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 예약
호출 내역
추천 내역
신고
  1주일 보지 않기 
카카오톡 공유
https://instiz.net/writing/707775주소 복사
   
 
로고
인기글
필터링
전체 게시물 알림
사담톡 상황톡 공지사항 팬픽 만화 단편/조각 고르기
혹시 미국에서 여행 중이신가요?
여행 l 외국어 l 해외거주 l 해외드라마
돼지저금통 전체글ll조회 1296







[카디/찬디/찬백] 장미에 가시가 있는 이유
written by. 돼지저금통




 9. 폭풍전야


 불운의 2인방이 입을 신나게 털어 준 덕에, 전교에는 종인과 경수가 사귄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경수는 좌절했고 종인은 기뻐 날뛰었다. 찬열이랑 헤어졌다는 사실이 퍼진지 얼마나 됐다고 종인과 열애 사실을 인정하다니. 아이들 사이에서 어떤 말이 돌고 있을 지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그 날 화장실에서 들은 얘기만 해도 벌써 그런데, 앞으로는 더 심한 이야기들이 오고 갈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런 것 쯤은 이제야 겨우 나의 사랑스러운 장미를 정원에다 옮겨 심게 된 김종인에게는 조금도 상관이 없는 것들이었다. 종인은 말 그대로 하루하루가 하늘이 날아 갈 것 처럼 행복했다. 원래부터 매일 매일, 것도 쉬는 시간 마다 경수를 보러 가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요즘은 더했다. 한시도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제 경수가 완벽한 내것이다. 우리 장미가 드디어 내손에! 그 사실만으로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이고, 심지어는 중천에 뜬 해 조차도 평소와는 다르게 훨씬 더 눈부신 것이다. 물론 우리 경수만 못하겠지만. 겁도 없이 해를 그대로 올려다보며 종인은 탈 것 같은 각막에도 불구하고 미친 놈 처럼 허허허껄껄껄낄낄낄 웃어댔다.

 처음에는 미친놈 같은 종인에 대해서 약간의 거부감이 남아있던 경수도 시간이 좀 흐르고 나니까 많이 풀어졌다. 제법 종인과 투닥거리며 장난을 칠 줄도 알고 도도한 척 하면서도 은근히 좋은 티를 살짝씩 내줬다. 이게 밀당인가, 어장인가. 진짜 얘는 선수인가. 사람을 들었다 놨다, 아니 종인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은 어느덧 경수의 전공분야가 된 지 오래였다. 가끔 학교에서 종인과 놀고 있을때면 찬열과 함께 했던 장소에서 함께 했던 기억들이 문득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지만 이제는 예전만큼 힘들지 않았다. 그저 오래된, 예쁘고 반짝거리는 빛바랜 추억처럼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경수는 요즘의 일상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들의 점심시간은 그 전보다 훨씬 더 기묘해졌다. 종인과 경수, 세훈, 종대의 콜라보레이션은 다른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엔 충분했다. 대체 저건 무슨 조화지? 흡사 육식동물 두마리가 초식동물들을 잡아 먹기 전에 놀아주는 것과 같은 모양새였다. 물론 그 아이들보다도 훨씬 더 불편하고 이 상황이 어이가 없는 것은 당사자 세훈과 종대이긴 했다. 본의 아니게 식사를 함께 몇번 한 뒤로, 그 둘은 말을 트기 시작했다. 물론 그 말들은 대개 종인과 경수의 뒷담이었다. 경수가 숟가락을 들 틈도 없이 반찬을 올려주고 아예 제 식판을 경수에게 이식 해주다시피 하는 종인에 대한 세훈의 불만과, 튕기는 척 하면서 종인과 노느라 밀당에 필요할때만 저를 찾는다는 종대의 투덜거림은 꽤 죽이 잘 맞는 편이었다. 대부분 여자애들 사이의 일이긴 하지만, 원래 뒷담을 까면서 제일 친해진다 했던가. 어찌보면 세훈과 종대는 종인과 경수보다도 더 친한 사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경수경수야.”


 매일 보면서도 뭐가 그렇게 보고싶은지, 종인은 시도때도 없이 경수의 이름을 부른다. 오늘 좋아하는 돈까스가 나온 탓에 정신 없이 식판에 얼굴을 묻고 밥을 퍼먹던 경수가, 표정을 도도하게 바꾸고 종인을 무심하게 올려다 본다. 그것 마저도 종인은 사랑스럽게 느껴져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왜.”
 “내 돈까스 다 먹을래…?”


 급식 아주머니에게 애교를 부리고 주위 애들까지 협박을 해서 얻어 온 돈까스가 종인의 식판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경수는 그 먹음직스럽게 커다란 수제 돈까스를 멍하니 쳐다봤다. 응…. 하고 천천히 고개가 끄덕여지기가 무섭게 종인은 돈까스를 모조리 경수의 식판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안먹어도 배가 불러. 네가 양분을 섭취하는 모습만 봐도 배가 빵빵하다, 경수야…. 종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수의 눈은 오직 돈까스에만 집중되서 헤어 나올 줄을 모른다.


 “돈까스 맛있지?”
 “응.”
 “나 착하지?”
 “응.”
 “그럼 오늘 야자 째.”
 “응. ……응?”


 하마터면 넘어 갈 뻔 한 경수가 돈까스를 입에 문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종인을 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미칠 지경인 종인은 몸을 배배 꼬며 좋다고 함박 웃음을 날려 댄다. 옆에서 돈까스고 나발이고 시방 내가 씹는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던 세훈과 종대는 결국 밥 몇 숫가락 뜨지도 못하고 사랑이 풀풀 샘솟는 호모씹게이 커플을 방해 하지 않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굳이 그 커플을 위한 것은 아니고, 두 사람의 위장을 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둘이 사라지거나 말거나. 알아 채지도 못한 종인은 그저 경수의 동그랗고 예쁜 눈과 포동포동한 볼을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데이트 하러 가자, 데이트.”
 “…무슨 데이트.”
 “우리 사귀고 한번도 제대로 데이트 못했잖아!”
 “맨날 학교에서 보잖아.”


