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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의 향수 02




 

 






쉬는 시간을 끝내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시간이 체육이라 그런지 애들은 분주했다. 
미리 체육복을 입고 나가있는 애들이 많았고 그러지 못한 아이들은 운동화를 챙겨 후다닥 뛰어 교실을 나갔다. 

탄소는 혼자 조용히 교실 구석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이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혼자 교실에 남는, 가장 외롭지만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체육이라면 젬병이라 말할 수준까지도 못됐다. 몸이 허약한 탓에 체육시간에 참여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뛰기라도 하면 쓰러지기 일쑤였고

수업에 민폐가 될 바에는 없는 게 낫다. 시선이 주목 되는 것도 싫고 괜히 눈치 보게 되는 것도 싫었다.



"탄소야 뭐해 체육시간인데 나가자"



지금 수업이 늦었는데 왜 눈앞에선 박수진과 그 무리가 알짱거리는 것인가. 의도가 뻔한 질문에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나 체육 못해"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거겠지 빨리 가자"



수진이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러자 주위아이들이 곁눈으로 탄소의 몸을 위아래로 훑으며 어이없다는 식의 웃음을 지었다. 
그 눈빛들 앞에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내 모습이 싫었다. 그래서 머리가 아팠다. 
머리에 손을 얹으니 화가 날 정도로 뜨거웠고 찌질하게 그 몇 마디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탄소는 한숨을 내쉬며 손등으로 제 얼굴을 식혔다.

그리고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마음을 다스릴 때 박수진은 우악스럽게 탄소의 팔을 잡아끌었다.



"뭐하고 있어 빨리 가자니까 꾀병 그만 부리고!"



저게 기어이 미친 게 분명했다. 나도 꾀병이고 싶었다. 
꾀병이어서 널 뿌리치고 밖으로 나가고 싶고 그 집안을 뛰쳐나가 한없이 도망쳐 엄마한테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안겨 펑펑 울고 싶은데, 그런데 왜…



"싫다고 이거 놔"

"애들은 땡볕에 나가서 고생하는데 너는 공주 대접 받고 싶냐? 꼴에 공주라고"

"그런 거 아니니까 놓으라고"

"그런 거 아니면 가자니까?"



자신을 이끄는 수진의 힘에 탄소는 휘청거렸다. 한걸음도 안 가게 버텨야 했는데 자존심이 상했다.



"싫다고!"



말이 통하지 않아 주저앉았다. 

주저앉았음에도 박수진은 자신의 고집대로 날 끌어당기다가 내 무게를 들 힘까진 없는지 단단히 심술이 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주위 애들이 그냥 가자 수진아. 라고 다그친 후에야 자신의 머리를 역겹도록 고상하게 쓸어 넘기며 후, 하고 화가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존나 재수 없네."



인정~ 뒤에서 듣기 싫은 소리가 연달아 튀어나왔다. 
탄소는 복도에 가냘프게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이 웃긴지 실없이 웃다가, 다시 교실로 돌아와 미친 듯 사물함을 뒤졌다. 
쾌쾌한 냄새가 나는 자신의 체육복을 바라봤다. 용케도 있다.

나는 이 학교에서 동물원 원숭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그마저 못될지도 모르겠다. 

정말 예전 박수진의 말대로 칼 맞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고 살아야하나? 사실 잘 모르겠다.
그냥 죽고 싶다. 딱 그뿐이었다. 누군가 그렇게 깔끔히 죽여준다면 그게 더 감사할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탄소는 운동장으로 나갔다. 모두의 이목이 쏠렸고 수업을 받고 싶다는 탄소의 말에 체육선생님은 벙찐 표정으로 고개만 대충 끄덕였다.
그리곤 달렸다. 숨이 턱턱 막힐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름 기분이 좋았다. 운동장 냄새가 오랜만이라 괜히 코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좀 더 위험할 정도로 속도를 냈다. 끝까지 달리고 싶었다. 적어도 저 축구 골대까지는 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희망을 품으며.

그렇게 딱 3분 좋았던 것 같다. 

운동장 반 바퀴쯤 왔을 때 어지럽기 시작했다. 아까는 그렇게 죽고 싶더니 태생이 찌질해 지금은 좀 무섭다. 

