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열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푸른색의 나비 모양 네일 아트가 정교하게 그려진 손톱이 유리 테이블을 긁어내린다. 극도의 불안감에 빠졌다는 증표와도 같았으나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지금 자신이 패닉 상태에 빠져 있다는 꽤나 그럴싸한 이유에서 비롯했다. 성열은 다음 촬영 차례가 자신인 줄도 모른 채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며 유리 테이블을 만지작대는 쓸모없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다. 명수로부터의 갑작스런 충돌은 성열을 뒤흔들었다. 저의 순결하지 못한 육체부터 마음까지 전부 말이다. 성열은 가만히 가슴에 손을 대어보았다. 미약하지만, 뛰고 있다. 쓸데없는 감정 소모로 인해 아직까지도 뛰고 있다. 이렇게도 쉽게 저의 심장은 이년 전부터 제어해왔던 방어막을 무너뜨린다. 이것을 어떻게든 다시 멈춰야 한다. 명수의 얼굴을 생각하면 괴롭게도 뛰는 제 가슴을 진정시켜야 한다.
- 촬영 들어가야 한대.
괜찮을거야.
그리고, 성열은 저 스스로를 억지로 위로하며 미소지었다.
아까 촬영을 준비하기 전 피웠던 LSD의 향이 혀끝을 맴돌고 있었다.
주제는 다른 때보다 더욱 난해했다. 사死의 찬미, 손톱의 나비는 남아있는 혼을 의미한다. 온통 흰색과 푸른색 나비로 점철이 된 세트장 위에 푸른색 자켓과 흰 블라우스를 입고 포즈를 취하는 모델, 그러니까 성열은 곧 살아있는 나비이자 "파랑새"였다. 푸른색 위주로 강조되어 이루어진 메이크업은 그래서였다. "나비"가 빈 껍데기 안 남아있는 생生을 의미한다면 파랑새는 온전히 스스로 살아 날갯짓하는, 완전한 혼백이었다. 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 하면 성열은 껍데기가 되어야 했다. 꼬박 스무 날만 난다는 나비의 열 아홉번째 날, 최후의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성열은 오직 빈 껍데기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둘, 하면 성열은 파랑새가 되었다. 갸날프게 우는 파랑새는 겉보기에는 그저 한 마리의 새일 뿐이다. 그럼에도 스무 날이 아닌 평생을 날갯짓할 수 있다. 스무 날로 만족해야 하는 나비와는 달리 당당히 스스로를 뽐내며 비행할 수 있다.
- 죽어버린 나비와 살아있는 새,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업계에서 별종으로 유별난 남자 사진작가 K는 그것을 원했다.
그리고 지금만 해도 다섯 명의 모델들이 전부 그것에 실패했다. 심지어는 금방 전 실패한 그는 이 소속사 안에 있는 세 명의 메인 모델 중 단연 톱을 달리고 있는 모델 "이연"이었다. 신비로운 이미지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운 그가 어째서 실패를 했을까, 의문점이 있었지만 성열은 사진 작가의 요구대로 포즈를 잡았다.
- 거기 멈춰봐, 좋아. 그렇게 고개 뒤로 젖히고-
성열은 먼젓번에 말했던 세 명의 메인 모델 중 맨 마지막을 꿰차고 있었다. 스폰서와는 별개의 능력이었다. 쟤, 이 회장이 꽂아줬대. 수군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성열에게로 꽂히는 비난의 화살들은 아직까지도 끊이질 않았지만 성열의 능력은 또래 모델 중 단연 최고에 속했다. 열 여덟 살, 데뷔한 뒤 삼년간 성열은 데뷔 이래 가장 크게 성장한 한국 모델, 화보에서 유난히 핏이 잘 받는 모델 등의 잡지 순위에서 꼭 10위 안에는 들어가곤 했다. 스폰서를 하던 열여섯 살 때까지는 멸시의 시선이 끊이질 않았지만, 그 뒤의 성열은 그래도, 조금씩은 제 실력에 대한 인정을 받고 있었다. 다만 내면은 점점 더 망가지고 있었고, 회장의 탐욕어린 시선은 여전히 성열을 향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자기는 나비는 되는데 파랑새가 안 되네,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던 K가 한 컷만 더 가보겠다며 다시 사진기를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도중, 성열은 저 멀리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이연과 우연히 눈을 마주쳤다. 적의감이 담긴 시선이 자신을 향한다. 스물여섯, 자신과는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난다. 이연은 유난히 성열에게 경쟁감을 대놓고 드러내곤 했다. 워낙에 짧은 모델의 생명상 은퇴가 몇년 남지 않은 지금, 무섭게 제 뒤를 좇는 성열을 고깝게 여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성열은 끈질기게 저를 쫓는 시선을 피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진정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잠깐만!