 또 그새 까칠도도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말도 안돼. 아무리 학교에서 쉬는시간마다 본다고는 해도, 주말을 비롯한 밖에서 데이트는 완강히 거부하는 경수에 대해 종인은 쌓인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종인은 여전히 경수의 말이라면 꼼짝을 못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시간이 제법 흐른 뒤여서 경수에게 먹히는 것 몇개는 눈치를 채고 있던 중이었다. 멋진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는데, 데이트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지. 종인은 손에 쥐고 있던 숟가락을 조심스럽게 식판에 내려 놓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경수야….”
 “너 그래봤자 소용 없거든.”


 팽 코웃음을 친다. 오늘 유난히 우리 장미 가시에 날이 많이 섰네…. 종인은 머리를 굴리다가 칠전팔기 내인생. 어떻게 우리 장미를 얻어냈는데 내가 이 작은 시련 하나 못버티겠나! 싶어서 다시 도전해보기로 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불쌍한 강아지 같은 촉촉한 눈으로 경수를 그윽하게 쳐다보기. 물론 종인은 이 방법이 몹시 귀여워보여서 먹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정작 경수는 아니었다. 시발 저새끼 또 저렇게 본다. 왜 저렇게 노려봐, 누구 하나 죽이겠다……. 도경수의 눈에 흑표범 김종인의 귀여운 표정은, 강아지의 표정이 아닌 날이 선 산짐승의 그것이었던 거다.


 “아, 알겠어! 가면 되잖아!”


 오늘은 야자 시간에 다운 받아 놓은 영화를 보려고 했는데…. 종인의 경악스러운 칭얼거림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경수가 울상을 지으며 억지로 대답하자, 종인이 신난다고 벌떡 일어나서 춤을 춘다. 내가 남자친구를 사귀고 있는건지 애를 키우고 있는건지. 그래도 신난다고 함박 웃음을 지으면서 돈까스를 입에 우겨 넣어주는 종인을 보고는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오르는 경수였다. 우리의 장미 도경수는 겉으로는 츤츤대도 속으론 데레데레, 이미 김종인에게 녹아 버린 츤데레의 정석 도첨지였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


 “경수야!!!!”


 담임이 종례를 마치고 앞문을 열기가 무섭게 드르륵 쾅. 하고 뒷문이 열린다. 이윽고 불려지는 자신의 이름에 경수는 눈이 휘둥그레져선 주위를 휘휘 둘러본다. 왁자지껄한 교실을 눈빛 하나로 잠재운 종인은 성큼성큼 경수에게 다가오더니, 청소를 해야 한다는 경수의 말따위는 모두 무시해버린채로 손목을 휘어 잡고는 씩씩하게 교실 밖으로 나섰다. 경수의 애절한 손 끝이 가방에 닿았다. 겨우 가방을 사수해서 어깨에 걸친 경수는, 급한 손길로 자신을 끌고 어디론가 가는 종인의 뒤통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수 밖엔 없었다.


 교문 밖으로 나간 종인은 그것이 제 계획의 끝이었던 듯, 그 자리에 멈춰서선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설마. 데이트 하자고 그렇게 노래 노래를 부르더니, 아무것도 생각 해놓은게 없는거? 경수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야! 너 뭐, 생각한 거 없어?”
 “어…?”
 “아 씨. 너 여자 많이 사겨 봤을꺼 아냐. 근데 그런 것도 안해놔?!”
 “여자는 많이 사겨 봤지….”


 하지만 너는 남자잖아……. 우물쭈물하는 종인의 말에 경수의 말문이 막혔다. 하긴. 여자애라면 영화라도 보러 간다거나, 하다 못해 근사하고 큰 공원에서 꽃 핀 봄을 만끽하며 손잡고 걸을 수 라도 있지. 남자애 둘이 그러고 있었다가는 웃긴 꼴이 연출되기 쉽상이다. 경수의 머릿속에 불현듯 찬열이 스치고 지나갔다. 찬열이 형이랑은 데이트를 어떻게 했지. 가슴 한구석이 콕콕 쑤시고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다행이다. 그러고보니 찬열과도 데이트를 당당하게 대놓고,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근처 카페에서 마시고 수다를 떨거나, 어두컴컴한 집 근처의 그 공원에서 스릴만점의 데이트를 즐긴다거나. 기껏해야 학교 근처의 음식점 투어를 하는 것. 그런 사소한 데이트에도 찬열과 경수는 행복했었다. 그랬으면서도 이렇게 오래 사귀었다니 새삼 신기하기까지 했다. 경수는 찬열의 생각에 눈을 도로록 굴렸다. 멍때리고 말을 않는 경수가 불안했던지, 종인이 경수의 팔을 붙든다. 그 단단한 손에 경수의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찬열이 지워진다. 고개를 휘휘 저었다.


 “흔한 데는 가기 싫어.”


 카페나 공원, 학교 근처 음식점. 전부 찬열과의 추억으로 덮혀 있으니 종인과의 추억을 쌓기에는 좋지 못한 장소들이다. 종인은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디가 좋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남자 둘이 좀 창피하긴 해도 영화를 예매 해놓는 건데, 지금 영화관까지 가서 예매하고 기다리기엔 시간이 촉박하다.


 “어디 갈까 경수야. 미안해, 내가 미리 준비 했어야 하는건데.”
 “…넌 가고 싶은 곳 있어?”
 “어? 난 너랑 함께라면 어디든.”


 닭살스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경수는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그리고는 정말로 어딜 가야 하지, 한숨을 내쉬면서 곰곰히 생각을 했다. 야자를 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보충 수업까지 꼭 챙겨들어서 지금은 저녁시간이다. 어디 마땅히 갈 데도 없고, 멀리까지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찬열과의 추억이 하나도 없는 곳. 종인과의 새로운 추억을 만들만한 곳. 그다지 끌리지는 않지만, 그런 곳이 가까이에 하나 있긴 했다.


 “어디로 갈래. 우리 집으로 갈래?”


 도경수는 가끔 대담하다. 동그랗고 큰 눈으로 저를 쳐다보며 도톰하고 섹시한 입술로 저 말을 하는데. 어떤 혈기왕성한 남성이 그것을 거부 할 수 있단 말인가? 경수의 영업질에 그대로 넘어간 종인은 무조건 Yes! 감사, 또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두말 않고 학교 가는 길 보다 익숙한 경수 집 가는 길로 걸어 가기 시작했다.


 “근데 너 집에 아무도 없어?”
 “없긴. 엄마 있는데?”


