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닮은 너에게
08. 여전히 사랑을 망설이는 당신께
“선배, 나 다음 녹화 대본 아직 못 받아본 것 같은데, 언제쯤 나와요?”
“연주씨가 언제부터 대본까지 챙기기 시작했어? 한 이틀 걸리지. 왜?”
“아니, 그냥 제가 녹화 흐름이라도 대충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 특별한 내용은 없죠?”
“본격적인 사연 소개 전에 황 작가 신간 홍보 일정 잡혀있을걸? 책 새로 내셨잖아.”
“신간이요?”
그런 이야기 없었는데. 요즘 작가님과 꽤 자주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음에도 신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신간을 발간할 거라는 이야기는 물론, 새로운 책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마저도. 작가님의 신간에 대한 소식을 작가님 본인이 아닌 직장 상사에게 먼저 듣게 되었다는 사실에 이유 모를 서운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내가 이런 사소한 일에 서운함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살짝 상한 것도 같았다.
“이번엔 로맨스래. 황 작가 로맨스 소설은 또 처음인 것 같은데. 원래 추리소설만 쓰던 거 아니었어?”
“네? 아, 그렇죠. 황 작가님이 쓰셨다는 로맨스 소설은 못 읽어본 것 같아요, 저도.”
심지어 로맨스라. 작가님이 로맨스 소설을 발간하셨다는 말을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신간을 세상에 공개하는 건 황 작가님인데 왜 내가 다 떨고 난리인지. 그냥, 왜 그냥 그럴 때 있지 않은가. 정말 그냥, 그럴 이유도 없는데 정말 혹시나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기는 때. 그냥, 작가님이 나를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그냥 나를 놀리려는 말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냥…….
「황민현 작가 신간 <그대의 발아래> 출간!」
지하철역에서까지 작가님의 소식을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오늘 잡힌 작가님과의 저녁 약속자리에서 물어볼 심산이었다. 신간을 냈다더니 왜 나한테는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래도 나름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선배한테 듣고 얼마나 섭섭했는지 아느냐고. 내가 섭섭해할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그래 볼 생각이었다. 부담스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신경을 쓰지 않은 척했지만 나도 나름 작가님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넌지시 암시하기엔 그쪽이 적당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약속장소로 가는 길에 작가님의 신간 광고까지 마주한 이상 말로만 투덜대기엔 어딘가 아쉬운 구석이 있는 것 같아 결국 발걸음을 돌려 방송국 근처의 서점으로 향하고 말았다. 나는 작가님한테 관심 없다고,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끄떡 안 할 거라 말한 사람치고 과한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모순이었다. 있지도 않은 자존심을 지키고 싶으면서도 작가님에게 은근슬쩍 내 마음을 흘리고 싶은 이상한 심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으니까. 약속시간에 늦을까 헐레벌떡 뛰어가 작가님 신작의 위치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오늘 발간된 탓에 아직 서점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뿐이었다. 허탈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책을 사지 못했다는 것보다는 작가님께 신간이 발간된 날에 맞춰 직접 책을 사오는 정성을 보이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그나마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조금의 여유가 있는 것을 위안 삼아 가던 길을 마저 갈 수 있었다.
“어, 연주씨 왔네요? 여기 찾는데 어렵지는 않았어요?”
“제가 어디서 길치라는 소리는 안 듣고 살거든요. 많이 기다리셨어요? 빨리 온다고 왔는데.”
작가님을 만나면 묻고 싶은 것들이 한 스무 가지는 있었던 것 같은데 막상 그 얼굴을 보니 아무런 질문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에게 신간 소식을 귀띔하지 않은 이유보다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가 더 궁금했달까.
“나 오늘 신간 냈어요. 무려 로맨스 소설로.”
“들었어요. 저 몰래 되게 열심히 쓰셨나 봐요. 허구한 날 저녁 약속 잡으시길래 난 작가님이 새 글을 쓰고 계신지도 몰랐네.”
“나는 뭐 연주씨 만나는 시간 외엔 시간이 없는지 아나 봐요. 남은 시간에는 연주씨 생각만 하는 줄 알았던 건가?”
잊고 있었다. 이 사람이 작정하고 나를 골탕 먹이기로 한 이후로 얼마나 더 능글맞아졌는지를. 뭐, 솔직히 말하자면 나쁘지 않았다. 그 능청스러움이, 그토록 얄밉기만 했던 능청스러움 속에 묻어나는 설렘과 두려움이 이제는 보이는 것 같아서 오히려 좋았다. 내가 뭐라도 된 것만 같아서. 황민현이라는 사람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농담은 됐고요, 오늘 길에 책을 사서 오고 싶었는데 아직 회사 앞 서점에는 아직 안 들어온 것 같더라고요. 내가 제일 먼저 작가님 싸인 받고 싶었는데.”
