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꽃
W. 메리투미
술에 취해 길을 잃은 사람들, 담배나 술을 사들고 시선을 피해 찾아오는 고등학생들, 우편 배달부를 제외하곤 아무도 발길을 들이지 않는 도심가에서 불과 10분 거리인 판자촌. 다 으스러지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모습을 한 집들 사이, 그 중에서도 가장 조그마한 집이 백현이 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집이였다. 그래도 직장을 가진 아버지 덕에 학교 친구들과 비슷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백현이였다.
백현이 중학교 때 였을까.
백현아, 아빠 왔다. 우리 아들 자니?
백현은 하루 종일 듣고 싶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가 미워 자는 척을 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백현의 옆에 누워 잠을 청했다. 아버지의 직업이 도심가 최고의 클럽이자 성매매 업소의 포주라는 사실을 백현이 알아버린 그 날 밤이였다.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는 백현이 고등학교 진학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시내에 위치한 명문고 진학을 고려해보라는 선생님의 말에 백현은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판자촌에서 조금 사는 집이라지만, 꿈에도 못 꿀 학교였다. 부모님의 연봉이 억대, 심하면 수십 조까지 다다르는 집안의 아이들, 시내 사립 중학교나 명문중 및 내신 1등급의 학생들을 추려 운영하는 학교였고, 학비 또한 만만치 않았다. 문득 아버지가 조금 더 일을 자주 나가신다면 학비 정도야 구할 수 있다는 걸 백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모라며 잘 따르던 어머니의 친구는 그 클럽의 주인이였고. 그 사실을 안 뒤, 백현은 한 번도 이모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버지도, 이모도, 역겨웠다. 어린 백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백현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더 이상 생각을 했다간 기말고사를 망칠 것만 같은 기분에 고개를 저었다. 세화고라……. 졸업장만 있어도 대학을 진학하지 않아도 취직이 보장된 학교였다. 백현은 욕심을 부려볼까도 생각 했지만, 다시 떠오르는 아버지의 얼굴에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세화고는 무슨.
세화고?
혼자 고민하며 복도를 걷던 백현의 걸음을 멈춘 건 경수의 목소리였다. 같이 전교권을 다투는 경쟁자이자, 백현의 유일한 친구였다. 백현이 말수가 없을 뿐더러, 학교에서 활발하게 지내는 타입이 아니였다. 아버지에겐 항상 애교가 많은 아들이였지만, 밖에선 냉정하고 철두철미한 모범생의 모습이였다. 그런 백현이 미소를 보이는 건 경수 뿐이였기에 남학교에서 둘의 소문은 끝도 없이 퍼져나갔다. 쟤 둘이 뭔가 있어. 딱히 당사자들은 소문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백현의 학교에서 세화고 진학을 권유 받은 건, 백현과 경수를 포함한 5명 정도였다. 그 중 2명은 그저 일반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결정했고, 한 명은 세화고로 가겠다고 원서 준비를 부탁한다고 얘기 한 뒤 교무실을 나섰다. 이제 교감 선생님 앞에 남은 건 백현과 경수였다. 경수는 하루만 더 시간을 달라고 했고, 백현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고개를 빳빳히 들고 말했다.
학비가 없습니다. 진학 포기 할게요.
백현의 말에 교감 선생님도, 다른 선생님들을 포함한 경수의 시선도 백현에게로 옮겨졌다. 강아지같은 눈망울은 흔들림이 없었고, 다시 한 번 백현의 목소리가 교무실에 울렸다. 학비가 비싸요. 일반계 고등학교도 버겁습니다. 담임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을 알고 있었다. 백현의 집안 사정과 아버지의 직업. 어쩌면 백현의 생각까지도. 백현은 말렸지만, 담임 선생님은 전화기를 드셨다. 아버지도 아셔야지. 네가 이렇게 쉽게 포기하면 안 된다는 거. 백현은 고개를 떨궜다. 세화고는 보충도 야간 자율 학습도 없다. 하지만 지역이건 대한민국 안에서도 모든 시험에서 1위를 놓친 적이 없는 학교다. 엘리트들만 모으고, 골라서 만든 학교였기에 가능했다. 선생님들이 세화고 진학을 권유하는 건. 세화고에서 이미 연락이 왔다는 소리와 같았다. 늘 전교 1등에 큰 단위 시험에서도 다른 학교 학생들에게 안 쳐지던 백현에겐 당연한 문제였고, 세화고 진학 역시 이미 정해졌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백현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니, 어쩔 수 없이 백현의 아버지에게 직접 말을 전할 수 밖에 없어졌다. 백현은 통화음이 가는 걸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장학금 신청 할게요. 이번 기말고사 올백 맞을게요. 그럼 장학금 신청 가능하잖아요. 담임 선생님은 휴대폰을 내려 놓으셨다. 백현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린 뒤, 백현이 교무실을 나갈 수 있도록 도왔다.