몇 번 쓰러져봤는데 기분이 꽤 더러웠단 말이지, 그걸 생각하니 온몸이 아찔하다.

시발 모르겠다. 걍 달려. 라고 생각하자마자 멀리서 마법처럼 공이 날아와 그 많은 아이들 중에 나를 맞고, 특히나 내 볼을 맞고 엄청난 회전력으로 한 두 바퀴 정도 돌곤 떨어졌다. 당연하다시피 정신을 잃었다. 저렇게 생생히 기억하지만 누가 찬 공인지는 모른다. 





그걸 알아야 하는데, 어떤 미친놈이 다른 반 운동장 도는데 축구공을 찬단 말인가.

그래도 달리다가 쓰러진 거 아니라 다행이다. 이건… 뭐냐 그냥… 다른 애들이었어도 쓰러졌겠지. 






**





병원에 가야한다는 둥 응급차를 부른다는 둥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바닥을 슬쩍 만져보니 다행이도 모래 바닥이 아닌 침대 시트였다.


보건 쌤의 목소리와 한 남자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남자는 분명 축구공 날린 새끼겠지. 
좀 더 쫄리게 하고 싶었지만 응급차에 오르는 건 사양이기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저 괜찮아요."

"허억!"



보건쌤이 놀라 들고 있던 판때기로 탄소의 머리를 칠 뻔했다.



"가벼운 뇌진탕 아시죠? 쨌든 그거예요 뇌 흔들리는 느낌이었으니까"

"탄소야 정말 괜찮니…?"

"괜찮다니까요 그러니까 저 커튼 뒤에 남자애 불러서 사과 받고 빨리 끝내죠. 지금 점심시간이라 점심 먹으러 가게요"

"탄소야 그래도 병원 가서 검사 받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이상하면 바로 병원 가볼게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따가 볼에 난 상처나 소독해주세요"



보건 쌤은 당황했는지 침을 꿀꺽 삼키며 알겠다고 하곤 커튼 뒤로 사라졌다. 그리곤 그 곳에 서있던 남자애의 옆구리를 찌르는 실루엣이 보였다. 
빨리 얼굴이나 보자, 오늘 점심 제육이라 빨리 가고 싶단 말이야.



"어… 안녕"

"인사 됐고 사과"

"뭐?"

"사과하라고"

"미, 미안!"

"넌 머리에 뭐가 들어차서 다른 반 운동장 도는데 공을 차냐"

"몰랐어 진짜 미안"

"모르는 게 말이 돼? 아 죽을 뻔 했네"



웬만하면 그냥 미안으로 끝내려했는데 이 남자애의 반응이 재밌었다. 
오랜만에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사람을 보니 품위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어떡하면 될까 진짜 미안하다"



아까까진 화나서 따질 말만 주욱 생각해 놓고 있었는데 어느 샌가 넋을 놓고 웃어버렸다.

날티 나게 잘생긴 애가 이렇게 당황스러워 하는 것도, 쭈뼛거리며 미안함을 온 몸에 뿜어내는 것도 우스워 참을 수 없었다.



"그럼 친구라도 해주던가."

"……"

"아하하! 농담이니까 표정 풀어 용서 할게"



아 맞아 나 왕따였지, 무슨 생각으로 저 애한테 이런 곤란한 부탁을 장난이랍시고 한 걸까. 꽤나 자해적이기도 하다.
그냥 이 애가 좀 웃겼을 뿐이다. 화가 갑자기 동정으로 바뀔 정도로 웃겼을 뿐이라 흐름을 타 무심코 해본 소리였다.
그런데 이렇게나 나에게 상처가 될 표정을 하곤 곤란해 할지 몰랐다.


탄소는 침대에서 일어나 목을 뚜둑 거리며 스트레칭 했다. 
그리곤 자신이 용서한다고 말했음에도 제 앞에서 가만히 자신을 지켜보는 남자를 그대로 지나쳐 보건실 밖으로 나왔다.

밥이나 먹으러가자, 아… 이 볼 송하댁이 보면 한소리 하겠는데?



"저기!"



뭐 더 할 말이 남으셨기에, 탄소는 실소를 터뜨리며 뒤를 돌았다.



"뭔데"

"할게, 친구"

"됐어 그냥 해본 소리였으니까 신경 쓰지 마"

"안돼 미안해서!"