 좋다 말았다. 종인이 입맛을 쩝 다시자, 너 없으면 무슨 짓을 하려고 그랬냐며 경수가 버럭 언성을 높인다. 등짝까지 제법 맵게 맞았다. 그러면서도 좋아 죽겠다는 듯 종인이 실실 쪼갠다. 너 잡아 먹으려구 했지. 그 말에 질색팔색을 한 경수가 집에 안간다고 몸을 비틀자 종인이 가볍게 제압했다. 안 잡아 먹을게. 그러니까 너희 집으로 가자. 경수의 귓볼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투닥투닥 거리는게 귀엽고 흐뭇한 남고생들이다, 라고, 지나가던 EXO-K 라는 그룹의 카디라는 게이커플을 핥는 한 호모수니는 생각했다.


-


 “다녀왔습니다.”


 다른 사람의 집에 가면, 그 집 특유의 냄새가 풍겨지곤 한다. 누가 짐승 아니랄까봐 후각에 예민한 김종인은 그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세훈의 집에 가도 세훈의 엉덩이를 걷어 차며 환기를 시키라고 소리를 지르곤 했고, 명절날 친척 집에라도 가면 인상이 팍 굳어서는 제 코가 익숙해 질 때 까지 다른 사람들의 기분까지 망가뜨려 놓곤 했다. 그런데 이 집은. 이 아리따운 한 송이 「내」 장미가 자라온 이 집은. 어째서 특유의 냄새마저 향기로울까? 항상 은은한 로션+섬유유연제 향이 풍기는 경수와 같은 집이었다. 종인은 마치 경수가 자신을 품은 기분에 빠져서는 집에 발을 들여 놓자 마자 마약한 놈 처럼 헤롱댔다.


 “어, 엄마 없네. 너 제 정신이야?”


 모든 방의 문을 다 열어보고 엄마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경수가 종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묻는다. 그 말에 종인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 뭐, 엄마가 없으시다고? 헐, 헐, 정말? 종인은 심장이 벅차올라서 터질 것 같았다.


 “니 방은 어디야?”
 “저기.”


 현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안쪽에 경수의 방이 있었다. 종인은 남의 집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집 처럼 거침없이 성큼 성큼 걸어 방 문을 확 열었다. 아, 다시 풍겨져오는 경수의 향기. 종인은 취한 것 처럼 기분이 몽롱해졌다. 불을 켜니 깔끔하게 정리 된 방 안이 보였다. 경수의 성격 다웠다. 책도 가지런히 줄을 맞춰 정렬 되어 있고, 심지어 이불은 각을 맞춰서 정리를 해놨다. 남자애의 방이 맞는가? 종인은 입을 떡 벌리고는 감탄했다.


 “앉아.”


 경수가 무덤덤하게 침대를 가리키며 말한다. 종인은 말 잘듣는 개새끼처럼 그곳으로 가 가지런히 두 손을 무릎에 모아 앉는다. 경수도 일단은 가방을 내려 놓고 책상에서 의자를 빼 종인과 마주보고 앉기는 했다. 그런데 이제 뭘 하지? 집에 와봤자 마땅히 할 게 없었다.


 “어… 엄마가 어디갔지.”


 경수가 눈만 도로록 굴리면서 눈치를 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엄마에게 연락이 와 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원래 이시간이면 집에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문자함에 문자가 하나 와있다. 『오늘 아빠랑 부부동반 모임 갔다가 밤 늦게 오니까, 전자렌지 위에 돈 가지고 맛있는거 시켜 먹어 아들♥』 하나뿐인 외동아들에게 보내는 문자답게 애정이 듬뿍 담겨있다. 어쨌든 할 일 하나는 건졌다. 경수는 오늘 종인에게 한 턱 쏘기로 다짐했다. 물론 자기 돈은 아니지만.


 “야. 뭐 먹을래? 시키자.”


 대충 먹을 걸 시키고 영화 DVD를 보면 딱일 것 같았다. 시간도 빨리 가고. 어차피 엄마 아빠는 부부동반 모임 갔으니까 늦게 오고, 집에 혼자 있는 거 무서웠는데 마침 잘 됐다. 대체 왜 거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상 서랍에서 음식 전단지를 한 뭉텅이 꺼낸 경수가 종인을 향해 그것을 가볍게 던졌다. 마찬가지로 가볍게 그것을 낚아 챈 종인은 덜덜 떨리는 손을 억지로 진정 시키며 전단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침이 꿀꺽 넘어간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경수는 신경도 안쓰는 것 같았지만 종인 혼자 그랬다. 지금은 경수 방 안이다. 아무도 없는 집에, 단 둘만 있는 경수의 방…. 심장이 이상하게 덜덜 떨리고 긴장이 된다. 뭐라 뭐라 글씨가 보이긴 한데 하나도 눈에 안들어온다. 아무거나 먹을래. 결국 전단지를 툭 떨구며 종인이 힘 없는 소리로 중얼거린다.


 “정말 아무거나 시켜도 돼?”
 “니가 먹고 싶은 거 시켜, 경수야.”


 하긴, 늘 종인의 의견은 별 상관이 없곤 했다. 그렇다면 치킨이다. 다부지게 마음을 먹은 경수가 작고 귀여운 손으로 폰을 조물거리며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네, 거기 치킨집이죠. 간들어지는 목소리에 이제 종인은 치킨집 아저씨에게까지 질투를 느낄 것 같았다.


 “야! 뭐해.”


 결국 손을 달달 떨며 멍을 때리던 종인을 경수가 툭 쳤다. 화들짝 놀래면서 뒤로 파바박 물러 선 종인 때문에 괜히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이제 치킨도 시켰겠다, DVD는 치킨 오면 볼꺼고…… 올때까지 뭐하지? 경수가 괜히 헛기침을 한다. 이렇게 단 둘이서만 조용히 있는 건 처음이라서 뭘 해야 될지 모르겠다.


 “있잖아….”


 한참동안 이어지던 침묵을 깬 것은 종인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손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눈은 요리조리 굴러가는게, 망설이는 티가 역력했다.


 “너, 집에…”
 “응.”
 “누가 와봤어?”


