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가볼 (SUGA BALL)
w. 슈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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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여기가 어디지..."
결국 길을 잃었다. 양손에는 중간중간에 받아든 빵과 육포 따위가 잔뜩 들려있어서 무겁기까지 하다. 어느샌가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김태형 때문에 길을 잃어버렸다. 왔던 길로 돌아가려고 해도 골목이 하도 요리조리로 꺾여있어서 어디로 왔는지 까먹었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가만히 서있는데 지나다니는 아줌마들이 어깨를 마구 치고 갔다. 아나 진짜. 안 그래도 짜증나는데. 괜히 심술이 나서 길 한가운데 꿈쩍도 안 하고 서있었다. 어짜피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는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인데 뭐.
봉지를 양 손목에 걸고 팔짱을 끼고 서있는데 갑자기 모세의 기적처럼 길이 뚫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가게로 들어가서 숨는 것이다. 어리둥절해서 뭐지? 싶었는데 저 멀리서 한눈에 봐도 깡패처럼 보이는 껄렁한 놈들이 무리 지어 오고 있었다. 당황해서 바로 옆에 있던 정육점으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옵쇼."
주인아저씨가 인사를 했지만 나는 유리창에 붙어 서서 그놈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주인이 의아해서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고 창가로 왔다. 그리고 함께 밖을 내다보았다.
"저 놈들 또 왔구먼."
"뭐 하는 사람들이에요?"
"시장 바닥에 있는 가게를 들쑤시고 다니지."
나는 문득 드라마에서 보았던 길거리 장사하시는 분들 물건을 집어던지고 하던 게 생각났다.
"지들이 내키는 대로 가게를 하나 잡아서 쑥대밭을 만들어놓지. 그리고.."
쨍그랑!!
"꺄악!!!"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서 창문에 얼굴을 박고 쳐다보았다. 놈들이 정말 드라마에 나오는 것 마냥 다 때려부수고 있었다. 이걸 나가서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전부 숨어서 보기만 하고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것이었다. 갑자기 김태형이 시장에 오기 전 했던 말이 생각났다.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말라.. 고 했었지. 그치만..
말릴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에 놈들은 깽판 치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주머니에게 가죽 주머니를 휙 던지고는 가버렸다. 아주머니는 주머니를 품에 안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떡해요? 왜 아무도 도와주지 않죠?"
"방금 저놈들이 주고 간 저 주머니 보이지? 저게 돈이야. 깽판 값이지."
아저씨는 구경 다 했다는 듯이 다시 앞치마를 메었다.
"문제는 저 돈이 저 아줌마가 버는 돈 보다 많지. 놈들은 항상 저런 식으로 돈을 줘. 그래서 머리 나쁜 아줌마들은 오히려 부러워해. 멍청하지."
",,,,,,"
"저렇게 당하고 난 뒤로는 시장에서 다신 보이지 않는데, 그게 돈이 너무 많아서 장사할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라는 거야."
아저씨가 나를 보고 빙긋 웃었다.
"그래서 난 저런 짓을 당하고 싶지 않아."
왠지 마음이 복잡했다. 한숨을 내쉬고 가게를 나가려고 밖을 보는데 익숙한 주황 머리가 바쁘게 뛰어가고 있었다. 얼른 문을 열고 소리쳤다.
"야! 김태형!!"
김태형이 정육점을 지나치려다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김태형의 얼굴은 땀 범벅이었다. 김태형은 나를 보고 걸음을 멈추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김태형에게 다가갔다.
"너 어디 갔었어!"
"너야말로 왜 안 따라와! 한참 찾았잖아!"
"야.. 무슨. 니가 빨리 가지만 않았어도 나 길 안 잃어버렸어!"
"후.."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나라고!
언성을 높여서 싸우는 소리에 주위 사람들이 흘끔 쳐다보고 지나다닌다. 김태형도 그걸 느꼈는지 일단 가서 얘기해. 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혼자 가다가 멈춰 서서 다시 와서 내 손을 잡고 간다. 안 그래도 머릿 속이 복잡한데 얘는 왜 화를 내는 거람.