“그럴 줄 알고 내가 챙겨왔죠. 내가 쓴 책이니까. 작가 특별 권한으로. 아마 연주씨가 나 다음으로 이 책을 먼저 받아 본 사람일걸요?”
작가님이 꺼내 보인 책의 표지에는 너무 진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연하지도 않은 은은한 하늘색 배경에 제목 <그대의 발아래>가 깔끔한 글씨체로 적혀있었다. 평소 하늘색을 좋아하는 내 마음에는 당연히 쏙 들었지만, 나 하나를 위한 책이 아닌 만큼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도 들지는 의문이었다. 편견이라면 편견이겠지만, 내가 건네받은 이 책의 표지는 뭔가 분홍빛 배경에 어울릴만한 아기자기한 삽화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표지 디자인도 작가님이 직접 하신 거예요?”
“디자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고, 전체적인 분위기나 색감만 제가 제안했어요.”
“그럼 배경 색은 작가님이 정하셨겠네요?”
“네. 혹시 별로예요? 다른 색으로 할 걸 그랬나?”
“아니요, 사실 제가 하늘색을 엄청 좋아하거든요. 저는 되게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푸른 계열의 표지는 로맨스 소설에서 거의 못 본 것 같아서요.”
“아. 그럼 됐어요. 다행이다.”
역시나 참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녹화할 때 보면 내가 아는 사람 중 손에 꼽을 정도로 똑똑한 사람 같은데, 이럴 때 보면 한없이 단순한 사람이다. 수십 수백만 명이 읽을지도 모르는 책인데 고작 나 한 명에게만 칭찬을 받은 게 뭐가 그리 다행이라는 건지.
케이시 - 굿모닝 inst.
“작가님,”
“네?”
“싸인해 주셔야죠.”
솔직히 인기가 뭐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기회가 없어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꾸준히 방송에까지 출연할 정도로 유명한 듯한 작가님을 눈앞에 두고도 싸인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지하철역에 광고가 걸릴 정도면 인정하기는 싫지만 나름 인기가 많은 작가임이 틀림없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럴 줄 알고 미리 펜까지 챙겨왔죠.”
“연예인 병 걸리셨네.”
“그래서 싫으면 받지 마시든가요.”
“왜 이러실까, 치사하게.”
“내 싸인 아무 때나 받을 수 있는 거 아닌데, 연주씨니까 흔쾌히 해주는 거예요.”
“전에 우리 선배가 부탁했을 때도 잘만 해줬으면서.”
작가님이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왜 자꾸 툴툴거리는 말만 튀어나오는지. 내 투정을 받아주는 작가님의 반응이 재미있어서일까. 작가님과 있을 때면 항상 궁금해하곤 했다. 작가님은 대체 어떤 사람인지.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나를 자꾸만 흔들리게 하는지. 하지만 이제는 내가 누군지를 궁금해하게 되었다. 나는 누구고, 어떤 생각으로 작가님을 대하고 있는 걸까. 나는 정말로 그를 좋아하지 않는 게 분명할까.
“내가 말했죠. 나한테는 그것도 연주씨 부탁이었다고.”
“알았어요. 영광스럽게 생각할게요. 오늘도 그때처럼 ‘행복하세요’라고 써주실 거예요?”
“싸인은 내가 하는데 연주씨 말이 너무 많네. 연주씨한테 진짜 해주고 싶은 말로 골라서 내가 알아서 잘 쓸 거니까, 걱정말고 기다려요.”
내가 싸인 중인 작가님께 계속해서 말을 걸자 시선을 책에 고정한 작가님이 좀 가만히 있으라는 듯 말했다. 부끄러웠다.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혼란스러워진 마음속을 감추기 위해 괜히 더 들뜬 척하는 내 모습이 멀쩡하게 보였을 리 없었으니까.
“다 됐다.”
“나 작가님 책들 다 읽었는데, 싸인 받아보는 건 처음이네. 뭐라고 썼어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건네받은 책에 적혀있는 다섯 글자. 사실 ‘행복하세요’나 ‘감사합니다’ 따위의 상투적인 멘트를 기대한 건 절대 아니었다. 전에 그렇게 핀잔을 줬으니 조금 다른 멘트가 적혀져 있을 거라는 것 정도는 예상할 수 있는 범위에 속했고. 그렇지만 막상 이 다섯 글자를 마주하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강요 아닌 제안? 대충 설명하자면 그랬다.