- 자기, 몇 장만 더 찍어보자.
그것은,
아까의 긴 상념을 끝으로 잊어버린 줄 알았던 명수가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흐리멍텅하게 내려앉은 두 눈의 초점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진정할 수 있을 거야.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 본다. 지금은 촬영 중이다. 공과 사는 다른 일이고, 지금은 촬영에만 집중해야 한다. 꾹 다물린 입술이 잠시간 일그러졌다가 다시 펴진다.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하는 성열은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떴다. 자, 아무것도 아닌 일이야. 김명수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내가 사랑한다지만, 그 까짓게 무슨 소용이야. 진정할 수 있을 거야, 지금까지 그래왔잖아. 명수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마음에 담고 있다고 생각해봤자, 둘 사이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래야 해, 그래야만 해….
그러나, 문득 성열은 두려워진다.
진정,
시켜야 하는데,
' 이성열. '
멈추지 못하면 어떡하지?
순식간에 제 낯빛이 새하얘졌다. 표정은 일그러지고, 일렁이는 두 눈의 초점은 더욱 흐려졌다.
찰칵-
그리고,
다른 때보다 훨씬 볼품없는 제 형상을 담은 카메라의 플래시가 연신 터지기 시작했다.
명수야,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은 무채색이다. 무채색의 두 동자는 자신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내 그것을 지나친다. 성열은 자신이 자초한 일임에도 그런 명수에게 상처받는다. 지독히도 치졸하고, 이기적인 그것은 곧 성열의 사랑의 단상이자 이그러진 애정이었다.
꼭 잡은 손이 자신의 팔을 놓아주지 않는다. 성열이 불편하다는 기색을 내비쳐도 명수의 행동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것 좀 놔줘, 부탁조로 조용하게 말하고서야 힘이 실린 손이 느슨해지며 제 팔에서 떨어져 나갔다. 성열은 현재의 상황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년 동안이나 지속되던 허울뿐인 연애 기간 동안 명수가 자신과 등교를 같이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명수에게 이끌려 같이 등교를 한 지가 벌써 이 주일이다. 왜? 의문이 가득찬 채 기가 질린 표정을 하고 있는 성열이 무색하게 명수는 태연하기만 했다.
" … 왜 이래? "
- 왜?
나한테 왜 이래,
속내로 던진 물음은 이내 조각조각이 되어 흩어진다. 성열은 감히 명수에게 엉망인 제 세계를 보여주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명수는 애초부터 그것을 보고싶어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자신을 구해줬던 것은 정말, 정말 조금의 동정심이던가, 아니라면 애인 놀이, 단순한 흥밋거리, 그 정도라고 생각했다. 실은,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명수와 같은 사람이 자신을 좋아할 거라는 기대감 자체가 사치이다. 어디서 감히, 항상 그렇게 말하며 속내에서 제어하던 이성이었다. 폭주할 일이 없었다. 그것은 진실이었으니까. 아니, 진실이 아닐 리가 없으니까!
' 애인이잖아, 우리.'
그러나, 그 신념은 명수의 그 한 마디로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불상사를 겪어야 했다.
애,인?
성열의 손목이 벌벌 떨려오기 시작했다.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는 성열을 명수는 잡지 않았다. 그는 모순적이다. 자신도 모순적이다. 모순투성이의 이 관계는 두 해라는 기간을 거쳐 더 얽혀버렸다. 아니, 어쩌면 과거의 그것은 그저 단순한 유예 기간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부러 등을 돌렸던 지난 이 년의 시간,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진정한 종말과 종결점의 끝을 위해 조용히 은닉했던 시간이었다. 그것이, 단순한 현실 도피를 시도했던 나를 더욱 사지로 몰아가는지도 몰랐다.
