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그렇게 나는 너와 나의 사이를 '고등학교 동창'으로 결론 지었다.오세훈이 이 회사 본부장이라는 것에 대해선 어차피 안 마주치면 그만일 테고, 나는 내 일만 열심히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어차피 오세훈은 예나 지금이나 늘 바쁠 테니까 날 상대할 시간도 없겠지.
라는 생각은, 나의 잘못된 계산이였다는 걸 금방 깨닳았다.
"그냥 단순한 동창은 아니지 우리가."
케 세라, 세라 02
사무실 안은 깜깜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깥 불빛과 엘레베이터 앞에 켜진 불빛만 제외하곤. 녀석이 입은 옷도 깜깜했다. 더워 죽겠는데 셔츠에 슬랙스라니. 속도, 겉도 갑갑한 새끼. 뜬금 없이 치고 들어온 녀석의 말 때문에 팀장님도 적잖게 당황하신 것 같았다. 단순한 동창이 아니라니. 팀장님이 듣기엔 오해의 소지가 충분한 말이였다. 이걸 또 뭐라고 변명을 해? 완전 거짓말 한 꼴이잖아 시발. 괜히 녀석을 더 노려봤다.
"여긴 왜 왔어."
"우리가 단순히 동창인지 아닌지 얘기 좀 할까 해서."
"미친 놈."
건방진 새끼. 나와 팀장님의 대화를 자른 녀석 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저군다나 자꾸 '동창'이란 단어를 강조하며 얘기하는 오세훈 탓에 팀장님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팀장님은 연신 나와 오세훈의 눈치만 살폈다. 녀석은 그 모습을 보고 살짝 웃더니 하는 말이,
"박팀장은 시간 늦었는데 퇴근 안 하시나?"
오세훈은 나와 팀장님을 번갈아 보더니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싸가지 없는 새끼. 저보다 나이도 많은 팀장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왜. 아무리 저보다 직급이 낮다지만 존댓말 정도는 써 줘야 예의 아닌가. 녀석은 눈치도 없냐는 눈초리로 팀장님을 계속 노려봤다. 팀장님은 나와 오세훈을 번갈아 보며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싶더니 '여주씨, 그럼 내일 봐요.' 라는 말을 남기고 퇴근을 하셨다. 팀장님 저 두고 가시면 어떡해요. 나 쟤랑 할 말 없는데 저도 좀 데리고 가주지. 퇴근하시는 팀장님의 뒷모습을 보다가 나도 얼른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할 말 없어 너랑. 아니, 사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
"넌 어디 가려고."
줄곧 사무실 문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얘기하던 녀석이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내 팔을 낚아챘다.
"할 말 없어."
"다음에 내 얼굴 계속 볼래, 아님 지금 얘기하고 끝낼래."
아무 말도 못하는 나를 힐끔 보고는 다시 내 자리에 가서 날 앉혔다. 그리고 녀석은 옆 책상에 걸터 앉아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한 손은 자꾸 제 눈썹을 만지작 거렸다.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는 듯 계속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정적이 계속되니 시계 초침 소리가 째깍째깍 잘도 들렸다. 봐, 너도 할 말 없잖아. 괜히 고집 부리고 지랄이야 왜. 한동안 말이 없었던 녀석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뭐하고 지냈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길게 생각하더니 고작 뱉은 말은 '뭐하고 지냈어'란다.
고작 그런 질문하려고 날 잡아뒀어? 니 아들래미랑 잘 먹고 잘 살았다 왜.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녀석은 날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더니 표정을 더 굳혔다. 내가 노려보는 듯한 눈빛이였다면 녀석은 날 깔보는 눈빛이였다.
슬슬 녀석도 화가 나기 시작하는 듯했다.
"그렇게 까칠하게 말할 필요 없지 않나. 동창생?"
녀석은 동창생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
씨발새끼야, 언젠 단순한 동창 아니라며.
"......"
"니 말대로 우리 그냥 동창일 뿐이잖아. 동창끼리 안부도 못 물어봐?"
팀장님 있을 때 이렇게 말했으면 얼마나 좋아. 내 기분 상하게 만드는 재주라도 지니셨나 보다. 지금 우린 난 동창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였다. 그치만 녀석에게 듣는 '동창생'이라는 말이 낯설고 짜증났다. 먼저 동창이라며 선을 그으려던 건 난데, 녀석도 그걸 인정해 버리는 것 같아서 자꾸 심술이 났다. 아까 내가 팀장님에게 그냥 동창이라 했을 때, 녀석도 이런 기분이였을까. 녀석은 팔짱을 끼고 건방진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 봤다. 내 답을 기다리는 듯 내 눈을 계속 주시했다. 시계 바늘이 내 답을 재촉이라도 하듯 째깍째깍 움직였다.
