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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분위기는 미묘하게 바뀌었다. 어쩌면 눈치 채지 못 할 정도였다. 예전과 똑같이 주말 아침에는 백현이가 좋아하는 꽁치김치찌개를 해먹었으며 저녁에는 내가 좋아하는 치맥을 먹었다. 그리고 똑같은 TV프로를 챙겨봤으며 같이 누워 책을 읽었다. 하지만 그 후로 백현이는 책 읽는 속도가 느려졌고, 잠 못 들어 뒤척이는 밤이 늘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뒤척이던 밤에 항상 나를 찾았고,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는 방법으로 섹스를 선택했다. 그래, 우리는 이렇게 지냈다. 며칠 동안 말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그를 보며 나는 우리 관계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문제가 생겼음을 짐작했다. 그 며칠 사이에 나는 그에게 그 어떤 것도 물을 수 없었다. 늘 그렇듯이 나는 그가 그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을 껄끄러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나는 그 문제에 대해 백현이와 함께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목요일 밤, 잠들기 전에 나는 정말 용기를 내어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하며 나는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자 그는 아주 조용히 눈물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을 눈물을 떨구다가, 그가 말했다.
“ 엄마한테 다른 사람이 생긴 것 같아. 이게 내가 아는 세 번째야.”
그는 그렇게 눈을 감고는 웃었다. 그리고 아주 옛날 얘기를 했다.
백현이네 어머니와 아버지는 부산에서 유명한 법무법인 설립자이시다. 관세법을 주로 다루시고 그래서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더 오래 체류하셨고, 그게 백현이가 부산에서 성장하게 된 이유이다. 이것은 나도 알고 있던 사실이다. 사실은 인터넷 검색만 해도 백현이 부모님 인터뷰가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 백현이는 자신이 태어나기 훨씬 전의 부모님의 젊은 시절 얘기를 들려주었다.
“ 우리 부모님은 사법연수원 동기야. 우리 엄마는 그 당시에도 똑똑하고, 예쁘고, 집에 돈도 많아서 모두의 관심을 받는 그런 사람이었고, 우리 아빠는 정말 그냥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라고 하는 게 맞을 거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엄마에 비하면 그저 그런 대학을 나와 사법고시를 통과한 사람이거든. 그래서 아빠가 엄마를 아주 오랫동안 쫓아다녔대. 사법연수원 시절에 공부도 무조건 같이 하고 일부러 과제를 챙겨주기도 하고. 그래서 엄마가 사법연수원 졸업할 때 쯤 아빠를 받아 줬나봐. 그리고 사귀고 헤어지다를 반복하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결국 엄마한테 내가 생겼어. 그래서 두 분이 결혼 한 거야.”
백현이는 그리고 계속 흐느끼며 말했다. 평소보다 말하는 속도가 한 박자 느렸다. 이것은 그가 꺼내기 힘든 얘기를 할 때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 그리고 엄마가 나를 낳고 지금 회사를 만드신 거야. 능력 있는 분이었으니까 승률도 좋았고, 그래서 아주 빠르게 성공했어. 그런데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지 않았던 거야. 그냥, 내 아이의 아버지정도로 생각한 거지. 그래서 다른 남자와 연애했대. 사랑하고 싶어서. 내가 처음 알았던 게 초등학교 6학년 때였고. 두 번째는 중3때, 그리고 지금.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기도 하고, 변호사로서 본인의 자리 때문에 이혼 못 하시는 거고”
그리고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서 내가 여자가 별로고 남자가 좋은가봐. 그렇게 말하고 그는 내 손을 잡고 누웠다. 백현이는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박자에 맞추어 숨을 쉬며 아주 깊은 잠에 들었다. 그가 며칠 만에 편히 자는 잠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초등학교 6학년 이후로 오늘이 가장 맘 편할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던 고민을 하나 내려놓았기 때문에. 그리고 나는 그에게 조금 더 가까운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좋아졌다. 그렇게 나도 그의 옆에서 잠이 들었다.
날이 밝아서 금요일이 되었다. 금요일은 3시에, 3시간짜리 경제학원론 수업 하나만 들은 날이었다. 저번 주는 첫 수업이어서 대략적으로 수업이 어떻게 흐를 것인지, 그리고 교수님의 대학생활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남의 얘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참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아니 나와 한 사람을 빼고는 다 졸았지만. 나는 첫 수업 날 그를 꽤 오랫동안 쳐다봤다. 그를 묘사하자면, 웃을 때 빛이 난다고 해야 맞을까, 아니면 웃음이 물에 돌을 던졌을 때 일어나는 파문 같다고 해야 할까. 둘 다 맞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대학을 와서 본 사람 중 가장 잘 생겼으며, 눈에서 가장 생기가 많이 도는 사람이었다. 나는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를 찾았고, 그는 왼쪽 분단 앞에서 세 번째 줄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난 그의 왼쪽 대각선 뒷자리에 앉았다. 수업 내내 그를 쳐다보아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그리고 수업이 시작되며 교수님은 출석을 부르셨다. 내가 관심을 갖게 된 그의 이름은 박찬열이었다. 그가 드는 손을 보며 팔이 참 길다, 라고 생각했다. 교수님은 출석을 다 부르시고는 앞으로 한 학기 동안 같은 수업을 들을 학우들에게 자기소개를 한 사람씩 나와서 해보라며 가나다순으로 한 사람씩 호명하셨다. 선배들 혹은 동기들의 자기소개를 들으며,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여학생이 수줍게 자기소개를 할 때는 호응도 하고 재밌게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웃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내 차례가 되었다.