"뭐가 안돼 됐다니까?"





[방탄소년단/전정국] 화살의 향수 02 | 인스티즈 

 

"네가 싸가지가 없어서 좀 고민했는데 어떻게든 참아볼게!"
 




이 새끼 이름이 뭐였지, 아까 명찰 봤는데



"너 나 왕따인거 몰라?"

"어? 근데 예상은 했어!"

"이게 미쳤나"

"이름이 뭐야?"

"안 알려 줄 거야 너랑 이제 만날 일 없을 것 같으니까"

"사실 아까 보건쌤이 너 부르시는거 들었어! 예의상 물어 본거야 탄소야"




네 이름은 김태형이었지 아마, 귀찮은 게 붙었다.






**






"저 오늘 차 안탑니다. 늦을 거 같으니 혼자 버스타고 갈게요"

[무슨 일인지 물어 봐도 되겠습니까? 오늘 저하께서도 같이 하교하신…]

"저는 빼놓고 가셔도 돼요! 오늘 어, 숙제! 그 숙제가 있어서 학교에서 좀 남아있어야 되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럼 늦어도 8시 이전엔 들어오셔야 하는 거 아시죠?]

"저녁도 먼저 드시라고 하면 안 되겠죠?"

[당연한 걸 물으십니다.]

"알겠습니다~"



다행이도 학교에서 같은 차에 타는 건 피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피해 다닐 순 없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게 바람이었다.

하교할 때마저도 저 많은 인파를 우르르 몰고 다니는 왕자신데, 내가 거기에 끼어서 같은 차안으로 들어간다고?

절대 안 되지.

게다가 내 얼굴도 기억도 못하는데 얼마나 다행인 조건인가, 한 일 년만 안 마주쳤으면 좋겠다.



"야 당번"

"어?"

"교실 내가 잠그고 나갈 테니까 먼저가라"

"어? 그래!"



몇 시에 들어가야 그를 마주치지 않을 수 있을까. 딱 여덟시쯤에 나갈까
탄소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왕자가 가는 길은 늘 요란했다. 
경호원은 물론이거니와 따라다니며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기가 차다. 이럴 거면 학교에는 왜 보내 논 건지.


갑자기 그를 마주쳐야 한다는 생각에 탄소는 몸을 떨었다.

그는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일까.
왕자가 돌아오고, 내가 그들에게 가족으로 받아들여질까 모르겠다.
이혼 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몇 백번이나 했지만 2년 동안이나 날 받아줬던 집에 날 잡아주길 내심 기대하기도 한다. 

너무 염치가 없으려나, 근데 왕자가 다른 좋아하는 여자라도 있으면 어떡해
아니 아예 사귀고 있거나. 그래서 내가 방해라도 되면?

그때가 되면 어떡할까, 그저 남편의 외도를 보고도 지금처럼 순순히 아무 생각 없이 살아야하나?

원래 정략결혼이란게 다 그런 거니까.

근데 난 그 새끼와 다르게 바람피다 걸리면 제명이잖아 

졸라 불공평하네. 이혼이나 해줬으면 좋겠다.



툭. 투둑



무언가 창문을 두드렸다. 고요한 교실에서 생각에 잠겨있다 자그마한 소리에 창가로 눈길을 돌렸다.

어쩐지 비 냄새가 나더라니.



쏴아아-



비가 쏟아졌다. 가을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쏟아지는 비는 탄소가 있는 창으로 들이치기 시작했다.
시간을 보니 7시가 넘었다. 충분히 어두운 교실이었는데 눈치도 못 채고 어둠에 혼자 갇혀있었다.

탄소는 더듬거리며 교실 불을 켰다.



우산 없는데.



핸드폰을 확인하니 예상대로 송하댁에게 곧바로 전화가 왔다.
탄소는 핸드폰을 조용히 뒤집었다.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면된다.
그 시간 중으로 성찬도 끝났으면 좋겠고.


손을 뻗어 비를 맞았다. 

손, 끈임 없이 지푸라기라도 잡던 내 손이었다. 불행했겠지. 지금도 비를 맞추며 궁상을 떨고 있다.

손으로 많은걸 쥐었다. 엄마의 손, 친구의 뺨, 버거운 반지, 화살, 

화살. 

