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니까, 사귀기로 했다고? "
퉁명스럽게 한 마디 쏘아붙이는 성규가 적나라하게 요점을 꼬집자 호원과 동우가 살며시 얼굴을 붉혔다. 형도 참, 새색시마냥 얼굴을 붉힌 동우의 한 마디에 성규는 그대로 넉 다운, 얼굴이 빨개진 동우가 혹여나 아픈가 괜찮아요, 형? 하는 호원이다. 제대로 골 때린다. 성규가 머리를 짚었다. 어째 요샌 죄다 게이 새끼들이야. 보이는 놈마다 게이, 에브리바디 세이 게이도 아니고 이건 뭐 병... 찌푸려진 성규의 미간은 도통 펴질 줄을 모른다.
" 저새끼 손버릇 조심해라. "
언제 네 지갑을 쌔빌지 몰라, 눈꼴시려 일부러 으름장을 놓는 성규에도 호원은 꿈쩍도 않는다. 걱정마세요. 호원이 대답하며 슬쩍 웃었다. 아, 솔로라서 그런가 저런 모습마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젠 안 그럴거죠, 형? 응응, 나 이제 진짜 안 그럴 거야! 있는 대로 닭살을 뿌려대는 모습하며, 저렇게 행복하게 웃어대는 모습하며! 커플 파괴범의 욕구가 발동되기에는 충분하다. 씁쓸해져 괜히 손목을 우두둑 꺾은 성규가 저놈들을 어떻게 하면 싸우게 만드나. 하고 유치한 생각을 하다가, 곧 생각을 접었다. 제 아무리 게이가 아니꼽다지만-사실 게이도 아니고 커플이 아니꼬운 거다- 어쩌겠는가, 좋다는 걸! 그래, 커플천국 솔로지옥이렷다. 하고 대마를 꼬나문 성규의 표정이 영 안습했다.
" 형 여친 없어서 그런 거죠? 존나 규기력. "
" 시끄러 임마. "
뭐, 그렇다고 겁도 없이 옆에서 자신을 놀리는 우현에게 꿀밤 한 대를 못 먹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프다며 엄살을 떠는 우현을 뒤로한 채 커플은 잘 노쇼, 솔로는 이만 빠져줄테니. 하고 슬쩍 둘을 비꼰 성규가 등을 돌려 은신처를 빠져나갔다. 뒤에서 우현이 같이 가자며 쫄래쫄래 따라왔다. 이놈은 무슨 똥개도 아니고, 매일 형 형 거리면서 쫓아오는 게 영 달갑지 않다. 뭐, 미친놈 김명수나 저 빌어먹을 문제의 커플종족보다는 훨씬 낫긴 했다.
" 너 여자 좀 아냐? "
" 알죠, 그런데 왜? "
" 눈은 좀 작고, 바스트 장난아닌 년 있어? "
" ...한명 있긴 한데, …왜요?"
소개시켜줘요?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잘 대답하는 것 같으면서도 우현의 목소리가 묘하게 시원찮아진다. 달갑지 않다는 티가 확연히 나지만, 둔감한 성규는 하나도 모른다. 그것에 묘하게 서운해진 우현이 저도 대마를 물었다. 우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성규는 문득 철이 덜든 티가 확연히 나는 우현의 얼굴을 보았다. 자기보다 한 뼘은 작은 키에 명품으로 휘감은 모양새에, 붉은 빛이 살짝 돌게 염색한 머리까지 딱 제비 스타일이다.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얼굴에 인상을 찌푸리던 성규가 금새 시선을 거둔다. 왜요, 사귀게요? 묘하게 더욱 시원찮아진 우현의 목소리에.
" 아니, 섹스하려고. "
그래봤자, J와는 하나도 안 닮았으니까.
성규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묘하게 밝아진 우현의 표정을 보지 못한 채로.
무릎 위에 누워봐도 돼?