 는 무슨. 사실 속으로는 집에 박찬열도 데리고 왔니? 라고 하는 질문에 목까지 차올랐지만 경수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건드릴까봐서 조심스럽게 돌려 물었다. 물론 머리가 좋은 경수는 곧바로 이해를 할 것이다.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경수의 눈동자는 침대 위에 펼쳐진 이불 끝을 향하고 있었다. 실수를 한건가. 종인의 심장이 빠른 비트로 쿵쿵 뛴다. 실수를 했구나. 상처를 건들였다. 상처를 낸 것도 자신이면서, 그걸로도 모자라서 이번엔 상처를 헤집어 놓다니. 망했다. 이 망할 질투심이랑 소유욕 때문에 되는게 없다. 종인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뜯었다.


 “…니가 처음이거든.”
 “응?”
 “처음이라고 멍청아!”


 볼이 빨개져선 경수가 소리를 꿱 지른다. 뭐라고? 종인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종대도 안와봤어….”


 그니까 운 좋은 줄 알아. 워낙 사생활이 밝혀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종대도 데려오지 않았던 집이다. 찬열도 물론 그랬다. 집에 들어 왔다 가라고, 말을 안꺼내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도 예의상 던져 본 거였다. 자신의 공간에 다른 사람을 들이는 것은 거부감이 드는 일이었는데 이상하게 종인에게는 먼저 그 말이 툭 튀어 나왔다. 그렇게나 싫어하고 거부했던 사람인데, 지금은 누구도 들어오지 못했던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다는 것에 기분이 묘했다. 종인은, 그러니까 종인은…. 뭔가 믿을 만 했다. 편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편하고 익숙했다. 종인이 경수에게 엄청난 공을 들인 결과였다. 어느새 경수는 종인에게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경수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종인이 주는 사랑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는 우리의 짐승 김종인은, 그저 박찬열을 이겼다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입을 헤벌쭉하게 벌린 채 헤헤 웃고 있다. 저런 병신이 어떻게 흑표범이니 뭐니 할 수가 있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경수를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옆에 와, 어?”


 아까보다 긴장이 풀렸는지 한층 대담해진 종인이 제 옆자리를 툭툭 친다. 경수가 쭈뼛댄다. 가시가 바짝 섰다가도 저럴 때 보면 영락없이 순수한 어린애 같은 게 경수의 매력이다. 종인은 지금 미칠 것 같았다. 진짜 성격 같았으면 벌써 잡아 먹었는데. 순결한 장미를 더럽힐 수 없다는 필사적인 생각이 간신히 끊어질락 말락한 종인의 이성의 끈을 붙잡아 주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 학교에선 붙어 있지도 못하잖아, 경수야.”


 안달이 나서는 징징징. 결국 그 징징거림에 경수가 종인의 옆에 슬쩍 가서는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경수야.”


 사실, 경수는 종인이 이름을 부를 때면 얼굴이 빨개진다. 요즘 들어 그렇다. 처음엔 그냥, 마냥 귀찮고 짜증만 났는데 요새는 다르다. 종인이 그 깊고 짙은 눈으로 자신을 보면서 진득하게 경수야― 하고 이름을 부를때면 경수는 온 몸에 열이 올라서 얼굴도 들 수 없다. 쪽팔렸다. 이게 좋아하는 감정인가? 제법 의젓하게 그런 생각도 해봤다. 그렇지만 그런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좋아하면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원래 잡은 물고기에는 밥을 안준다고, 경수는 자신이 종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종인이 알면 버려지고 말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종인이 알면 기함을 할 일이었다. 어쨌거나 요즘 종인에 대한 엄청난 감정의 변화를 겪고 있는 경수는 지금 종인이 자신을 지그시 보고 있는 이 상황이 간지러워 견딜 수 없었다.


 “아 씨. 왜 자꾸 봐. 절로 눈 안돌려?!”


 쫓아 낼 꺼야….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그 모습이 몸서리가 쳐지게 귀여워서 종인은 저도 모르게 흐허. 하고 병신 같은 웃음소릴 냈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쪽쪽 빨아 먹어도 시원찮을 우리 경수. 결국 종인은 약간 정신줄이 끊겼다. 경수가 부끄러움에 방심을 하는 새에 경수의 볼을 두 손에 감싸쥐고는 입술을 맞댄 것이다. 순식간에 종인의 악력에 의해 고개가 돌아간데다 입술까지 빼앗겨 버린 경수가 공황상태에 빠졌다. 물컹한 입술. 따뜻하고, 촉촉한 입술. 머릿속에 종이 뎅뎅 울리는 것 같았다. 가벼운 뽀뽀인데도, 그냥 단순히 입술을 맞대고 있는 것 뿐인데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종인은 눈을 감고 있다가 아무 반응 없는 경수가 궁금해 눈을 슬쩍 떴다. 그랬더니 눈 앞에 왕방울만한 두개의 눈이 흰자를 사방으로 들어 낸 채 끔뻑대고 있다. 놀라서 얼어 버린 듯 했다. 눈이 떙그랗다… 너무 귀엽다……. 의외로 거부하지 않는 경수의 반응에 종인은 쿵쿵대는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혀를 내밀어 부드럽게 아랫 입술을 쓸었다.


 “으웅….”


 아 씨발 얘 뭐야. 방금 그 소리 뭐야. 갑자기 입술에서 느껴지는 자극에 경수가 몸을 틀며 작게 신음을 내뱉자 종인은 이제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졌다. 미칠 것 같다. 진짜 날 죽이려고 하는건가, 얘가 일부러 그러나. 오늘은 입술을 정복할테야! 그럴 때가 됐다고 저 혼자 합리화를 시킨 종인은 경수의 볼을 잡고 있던 손을 뒤로 뻗어 침대에 단단히 세우고 그 안에 경수를 가둬 본격적인 키스에 돌입했다. 경수는 여전히 당황해서 눈이 땡그랗게 커진 상태였다. 종인의 혀가 살살 경수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다. 타액과 함께, 그 혀는 경수의 입 안 이곳 저곳을 공격했다. 혼절 할 것 같았다. 황홀했다. 자신의 혀를 살살 건들이는 그 혀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정신이 몽롱해짐과 동시에 경수의 눈이 마법처럼 사르르 감겼다.