그 거친 촉감.

씻겨 내려간다. 모든 게 무뎌지고 있었다.



"김탄소"



누군가 복도 문을 여는 순간 맞바람이 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날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누르고 있었던 영어프린트가 저 멀리도 날아갔다.


저하. 본능 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발 날 모르길 바랐는데 내 이름 석 자까지 부르시다니.  이거 좋아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별것 아닌 것처럼 마주치고 싶었다. 그저 넌 한 사람. 내가 처음보고 처음 말을 걸어보는 그냥 그뿐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게 내 작은 자존심이었다.


나는 한없이 작았고 그는 눈부시게 컸다. 그렇게 다가오지 말라고 속으로 애원을 했는데 역시, 다 소용없는 것이었다.
그가 어두운 복도에서 나와 점점 나에게로 발걸음을 디딜 때 난 그 한걸음 한걸음에 짓눌리고 있었다. 
무언가의 압박. 다신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그의 눈, 아름다운 형태와 가시지 않을 물기가 뱃속에서 부터 올라와 목을 조였다.

2년 동안 하루도 원망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하루도 보고 싶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난 수백 번 널 만났고 죽였고 울었고 또 위로했다.

그가 불빛으로 들어오자 탄소는 미친 듯 가방을 챙겼고 멍청히 그가 있는 뒷문으로 그를 밀치곤 도망치듯 나왔다.

잠깐이지만 가까이 있을 때의 그의 향기를 기억한다. 
지금 사는 집과 그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 나던, 서러움과 함께 날 동여매던 향이었다. 지독히 싫었다.

그리곤 곧바로 팔목이 잡혔다. 감히 뿌리치지도 못하겠는 그 차가운 손에 탄소는 가만히 뒤를 돌아 그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하"

"학교에서 까지 저하 소리는 듣고 싶지 않은데"

"제게는 그럴 용기가 없습니다."

"이름으로 불러줘"



전정국. 그의 이름이었다. 이름마저도 고상하지. 꼭 제 큰어머니처럼 넘치는 품위가 날 괴롭힌다.



"이제 놔주시지요. 더하면 화날 것 같은데"

"아,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가 탄소를 잡은 손을 내려놓곤 귀를 긁적였다. 
행동과는 다르게 전혀 당황하지 않는 입 꼬리와 알 수 없는 그의 속에, 머리가 복잡해져 헛웃음이 나왔다.



"당연히 그러시겠죠."

“경어 안 쓰면 안 돼?”

“네. 그보다 제 이름도 얼굴도 아시네요. 모르실줄 알았습니다.”

“그럴 리가”



그의 말과 동시에 그의 표정을 살폈을 땐, 딱히 나에게 관심이 있어보이진 않았다. 
지금 내 위치 때문에 그가 더 어려운걸까, 아니면 그냥 그저 어려운 사람인걸까. 한참을 고민했다.

그와 말을 이토록 많이 섞어본 것도 처음이라 당황스럽기만 하고 정신은 못 차리겠고. 딱 죽을 맛이었다. 
우선 공기를 무겁게 하는 이 어두운 복도를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야한다.



“방금 차를 타고 가시는 걸 봤는데 왜 이곳에 계시는 겁니까?”

“네가 안 오잖아. 분명 같이 하교 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송하댁이 전해드리지 않았습니까? 저 숙제하고 간다고요.”

“거짓말 같아서 오늘 네가 운동장에서 쓰러진 것도 봤고”

“그래서 걱정이라도 하셨어요?”



순식간에 어색한 공기가 흐르자 그가 헛기침을 흘렸고 나까지 이상해져 괜히 옆에 있던 소화전을 바라봤다. 
사춘기도 아니고, 짜증나게 하네.





[방탄소년단/전정국] 화살의 향수 02 | 인스티즈 

 

“그만 같이 가주면 안 돼?”

“네?”

“집에 혼자 들어가기 무서워서, 비도 오는데”



뭐래, 참았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첫 만남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친한 척 다가오는 전정국에 무방비 상태가 돼 버렸다.
하지만 어떻게 다가오든, 내 앞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서있던 전정국은 나에겐 그저 왕자였다. 

