돌담길 집배원
나즈막한 돌담길에 들어서자 타고있는 자전거가 붕붕 뜨는 기분이 들 정도로 설렘으로 마음이 뒤덮혀간다.
담쟁이덩쿨이 듬성듬성 얽혀 장식된 돌담은 낮지도 높지도 않아서 괜히 남의 집을 훔쳐보는 느낌도 나지않고
너무 꽉 막혀 답답한 느낌도 없어 이 돌담길은 지훈이 마을에서 좋아하는 장소 중에 하나였다.
이 곳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제일 좋아하는 곳도 나온다. 그 곳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지훈의 마음이 이젠 설렘으로 꽁꽁 뭉쳐져 쿵쾅댔다.
그러면서도 점점 붉어지는 하늘에 내심 불안해졌다.
입춘이 지나 이젠 봄이라고는 해도 꽃을 시샘해서인지 추위는 아직 주변에 머물러 저녁만되면 입김이 하얗게 퍼지는데
추위때문에 그 사람이 이미 집으로 들어간 건 아닐까 아니면 추위에도 그림을 그리다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걱정도 설렘으로 뒤덮인 마음속에 조금씩 자라났다.
사람이 사는 집이 몇채없는데다가 집들이 다 떨어져있어 집배원들이 가고싶어하지 않던 마을에 지훈이 오게된 건 순전히 지훈의 자원때문이였다.
어릴 적 가족여행 중에 오게된 산골은 어린 지훈의 눈에도 너무 예뻤다.
예쁘다...어린애의 유치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스무 살을 훌쩍 넘긴 지훈은 아직도 예쁘다란 말을 자주 사용했다.
사실 그닥 많이 배운 것도 아니긴했지만 예쁘다란 말이 지훈에겐 가장 순수하고 담백하게 표현한 최고의 단어였다.
그리고 마침내 지훈이 마을에서 가장 좋아하고 예쁘다생각하는 곳에 도착했다.
멀리부터 쭉-이어지는 나즈막한 돌담길은 이 집의 소유였다.
그것만 본다면 집은 꽤나 크고 으리으리할 것같지만 제 눈앞에 있는 집은 돌담길을 닮아 나즈막했고 소박했다.
벽을 이루는 붉은 벽돌을 따라 담쟁이도 붙어있었고 마당 여기저기엔 싹눈이 붙어있는 작은 나무들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한 구석을 차지한 붉은 흙들 속에는 좀 있으면 필 꽃씨들도 잠들어있겠지.
벌써부터 꽃들이 만연할 봄이 기다려진다.
그 속에서 나무벤치 앞에 이젤을 세우고 앉아 연필로 스케치하는 지호를 발견한 지훈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다가도 쌀쌀한 공기에 가디건만 걸친 지호가 걱정됐다.
안그래도 예쁜 마을에 지훈이 더 있고싶어진 이유인 지호는 지훈이 집배원 일을 한 후, 일에 적응이 되기 시작할 때 이 곳으로 이사 온 서울남자였다.
커다랗고 납작한 판때기가 택배로 보내져 가져다 줄 때 처음 지호를 봤다.
낮은 돌담길을 봤을 땐 고상한 노부부라도 이사왔구나,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남자가 자신의 집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에 벙쪄서 몇십분은 그 모습을 곱씹었다.
그 후에 정신을 차리고 그를 불렀을 땐 뒤돌아보는 남자의 얼굴이 마을에선 보기 드물게 젊어보여서 또 놀랐다.
또래로 보였던 지호는 예상대로 자신보단 두살은 많았지만 20대였고 그림을 아는 사람들 중엔 적지않게 알려져있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 이후론 지금까지 지금 자신이 품고있는 하늘색 편지 겉에 써있는 것같이 또박또박 깔끔한 글씨체를 가진 사람과의 편지를 전해주며 안면을 텄다.
그걸로 보면 확실히 편지는 지훈과 지호의 사이를 잇게해준 매개체로 고마운 물건인 건 분명하지만 편지만 생각하면 지훈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글씨로 보나 편지지로 보나 연인사이로 보이는 편지는 지훈의 마음을 감싼 설렘을 다 뭉개버리고 그 자리에 좌절과 안타까움으로 엉겨붙었다.
지호씨!잠시동안 자전거에 머물러 생각에 잠겼던 지훈이 잡생각을 애써 떨쳐내고 지호를 불렀다.
밝게 웃으며 뒤돌아보는 지호에 심장이 철렁했다.
기다렸다는 듯 달려오는 이유는 이 편지 때문일텐데 괜히 나를 기다리던 듯한 기분이여서 더 그랬다.
"안녕하세요. 지훈씨."
반갑게 편지를 받아드는 지호가 야속하다가도 짧은 거리를 뛰는 것도 힘든지 콜록대는 터에 지훈의 눈이 걱정스런 빛을 띄었다.
예전에 지나가는 말로 천식을 고질병으로 달고다닌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걸렸다.