 “흐으…”


 간간히 고개를 돌리며 입술 사이에 틈이 날 때 마다 경수는 작은 신음을 뱉었다. 의식하지 못하고 한 행동이었지만 그 행동에 종인은 더 자극을 받았다. 여태까지 그 어떤 사람과 해본 키스보다 좋았다. 첫키스도 이만큼 달콤하지는 않았다. 경수의 입술은 달았다. 이런 표현을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정말 사람의 입술도 달수가 있구나, 종인은 처음 깨달았다. 경수의 감긴 눈과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이 보인다. 아, 너무 예쁘다. 

 서로에 심취해 정신 없이 입술을 맞대던 도중 경수가 종인의 목에 팔을 두를 때 쯤이었다.

 띵-동! 울리는 경쾌한 벨소리.


 “으브븝!”


 종인의 목을 감싸 안으려던 경수의 팔은 순식간에 종인의 어깨를 밀쳐내고 그 둘은 뭔가에 홀렸다가 깨어 난 사람처럼 파바박 뒤로 물러났다. 아 씨발 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 하고 자책하는 것은 종인의 생각, 헐 내가 미쳤지 이게 무슨 일이야. 하고 충격에 빠진 것은 경수의 생각.

 치, 치킨 왔나봐.

 결국 벨소리가 두번 정도 더 울렸을 때 경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치킨을 가져오기 위해 방을 나섰다. 손이 덜덜 떨린다.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찬열과도 키스를 해봤지만 이정도는 아니었다. 머리로 피가 다 몰린 것 같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 치킨을 받아 들어 계산하고, 부엌으로 가 냉수를 한잔 마시고 정신까지 차린 경수가 방 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문을 열었다.


 “치… 치킨 먹어!”


 안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건지 문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종인도 어, 어, 하고 쭈뼛대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거실로 나와 치킨을 세팅하고 디비디를 작동 시키는 중에도 둘은 말이 없었다. 티비 앞에 나란히 앉아 치킨을 뜯기 시작했다. 불을 끄고, 영화는 시작 됐다.

 경수는 지금 죽을 것 같았다. 이 상황이 어색하기도 하고, 어떻게 이렇게 됐나 싶기도 하고. 아까 자신이 눈을 감았던 것과 팔을 목에 두르려던 것이 생각하자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다. 혹시 티가 났을까? 엄청 좋았던 티가 났을까…. 티가 났으면 죽어 버리고 싶다. 눈을 질끈 감았다. 영화 도입부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으나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나저나, 김종인은 왠 키스를 그렇게 잘하지?


 “야.”
 “ㅇ, 어?!”


 갑자기 경수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종인은 막 뜯으려던 치킨을 내던지고 말을 더듬으며 대답한다.


 “너 여태 여자친구 얼마나 사겨봤어?”
 “응? 그건 왜?”


 의외로 별 대수롭지 않은 질문이다. 종인은 아무렇지 않게 눈을 깜빡이며 손가락으로 여태까지 사귀었던 여자친구 이름을 세어봤다. 수정이, 진리, 태연이, 서현이, 윤아… 아 분명 더 있는데. 너무 많아서 손에 꼽을 수도 없다.


 “아, 못세겠어.”
 “…그렇게 많아?”
 “응.”
 “……그럼 걔네랑도 다 키, 키스 해봤겠네?”


 키스, 에서 말을 더듬었다. 경수는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종인은 그것도 곰곰히 생각하더니만은, 경수의 기대를 와르르 무너뜨리고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 한다.


 “그럼. 다 해봤을 걸 아마.”


 떡 벌어지는 경수의 입.


 “…야이 개새끼야!”


 나쁜새끼! 경수의 등을 받치고 있던 쿠션이 다짜고짜 하늘을 날아 종인의 머리를 강타한다. 어? 어? 뭘 잘못한지도 모르고 눈을 동그랗게 뜬 종인이 멍청한 소리를 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을 다닌다. 자기도 처음은 아닌 주제에 어쩐지 억울한 느낌에다가 이유 모를 질투심에 휩싸인 경수는 그 뒤를 빨빨 따라다니며 쿠션을 휘둘렀다. 나쁜새끼야! 개새끼야! 씨발새끼!  또 무슨새끼, 어떤새끼, 난리가 났다. 영문을 모르는 종인은 계속 도망을 다니고, 뭔가 순결을 빼앗긴 것 같은 억울함에 경수는 종인을 쫓아 다니고. 결국 영화는 하나도 못보고 둘은 힘이 빠져서 다 식은 치킨을 뜯게 될 때 까지 그렇게 온 집안을 들쑤시며 뛰어다녔다, 는 첫 데이트 후기다.




***




 여유, 흡족, 행복. 이 세가지는 요즘 들어 종인이 가장 많이 느끼는 세가지 감정이다. 요즘의 생활은 천국보다 더 달콤했다. 경수의 집에서 첫 데이트도 하고 첫 키스도 하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그동안 염원해왔던 것을 모두 이룬 종인은 정말 지금 죽어도 경수를 못보는 것 외에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 입술까지 부대끼고 나니 괜히 더 책임감도 느껴지고, 이제 정말 경수가 제 것이 됐다는 사실이 맘에 확 와닿았다. 그 때 이후로 시도때도 없이 사람 없는 곳으로 경수를 끌고가 작게는 뽀뽀부터 크게는 키스를 한다는 것은 전교생이 모르고 종인과 경수만 아는 둘만의 작은 비밀이었다.

 그러나 경수가 종인을 좀 더 편하게 그리고 전보다 많이 열린 태도로 대한다는 것은 물론 전교생이 알았다. 종대는 벌써 종인에게 빠져버린 거냐며 박수를 쳐댔고 세훈 또한 심드렁하게 종인에게 축하 인사를 건냈다. 너 드디어 평생 소원을 이루었구나. 그 말에 종인은 브-이를 해보이면서 세훈을 더 약올렸다. 종인은 하루하루가 구름위를 걷는 기분이었고, 그런 날아갈듯한 종인을 보면서 경수도 기분이 살살 좋아졌다. 요즘 들어 자꾸 종인에게 설레고 있다는 것은 물론 아직 말하지 않았다. 종인이 알았다가는 난리가 날 게 뻔했다.