다시 지금,
성열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명수야,
너를 사랑해서 미안해.
- 컷!
촬영이 끝났다.
아직까지 사랑하고 있어서, 더 미안해.
이기심을 숨기려 지은 흉측한 미소가 성열의 마지막 컷 표정이었다.
성열의 손이 나풀거리는 목가의 하얀 레이스 컬러를 매만진다.
옆의 네일 아티스트가 아직 지워지지 않은 왼쪽 손톱을 정리해주고 있었다. 푸른 손톱에 새겨진 나비들을 하나 둘씩 떼어내며, 아세톤으로 푸른 색 매니큐어를 지워가는 과정은 여느 때와 같았다. 그리고, 왼쪽 손을 맡긴 채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는 두 눈 역시 아까와 그다지 다를 바는 없었다.
죄여오는 느낌이다. 저 깊숙한 내면에서부터 이루어진 무거운 몽우리가 제 식도를 지나쳐 심장께를 아프게 때리는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음에도 지르지 못하게 하고, 그저 주저앉을 수 밖에 없는 그런 크나큰 고통이,
성열을 아프게 한다.
멈추지, 못하면 어떡하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성열은 부정한다. 아니, 부정해야만 한다. 수도 없이 제 자신을 제어하며 지켜왔던 지난날이다. 이렇게도 추하고 더러운 내게 주어진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푸르게 질린 성열의 안색이 잠시지만 몸을 휘청거렸다. 뒤에 있던 스타일리스트가 황급히 성열을 부축했다. 도와주겠다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괜찮아요, 촬영도 끝났으니까 세수 좀 하고 올게요. 힘없는 목소리로 몸을 일으켰다. 메이크업과 네일은 다 지워진 상태였다. 터벅터벅 걷는 걸음걸이가 한없이 위태롭기만 했다.
성열은 수도꼭지를 튼 그대로 제 얼굴을 정신없이 씻어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죽어버릴 것 같았다. 차가운 물줄기를 제 얼굴에 가져다대는 행동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세수를 하고서야 성열은 고개를 들어냈다. 물기가 가득한 제 얼굴이 보였다. 지나치게 희고, 볼품없고, 마른 얼굴은 여전히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렇게 볼품없는 얼굴로 모델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신기할 지경이다.
성열은 명수를 생각했다. 그토록 잊으려 했던 그 모든 노력들이 허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이성열은 김명수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김명수를 밀어냈고 김명수는 다가오지 않았다. 모두 이성열의 잘못이고 이성열의 죄였다. 밀어낸 것은 잘한 처사였지만 김명수를 사랑한다는 자체가 이성열에게는 죄였다. 그러나, 자신이 명수를 거부했다는 사실은 분명히, 분명히 잘한 일이다.
그런데도
명수야,
어째서 이토록 아픈 걸까?
성열은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막 네일이 지워진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 자기는, 날개가 꺾였어.
나가던 도중, 우연히 마주친 K는 다짜고짜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파랑새는 맞는데, 날개가 꺾인 파랑새야.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K와는 반대로 성열의 손은 정처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하며 황급히 돌아서려 하는 성열을 멈칫하게 만든 것은, K의 한 마디였다.
- 다음에 다시 한번 찍어보고 싶어. 자기같은 타입, 흔치 않거든.
모델로서는 영광의 발언이었다. 괴짜 사진작가 K는 그만큼 세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니까. 성열이 허리를 숙였다. 이만 가 봐,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K가 말하자 성열이 서둘러 몸을 돌렸다. 저 멀리서는 이연이 보였다. 성열은 서둘러 뜀박질했다.
" 하아, 하아. "
그렇게 엘리베이터 안에 홀로 몸을 싣고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성열은 비로소 기침했다. 숨도 쉬지 않고 달려서였다. 기침소리가 멈추지 않자 제 가슴을 쳤다. 다시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병은 아니었다. 단지 가슴이 너무 아파서, 숨을 쉴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성열은 오랫동안 제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마침내 호흡이 제 자리를 찾고 숨이 고르게 내쉬어졌다.