시장을 빠져나오자 큰 길이 보였다. 김태형의 걸음걸이가 너무 빨라서 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좀 천천히 걸어!"
김태형이 고개를 돌려 나를 힐끔 보더니 속도를 늦추었다. 나는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나란히 서서 걸었다. 김태형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나는 어색한 느낌이 들어서 괜히 거리를 두리번 거리며 구경했다. 김태형이 시선을 아래로 두고 길을 걷다가 무언가 결심을 했는지 고개를 들었다.
"미안."
"어? 뭐라고?"
"미안하다고."
멍하게 걷다가 김태형이 말하는 것을 못 듣고 되물었더니 미안하다고 한다. 의외네, 미안하다는 말도 하고. 나는 고개를 돌려서 김태형의 얼굴을 쳐다봤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앞만 보고 걷고 있는 김태형의 옆얼굴은 감탄할 정도로 잘생겼다. 짜증나게. 김태형은 평소 무표정한 얼굴이나 장난끼 넘치는 얼굴과는 다르게 우울해 보였다.
"앞으론 먼저 가지 않을게."
"... 그래. 고마워."
무슨 바람이 들어서인 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우울한 표정으로 그런 소릴 하니까 괜히 내가 미안해진다. 손으로 김태형의 등짝을 퍽 하고 때렸다.
"야! 나 괜찮아. 걱정 마. 인상 좀 펴라."
"아!! 아프잖아!"
"아프라고 때린 거거든?"
"조폭이 따로 없어 진짜. 무슨 여자애가..."
"또 맞고 싶다고?"
"아니."
그거 무겁지? 얼른 나한테 줘. 어휴, 이걸 어떻게 들고 있었냐? 가방에 넣고 다니지. 하여튼 머리는 나빠가지고.
김태형은 내 양 손목에 걸려있던 봉지를 웃으면서 가져갔다. 근데 마지막 말은 좀 빼지? 죽는다 진짜.
●
다음 날 아침. 김태형이 일어나자마자 내 방에 쳐들어 왔다. 그러고는 빨리 가야 한다면서 내 가방에 음식과 잡다한 용품을 쑤셔 넣는다. 그거 내 가방인데 왜 니가 챙겨. 팔짱을 낀 채 자리에 서서 김태형이 하는 짓을 지켜봤다.
"너 뭐 해? 빨리 씻어."
".. 알았어."
흠흠. 하고는 화장실에 들어갔다. 김태형이 사준 칫솔로 양치도 하고 비누로 뽀득뽀득 세수도 했다. 밤에 머리는 감았으니까..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 화장실을 나왔다. 김태형은 준비를 마쳤는지 이제야 여유로워 보였다.
"가방 니가 메고, 로브 입어."
"알았다고."
"방은 빼뒀는데, 우리가 가는 곳은 바란 산이야."
"....네?"
"왜?"
".. 산이라고?"
"어."
아니야. 거짓말이야. 산이라니? 산에 간다는 말 없었잖아. 나는 울상을 지었다. 왜? 슈가볼이 왜 산에 있대?
"와 너 표정 진짜 웃긴다."
"왜 산에 있는 건데?"
"나야 모르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멍하게 서있었다. 나는 산이 싫어.. 힘들단 말이야.
"빨리 로브나 챙겨 입고 나와."
김태형은 먼저 방을 나갔다. 그래. 가야지. 응. 가방을 메고 로브를 입고 방을 나와서 1층에 갈 때까지 머릿속은 멍했다. 가기 싫어....
"아침 먹고 가야겠지?"
"어..."
"정신 좀 차려. 너 여기 다닐려면 산타는 건 기본으로 해야 돼."
"알았어.."
따끈한 스프가 나오고 멍하니 스프를 떠먹다가 문득 어제의 일이 생각났다.
"있잖아."
김태형은 빵을 뜯어먹으며 말해. 라고 대답했다.
"원래 여기 시장에 깡패들이 깽판 치고 그래?"
김태형은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보았다.
"아니, 어제 어쩌다가 봤는데.. "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아니...!"
"내가 말했지. 눈에 띄는 행동은 하면 안된다고."
"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거나 먹고 우린 구슬을 찾기만 하면 돼."