그가 없었다면 난 나의 평범했던 일상을 엄마와 함께 보내고 있지 않을까, 
세상은 내 작은 행복까지 앗아가진 말았어야 했다. 이제 온갖 것을 원망하고 있었다. 
특히 겁쟁이였던 나에겐 눈앞에 보이지 않았던 전정국이 제일 편한 원망의 대상이었다. 
한 번도 본적 없는 조국의 아버지이자 내 친아버지를 원망하기엔 속이 턱턱 막혔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니 그가 좋은 화풀이가 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 자신에 세뇌 당하듯 내속에서 그는 아름다운 악이었다. 
패국의 공주 따위, 제 맘에 들지 않으면 죽여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왜 붙들고 있는 건지, 이혼하라는 주위사람들의 말에도 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이혼하고 싶었다. 
이혼해봤자 국경을 넘을 힘 따윈 내게 없었고 이 핸드폰 시대에 국경 너머에 있는 엄마한테 연락할 방법은 편지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그냥, 모든 걸 그만하고 싶었다.

집안사람들의 관리와 감시를 받는 것도 싫었고, 집에서까지 정해진 규칙에 살아야 한다는 게 싫었다.

학교도 싫었고, 쓰레기 같은 내 자신도 싫었다. 주위에 아무도 날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게 이렇게 힘든 것 일줄 몰랐다. 
충분한 삽질에 우울의 구렁텅이는 빠지고 잠길 수준이었고 나는 그저 몸을 뉘이면 된다.



“걸어가면 한 시간 걸립니다.”

“…너 따라가고 있던 건데.”

“저는 패기 좋게 걸어가시려는 줄 알았습니다.”



같은 우산 안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나올 때 우산이 없어서 멍하니 비 오는 밖을 쳐다보자, 
한숨을 내쉬며 고갯짓으로 자신의 우산 안으로 들어오라던 전정국의 모습이 생생하다. 
시발 쪽팔려 뒤지겠다. 송하댁 말 안 듣고 우산 안 들고 온 내 업이지.

탄소는 송하댁 생각에 잠시 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부재중전화가 아직 한 통인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지, 아니면 집에서 왕자랑 내가 같이 있다는 걸 알아서 그런 건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탄소는 곧바로 택시를 잡았다.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는 정국에게서 우산을 뺏어들고 그를 차안으로 먼저 구겨 넣었다. 
추웠는데 차안은 그나마 따뜻했다.



“왜 편한 차 안타시고 이런 고생을 하십니까?”

“지금도 타고 있잖아, 편한 차”

“아예 그렇죠.”

“만나고 싶었는데 못 만날까봐”



진심이 느껴지는 말투에 홀리듯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다급히 창가로 고개를 돌리는 것 같은 느낌은 기분 탓인지 모르겠다. 
보고 싶었어도 아니고 만나고 싶었다니. 거래처라도 만나는 것 같네, 물론 전자가 더 이상하지만.



“저희 이렇게 대화 나눠보는 거 처음인건 아십니까?”

“처음인데 내가 너무 말이 많았나?”

“없는 건 아니죠.”

“난 처음 같지 않아서”



나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수없이 상상했으니 그럴 수밖에, 내적 친분이 생긴 샘이었다. 
그런데 그는 왜? 그가 날 생각했으리라곤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다. 그렇게 그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은 채 한참을 달려 택시에서 내렸다.

다시 우산 속에 나란히 있으니 괜히 목을 긁적이게 된다.



“저는 마주치기 싫었습니다.”

“……”

“원망했고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만나기 싫었고 평생을 모르는 사이로 살고 싶었습니다.”



조용히 있던 정국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다가 기어이 나중엔 멈춰버렸다.



“그런데 지금 뵈어보니 죄송하네요. 생각했던 것보다 선한 분이신 것 같아서.”



그는 천천히 옆을 돌아 탄소를 바라봤다. 탁해진 정국의 눈동자의 비추는 건 주황 가로등빛밖엔 없었다.



“그리고 이제 만나도 뵈었으니 더 이상 기다릴 것도 없고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탄소는 침을 삼켰다. 비 소리에 심장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그렇지 심장은 곧 폭발할 정도로 뛰고 있었다.