세화고에 가야 한다. 아버지에게 부담이 안 되려면 장학금을 타야 하고, 장학금을 타려면 올백을 맞아야 한다. 지금까지 남은 시험 모두.
사실 백현은 이번 기말고사를 어떻게 치던, 꼴등을 하던, 세화고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세화고에서 원하는 인재였고, 중2 2학기 때 이미 백현도 들은 바가 있었다. 앞으로의 성적 상관 없이 세화고 진학은 확정 되었다고. 어쩌면 백현에게 처음부터 선택권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백현은 전액 장학금을 지원 받는 쪽을 선택했다. 경수에게도 얘기 했다. 올백 맞을 거야. 장학금 타서 학교 가야지. 부담 되긴 싫어. 유일하게 가정사를 알고 있는 경수였다. 백현과 다르게 경수는 부유한 집에서 자랐다. 부족한 게 없었으며, 부모님이 딱히 경수의 학업이나 취미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셨다. 그저 경수가 건강하게만, 좋은 친구들 사이에 행복하게 자라 본인의 사업을 이어 가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경수는 무슨 일이든 척척 해냈고, 백현과 함께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 또다른 인재였다.
경수도 세화고 진학을 확정했다.
경수는 백현이 올백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왔다. 세화고 진학자 중 한 학교에서 올백은 단 한 명. 그래야 장학금을 지원 받을 수 있다. 그걸 아는 경수였기에, 백현을 도울 뿐 시험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물론 경수가 이번 시험을 백지로 낸다고 해도 세화고 진학은 가능했다. 경수와 백현, 아니 어쩌면 모두의 바람대로 백현은 올백을 맞았다. 장학금 신청에 바로 백현의 이름과 생기부 및 성적이 올라갔고, 4일 안에 세화고에서는 학비 전액 지원 이라는 답변이 날라왔다. 아버지는 크게 미동이 없으셨으나, 백현은 아버지가 매우 기뻐하고 계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빠, 제가 4년 뒤에 멋진 집 장만 할게요. 백현은 속으로 말을 삼킨 채,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갔다. 백현과 경수는 세화고에서 보낸 교복과 가방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엘리트 중에서도 성적 우수자에게 내려지는 보상이였다. 세화고의 교복과 가방은 정해져있다. 검정과 회색이 잘 조화된 교복과 흑색에 가까운 가방은 여느 학생들의 로망이였다. 디자인이 예쁜 면도 있었지만, 가격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백현은 걱정거리가 줄었다. 교복과 가방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것에 한시름 놓은 백현이였다. 입학 준비는 속전속결로 진행 되었다. 눈을 뜨면 보이는 세화고 교복에 왠지 모르게 백현의 마음은 들떴다. 그걸 증명하듯 백현은 길을 걸을 때면 콧노래를 불렀다. 듣기 좋네. 경수의 짧은 한 마디에 백현은 미소를 지었다.