"허.. 왜 이렇게 단호해? 단호박 먹었어?"
"그건 대체 무슨 유머냐?"
아이씨. 말도 못 꺼냈네. 그 아줌마가 이젠 다시는 시장에 못 나오는건 알겠는데. 그게 진짜로.. 그런 이유인 건지 궁금하단 말이야.
묵묵히 계속 먹기만 하는 김태형을 살짝 째려보다가 나도 마저 먹었다. 어젯밤에도 여관 음식을 먹었지만 확실히 맛이 있긴 하다.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신경을 끄기로 했다.
"자! 이제 출발!"
"하.. 출발.."
김태형이 옷을 고쳐 입고 혼자 신나서 출발! 이라고 외친다. 너만 신났지? 나는 안 신나.
마을을 나오고 또 어제 보았던 숲 사이에 난 길을 걸었다. 어제 좀 걸었다고 조금은 익숙해졌다. 그래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는데 김태형이 멈춰 섰다.
"왜?"
"이쪽이야."
길을 가다 말고 오른쪽으로 꺾었다. 바란 산 등산로의 입구였다. 아.. 이제 시작인가. 제발 구슬이 높은 곳에 있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잠깐, 그러고보니 어제 김태형이.. 다음 구슬은 험한데 있다.. 고 하지 않았나? 편하게 가기는 글렀군.
●
"다 왔어?"
"아니."
"......"
"......"
"다 왔어?"
"아니."
"......"
"......"
"다..."
"아니! 아니! 아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너 좀 조용히 해. 힘들어 죽겠으니까."
산에 오르는 건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던 사람이 누구더라? 정작 본인도 힘들어하면서. 어쨌거나 지금 죽을 맛이다. 처음엔 경사가 높지 않아서 오를만했는데 올라갈수록 가파른 거 같다. 중간중간에 쉬면서 물도 마시고 육포도 뜯어먹었지만 체력이 딸린다. 아!!! 도대체 어디냐고!!!
앞서 올라가던 김태형이 멈칫했다.
"왜?"
"이 쪽인 것 같아."
길 따라 올라가지 않고 샛길로 샜다. 여기 길 맞아..? 우리 길 잃는 거 아냐? 불안해하며 김태형을 뒤따라갔다.
"여기 혹시 몹 같은 거 있는거 아냐?"
"몹이 뭐냐?"
"그... 몬스터? 괴물?"
"야생동물 같은 건 있겠지."
"아.."
"그리고, 너네 세계엔 없는 게 있어."
"... 뭔데?"
김태형은 뜸을 들였다. 그리고 자리에 멈춰 서서 나를 보고 갑자기 표정을 굳히더니 말했다.
"드래곤."
"...? 네?"
"드래곤. 이 세계에는 있어."
"헐. 진짜?"
"그 중에도 레드 드래곤이 이 산에 살아."
"......."
"....?"
"야!!! 그걸 왜 이제 말해!! 우리 빨리 여기서 나가자."
"슈가볼은 찾아야지 멍청아. 따라오기나 해."
드래곤이라뇨? 지금.. 나랑 장난? 나 판타지 소설 많이 읽어 봤단 말이야. 걸리면 죽는 거 아냐? 나 소원 빌어야 되는데.. 제발 만나지 않게 해주세요. 슈가볼을 드래곤볼이라고 말하지 않을게요. 엉엉.
점점 깊숙한 숲 속으로 들어갔다. 진짜 길 잃을 것 같은데.. 나중에 어떻게 나가려고. 민간인 등산로를 한참 벗어났는지 온통 숲 밖에 없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반대편 산 중턱에 해가 걸려있어 빨간 빛이 드리웠다.
"해가 지고 있는데.."
"다 와가. 여기 어딘데.."
김태형은 수풀을 헤치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갔다. 김태형이 헤친 수풀이 내가 지나갈 때 원래대로 돌아와서 내 얼굴을 마구 후렸다. 어후. 앞이 안 보여.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수풀이 얼굴에 닿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뻗은 손에 무언가 닿였는데, 멈춰있는 김태형이었다.
