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F.L.
온통 이명 속에 잠기는 밤이면 지호는 조용히 제 몸에 그림을 그려나갔다. 물감은 필요하지 않았다.
종종 자부심울 느끼던 하얀 살결 위론 스스로 새겨넣은 그림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지호는 제가 고통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했다. 감각을 잃는다는 것은 몰려오는 해일을 기다리는 한낱 인간이 되는 일이었다. 그 모든 과정은 전혀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다만 두려움의 심연에 잠식되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지호를 광기로 밀어넣을 뿐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지훈이 지호를 처음 막아선 것은, 제 왼쪽 팔을 온통 화려하게 물들여놓은 지호가 막 귀를 잘라내려 할 때였다. 거실의 거울 앞에 멀뚱히 주저앉은 지호는 왼쪽 손으로 귀를 한껏 당겨 놓고, 다른 손으로 식칼을 잡아 여린 귀에 갖다 댄 채였다. 아무렇지 않게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던 지훈이 놀라 제 손에 들려있던 핸드폰은 떨어뜨리곤, 재빠르게 지호의 앞에 다가서서 어깨를 붙들고 허리를 숙여 눈을 맞췄다. 앙상한 어깨가 한 손에 들어왔다. 지호는 커다란 손 끝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온기가 포근하다, 고 생각했다.
"형."
지훈의 입은 움직였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호가 고개를 숙였다. 오른손 손목이 살짝 움직였다.
"형."
지호가 왼손을 내려, 어깨에 얹혀진 지훈의 손을 덮었다.
"지호형."
그리고는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팔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지호!"
자그마한 귀 위로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지훈이 지호의 손을 우악스럽게 잡아올렸다. 매번 제 몸에 함부로 손을 댈 때마다 짙은 짜증을 부리던 지호도 이번만큼은 잠잠했다. 다만 시선을 끌어올려 지훈과 눈을 맞출 뿐이었다. 한참을 알지 못할 표정을 짓고 있던 지호는 까무룩 잠이 들어, 지훈의 품 위로 쓰러졌다. 체향이 깊게 배어들었다.
조심스레 눈을 뜬 지호는 침대에 누워있는 채였다. 지호는 움직이지 않은 채로 방 이곳저곳을 살폈다. 지훈의 냄새가 났다. 하늘색 보드라운 이불, 아이보리색 방문, 하얀 천장과, 책상 위의 작은 인형들과, 책장에 놓인 색색의 책. 곧 방문이 열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느릿느릿 문을 연 지훈이 웃으며 다가와 지호의 머리를 헝클었다.
'잘 잤어?'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제가 자고 일어나면 해주던 말을 모를 리 없었다.
"지훈아, 나 좀 씻을게. 찝찝하다."
지호가 평소처럼 지훈에게 웃으며 말했다. 느낌은 이상했지만 그런대로 말은 할 만 했다. 지호는 평소처럼 침대를 내려와 속옷을 챙기고 욕실로 들어섰다. 물을 최대한 세게 틀어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곧 욕실 거울은 뿌연 김으로 가득 차고, 지호는 평소처럼 조금 뜨거운 온도의 욕조에 몸을 담궜다.
지호는 정확히 육 개월 전의 평소와 같았다. 잘 잤냐고 물어오는 제 말에 웃으며 대답을 하는 것도, 매일 아침 일어나면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담그는 것도.
지훈은 그런 지호를 바라보다 거실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기 시작했다. 시시한 예능 프로나 보며 지호가 나오기까지의 십오분을 때울 요량이었다. 육 개월 전 평소의 지호가 이십 분정도 목욕을 하고는 뿌연 김을 가득 머금은 채 머리를 털며 욕실을 나왔던 것을, 지훈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지훈은 생각없이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이상해지기 전으로 돌아온 지호의 모습에, 오늘은 오랜만에 데이트나 할까. 뭘 사먹이면 좋아할까. 살이 빠졌던데 기름진 걸 먹여야 하나. 행복한 상상은 끝이 없었다.
깜빡 잠이 들었던 지훈이 깼을 땐, 벌써 지호가 욕실로 들어간지 삼십분이나 지난 후였다. 욕실 문은 아직도 굳게 닫혀 있었다. 혹시 목욕하다 잠이라도 든 건 아닌지, 지훈이 조심스럽게 욕실 문을 열었다.
뿌연 욕실 안개 속에서 지호가 고개를 들어 지훈과 눈을 맞췄다. 왼쪽 귀가 잘려있는 지호는 붉어져가는 분홍빛 목욕물을 힘껏 찰박이고 있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형, 형?"
"지훈아, 고흐는, 고통은 영원하다고 했어."
나는 이제 멈출 수 있을까.
입술을 끌어올려 간신히 미소짓던 지호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지훈이 화를 낼 게 뻔했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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