너가 날 단지 동창으로 생각해서 물어보는 거라면 나도 똑같이 상대해줄게.
동창생아. 나는 말이야,
"너 없이도 존나 잘 지냈어."
우린 그냥 동창생일 뿐인데 너 없이 잘 못지낼 이유가 뭐 있겠어. 급히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녀석은 날 잡지 않았다. 내가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는데도 녀석은 아직 책상에 걸터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재수 없는 새끼. 존나 멋있는 척은 혼자 다 해.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5년 간 세훈의 근황을 생각할 시간이 없었을 뿐더러 별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이 안 났다면 물론 거짓말이겠지만,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거니 하며 그냥 넘겨 버렸다.
5년 전에 내가 겁이 나서 이별 통보를 했다. 그리곤 녀석의 허락도 없이 덜컥 애를 낳아버렸다. 헤어지자고 한 것도, 허락 없이 윤이를 낳은 것도 내가 잘못한 일임을 잘 알고 있다. 그에 비해 오세훈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 나의 힘들었던 5년에 비해 너무나도 잘 살고 있는, 5년 동안 잘 살았을 오세훈을 보니 괜히 짜증이 났나 보다. 너는 좋은 집안에서 잘 먹고 잘 배우고 지금 나이에 본부장이라는 직책도 얻고. 팔자 좋네 오세훈. 나는 너 없는 동안 되게 힘들게 살았어. 임신했을 때, 태어나자 마자 아빠가 없을 윤이가 불쌍해서 하루종일 펑펑 울다가 실신한 적도 있어. 윤이가 커 갈 수록 너를 닮아가는 것 같아. 보는 게 힘들어.
아니다, 네 잘못도 있는 것 같아.
넌 그 때 왜 날 안 잡아줬어?
왜 나한테 이유를 묻지 않았어?
"보고 싶었어."
띵. 엘레베이터를 타려고 걸음을 옮기는데 녀석이 뒤에서 안아왔다. 그리곤 고개를 떨궈 내 목에 녀석의 얼굴을 묻었다. 갑자기 스킨쉽을 해 온 탓인지, 조용한 주면 환경 때문인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또, 왠지 지난 날들을 위로해 주는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릿 속이 하얘졌다. 내가 지금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계속 찾았어."
"......"
"처음에는 그냥 내뱉은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
"그래서 시간 좀 지나면 연락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
"근데, 여전히 니가 어디에도 없었어"
오랜만에 듣는 네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 하마터면 울컥할 뻔했다. 말하는 동안 녀석에게선 남자 냄새가 났다. 너도 나도 5년 동안 많이 변했겠지.
"아는 게 하나도 없더라."
"......"
"니 집도, 니 친한 친구도."
당연히 없겠지. 아는 것이라곤 핸드폰에 저장된 내 예전 번호밖에 없을 게 분명했다. 아, 학교 이름 정도까진 알겠지. 이별 통보를 한 그 후로 돌연 잠적을 탔다. 번호도 바꾸고 친한 친구 몇 명만 놔두고 지인들과 연락도 다 끊어버렸다. 활발했던 내가 돌연 잠적을 타고 SNS도 다 탈퇴하니 주변 사람들에게선 내가 죽은 게 아니냐는 소문도 돈다고 했다. 집도 분만하기 몇 달 전에 이사를 했다. 넉넉한 형편이 아닌데다가 입이 하나 더 늘면 그만큼 돈도 더 들어갈 테니 낳기 전에 냉큼 이사해 버리자는 엄마의 판단이였다. 녀석은 당연히 아무것도 몰랐겠지.
녀석은 나를 안고 있던 팔을 풀더니 나를 돌아세웠다. 내 어깨를 잡고 눈을 맞춰오며 말했다.
"헤어지자고 한 건 넌데, 변명은 왜 내가 해?"
"......"
"니가 그렇게 삐딱선 타는 이유가 뭔데?"
역시나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질문이였다. 저런 맥락이면, '이미 헤어졌는데 그게 왜 궁금해.' 라고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더 이상 틱틱 쏴대는 말을 하긴 싫었다. 네 눈을 보고 있자니 그 동안 나 많이 힘들었다며 다 말해 버릴 것 같아서 고개를 떨궜다. 녀석은 '대답 좀 하지?'라며 대답을 재촉했다. 생각이 정리가 안 된다. 너에게 헤어지자고 한 것에 대해 뭐라 변명을 해야할까. 네 애를 뱄어. 근데 니가 지우라고 할까봐, 버림 받을까 겁이 났어. 그래서 너한테 헤어지자고 했어. 이렇게? 윤이는 벌써 5살이고 너는 이미 꽤 큰 회사의 본부장이다. 사실을 말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제라도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나도 보고 싶었어. 세훈아."