판자촌에 없던 게 생겨났다. 무료로 개방합니다. 피아노 교습소. 짧은 현수막 문구와 함께 작지만 깔끔한 컨테이너 박스 하나가 판자촌 입구에 자리 잡았다. 백현이 경수와 인사를 하고 골목길로 돌아섰을 때, 눈에 띈 건 하얀색 컨테이너 박스였다. 백현에겐 또 다른 재주가 있었다. 배워본 적 없지만 악보를 보면 피아노를 칠 수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음악선생님께 부탁해 악보를 구해 피아노를 치던 백현이였지만, 3학년이 되고 나서는 한 번도 피아노 앞에 앉지 않았다.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였다. 피아노를 그렇게 좋아하던 백현이 한 순간에 피아노와 돌아섰다. 백현의 아버지 역시 의아했지만, 딱히 백현에게 말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백현은 지금 피아노 교습소 앞에서 10분을 맴돌았다. 용기를 낸 백현이 문을 두드리자, 드라마에 나올 법한 여주인공 차림을 한 여자가 문을 열어 반겼다. 피아노 좋아해요? 백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쳐봐도 될까요? 배울 건 아닌데…. 말끝을 흐린 백현이 문 앞을 기웃거리자, 여자는 밝은 얼굴로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자리를 비켰다. 컨테이너 박스는 생각보다 좁았다. 피아노 한 대와 사람 셋이 설 수 있는 자리 그 나머지 공간은 모두 악보로 가득했다. 백현은 피아노 의자에 앉아 제일 먼저 손이 가는 악보를 잡았다. 피아노 배운 적 있어요? 여자의 물음에 백현은 고개를 저었다.
여자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 백현의 연주가 시작된 뒤였다. 여자는 멍하니 백현의 손과 피아노 선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때 이후로 들은 적이 없어. 여자가 중얼거렸다. 백현은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여자는 그런 백현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였다. 부담스러움을 느낀 백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자가 백현의 팔을 잡았다. 피아노 배울 생각 없어요? 아니다, 피아노 공짜로 치게 해줄게요. 악보 다 가져가도 괜찮아요. 하루에 한 번만 연주 들려줄래요? 여자의 권유 아닌 부탁에 백현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웃으며 고맙다는 말과 함께 백현을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백현은 자신의 손을 한참이나 쳐다봤다.
다시 피아노를 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건, 2학년 백현의 반 실장 때문이였다. 실장은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고, 종종 음악시간에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다. 백현은 연주를 들을 때 마다 생각했다. 음 밖에 안 들려. 감정이 안 느껴져. 매번 생각만 하던 백현이 어느 날은 입 밖으로 그 말을 내뱉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고, 음악 선생님은 그런 백현을 자리에서 일으켰다. 무엇에 끌린 듯, 한 번 연주 해보는 건 어때? 음악 선생님의 말에 백현은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악보 정도 보는 건 초등학교 때 부터 배웠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 백현은 한참 악보를 쳐다보다가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백현의 연주가 남다르다는 건 어린 친구들도 선생님도 알 수 있었다. 음이 딱딱 떨어지고 정갈한 연주였지만,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졌다. 아픔과 상처가 느껴지는 듯 했고, 기쁜 곡을 연주할 땐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지는 듯 했다. 그래서 백현이 피아노 의자에 더 이상 앉지 않았을 때 모두가 의아했다. 어쩌면 백현 자신이 더.
세화고 진학을 앞 둔 마지막 방학. 백현은 매일같이 피아노 교습소에 얼굴 도장을 찍었다. 여자는 오히려 반기는 입장이였고, 백현 역시 하루종일 교습소를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판자촌 사람들이 피아노를 알리도 없었으며, 돈을 내야되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십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판자촌의 연령대는 백현과 아버지를 제외하고 모두 할머니, 할아버지였다. 배우러 올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있다 해도 불과 10분 거리인 도심에 음악 학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런 작은 교습소를 찾을리 만무했다. 덕에 교습소는 백현의 장소가 될 수 있었다.
세화고 입학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백현은 설렘 반, 기대 반으로 잠에 들었다. 내일 아침이면 늘 가던 등교길이 아닌 새로운 등교길로 가야한다. 경수를 제외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것이며, 좀 더 도심가로 나가야 한다. 백현은 떨리는 마음에 휴대폰을 켜 알람을 설정했다. 6시. 씻고 걸어서 학교에 가려면 그 쯤 일어나야 했다. 등교시간은 8시 정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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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망글을 가져온 건 아닌가 걱정이 되네요....ㅜㅡㅜ 찬열이랑 만남은 아마 다음화에 있을 겁니다.. 띄어쓰기나 오타 있으면 알려주세요!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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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는 의사인줄 알았으니까 문제는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