볼따구를 너무 많이 맞아서 정신을 못 차리고 김태형의 등을 밀듯이 세게 쳤다.
"너 뭐 해!"
"악!!!"
세게 밀지도 않았는데 김태형은 발이 미끄러져서 넘어졌다. 넘어지기만 하면 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앞에 구덩이가 있었다. 아. 이런. 김태형은 구덩이로 빠졌다.
"김태형!!!! 내 목소리 들려?!"
아무런 대답이 없다. 아.. 어떡하지.. 천천히 구덩이에 들어갈 요량으로 앉아서 조금씩 들어가는데 구덩이가 생각보다 크다. 그리고 안이 새까매서 보이는 것이 없다. 발에 닿이는게 없나 다리를 쭉 뻗다가 바닥을 잡고 있던 손이 미끌려서 나도 떨어져버렸다.
"꺄아악!!!"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엉덩이를 땅에 찧었다. 아으... 아파. 다행히도 구덩이는 깊지 않았다. 위를 보니 안에서는 바깥이 보였다. 위에선 안 보이더니.. 쓰라리는 엉덩이를 문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카만 어둠뿐이었다.
"김태형!! 어딨어!"
어딨는 거야 대체.. 괜히 무서워서 주위만 두리번 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헉! 누구야!"
뒤를 확 돌았더니 허여멀건한 얼굴이 바로 앞에 나타났다.
"꺄아아아악!!!!!!!!!"
"어후!"
귀신인 줄 알고 빼액 소리 질렀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김태형이다. 어디서 났는지 랜턴을 얼굴 밑에 두고 비추고 있었다.
"내가 깜짝 놀랐네."
"죽을래!!!"
"흐흥. 이 동굴 안에 슈가볼이 있는 것 같아."
"오!"
김태형은 랜턴으로 주위를 비추며 동굴 안쪽으로 향했다.
"너무 앞이 안 보이지 않니?"
"어둡긴 어둡네."
슬그머니 김태형의 팔을 붙잡았다. 김태형은 왜 그러냐는 듯이 보았다.
"무서워서.."
라고 했더니 픽 웃는다. 랜턴은 꽤 환했는데 이상하게도 넓게 비춰지지 않았다. 시야가 좁아서 바로 앞에 무언가가 나와도 꼼짝없이 깜짝 놀라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적막함 마저 감도는 캄캄한 동굴을 조금 더 걸었을까, 김태형이 어라? 한다.
"왜?"
"동굴이 여기가 끝인데.."
"엥? 구슬은!"
"흐음.."
김태형은 동굴의 끝인 벽 쪽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나는 뒤에 서있는데 괜시리 추워져서 양손으로 양 팔을 감쌌다. 김태형은 랜턴을 벽에 비추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덕분에 내가 서있는 곳은 빛이 적었다. 여기 없는 거 아냐?
김태형의 뒷모습을 보다가 내 뒷통수가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김태형을 보고 있는데 왜 내 뒷통수가...
설마.. 내 뒤에 뭔가 있는 건 아니겠지? 고개를 뒤로 돌리고 싶었지만 고개가 움직이질 않았다. 내 고개가 움찔움찔했다. 뒤로 돌아볼까? 말까? 곁눈질로 옆을 봤지만 어둠뿐이었다. 어쩌지, 어쩌지. 얼음마냥 굳어서 계속 서있었다.
"없는 것 같다.. 돌아가자."
"어! 그래!"
김태형이 계속 벽을 보고 말을 했다. 미련이 남는지 계속 보고 있었다. 나는 앞서 한 고민을 한순간에 잊어먹고는 그래! 하고 바로 뒤를 돌았다.
아... 나는.. 바보다..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는 것이 분명하고, 내 촉은 아주 좋은 게 분명하다.
"꺄아아악!!!!!"
그리고 몇 번째 비명인지 모르겠다.
어둠 속에서 빨간 눈동자와 마주쳤다.
♥
원래라면 오늘 아침에 올렸어야 했는데.. 늦잠을 자는 바람에 헤헷.
짤을.. 못찾아서 안올렸어여 (뻔뻔) 그냥.. 근양.. 읽어주세여 *'ㅅ'*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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