"......"
가진 게 많은 너는, 잃을 게 너무 많다.
"근데,"
"......"
"너 나랑 엮여봤자 좋을 거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 마주칠 일 없게 하자."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지금처럼 살아왔던 것처럼 살자 우리.
***
그리고 두 달이 지났다. 녀석은 그 후로 나에게 찾아 오지 않았고 나도 녀석을 찾지 않았다.
가끔, 아주 가끔 로비에서 마주치는 것 빼고는 얼굴 맞댈 일이 없었다. 그렇게 또 잊혀지려고 했다.
일도 거의 다 배웠고, 막내 노릇도 톡톡히 해냈다. 팀원들과도 많이 친해졌다. 그 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물어볼 법도 한데 박팀장님은 그 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내가 또 불편해 할까봐 일부러 말을 아끼는 듯했다. 박팀장님은 뭐든 나서서 날 도우려 했고, 백팀장님은 나보단 윤이에게 더 관심이 있는 듯 보였다. 1팀, 2팀 나뉘어져 있어도 같은 디자인 팀이다 보니까 마주칠 일이 많았다. 그 때마다 항상 '윤이 사진 좀 보여줘요.', '윤이 생일은 언제에요?' 라며 질문 공세를 펼쳤다. 자기도 얼른 애기 낳고 싶어서 그런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팀원들에게 윤이의 존재에 대해 숨길 생각은 없었는데 다들 모르는 눈치였다. 혹시 윤이가 가십거리가 될까 조심스러운 것도 있었다. 박팀장님도 그걸 아시는지 일할 때는 윤이 얘기에 대해 일체 꺼내질 않았다. 팀원들이 원래 알고 있었다면 모를까, 굳이 '저 아들 있어요!'라며 나서긴 좀 웃기지 않나. 그렇게 팀원들은 앞으로도 윤이의 존재에 대해 모를 것 같았다.
물론 오늘 회식 때 밝혀질 거라곤 예상도 못했지만 말이다.
"여주씨, 막내는 회식 빠지면 안 되는 거 알죠?"
"네, 당연하죠."
오늘 회식이라 그런지 아침부터 다들 들떠 있었다. 그 동안에도 몇 번 일 끝나고 삼삼오오 모여 밥을 먹은 적은 있는데 이렇게 회식이란 타이틀을 달고 사원들이랑 밥을 먹는 건 또 처음이였다. 회사가 좀 크다 보니 전체 회식은 일년에 한 번 할까 말까고 팀끼리 자주 회식을 한다고 했다. 이번엔 디자인팀과 마케팅팀의 회식 날짜가 겹쳐 아예 같이 먹는다고 했다. 꽤 큰 회식이 될 것 같았다. 팀원 중 사교성 좋고 말 많은 종대씨가 '아싸, 마케팅 팀에 예쁜 분 많던데!' 라고 했다가 여팀원들의 눈초리를 받았다. 종대씨는 주변 눈치를 살피더니 '아 왜애 나도 여자친구 좀 만들자.' 라며 이리저리 떠돌며 또 찡찡대기 시작했다. 그러다 박팀장님에게 가서는 '팀장님 팀원들이 저 왕따시켜요!'라며 졸지에 팀원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참을 고자질하던 종대씨도 반응 없는 박팀장님이 재미가 없었는지 자리로 돌아가려는 듯 뒤돌아 섰다. 그러다 갑자기 번뜩 할 말이 생겼는지 '아, 맞다.' 라며 다시 뒤돌아 팀장님에게 물었다.
"팀장님 그 소문 사실이에요?"
종대씨의 어떤 고자질에도 대꾸를 하지 않고 자료들만 보던 박팀장님이 '어떤 소문이요?' 라며 고개를 들어 종대씨를 바라봤다.
종대씨의 소문 드립에 팀원들은 다들 귀를 쫑긋 세우는 듯 보였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였다.
"이번 회식 때 본부장님 오신다는 소문이요."
오, 시발 신이시여.
| 사담 (클릭) |
이렇게 진지하게 가려고 한 게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됐죠.. 매일매일 쓰고 싶은데 내일은 못 올 것 같아요ㅠㅠ 댓글 달아주시는 독자님들 덕분에 저도 쓰는 게 재밌어요! 진짜 인생 통 틀어서 글 써 보는 게 처음이라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거 쓰느냐고 독방 활동도 덜 하게 됩니다ㅠㅠㅠㅠㅠ ㅠㅠㅠㅠ재미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독방 달리러 가야겠네요 사랑함다! 그리고 암호닉 베베님 메리님 오구후나님 하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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