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닮은 너에게
Various Artists - 나 심심하다 진짜...
07. 그의 이야기 O
욕심이 났다.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그와 동시에 겁이 났다. 9년 만에 나를 찾아온 사랑이, 다시금 상처가 되어 나를 떠나게 될까 봐. 그래서 나도 모르게 사랑에 집착하게 된 것 같다. 네가 나의 사랑을 이다지도 부담스러워하는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까지 밀어붙이지는 않았을 텐데. 사실 완전히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네 앞에만 서면 자꾸만 커져만 가는 마음을 조절할 방법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 문제였을 뿐. 누군가를 너무나도 많이 좋아하면 자신의 마음 하나 조절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사랑이 이렇게나 힘든 일이었다는 것을 서른하나가 된 지금에야 깨닫는다.
나는 항상 사랑을 주는 쪽보다는 받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 탓에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 자체를 어색해하던 사람이었고. 사랑이라는 녀석은 참 웃기다. 그깟 사랑이 뭐라고, 사람을 하늘에 닿을 듯 붕 띄워도 놓았다가, 또 순식간에 지하로 푹 꺼지게도 만든다. 감정 기복이 거의 없는 편이라 생각했던 나의 하루에 수십 번씩 울고 웃을 일이 생기면 그 이유는 언제나 사랑이다. 자꾸만 나답지 못한 행동들이 튀어나오는 게 싫어서 제발 좀 그만하고 싶은데, 그것마저 마음대로 되지를 않는다. 짝사랑이라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애초에 시작을 하지 말걸, 하고 후회해 보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걸 안다. 이미 사랑해 마땅한 사람을 알아 버렸고, 사랑에 빠져 버렸고, 헤어나오는 방법을 잊은 지 오래이기 때문에.
너는 나에게 사랑지상주의자가 아니냐고 물었었다. 질문을 들은 지는 꽤 된 것 같지만, 그때를 회상해 보면 나에게 붙은 여러 호칭 중 그다지 유쾌한 단어는 아니라 생각했던 것 같다. ‘지상주의자’라는 말이 뒤따르는 이상 무언가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사랑지상주의자라는 말이 꽤 괜찮은 것 같기도 한 게, 사랑은 그것이 가진 힘을 의심하기 어렵게 할 만큼의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사랑으로 인해 행복해질 수도, 혹은 불행해질 수도 있지만, 그 불행의 유일한 치료법 또한 사랑이지 않은가. 이걸 최근에서야 깨달은 것도 어쩌면 너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송이를 알게 되고, 그녀를 사랑하면서는 참 행복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을 하고, 또 그만한 사랑을 받으면서 스스로를 가치 있는 사람이라 여기게 되었고, 별 볼 일 없던 일상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꿈에서 깨어나기라도 하듯, 송이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온갖 슬픔과 비애만이 들어선 내 삶이 그 무엇보다 싫었던 시기를 겪어야 했다. 스스로를 자책하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내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사랑을 외면하는 등. 하지만 사랑은 내가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불행만을 선사했을 뿐, 사랑했던 송이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어느 정도 잊을 수 있도록 다시금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비로소 그걸 깨닫기까지 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그 시간을 결코 낭비했다 생각하지 않는다. 10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며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았기 때문에.
여전히 너를 바라볼 때면 송이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이곳에 혼자 남은 내가 송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미안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턴가 송이가 원하는 것이 내가 한평생을 슬픔에 빠져 삶을 낭비하는 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새로운 사랑에 죄책감을 갖지 않으려는 자기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내가 송이가 아닌 다른 여자를 뻔뻔하게 사랑하기 위한 혼자만의 핑계일지도 모를 일이고. 하지만 한동안 사랑의 능력에 의심을 품고 있던 내가 이 정도까지 발전하게 된 이상 사랑이 주는 희망을 거절하는 건 사랑에 대한 예의도, 송이에 대한 예의도 아닐 것 같다는 확신이 생겼다. 요즘은 그런 생각까지 든다. 어쩌면 이연주라는 여자 또한 송이가 내려준 선물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사랑이 마지막에 남긴 희망이 사람의 형태로 내 일상에 자리하게 된 게 아닐까 하는, 뭐 그런 유치하고도 어이없는 생각 말이다.