 어쨌거나 종인&경수 커플은 한창 풋풋함을 뿜어 내면서 옥상에서 막 입을 맞춘 뒤 내려오던 길이었다. 종인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경수에게 매달려 칭얼대고, 그런 종인이 속으로는 귀여워 죽겠으면서도 귀찮다는 듯이 뿌리치는 경수는 누가 봐도 한쌍의 바퀴벌레였다.


 “아 씨! 너 이거 안놔!”
 “오늘두 데이트 가자. 엉엉엉?”
 “아 시러어- 오늘은 야자 할꺼야. 종대랑 약속 했단 마랴.”


 부러 애교를 섞어 투정을 부린다.. 그런 경수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던 종인은 어디선가 불현듯 적의 낌새를 느꼈다. 짐승의 본능이었다.


 “…아.”


 아니나 다를까. 반대편 계단에서 찬열이 올라오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찬열의 얼굴은 반쪽이 되어 있었다. 평소에 쓰지 않던 안경까지 쓰고, 머리는 정리를 하지 않았는지 그새 많이 길어 있었다. 피부는 꺼칠했고 입술은 부르텄다. 누가봐도 맘고생을 심하게 한 얼굴이었다.

 찬열을 발견한 경수는 그 자리에서 잠깐 멈춰 선 채 숨을 훅 들이켰다. 이제 좀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분명 찬열 생각이 하나도 안날 정도로 행복해졌는데. 그래도 반쪽이 된 얼굴을 보니 걱정이 되고 가슴이 쿡쿡 쑤셨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혹시 헤어져서 그런건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금방 지워냈다. 변백현이랑 잘 지내고 있겠지. 그 개새끼랑 벌써 키스까지 진도를 나가지 않았던가? 그냥 변백현과의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았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경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올라오던 찬열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있는 종인과 경수를 봤다. 경수를 보고 눈이 커지고, 그 옆의 종인을 보며 눈이 더욱 커진다.


 “겨…”


 찬열은 망설이지 않고 경수의 이름을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벌써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마음을 굳게 다잡은 경수는 종인의 팔을 붙들며 얼른 가자, 하고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냉정한 목소리를 낸다. 경수는 더이상 찬열이 알던 귀여운 연인이 아니었다. 종인의 옆에서, 종인의 팔을 잡고, 자신을 냉정하게 지나쳐 가는. 이제 둘은 아무 사이도 아닌 것이다.

 차갑게 지나친 경수도, 그리고 경수를 또다시 그렇게 보내버린 찬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마음이 불편한 것은 종인이었다.  자신의 팔을 붙들고 냉정하게 지나친 경수 덕에 승리감을 느낀 것도 잠시. 경수가 잠시나마 흔들렸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완벽하게 잊은 줄 알았는데 역시 아니었나. 자신의 사랑이 부족했었나. 말이 없어진 경수의 어깨를 종인이 감싸쥐었다. 경수의 고개가 천천히 종인을 올려다 본다.
 종인은 경수를 보지 않고 묵묵히 앞을 보고 있었다. 경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종인은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경수가 찬열 때문에 힘들 때, 헤어져서 죽을 것 같을때도 이렇게, 지금처럼 묵묵히 곁을 지켜 준 사람.


 “…김종인.”


 경수는 이제 더이상 찬열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응?”


 종인은 다정하게 대답했다.


 “좋아해.”


 경수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백. 종인이 처음 쪽지로 경수에게 마음을 전했을 때 처럼, 그 어떤 말 보다 진심이 느껴지는 『좋아해』 라는 말에 종인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경수의 동그란 눈이 예뻤다. 부끄러운 듯 살짝 발갛게 달아 오른 볼이 사랑스러웠다.


 “나도 좋아해, 경수야.”


 내가 더 좋아해. 더 좋아하고 더 사랑할게, 장미야. 종인은 자신의 정원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장미에게 아낌없이 햇빛과 물을 주겠노라 다짐하며 경수의 어깨를 감싸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는 경수를 아무한테도 뺏길 수 없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찬열을 애써 지워내며, 종인은 경수 모르게 이를 빠득 물었다.




***




 “야. 김종인. 일어나봐.”


 경수의 반이 체육시간이라 오랜만에 즐기는 쉬는시간의 꿀잠을 누군가가 방해했다. 자신의 몸을 흔들어 깨우는 느낌에 종인이 얼굴을 한껏 구기며 눈을 떴다. 그 버릇없는 손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세훈이다.


 “뭐.”
 “박찬열이 부름.”


 뭐? 그제서야 반응이 좀 왔는지 종인은 우득 우득 몸을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 몸이 뻐근했다. 요새 들어 경수의 주위를 경계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웠더니 몸에 까지 무리가 온 모양이다. 세훈의 표정은 밥 먹자, 라거나 매점 가자, 라고 말하는 것 처럼 태연했다. 아무리 그래도 한 학년 선배가 지 친구를 부르는데. 그것도 좋은 일로 부르는 것은 아니란 걸 뻔히 알면서도 저렇게 태평 할 수 있다니. 그때서야 느껴지는 둘의 얕은 우정의 깊이에 종인이 혀를 쯧쯧 찼다.


 “옥상 오라는데.”
 “좆 됐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전혀 겁먹지 않은 눈치다. 망설임이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뒷문을 열고 나가는 위풍당당한 종인의 뒷모습을 보며 세훈은, 니가 그러니까 내가 걱정을 하겠니. 하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아마 이런 일에 대해서는 종인만큼 믿음직한 놈이 없을거다. 태생부터가 먹이사슬의 꼭대기로 태어난 놈인데, 어딜 가서 쳐맞고 오는 일은 없을테지. 같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방을 끝까지 물어 뜯을 놈이었다.
 교실 밖을 나서던 김종인은 번뜩 생각이 났는지 몸을 틀어 세훈에게 소리쳤다.


 “경수한테 아무 말 하지 마라!”


 세훈은 쯧쯧 혀를 차며 종인에게 중간 손가락을 곱게 날려 줄 뿐이었다.


-


 성큼성큼. 거침 없이 계단을 올라 거침 없이 옥상 문을 열어 제끼자 한 중간에 서서 무슨 영화라도 찍는 건지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박찬열이 보인다. 종인은 아에이오우, 한번 하고 금세 웃는 얼굴을 만들어 낸다. 가식과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 박찬열은 그런 종인의 명백한 도발에 꿈쩍도 안하고, 인생의 모든 것을 놓아버린 눈빛으로 담배를 발로 비벼 껐다.


