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
< D - 20 >
“누나!!”
초인종이 몇 번 울리더니 이윽고 강우의 외침이 들렸다. 초인종을 누르고 내가 문을 열기까지 기다리지도 못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노크소리는 아주 시끄러웠다. 이 시간에 무슨 소란이람. 문을 열자마자 강우는 흥분한 발걸음을 내세우며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후 뾰로통한 얼굴로 내 눈치를 살피는게 내심 귀엽기도 했다. 이 시간에 강우가 저런 표정으로 우리 집에 오는 건 일종의 피신이었다. 보나마나 석진 오빠와 싸웠겠지.
“싸웠어?”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뭔데?”
“요즘 계속 자기들끼리만 얘기하는게 짜증나서 왔어요.”
강우가 손톱을 뜯으며 툴툴거렸다. 강우의 손을 탁하는 소리가 나게 때렸다.
“왜 때려요!”
“손톱은 무슨 잘못이야.”
“정국이 형은 누나한테 말해줘요?”
“무슨 말?”
“자기들이 하는 비밀얘기.”
두서없는 강우의 말에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했다. 자기들끼리에서 자기들이란 범주에 전정국이 들어가 있다는 말인데.
“너한테는 알려주지도 않는다고?”
“맨날 찾아오면서 나는 쏙 빼놓고 자기들 셋이서면 얘기한다니까요?”
“셋? 나머지 한 명은 누구야?”
“윤기 형이요. 아, 누나는 모르나..?”
“민윤기?”
“네.”
“너는 어떻게 알아?”
“아... 전부터 친한 형이었어요.”
강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세상이 좁다는 말이 다 맞는 말이구나. 김석진, 전정국, 민윤기. 저 셋의 조합은 뭐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석진 오빠와 윤기 선배는 어떻게 아는 사이고 정국이랑 윤기 선배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는데. 비밀 얘기를 한다고?
“셋이 요즘에 완전 수상해요. 완전!”
“그러네.”
“누나가 한 번 가서 혼내줘요.”
“혼내라고?”
무슨 일일까 생각하던 중 강우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혼내라니. 무슨 일인줄 알고. 궁금증이 막 피어오르긴했다. 각각이면 몰라도 셋이 만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조합이었다.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있겠지 때가 되면 말해주겠지 하고 참기에는 내 인내심은 코딱지만도 못하다.
“무작정 가서 뭐라할 수는 없으니까.”
“그럼, 이렇게 가만히 있어요?”
“밖에서 엿듣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까치발을 들어 살금살금 옆집으로 향했다. 몇 걸음 밖에 안 되는 거리도 기척없이 걸으려고 하니 꽤 오래 걸렸다. 나를 따라오려는 강우를 집에 가라고 한 다음 현관문에 귀를 댔다. 새어나오는 소리를 듣는 것에 집중을 다했는데 웅얼거리는 말소리만 들릴 뿐 정확한 내용을 들리지 않았다. 방음이 좋은 것도 아니면서 필요할 때만 도움이 안 된다. 무슨 일인지 대충 알아야 안으로 들어가서 깽판을 치든 뭘할 텐데. 문에 붙어있는 귀를 완전히 납작해질 정도로 가까이 붙였다. 여전히 안에서 들리는 소리는 알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하나 생각을 하는 순간 문고리가 움직이는 소리가 귓가에 크게 들렸다. 철컥하는 소리에 재빨리 귀를 떼고 나자 눈앞에는 석진 오빠가 보였다.
“여주?”
***
강우의 말대로 김석진, 전정국, 민윤기가 좁은 집에 들어 앉아 있었다. 석진 오빠는 차라도 내어오겠다며 부엌으로 향했고 정국은 내게로 다가왔고 윤기 선배는 관심 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다가오는 정국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자리에 앉았다. 정국에게 화가 났음을 알리는 나름의 표시였다. 매일 다녀올게라더니 다녀온다는 곳이 석진 오빠 집이었을 줄이야.
“매일은 아냐.”
정국이 내 옆으로 와 앉으며 말했다. 내 눈치를 보느라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이제와서 눈치를 보는 건 뭐람.
“그럼 언제부터인데.”
큰 덩치로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웃겨 올라가는 입꼬리에 힘을 꽉 주어 무심하게 말했다.
“태풍왔던 날부터. 그 이후로 매일 만난 건 아니고.”