송이를 잃은 지도 어느덧 10년이 다 되어간다. 10년이면 나도 꽤 오래 아프지 않았나. 사랑을 미워하게 된 지도 꽤 오래되지 않았나. 이기적이라는 것도 알고, 욕심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 정도 아팠으면 이제는 다시 사랑이 주는 밝은 감정들을 느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행복과 불행을 거쳐 마지막에는 희망만을 남기는 것이 사랑이라면, 내가 사랑하는 너에게 사랑지상주의자라 불리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여 마땅하지 않을까.
내 삶은 나름 순조로웠다. 그랬던 내 인생에 너라는 변수가 끼어들었다. 언제나 내 글의 주인은 나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로 인해 내 삶의 중심이 통째로 흔들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제까지의 내 삶은 다소 이기적이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항상 나를 먼저 생각하고, 걱정하고, 신경 쓰기 일쑤였으니까. 어쩌면 송이와 함께하면서도 스스로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사랑 앞에 조금 더 용감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 어떠한 감정인지도 모르면서 지레 겁을 먹은 나는 조금 더 솔직하지 못했고, 조금 더 다가가지 못했고, 조금 더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큰 미안함과 아쉬움이 남았는지도 모른다. 송이를 그런 사고 따위로 잃은 뒤, 내가 그녀에게 얼마나 비겁하고 겁 많은 연인이었는지를 곱씹으며 전하지 못한 마음들에 짓눌린 삶을 살아왔으니까. 송이에게 직접적인 상처를 받은 건 아니었지만 사랑 그 자체가 가지는 무게를 뼈저리게 느껴버린 이상, 이번만큼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사랑이 가지고 있는 힘 또한 믿지 않는다고 했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과 오기에서 비롯된 고집이었다. 나와 의견이 다른 너를 기필코 설득하고 말겠다는. 하지만 이젠 아니다. 너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몸소 알게 해주고 싶다는 욕심은 나의 자존과는 별개의 문제가 되었다. 너를 사랑하게 된 이후로, 네가 사랑을 믿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오롯이 너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사랑이 가진 아름다움을, 경이로움을, 간간이 보이는 슬픔과 비애를, 그리고 마지막에서야 빛을 발하는 희망을. 이 모든 것을 네가 고스란히 경험해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나의 삶의 중심은 이제 나 자신에서 너에게로 전이되고 있는 듯하다. 너에게 사랑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내가 상처를 받아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내 마음에 크고 작은 생채기가 난다 해도 너만 사랑의 위대함을 의심하지 않게 된다면 그걸로 된 거라는 생각뿐이다.
사실 두서없이 써 내려간 이 글의 핵심은, 나의 글의 주인이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삶의 중심이 흔들리고 있다고 했다. 언제나 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던 내 삶의 중심이 언젠가부터 너에게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고. 글도 마찬가지였다. 이젠 잔인한 범인이 등장하고 사건의 조력자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고 마는 잔인한 추리소설은 나의 손을 벗어난 지 오래이다. 사실 로맨스 소설에 대한 생각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난 언제나 사랑을 지지했고, 그것이 가진 힘을 동경해왔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내 머리와 손가락을 거쳐 글로 옮겨내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관념이, 나의 글 안에 갇혀버림으로써 고유의 의미를 잃게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마저도 쓸데없는 걱정이 되어버렸다. 나는 너에게 사랑을 알려주기로 마음먹었고, 내가 널 도울 거라는 말을 내뱉어버렸으니. 그래서 내 생애 첫 로맨스 소설을 완성해보려 한다. 온통 너의 이야기로, 너를 담아낼 수 있는 단어들로, 너를 가리키는 마음들로 한 권의 책을 채워보려 한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너에게, 이 세상에 사랑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얼마나 큰지를 나의 방식으로 표현해보려 한다. 언젠가 너에게 반했던 그 순간부터 조금씩 끄적이던 글이 어느덧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어가는 이 시점의 나는, 네가 곧 완성될 이 책을 활짝 열린 마음으로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 사실 검토를 하며 수정을 여러 번 거쳤어야 했는데 독자님들께서 그동안 너무 오래 기다리셨으니까... 조금이나마 빨리 오는 게 좋을 것 같아 성급하게 7화를 업로드합니다...ㅎ 안 그래도 이전까지의 내용이 흐릿하실 텐데 이번 화가 황 작가의 독백이라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우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ㅠㅅㅠ
++ 황 작가가 연주를 위한 로맨스 소설을 쓰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으니 그 책에 대한 부분도 곧 다뤄질 예정이에요! 너무 늦었지만 여전히 저와 사닮너를 잊지 않고 찾아 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언제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