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2019
― 2002년 7월 XX일~
: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주어없음^^)
내가 태어난 날이다. 그날은 비가 엄청 많이 오는 날이었는데, 엄마는 24시간이 넘게 진통을 하도록 내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죽을 뻔했다고 했다. 하도 머리가 커서 고생이었다고. 또 온종일 어찌나 울어대는지 엄마랑 아빠가 새벽 내내 보채는 나를 재우려고 교대로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식탐은 또 어찌나 대단한지, 분유 값이 다른 애들 기저귀, 분유 값을 합친 것보다도 더 나왔다고.
아, 또 빼먹을 수 없는 사람이 있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나자마자 오빠라는 존재가 이미 숨 쉬고 있었다. 믿을 수 없고 믿기 싫지만 어렸을 때는 걔도 나를 이뻐했단다. 그래봐야 기껏 한 살 차이라 누가 누굴 귀여워하는 게 웃겼다고는 했지만 아무튼 꼴에 여동생이라고 꽤나 챙겼단다. 근데 그럼 뭐 해. 6살? 7살? 내가 기억이라는 걸 할 수 있는 나이 즈음에는 김석진은 나를 존나 갈구지 못해 안달 난 오빠 새끼였을 뿐인데.
'야, 여주야. 이거는 네가 먹으면 안되는 거야.'
'웅? 왜애?'
'여기 이거 보이지? 이게 과일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폭탄이거든. 아직 어린 네가 먹기엔 위험한 거야.'
'…오빠눈?'
'오빠는 이제 학교 다니니까 먹을 수 있지. 그러니까 오빠한테 양보해야겠지?'
케이크 위에 올려진 딸기를 보고 그딴 말을 지껄인 게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근데 나란 년은 그걸 또 수긍하고 김석진한테 금쪽같은 딸기 조각을 넘겼다는 게 너무… 아무리 어렸다지만 아마 난 그때부터 무식했던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한테 가서 오늘 있었던 일을 줄줄이 얘기해주니 엄마는 망설임 없이 김석진의 등짝을 한 대 후려갈겼다. 오빠라는 애가 동생 꺼 뺏어 먹기나 하고! 고작 초1 주제에 이제 책가방 좀 메기 시작한 나이라고 엄청 으스대던 김석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나를 탓했다. 쟤가 무식한 걸 왜 내 탓을 해? 그제서야 상황 파악이 된 나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인간 말종 새끼. 이제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는 놈은 예나 지금이나 다른 의미로 참 한결같다. 아니, 갈수록 더 철이 없어지는 중이라 골치 아프다.
― 2008년 3월 XX일~
: 우린 언제쯤… 떨어질 수 있을까?
엄마에게 원망스러운 점 한 가지를 고르자면 그건 바로 김태형이다. 얘랑 엮인 순간부터 내 인생은 평화라는 걸 잃게 되었으며, 엄마들끼리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앞으로도 쭉 김태형을 떼어낼 수 없는 팔자다. 엄마들끼리는 전부터 알고 지냈지만 우리가 처음 직접 만나게 된 건 7살, 유치원 입학식 때다. 엄마 품에 안겨있던 김태형은 걔네 엄마가 억지로 녀석의 손에 내 손을 잡게 하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참나, 나도 싫었다 뭐. 나는 정말 기억이 안 나지만 내가 그때 당황하지도 않고 점퍼 주머니에 있던 막대사탕 하나를 건네며 김태형을 달랬다고 한다. 울지 마, 뚝. 그쳐야지? 시발 이제 생각해보니 존나 수치플이다. 지가 엄마도 아니고 같은 햇병아리 주제에… 근데 또 김태형은 사탕 하나에 홀라당 넘어가서 금방 헤실댔다는 게 존나 코미디지만.
얘는 또 쓸데없이 잘나게 태어나서 유치원 때부터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다. 짝꿍을 정해야 하는 때가 오면 항상 머리를 이쁘게 땋거나 묶은 여자애들이 김태형 뒤로 줄을 섰다. 근데 이 새끼가 거기다 대고 뭐라 했냐면,
'으응- 안대 안대. 태태는 여주랑 짝꿍 해야 대. 엄마가 그러래써.'
시발 저 마마보이 새끼. 그 뒤로 난 자연스럽게 여자아이들의 표적이 되었다. 참 웃긴 게 유치원생들도 질투라는 걸 하더라. 하필 김태형이랑 아파트도 같은 라인에 살아서 온종일 집 앞 놀이터에서 흙투성이가 되도록 놀고 있으면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여자애들이 우르르 몰려오곤 했다. 우리 백설공주 놀이할 건데 태형이가 왕자 역할 해죠! 여학생 무리 중 센터에 서있던 단발머리 여자애가 막무가내로 김태형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면 김태형은 가기 싫다고 찡찡거리며 내 손을 붙들고 버텼다. 으응, 싫어어- 여주야! 나라고 뭐 별 수가 있었겠나…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리고 있으면 일제히 나에게로 날라오는 원망의 눈길에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물론 이 상황은 우리가 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김태형 존나… 인생에 도움 안 되는 새끼.