괜찮아요? 추운데 옷도 얇게입고...입고있는 가디건을 흘낏보자 그 눈길을 느꼈는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가까이서 지켜 본 지호는 생긴 것과는 달리 순수했다. 그렇다고 불순하게 생긴 건 아니지만, 뭐랄까 보는 사람을 불순하게 하는 얼굴?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지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펑-하는 환청도 들린 것같았다.
아픈 지호보다 되려 더 아파보이는 지훈의 얼굴에 지호가 대문에 걸쳐진 지훈의 손을 톡톡 두들겼다.
"지훈씨 괜찮아요? 얼굴이 빨간데. 열나요?"
"어! 아, 아니 그러니까 어...괜찮아요! 하하...그나저나 편지는 항상 같은 분이랑만 하시나봐요?"
순수하게 묻는 지호의 얼굴에 괜히 찔렸다.
그 바람에 말을 돌린다는게 속마음이 나와버렸다.
아, 그게 막 관찰한 건 아니고요. 그냥 매일 전해주다보니까 저절로 보이고...그러니까 제가 남의 편지나 읽는 이상한 놈은 절대 아닙니다!
의아해하는 지호의 얼굴에 지훈이 손사래까지치며 자신을 변호했다.
편지 얘기를 꺼내면 관심을 두고있는 걸 걸리는 거잖아! 마음 속으로는 자신의 머리를 콩콩 쳐대면서도 태연한 척 지호를 바라봤다.
"알았어요. 이상한 분 아닌 거 알아요. 그리고 편지는..."
"애인...이신거죠?"
지호의 입에서 애인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정말 상처받을 것같은 기분에 자신이 나서서 물었다.
그래도 상처를 받는 건 마찬가진지 지훈의 눈이 조금 어두워졌다.
아뇨. 지호의 말에 지훈의 눈이 다시 기대를 담았다. 연인은 아니구나.
"아쉽지만 저 혼자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아..."
한순간 부풀어있던 기대라는 거품들이 푹 꺼져버렸다.
지호도 짝사랑이구나, 하는 안도감과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아쉬움이 뭉쳐 탄식으로 빠져나왔다.
어색한 침묵 끝에 자전거를 돌려 지호의 집에서 멀어졌다.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뒤돌아도 보이지않는 지호의 모습에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빨간 석양빛으로 물드는 돌담길을 보고있자니 방금 전 본 석양빛으로 물들었던 지호의 얼굴이 떠올라 아쉬움이 달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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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랫동안 지호를 향한 편지는 오지 않았었다.
그러고보니 마지막 날 지호는 자신에게 편지를 부탁하지않았었다.
혹시 지호의 짝사랑이 끝난 건 아닐까, 기뻐하다가 곧 자신을 잘못을 깨달았다.
아무리 자신에게 기회가 생긴다해도 지호는 마음이 좋지 않을텐데 혼자 기뻐하다니.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았다.
오랫만에 누려보는 휴가였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장소가 시골이니만큼 우편물이 배달오는 건 가뭄에 콩나듯 드물게 한번씩이다.
지호가 특이한 케이스였던 거고, 더구나 오늘은 청구서들이 빗발치는 때도 아니니 지호의 편지가 없으면 자연스레 지훈은 쉬게된다.
사람보다 도로가 많고 도로보다 산이 많고 산보다 논이나 밭이 많은 지호의 동네와는 달리
유명 프렌차이즈 제과점에 이것저것 많이도 파는 커다란 문구점, 심지어 핸드폰 대리점까지 있는 지훈의 동네는 꽤 사람이 많았다.
그래봤자 시골 읍내이고 지훈은 프렌차이즈보단 동네빵집, 큰 문방구보단 동네 구멍가게, 핸드폰보단 편지가 더 좋았지만.
그래서 더 그 동네를 가고싶고 돌담길이 더 좋아진 걸 수도 있다.
딩동-. 지훈의 원룸에 초인종 소리가 퍼졌다.
누가 올리가 없는데, 의아해하면서도 문을 열었을 땐 집배원이 서있었다.
자신이 집배원이라서 그런지 이렇게 청구서든 뭐든 우편물을 받을 때면 느낌이 이상했다.
집배원에게 우편물을 건네받고 봉투를 제대로 본 봉투는 많이 익숙했다.
연두색의 손바닥 크기의 봉투는 짐작했던대로 지호가 자주 쓰던 편지봉투였다.
항상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적혀있던 받는 이의 이름엔 '표지훈' 세글자가 써있었고
보내는 이는 확실히 '우지호' 였다. 집주소는 몰랐었는지 '집배원 표지훈' 이라고 쓴 걸 보니 몇번 고민했을 지호가 떠올라 웃음이 났다.
뭐가 써있을까, 뚫어져라 편지만 바라보다가 아, 하고 탄식했다.
바보같이 보고만 있는다고 뭐가 나오나.
잘쓰지않는 가위까지 찾아내 편지를 뜯었다. 혹시 편지가 상할까 조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TO.표지훈 으로 시작하는 편지에 글이라곤 한 줄이였지만 지훈을 일으켜 자전거로 향하게하기엔 충분했다.
'나 자꾸 표지훈씨밖에 못그리겠어요, 미안해요.'