 “옥상에서 담배도 피우시고. 고3 이라 그런가요 선배.”


 종인은 설렁설렁 발을 질질 끌며 찬열의 앞에 섰다. 찬열의 눈썹이 꿈틀 한다. 용케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참 말 없이 눈싸움을 하며 누가 누가 먼저 입을 떼나 대결을 하는데 결국은 찬열이 먼저 말을 꺼냈다. 가오 잡지 마 개새꺄. 다짜고짜 뱉어진 욕설에 종인은 피식 웃었다. 이게 찬열이었다. 항상 후배들에게 생글생글 웃으면서 친절하게 대해주다가도, 선을 넘으면 바로 공격적으로 돌변하는 성격. 그래서 누구도 웃는 찬열을 만만하게 보지 않았다. 찬열은 웃는 만큼 무서운 사람이었다. 세상에 무서울 것 없는 종인도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천상천하 유아독존. 내가 너를 완벽히 이기지는 못해도, 같이 죽는 한이 있어도 너한테 지는 일은 없다. 를 모토로 삼고 살아가는 김종인은 박찬열이 무섭지는 않았다. 여태까지는 존경하는 제법 성격 괜찮은 선배였지만 도경수가 중간에 있는 지금 그딴 건 없다 이거야. 결국엔 강한 자가 얻게 되는 미인이라는 노래가사의 한구절이 떠올랐다.


 “너 언제부터 경수한테 그런 마음 품었어.”


 찬열은 이게 유치한 짓이라는 걸 알았다. 경수가 자신때문에 얼마나 힘들었을지도 알았다. 그래서 종인이 그 옆을 지켜 주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질투심이 불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렇게나 빨리 종인이 경수의 옆자리를 꿰찰 줄은 몰랐다. 오해를 풀기도 전에, 서로 마음을 정리하기도 전에 그렇게 빠르게 경수를 낚아 채 버린 종인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를 얼마나 아꼈는데, 얼마나 믿었는데. 호랑이 새끼를 키우고 있는 줄도 모르고 경수와 함께 종인을 만났던 지난 세월들이 떠오르자 화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뭔 상관이에요 그게. 지금은 내껀데.”
 “뭐 이새끼야?”
 “경수한테 그딴 짓을 해놓고 그 소리가 지금 입 밖으로 나와요?”
 “…니가 뭘 알아.”
 “변백현이랑 붙어 먹었잖아요, 선배. 그거 도경수가 뻔히 봤고.”


 씨발. 참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욕설이 나왔다.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는데 뻔뻔하고 당당한 종인의 태도에 자꾸만 그게 깨지려고 했다. 찬열은 종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이거 놔라, 씨발.”
 “씨발? 너 씨발. 내가 어떻게 너한테 했는데, 어. 내가 어떻게… 너 믿고….”
 “지랄 하네. 니가 도경수 잘 잡고 있었어야지. 그딴 짓 하면 안됐었지, 니가.”


 종인의 비웃음에 찬열은 결국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날렸다. 3학년 원톱 답게 주먹이 역시 매서웠다. 한대 맞았을 뿐인데 순식간에 입 안이 터진 것 같았다. 종인은 바닥에다 침을 퉤 뱉었다. 피가 섞여져 나왔다. 무슨 영화찍냐, 개새꺄. 찬열을 올려다 보는 종인의 눈이 매섭게 바뀌었다.


 “경수가 싸우지 말라 했는데 안되겠다.”


 싸우지 마. 싸우지 마, 형. 그건 경수가 찬열에게도 했던 말이었다. 항상 싸움을 해 상처를 달고 돌아가면, 저보다 더 아픈 표정으로 싸우지 마, 그렇게 애절하게 말했던 경수. 그런 도경수가.


 “만약 싸우게 되면 다치지 말라 했는데 다쳐 버렸네.”


 이어지는 말에 찬열은 머리가 띵해져 옴을 느꼈다. 벌써 놓쳐버린건가. 경수는 김종인에게 마음을 다 줘버린 걸까. 이제 더이상, 변명을 할 기회도, 진실을 말할 기회도 없는 걸까. 찬열이 타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눈치 챈 종인이 느릿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럼 뭐. 내가 다 이기라고 했으니까, 그 말이라도 지켜야지.”


 가볍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종인의 주먹이 순식간에 찬열의 얼굴에 꽂혔다. 찬열도 맞고 있지만은 않았지만 종인의 공격이 더 빨랐다. 한번 물꼬를 튼 공격은 쉴새 없이 찬열에게 쏟아졌다. 사실은 반격 할 힘도 없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찬열의 안에 있던 모든게 무너졌기 때문이다. 찬열은 종인의 공격을 최대한 막아 내면서 이를 물었다. 자꾸 경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경수야, 경수야…. 모든게 후회였다. 그 때 잘할걸. 정말로 있을 때 잘할걸.

 결국 공격을 하던 종인도, 막아 내던 찬열도 지쳐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찬열은 허망히 앉아 있었고 종인은 몸을 털고 일어났다. 더이상 공격 할 생각은 물론 없었다. 이정도면 이긴 것이라 생각했다. 초점 없이 어딘가를 응시하던 찬열은 종인을 따라 몸을 일으키더니, 힘 없이 한마디를 중얼거리고는 옥상을 나가버렸다.


 “경수 울리면 진짜 내 손에 죽어.”


 옥상에 덩그러니 남겨진 종인은, 고개를 저으며 어쩐지 자신에게 드는 패배감을 떨쳐 내려 애를 썼다.


-


 “너 누구랑 싸웠어?!!!”


 이럴 줄 알았어. 종인의 마음은 그렇게나 몰라주더니 이런 일에는 눈치 백단이다. 입술도 터지고 여러군데 상처를 달고 그래도 너무 보고싶어서, 괜히 너무 보고싶어서 힘든 몸 이끌고 경수의 반에 왔다가 등짝을 두들겨 맞으며 괜히 잔소리만 들었다. 종인은 찬열에게 맞은 것 보다 경수에게 맞은 등짝이 더 아파서 몸을 비틀며 으으, 신음을 낸다. 그래도 경수가 걱정해주니 상처가 저절로 아무는 느낌이 들었다.


 “누구랑 싸웠는데!!”