살아 있어,
그리고, 그 사실이 증오스럽기만 하다.
그가 말한대로라면 아주, 아주 오랫동안 부지해야 할 목숨이니까.
집에 도착한 성열은 잠을 잤다. 아주 오랫동안 잤다. 꿈에는 엘의 소설의 내용이 그대로 그려졌다. 맨 처음은 [찬가론]이었다. 웃음소리가 났다. 형체가 보이지 않는 Y가 웃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M이 저 뒤에서 Y를 지켜보며 웃었다. 그 다음은 [모순]이었다. 난간에 선 Y에게 다가간 M은 웃지 않았다. Y 역시 M을 보고 웃지 않았다. 사실, 성열은 여전히 Y의 형체를 보지 못했다.
M이 Y에게 말했다. 모순의 명대사였다.
[네 모순을, 내가 전부 끌어안는다면 좋을 텐데.]
어째서인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M은 간절했고, Y는 말을 하지 않았다. M은 독백한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심장께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지독히도 괴로운 일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그 잔인하고 괴로운 영혼의 죽음을 겪고 있다.]
그리고, 그 후속작인 [수선화]의 한 장면으로 넘어갔다. M은 이제 봉합된 심장의 상처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잔뜩 갈라져 있었다. 바싹 말라있는 심장은 애정이라는 수분을 요구했다. 그러나, Y는 이미 M의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 M은 예전처럼 Y를 저 멀리서 지켜보며 말라가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M은 스스로의 마음에 족쇄를 채워 버렸다. 그러므로 그는 말라가는 것이다. 애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혼의 울부짖음은 이미 예전 일이 되어 버렸다. 나는 Y를 사랑하며, 여전히 나는 그 사랑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Y가 간혹 모호한 답변으로 나의 심박을 후벼팔 때마다 나는 한번씩 더 죽어갈 뿐이다.]
아름다운 Y는 잔인했다.
끝까지,
사막에는 끝까지 비가 내리지도, 꽃이 피지도 않았다.
단지 L은 가장 최근 출간되었던 [물망초]에서, 맨 마지막 단락에 이 독백을 남겼을 뿐이었다.
[다만, Y가 나를 영원히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나를 조금이나마 알아달라 부르짖는다면, 네게 욕심일까?..]
M은 끝까지 아름답고 잔인한 사랑을 했다.
그리고, 그런 M의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지독하게 귀에 익은 목소리라서, 성열을 꿈 속에서 당황하게 했다.
성열은 문득 M의 옷깃을 잡아채었다.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M이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무섭게도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Y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Y는 성열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형체가 보이지 않았지만 M이 그 형상을 읊으면 상상하곤 했다.
[Y는 어디 있어?]
M은 의외로 순순히 입을 열었다.
[Y는 ㄴ… 야. ]
그러나 자세히 듣지 못한 성열은 다시 한번 물으려 그를 잡아챘다. 그러나, 그의 형체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성열은 마지막으로 다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너는 누구야..?]
[나는….]
그리고,
시야가 어두워졌다.
눈을 떴다.
눈앞에는 명수가 있었다. 성열은 잠깐 멍한 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곧이어 명수의 얼굴을 보자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 덕에 하마터면 침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힐 뻔 했으나, 그 불상사는 명수가 막아주었다.
" 깼어? "
" ……으응. "
고개를 끄덕이는 성열은 어제의 일은 아예 모른다는 듯이 행동했다. 명수는 그것을 아는 건지, 아니라면 잊어버린 건지 그 일에 대한 말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명수가 몸을 일으켰다. 주저하다 성열도 몸을 일으켰다. 시각은 벌써 대낮이었고,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휴일인 것이다. 성열은 자신이 열두 시간을 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을 일으키자 몸이 삐걱거렸다. 몹시 오래 잔 후유증이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명수를 지나쳐 걸으려 하자, 명수는 다시 성열의 팔을 잡아챘다. 지난번과 같은 상황이다. 성열은 최대한 자신의 뛰는 가슴을 명수에게 눈치채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 준비하고 나와. "
" …준비? "
" 데이트 하자. "
애인이잖아.
그러나, 명수의 발언으로 그 시도는 다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