정국 대신 윤기 선배가 답을 했다. 선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놈들이랑 매일 보는 건 질색이라서. 인턴이라 쉴 시간도 없는데 계속 불러내서 내가 더 죽을 지경이다.”
두 사람에게 호의적이지도 않으면서 선배가 둘을 만나는 이유는 뭘까. 해괴한 조합에 대한 의문만 커진다. 내 양 옆에 앉은 선배와 정국을 차례로 보고 있자 내 바로 앞에 석진 오빠가 앉으며 차를 건넸다.
“아, 감사합니다.”
잔을 들어 차를 마시려고 하자 정국이 내 손에서 컵을 채갔다.
“뭐 탄 거 아냐?”
컵 속의 내용물을 빤히 바라보던 정국이 석진 오빠에게 시선을 던졌다.
“차니까 차를 탔겠지.”
별 생각 없이 말장난같은 말을 던지고 다시 컵을 받아드려는데 정국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수면제야?”
정국의 말에 석진 오빠가 웃음을 터뜨렸다. 수면제를 탔다니. 이쯤되면 내가 이곳에 발을 디딘 게 잘못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윤기 선배가 인상을 구겼다.
“악마새끼 주제에 지 여자 챙기기는.”
윤기 선배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악마라고 했지. 그것도 엄청 아무렇지 않게.
“선배 뭐예요? 악마인 거 알아요? 어떻게?”
“아...”
“네가 말해줬어? 그럼, 석진 오빠는? 오빠도 알아요? 뭐야?”
“......”
“수면제는 또 뭔데? 날 왜 재워? 아, 뭐나고!!”
방금 전 말로 인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나는 질문을 쏟아내는 동안 셋은 굳은 채로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나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심산으로 가만히 있었으나 당최 말을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진짜 그렇게 가만히 있을 거예요?”
“여주야 밤도 늦었는데 얼른 자러...”
“뭘 자요!!”
석진 오빠는 상황을 어영부영 넘기려했다. 보통 때라면 넘어갔겠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돌이켜보면 윤기 선배와 정국의 적대적인 관계도 그렇고 그 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선배가 내게 밥을 사주러 오겠다한 것도 이상했다. 그냥 넘어갔더니 다시 되돌아오는 일이 더 버거웠다. 이번에도 대충 넘어가면 또 제자리다.
“그냥 말해.”
무심하게 말을 내뱉은 윤기 선배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것으로 보아 라이터를 찾는 것 같았다. 선배 앞에 라이터를 흔들며 석진 오빠가 말했다.
“중요한 순간을 담배 연기가 흐리는 건 안 될 일이지.”
“아, 진짜.”
선배가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던졌다. 저 멀리 떨어진 담배를 본 석진 오빠의 인상이 구겨졌다.
“내 라이터 함부로 가져갔으니까 담배 함부로 버리는 걸로 기분 상하지마.”
“벌금 때려 버린다?”
“진짜 죽일까.”
“인간 주제에 무슨.”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자니 방금 말도 이상했다. 의심을 한 상태로 들으니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석진 오빠, 방금 그건 뭐예요?”
“응?”
“인간 주제에. 오빠도 혹시.”
“아니, 절대.”
“근데 왜.”
“악마랑 같은 취급 하지마. 나는 천사.”
“네?”
갑작스런 말에 목소리가 커졌다. 정국이나 윤기 선배의 덤덤한 반응으로 보아 둘은 이미 알고 있었겠고.
“그럼, 윤기 선배는요? 선배는 뭐야?”
“나는 인간 맞고.”
“그러면 어떻게 아는...”
“빌어먹을 능력 때문에 쟤네가 천사랑 악마인 걸 알아.”
곱씹어보면 엄청난 사실들인데 평소에 농담주고받을 때와 같은 어투 때문인지 방금 들은 말들은 내 머리로 그대로 흡수되었다. 놀라움을 느낄 틈도 없이 내가 내뱉은 말은 감탄이었다.
“주변에 악마랑 천사가 이렇게나 많았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엄청 많은데요?”
“여주 네 주변에는 좀 많다.”
“그 날도 봤는데 내가.”
석진 오빠도 인간이 아니라 천사였다는 소리에 나는 확신했다. 태풍이 오던 날, 창문으로 들어온 그 존재가 악마라는 것을.
“봤어요.”
세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나에게로 향했다.
“또 다른 악마.”
일부러 좀 천천히 가고 있어요.
지루해도 이해해주세요ㅠ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W. 사프란(Spring Croc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