 빽 소리를 지르는게 제법 연인같은 느낌이 나서 종인의 입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아잉, 왜그래. 하고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며 경수의 허리에 매달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종인의 잘생긴 얼굴을 뒤덮은 자잘한 상처에 경수는 걱정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펼 줄 모르고, 그 옆에서 종대만이 애써 토가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버텨 내고 있었다.


 “걱정하는거야, 우리 경수?”


 느끼한 새끼. 상처를 달고 나타난 주제에 입은 잘 놀린다. 경수가 팽 토라져서는 종인의 팔을 풀고 돌아 앉는다. 잔뜩 뿔이 난 뒷모습마저 너무 귀여워서 종인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이기고 왔어.”
 “…….”
 “싸우지 말라는 말도 다치지 말라는 말도 못지켰는데 그래도 마지막 말은 지켰다. 어?”


 그러니까 칭찬해 줘. 하는 뒷 말을 삼키고 종인은 경수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씩 웃는다. 경수의 심장이 또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요새는 어쩐지 전세역전이 된 것 같아…. 입안이 바짝 말라옴을 느끼고 경수는 침을 꿀꺽 삼킨다. 알겠어. 붉어진 얼굴에 붉은 입술이 조물조물 움직인다. 종인은 경수의 말에 불안했던 마음이 싹 가시는 것을 느꼈다. 괜찮겠지, 괜찮을거야. 백현과 종인이 했던 말을 경수가 알게 될 리 없다. 거기다가 키스의 내막은 종인도 알지 못한다. 어쨌거나 난 꼬시라고만 했지, 넘어 간 건 찬열이 아니던가? 종인은 경수의 하트모양으로 벌어지는 입술을 보며 죄책감을 지워냈다. 괜찮아, 괜찮을거야. 경수도 내가 좋다고 했으니까, 이제 다 된거야.




마지막이 좀 애매하네용.. 이번편은 카디 얘기만 나온거같아요ㅋㅋㅋㅋ
다음편에는 찬백도 쪼금 나올 예정입니다! 갈길이 머네요ㅠ.ㅠ
언제나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감사해요♡ 특히 댓글 달아주신는 분들 덕에 힘내서 쓰고 있습니당!
오늘도 카디 찬백한 하루 되세요ㅎㅎㅎㅎㅎ
설정된 작가 이미지가 없어요
대표 사진
비회원28.136
ㅡ아 경수가 드디어 웃음을 되찾았는데 이번편 제목이 폭풍전야....! 곧 폭풍이 오겠군요ㅠㅠㅠㅠ 경수 아직까지도 찬열이 보면 잠깐 흔들리는 걸 보아하니 진실을 알게 되면 또 찬열이한테 엄청 미안해하고 갈팡질팡 흔들릴st....경수 맘 약해서 큰일이네ㅠㅠ
찬백 키스 사건의 전말 궁금해여ㅋㅋㅋ 짐작이 가는 상황이 있긴 있습니다만...ㅎㅎ 제 짐작이 맞는지 다음편에서는 확인할 수 있겠죠? 어오 변백현 진짜ㅠㅠㅠ 경수랑 찬열이랑 둘다 힘든거 보니까 백현이 진짜 미워가지고ㅠㅠㅠㅠ 근데 나중에는 결국 백현이도 울게 될 일이 있을 것 같은 촉이....ㅋㅋㅋㅋ
오늘도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당 사랑스러운 글 감사해요ㅠㅠㅠ

11년 전
대표 사진
독자1
백현이는뭘하길래찬열이가얼굴이반쪽이되도록...ㅠㅠㅠ
11년 전
대표 사진
비회원119.4
매일업뎃되서 진짜 좋아요 ㅋㅋㅋ 이제 경수도 마음을 열어서 넘넘 좋고 이대로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왠지 폭풍의 전야가 ㅠ 그래도 선택하는건 종인이겠죠?
10편 부탁드려요!!

11년 전
비회원도 댓글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확인 또는 엔터키 연타


이런 글은 어떠세요?

전체 HOT댓글없는글
[배우/주지훈] 시간 낭비 _ #016
12.03 00:21 l 워커홀릭
[김남준] 남친이 잠수 이별을 했다_단편
08.01 05:32 l 김민짱
[전정국] 형사로 나타난 그 녀석_단편 2
06.12 03:22 l 김민짱
[김석진] 전역한 오빠가 옥탑방으로 돌아왔다_단편 4
05.28 00:53 l 김민짱
[방탄소년단] 경성블루스 十一3
01.14 01:10 l 도비
[김선호] 13살이면 뭐 괜찮지 않나? 001
01.09 16:25 l 콩딱
[방탄소년단] 경성블루스 十2
12.29 20:51 l 도비
[방탄소년단] 경성블루스 九1
12.16 22:46 l 도비
[방탄소년단] 경성블루스 八2
12.10 22:30 l 도비
[방탄소년단] 경성블루스 七2
12.05 01:41 l 도비
[방탄소년단] 경성블루스 六4
11.25 01:33 l 도비
[방탄소년단] 경성블루스 五2
11.07 12:07 l 도비
[방탄소년단] 경성블루스 四
11.04 14:50 l 도비
[방탄소년단] 경성블루스 三
11.03 00:21 l 도비
[방탄소년단] 경성블루스 二
11.01 11:00 l 도비
[방탄소년단] 경성블루스 一
10.31 11:18 l 도비
[김재욱] 아저씨! 나 좀 봐요! -024
10.16 16:52 l 유쏘
[주지훈] 아저씨 나 좋아해요? 174
08.01 06:37 l 콩딱
[이동욱] 남은 인생 5년 022
07.30 03:38 l 콩딱
[이동욱] 남은 인생 5년 018
07.26 01:57 l 콩딱
[샤이니] 내 최애가 결혼 상대? 20
07.20 16:03 l 이바라기
[샤이니] 내 최애가 결혼 상대? 192
05.20 13:38 l 이바라기
[주지훈] 아저씨 나 좋아해요? 번외편8
04.30 18:59 l 콩딱
/
11.04 17:54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11.04 17:53
[몬스타엑스/기현] 내 남자친구는 아이돌 #713
03.21 03:16 l 꽁딱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7
03.10 05:15 l 콩딱


12345678910다음
전체 인기글
일상
연예
드영배
2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