사람이 살면서 자기소개를 몇 번이나 할까? 나는 열아홉 해를 살고 3달을 사는 동안 자기소개를 해본 적이 손에 꼽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입학했을 때, 그리고 아르바이트 면접 봤을 때 이외에 자기소개를 해본 적이 없어서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얼어붙는다. 면접 봤을 때도 사장님 앞에서 벌벌 떨어서 사장님이 웃으시면서 긴장 풀라고 하셨는데,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침을 크게 한번 삼키곤 입을 열었다. 남들 했던 대로 하면 되겠지.
“ 안녕하세요, 저는 경제학과 12학번 도경수입니다. 스무 살입니다. 그리고 부산에서 왔고, 친구와 함께 후문 근처 아파트에서 자취하고 있어요.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선배님들, 동기님들 한 학기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긴장한 모습으로 자기소개를 했고, 강의실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귀엽다! 라고 소리 쳐 주었다. 그래서 나는 살짝 웃으며 강단에서 내려왔다. 내 다음은 그의 차례였는데 생각보다 큰 키가 신기했다. 얼굴은 엄청 작은데, 키가 그렇게 크다니, 서울에는 연예인 같은 사람이 이렇게 학교에도 다니는 구나라고 생각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약간 생각하더니 말을 시작했다.
“ 반갑습니다. 저는 경제학과 12학번 박찬열입니다. 군대 다녀오고 나서 입학한 거라 나이가 조금 많습니다. 스물 셋이고,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저도 도경수 학우와 같은 아파트에 삽니다. 혼자 사니까 나중에 친해지면 놀러오세요. 제가 OT를 못 가서 친구가 별로 없는데 여기서라도 친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그는 빛을 받아 반짝이는 갈색 머리를 한번 만지고는 인사를 하고 들어갔다. 한 여자 선배가 쉬는 시간에 그와 나에게 있다가 저녁때 시간되면 개강 총회에 꼭 오라고 한 것 이외에는 평범한 수업시간이었다. 수업을 열심히 들었고, 노트 필기를 빠지지 않고 했으며 책에 밑줄도 그었다. 그리고 수업보다 더 열심히 그를 쳐다봤다. 나도 내가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 게 신기할 정도로. 나는 그와 친해지고 싶었다. 그의 밝은 분위기가 부러웠다. 많이 사랑받고 자란 사람 같았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아주 밝은 분위기가 곁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챙기는데, 그는 뒤를 돌아 내게 말을 걸었다.
“ 경수라고 했지? 도경수? 성이 특이하네. 근데 왜 나를 그렇게 쳐다봐? 나 뚫어지는 줄 알았어.”
사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대로 친해지고 싶다고 하면 될 일인데 남자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핑계를 대기로 했다. 아주 그럴싸한 것을 생각해야 하는데. 나는 눈을 굴리며 말을 했다.
“ 저기 그 책이 신기해서요. 저는 두껍고.. 그런데 얇고 스프링도 있어서... 궁금해서요.”
그는 아, 하고 소리를 내며 너무 두꺼워서 스프링 제본을 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나는 그 것을 모르지 않았다. 어차피 같은 맨큐의 경제학 책일 뿐인데. 고등학교 3년 내내 EBS 교재를 항상 스프링 제본해서 다녔다. 처음엔 백현이가 해주긴 했지만 그 편이 책 넘기기도 편했고, 필기하기도 편해서 문제집은 사자마자 인쇄소에 가서 스프링 제본을 했었다. 그는 나를 쳐다보며 한 번 더 입을 땠다.
“ 같이 제본하러 갈래? ”
나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고개를 아주 여러 번 끄덕였다. 그와 조금 더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그는 웃으며 재밌네, 라고 말하고는 가방을 챙겼다. 나도 가방을 빠르게 챙겼고, 그와 함께 402호를 나섰다. 복사실로 가면서 그는 나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부산 어디 살았는지, 아파트 몇 동에 사는지, 같이 사는 친구는 어떤지 그리고 경제학과에 왜 왔는지. 이 네 가지를 한 번에 물었다. 그리고 나도 한 번에 답했다.
“ 해운대 앞에 살았어요. 아파트는 102동 살고 같이 사는 친구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고 여기 후문 옆에 있는 학교 다녀요. 그리고 다른 것보다 수학을 좀 더 잘해서 경제학과 왔어요. 혀... 형은요?”
“ 나는 101동 사는데, 많이 가깝네! 나는 서울에서 쭉 살았어. 압구정 살다가 여기 입학해서 얼마 전에 이사했고. 나는 빨리 돈 벌어서 가게 차리고 싶어서 경제학과 왔어.”
그는 복사실에 가서 마치 많이 와본 사람처럼 아주머니에게 내 책을 주면서 스프링 제본 해주세요! 하고는 지갑을 꺼내 계산했다. 나는 그게 너무 빨라서 그냥 멍하니 서 있었다. 왜 돈을 내준 거지? 나는 지갑을 꺼내며 말했다.
“ 왜 돈 내셨어요? 제가 돈 드릴게요.”
그는 내 머리를 한번 톡 치면서 말했다.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 경수야 너 귀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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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얘기를 하기 위한 아주 밑밥을 까는 중이에요 ㅠㅠ...
뭔가 하고 싶으신 얘기가 있다면 댓글로 달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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