“이혼해 주세요, 저하”



정국이 우산을 들고 있던 손을 힘없이 놔버렸다.
그대로 비는 두 사람을 덮쳤고 영락없이 머리부터 젖어들고 있었다. 누구도 우산을 다시 주우려 하지 않았다.

그저 날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사로잡혀 그 아름다운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상상으로 많이 마주했던 그였다. 하지만 상상했던 그의 반응과 너무나 달랐다.

그는 알 수 없는, 혹은 상처받은 두 눈을 하고 비처럼 쏟아졌다.

이런 말을 듣게 해서 미안했다. 하지만 여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속이 뻥 뚫리듯 숨통이 잠시 트였지만 꽤나 시렸다. 
그래서 괜히 심장부분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러자 빗물로 차가워진 정국의 손이 탄소의 다친 볼 언저리를 건드렸다.



“많이 다쳤잖아, 아깐 어두워서 몰랐는데”

“……”

“넌 애가 왜 얼굴로 공을 들이받아?”

“…저하?”



놀라 그의 손을 내치지도 못했다. 알수 없이 북받쳐오는 감정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럼에도 기어이 미지근한 눈물이 두 뺨으로 흘렀다. 찬 빗물과 섞여 하염없이 밑으로 떨어지는 눈물은 날 괴롭게 했다. 
쪽팔리게도 난 오늘 다쳤고, 아팠고, 외로웠다. 무방비한 내게 이런 손길을 뻗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여태 잘 참았는데.

곧 멀리서 송하댁의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8시는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탄소는 정국의 손을 쳐냈다. 그리곤 발밑에 있던 우산을 다시 집어 들었다.



“대답 피하지마세요”

“네가 다치지 않고 죽지 않겠다고 하면”

"……"

"그때 다시 얘기해"



차가운 공기를 들이키자 머리가 아파왔다. 우린 언제 봤다고 걱정을 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인지. 
난 다음날이 되면 분명 그와 모르는 척 할 것이고 그렇게 평생을 보낼 건데…

나락까지 약해진 나에게서 빌어먹을 감정은 잘 주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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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93.160
와 .. 명작인데...
7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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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240.147
진짜 최고예요 다음편 너무 궁금하네요ㅠㅠ
7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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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진짜 명작 냄새가... 작가님 사랑합니다... 너무 설레버렸어..
7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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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2
와...... 대작 냄새 맡고 왔어요 잘 읽고 가요...... 하 설레
7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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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219.25
넘재미쏘요ㅠㅜㅜㅜㅜ
7년 전
비회원도 댓글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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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4 22:30 l 작가재민
[피어있길바라] 사랑이 필요하면 사랑을2
06.30 14:11 l 작가재민
[피어있길바라] 새끼손가락 한 번 걸어주고 마음 편히 푹 쉬다와3
06.27 17:28 l 작가재민
[피어있길바라] 일상의 대화 = ♥️
06.25 09:27 l 작가재민
[피어있길바라] 우리 해 질 녘에 산책 나가자2
06.19 20:55 l 작가재민
[피어있길바라] 오늘만은 네 마음을 따라가도 괜찮아1
06.15 15:24 l 작가재민
[피어있길바라] 세상에 너에게 맞는 틈이 있을 거야2
06.13 11:51 l 작가재민
[피어있길바라] 바나나 푸딩 한 접시에 네가 웃었으면 좋겠어6
06.11 14:35 l 작가재민
[피어있길바라] 세잎클로버 속으로 풍덩 빠져버리자2
06.10 14:25 l 작가재민
[피어있길바라] 네가 이 계절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해1
06.09 13:15 l 작가재민
[어차피퇴사]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지 말 걸1
06.03 15:25 l 한도윤
[어차피퇴사] 회사에 오래 버티는 사람의 특징1
05.31 16:39 l 한도윤
[어차피퇴사] 퇴사할 걸 알면서도 다닐 수 있는 회사2
05.30 16:21 l 한도윤
[어차피퇴사] 어차피 퇴사할 건데, 입사했습니다
05.29 17:54 l 한도윤
[어차피퇴사] 혼자 다 해보겠다는 착각2
05.28 12:19 l 한도윤
[어차피퇴사] 하고 싶은 마음만으로 충분해요
05.27 11:09 l 한도윤
[어차피퇴사] 출근하면서 울고 싶었어 2
05.25 23:32 l 한도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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