“멘트 마음에 안 들죠.”
“…….”
“내가 연주씨한테 하고 싶은 말 적을 거라고 했잖아요. 더 멋있는 말을 써줄 수도 있었는데, 정말 하고 싶은 말이 그거라.”
“아뇨.”
“네?”
“마음에 안 들지 않는다고요. 마음에 들어요, 이번 건.”
회오리치는 나의 감정을 정의하고 싶어 싸인이 적혀있는 속지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작가님의 이름 석 자 아래에 정갈하게 쓰여있는 다섯 글자.
사랑하세요
“음식 나올 동안 대충 훑어봐야겠다.”
“대충 훑을 책 아닌데, 이거.”
“알죠. 그래서 지금은 목차 정도만 구경하고 집 가서 제대로 읽어보려고요.”
“아, 목차만 보면 무슨 이야기일지 감 안 올 텐데.”
“책은 내가 읽는데 작가님 말이 너무 많네. 작가님 글 안 놓치고 한 자 한 자 꼭꼭 씹어 읽을 테니까 걱정말고 할 일 해요.”
“내 말은 또 언제 외웠대?”
“나 원래 기억력 좋거든요. 책 좀 보게 잠깐만 좀…… 첫 장부터 뭐가 있네요?”
“대충 볼 책 아니라니까.”
[사랑을 믿지 않는 당신께]
딱 봐도 나를 겨냥한 말이었다. 유명 작가의 책의 첫머리에 나를 위한 문구가 쓰여있다는 착각을 하고 싶지 않아 다르게 생각해보려 노력해도 너무 명백한 일이었다. 전에 그러지 않았던가. 사랑지상주의자인 자신에게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고.
“……이거 나한테 하는 말이에요?”
“아닌데, 찔렸나 보네?”
“아니면 말고요.”
작가가 아니라면 아닌 거지 뭐.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확실했지만, 작가님이 아니라고 하시니 뭐. 그냥 아닌 셈 치기로 했다. 나를 저격한 말이라 해도 이 책이 나를 위한 책은 아닐 테니까.
“저한테 하시는 말씀은 아니라 했지만, 제가 사랑을 믿지 않는 건 맞으니 참고해서 읽을게요. 추리소설 잘 쓰시는 건 잘 알겠는데, 로맨스는 또 어떨지 기대해보겠습니다.”
“이번에도 뻔하다고 한 소리 들을 것 같긴 한데, 읽어주시는 것만으로 만족할게요. 어, 음식 나왔다. 책은 천천히 읽고, 우선 밥부터 먹어요. 배고프다면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가방 위에 올려둔 책의 내용이 궁금해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식사를 마쳤던 것 같다. 계산이 끝나고 식당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 자꾸만 책 쪽으로 시선이 가려는 걸 참아내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 버스를 타면 집 앞에서 내릴 수 있다는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워줄 테니 어서 타라는 작가님의 제안에 어쩔 수 없이 차에 올라탔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이.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연주씨 그렇게 말해놓고 정말 하나만 물어본 적 없으니까 그냥 편하게 물어봐요. 허락 맡지 말고.”
“꼭 그렇게 말 잘하는 티를 내야 직성이 풀리죠? 사람 무안하게.”
“……무안하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랬다면 미안해요.”
딱히 사과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안절부절못하며 사과하는 작가님의 모습에 오히려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는 걸 작가님은 알까. 어쩜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질문만 쌓여가는지 모르겠다. 모르겠는 것 투성이인 사람이다, 작가님은.
“제목 말이에요. ‘그대의 발아래’, 이거 무슨 뜻이에요?”
“책 끝까지 다 읽었어요?”
“당연히 아니죠. 아까 첫 페이지만 같이 들춰보고 말았잖아요.”
“그런데 왜 벌써 물어요. 어떤 내용일지 알고.”
“그렇네요. 그냥 궁금한 마음이 앞서서. 신경 쓰지 말고 운전해요, 운전.”
“연주씨가 옆에 있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나 내려요.”
“미안해요. 최대한 안 쓰려고 노력해 볼게요.”
어느덧 서울의 날씨도 선선한 가을을 지나 서늘한 겨울을 향하고 있었다. 유난히 쌀쌀한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집으로 향하는 작가님의 차 안은 온통 따뜻하고 포근하기만 한 공기로 가득한 것 같았다.