두툼했던 편지 봉투엔 서너장의 A4 크기의 종이엔 지훈의 얼굴이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웃고있는 모습, 부끄러워 달아오른 얼굴, 시무룩한 얼굴. 자신이 몰랐던 표정까지 다양한 얼굴들이였다.
편지를 다 읽자마자 서둘러 머리를 정리하고 옷에 몸을 껴넣은 지훈은 현관에 서있던 자전거를 끌고 밖으로 갔다.
며칠 전 그 날처럼 주홍빛으로 물들고있는 하늘은 마음을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 사람이 그 곳에 있을 거라는 건 변함이 없을 텐데 뭘 그렇게 불안한지 페달을 밟은 발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돌담길과 가까워 올 수록 흐르는 땀과 비례하게 심박수가 빨라졌다.
돌담길이 보이고 그 뒤의 작은 집도 보이고 그 집의 불이 약하게나마 켜져있는 걸 봤을 때야 이유모를 불안감이 가셨다.
항상 닫혀있어서 열려있을 줄 몰랐던 대문은 살짝 밀자 바로 열렸다. 마치 지훈을 환영하는 듯이.
지훈이 이 집의 대문을 여는 건 이번이 처음이였다.
자신의 마음이 친구이상을 바라는 것을 깨닫고는 지호를 위해서 이 선을 넘지는 말자, 그런 생각이 무의식 중에 자리잡았었던 것 같다. 그래, 그랬다.
가볍게 열린 대문을 열고 곧장 지호의 집 문을 두드렸다.
쿵쿵. 지호가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다 못 참고 두어번 더 두드렸다.
내가봐도 자신이 너무 흥분한 듯 해보여 문을 등지고 쭈그려 앉았다.
돌담길을 타고 올라온 담쟁이를 물끄러니 바라보다 나무에 붙은, 몇일만에 조금 커져보이는 싹눈에도 눈길 한번.
문 바로 옆에 새로 올라오기 시작하는 담쟁이에도 눈길 한번.
집을 꼼꼼히 살펴보니 그제야 마구 요동치던 심박수가 진정됬다.
타이밍좋게 나온 지호는 조금 당황스러워 보였다.
활짝 열린 문은 지호의 뒤에 펼쳐진 집의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침대옆의 이젤에는 자신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얼굴이 반쯤 완성되가고 있었고,
거실 곳곳에 걸린 캔버스들은 수채화부터 스케치까지 여러가지 기법으로 자신이 그려져있었다.
아, 그러니까요...지훈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집에 아무렇게나 걸린 그림들에 고정되어있는 걸 느꼈는지 문을 반쯤 닫은 지호가 변명하려 입을 열었다.
첫째로는 그냥 아무 생각이 들지않았다. 갑작스러웠고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둘째로는 의아했다. 지호는 편지를 주고받던 사람이 있었는데. 왜?
셋째로는 다 잊었다. 다른 건 다 필요없었다.
당황해서 변명하려는 지호를 내려보다 그냥 안았다.
"나도, 미안했어요. 그런데 이젠 안 미안해도되서 다행이네요."
혼자 많이 고민했던 건지 지호의 얼굴이 닿은 어깨부근이 젖어드는 게 느껴졌다.
안았던 손을 풀자 눈가에 번진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지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냥...그림을 그리려고 했는데, 예전엔 지민이만 생각났었어요.
웃는 얼굴, 찌푸린 얼굴...그런데 여기로 오고 편지도 꾸준히 하는데 이젠 지민이가 아니라
표지훈씨가 생각나는 거에요. 그게 이상해서 억지로 풍경을 그리려고도 하고.
요즘엔 편지도 안하고, 그런데...아무도 안오는 게 너무 싫어서..."
설명을 안해도 지민이 누군지 잘 알았다. 지호의 편지를 항상 받았던 여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살짝 굳었던 건지 조금씩 작아지는 지호의 목소리에 다시 지호를 다독였다.
됐어요, 그만하면. 잘 알았으니까 변명 안해도돼요. 차가운 지호의 손을 문질러주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쇼파에 지호를 앉히고 손을 놓고 일어섰더니 불안한지 올려다본다.
"물이라도 마시라구요. 불안했잖아요."
아직도 눈물이 번져있는 눈가를 손으로 쓸어주며 일어났다.
태연한 척해도 조금 어벙벙한 기분이였다.
솔직히 꿈인 것 같기도 했다. 내일이면 깨버릴.
그래도 내색없이 물을 따라 지호에게 내밀었다.
조금 더 진정되어 보이는 지호의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미안했었다는 거..."
"나도 우지호랑 똑같았다구요. 내가 화가였으면 우지호 얼굴로 책 한 권은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내리깐 지호의 고개가 들리고 활짝 웃는 얼굴이 보였다.
이제 지호가 받고 보내는 편지의 이름은 지민이 아니라 표지훈이 되겠지.
앞으로 오갈 편지들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뭔가 쓸수록 오글거리는 느낌은 저만 받나요...?
음.....앞으로 -씨같은 호칭은 자제해야겠어요....
전에 쓴 거랑 느낌이 조금 다를 것 같아요. 제가 그때그때 쓰는 게 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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