갑작스런 명수의 요구에 동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호원은 잠깐 밖에 나가 있었다. 놀란 마음을 추스리고 왜? 하고 묻자 무덤덤한 얼굴로 시험해볼 게 있어서요. 하고 말한다. 어쩌면 좋지, 호야가 아무한테나 무릎 빌려주지 말랬는데. 망설이는 동우에게 명수가 딱 한번이면 되는데, 하고 말했고,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양반다리를 하자, 그 허벅지 위에 명수가 머리를 베고 눕는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 아닌가 봐요. "
" 응? "
" 잠이 안 온다. "
그 애랑 있으면 이상하게 잠이 와요.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에서 입꼬리만 미미하게 올라갔다. 기괴했지만 분명한 미소였다. 동우는 명수의 표정을 보았다. 미묘하게 후련하면서도 초췌한 얼굴이었다. 성열과 사귀게 된 뒤부터 급속도로 피폐해진 명수를 받아주는 존재는 동우였다. 다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고해성사를 하듯이 제 속의 말을 꺼내놓고 같이 대마초를 나누는 시간은 길지도 짧지도 않았지만, 명수는 동우에게 그것이 해방구라고 말했다. 비록 왜 해방구인데? 하고 물었을 때, 엄마 같아요. 하고 대답한 건 좀 그랬지만 어쨌건 동우는 명수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 형, "
" 응? "
" 이호원이랑 사귀기로 했다면서요? "
" …응, 명수도 알고 있었네. "
" 축하해요. "
두 사람, 잘 어울려.
여전히 표정없는 얼굴이었으나 가식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고마워졌다. 동우가 수줍게 미소지었다. 고마워, 뭘요. 짤막하게 답한 명수가 허공의 천정을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없지만 제 마음 안에 있는 누군가를 그려본다. 눈은 커다랗고, 피부는 하얀….
무슨 일 있어?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는 명수가 걱정스러웠던 건지 동우가 물음을 던지자, 모호한 답변이 돌아왔다.
" 애인을 보면, 숨이 막혀요. "
이성열,
널 보면 숨이 막혀.
" 그 애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
너도,
날 보면 그렇게 생각할까?
사랑해서 죽을 것만 같은데, 타들어가는 가슴은 여전히 사랑을 가리키며 숨을 쉰다.
그래서 죽을 수 없다.
명수의 누구보다 절절한 고백에, 놀란 동우는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 그럴 거야. "
단지,
한참이 지난 뒤 그럴 거라는 말을 했을 뿐이었다. 답변을 들은 명수가 씁쓸하게 웃었다.
명수는 일어섰고, 호원이 들어왔다. 가 볼게, 짤막하게 인사를 건넨 명수가 그대로 은신처를 빠져나갔다. 눈치빠른 호원이 뒷모습을 보고만 있다가 무슨 일 있었어요? 하고 묻자, 동우가 나지막히 고개를 끄덕인다.
" 명수가 왔었어. "
" 알아요, 뭐라고 했는데요? "
" 무릎을 빌려 달라더라. "
" …네? "
급격하게 굳어진 호원의 표정에 동우가 손사레를 친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 명수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거 알잖아. 호원의 표정이 약간 풀어지지만, 그래도 조금 서운하다는 얼굴이다. 볼멘소리로 틱틱대는 연하의 애인이 귀여워서인지, 동우가 볼을 쭉 잡아당긴다. 우리 호애기, 서운했쪄요-? 꼭 껴안자 그제서야 표정이 풀린 호원에게 호야밖에 없다며 뽀뽀를 해주고 나서야 웃음이 입에 걸린다. 역시, 연하 애인은 참 귀엽다.
" 명수 많이 힘든 것 같더라. 표정도 그렇고… "
" 고생을 사서 하잖아요, 답답한 애에요. "
" 그래도…. "
" 왜요, 뭐라고 했어요? "
" 아니, 그런 건 아닌데. "
겉보기에는 그래도 참 가여운 애라서, 마음이 쓰이고 그러네.
속 깊은 동우의 말을 호원은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답답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친구라고 안쓰럽기도 했다. 명수와 성열이 그 지경이 된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지만, 명수가 반병신이 된 원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성열이라는 것을 아니까. 그리고, 얼마 전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하더라도 그 기약없는 밀고 당기기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니까.
형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렇지?
네.
오해 않기다?
그런 거 안 해요.
진짜지?
아, 안 한다니까요.
뒤늦은 호원의 발뺌에 동우가 웃었다.
한 살 연하의 멋진 제 애인은 누구보다도 훨씬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