“이번 신호에서,”
“알아요. 이번 신호에서 내려드려야 하는 거. 한두 번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뭘.”
“아…… 그렇죠.”
“다 왔네요. 잘 들어가고 다음 녹화 때 봬요. 책 재미있게 읽으시고.”
“싸인 고마워요. 책도. 작가님도 안녕히 들어가세요.”
조수석 문이 닫힌 뒤로도 작가님의 차에 꺼졌던 시동이 다시 켜지기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린 건 아마 내가 내린 곳에서 한참을 걸어 모퉁이를 돌았을 때쯤? 내가 집 앞까지 무사히 들어가기를 기다린 게 아니었다 해도 좋았다. 그냥 내가 사는 동네에 그가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는 사실만으로 바보처럼 기분이 좋았다. 집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단연 작가님의 신간을 천천히 읽어보는 것이었다. 가방에서 책을 꺼낸 뒤 코트도 제대로 벗지 않은 채 넘겨진 첫 페이지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과연 작가님은 자신의 독자들에게,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될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 소설을 발간하셨을지를 알아내고 싶었다.
책장을 천천히 넘기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평범한 소설이네, 하고. 말 그대로 로맨스 소설이었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고, 그들이 서로 사랑을 하며 일어나는 일들을 그린, 그런 뻔하고 단조로운 로맨스 소설. 다른 로맨스 소설과 비교했을 때도 특별하다 싶은 부분을 발견하기 어려울 만큼 평범한 소설책이었다. 다만 조금 눈길이 가는 설정이 있다면, 나와 같은 나이의 여자 주인공이 일식을 좋아하고,
― 일식 좋아하시나 봐요.
― 피디님이 좋아하신다길래.
커피라고는 카페라테밖에 안 마시고,
― 너무 오래 일만 하면 힘드니까, 나와서 커피 한 잔이라도 마시고 하라고요. 자요. 다른 피디님께 여쭤보니까 막내 피디님 카페라테 좋아하신다던데.
무엇보다도,
― ……이거 나한테 하는 말이에요?
― 아닌데, 찔렸나 보네?
― 아니면 말고요.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장난이든 뭐든 간에 작가님께 좋아한다는 말을 직접 들어버린 뒤였으니, 그가 신경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나는 작가님을 좋아하지 않는다 선언하긴 했지만, 나도 모르게 말을 뱉기 전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작가님의 말 한마디에도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이런 나 자신이 참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에는 황 작가님이 이긴 건가. 언젠가 나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직접 보고 느끼게 해주겠다고 호언장담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아픈 과거를 꺼내는 것으로 시작해 틈날 때마다 약속을 잡아 식사를 함께하는 것은 물론, 예고 없이 불쑥 찾아와 커피를 건네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내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착각하게끔 만드는 어설픈 로맨스 소설을 집필하는 것까지. 다 아는데도 눈감아주고 싶은 힌트들이었다. 모른 척 눈을 감아준다기보다도, 정말로 모르는 척을 하며 눈을 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작가님이 곳곳에 놓아둔 힌트들을 모조리 찾아낸 뒤에 알아내 버린 답이 또 한 번 나를 위태롭게 흔들어놓을 것만 같아서, 어쩌면 끝까지 그를 외면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책을 읽어간 지도 벌써 두 시간. 어느새 소설은 모두 끝이 나고, 마지막 장에는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작가님의 짧은 몇 마디만이 남아있었다.
[여전히 사랑을 망설이는 당신께]
사랑은 그대의 발아래 숨어있습니다.
숨을 한 번 크게 내쉰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겨보세요.
그대는 사랑할 자격이 충분한 사람입니다.
그대의 걸음이 닿는 곳마다 사랑이 피어오르기를 바라며.
2018. xx. xx
작가 황민현
마지막 페이지를 한참 들여다보다 탁, 소리와 함께 책을 덮고는 한참을 생각했다. 나는 분명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진정한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고. 그러던 나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직접 보여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을 통해 정말로 사랑의 민낯을 만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세상에 사랑이라는 건 없다고 우기던 나의 고집을 한풀 꺾어도 될 때가 온 것이 아닐까. 그대의 발아래. 사랑은 그대의 발아래. 사랑은 나의 발아래. 어쩌면 나에게서 영영 자취를 감춘 줄로만 알았던 사랑이라는 숨어있던 곳은 내 발아래였을지도 모르겠다.
나 다시 상처 받아도 좋으니
그대에게 물들겠다
- 손씨, 어른은 겁이 많다
+ ( ͡° ͜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