― 2011년 5월 XX일
: 스치면 인연, 스며들면 악연
아, 드디어 나오네. 전정국. 김태형보다 재수 없고 싸가지 밥 말아먹은 한마디로 그냥 멍멍이 새끼. 김태형은 그래도 잘 구슬리면 말 잘 듣는 강아지가 되기는 하는데 얘는 진짜 구제불능이다. 처음 알게 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진짜 나는 인복이 없나 봐. 랜덤으로 짝지 바꾸기를 하는데 전정국이 걸렸다. 진짜 존나 재수가 없었던 거지. 얘도 또 여자애들한테 인기는 많아서 나는 얼떨결에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솔직히 나도 그때는 좀 설레긴 했다. 어렸을 때부터 녀석의 외모는 또래 중에서도 꽤 뛰어났으니까. 초딩 주제에 잘 생긴 건 알아가지고 괜히 방긋방긋 웃으려고 애쓰고 그랬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저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공주 드레스에 머리핀을 죄다 빼다 박아 등교하는 나를 전정국은 꽤 하찮게 여겼던 것 같다. 일부러 생글거리며 치근덕댈 때는 대놓고 정색을 하며 친한 척하지 말라고 나를 쪽줬다. 시발롬. 더 충격이었던 건 그다음이다. 자기랑 내 책상 틈 사이에 문구점에서 파는 판때기 같은 걸 끼우더니 이제부터 넘어올 때마다 100원씩이란다. 아니 무슨 기철이세요? 지금 생각하면 존나 어이가 털려서 녀석의 대갈빡을 수십 번 후려쳤겠지만 어렸을 때는 내 성격이 워낙 소심하고 여렸던지라 대꾸도 못하고 고개만 세차게 끄덕였다.
'자, 5분 남았어요~'
아, 초딩때는 저래서 힘들었던 것 같다. 손재주도 드럽게 없는 나한테 자꾸 뭘 만들래. 하필 그것도 짝지랑 협동해서 하는 거라 두 시간 동안 전정국 눈치만 엄청 봤었다. 스티로폼을 자르고 골판지로 모양을 만드는 녀석 옆에 멀뚱히 서있자 뭐 하냐면서 나에게 잔뜩 핀잔을 줬다. 결국 색종이 몇 장을 붙들고 오리는데 그때는 그거조차도 나한테는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5분 남았다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자 못 봐주겠는지 책상 사이 끼워진 판때기를 던져버리고선 내 손에 들린 걸 뺏어갔다. 이것도 못하냐? 이 쉬운걸? 저 개새… 그래 너 잘났다 이거야. 하지만 전정국 덕분에 만들기 점수는 만점 받았다는 건 비밀이다. 아, 이 새끼는 지금도 똑같이 싸가지가 바가지다. 알고 보니 초1 때부터 김태형이랑 축구공을 같이 차면서 뛰댕기던 절친이더라. 둘 다 내 인생에서 꺼져라 좀.
― 2015년 4월 XX일~
: 여주야, 몸을 이렇게 움직여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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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 중학교에 입학했다. 전정국이랑 김태형의 인연이 끊기지 않았다는 걸 제외하고는 아주 순탄한 절차였다. 교복도 입고 초딩 딱지를 떼니까 한참 들떠있을 시기가 학기 초반이었다. 제발 거기서 멈췄어야 하는 건데 도를 넘어 나댄 거지, 내가. 우리 여자 멤버 한 명 모자라거든. 여주 너 할 생각 없어? 같이 다니던 무리 중 한 명이 댄스 동아리였던 것이 화근이었다. 체육대회를 맞이해서 1학년 댄스부 애들끼리 남녀 커플댄스 공연을 할 건데 여자 멤버 한 명이 모자란다고 나보고 그 무대만 같이 해달라는 거다. 생전 춤이라는 걸 춰본 적도 없으니 몰랐던 거지. 비참한 춤 실력에 대해. 멋모르고 한다고 나섰다. 좀 재밌을 것 같았거든. 뭐, 재미는 있었지… 재미는 있었는데, 음. 눈칫밥을 꽤나 먹은 경험을 했다.
"스트레칭, 우리 스트레칭 한 번 더 할까?"
내 짝이 하필이면 춤에 대한 열정이 엄청난 애가 걸렸다. 성격은 쾌활하고 넉살 좋아 보이는데 음악이 나오는 순간 눈빛이 변한다. 쟤는 어떻게 관절이 저렇게 꺾이는 거지? 몸에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처음 봤을 때는 입도 못 다물고 넋이 나가 구경했다. 그런데 그런 애가 나 같은 년을 이끌고 무대를 준비해야 하니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막막했을까…. 나는 같은 동작을 수백 번을 알려줘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당황하는 정호석의 얼굴을 보면 진짜 미안한 마음이 격렬히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도 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을 때가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근데 또 애가 성격이 막 누구처럼 마음에 안 들면 화내고 남한테 지적질을 잘 못하는 성격인가 보다. 녀석은 내가 춤을 처음 춰보고 몸이 아직 덜 풀려서 그런 것이라고 애써 부정하며 한 시간 동안 스트레칭만 주구장창 반복했다. 야… 아무래도 나 안 될 것 같아. 그냥 다른 애 구해볼까? 도저히 못 해먹겠어서 먼저 말했더니 단번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할 수 있어.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오기로 눈이 활활 불타올랐다. 어찌어찌 무대를 마치고 우리 반 구역에 가서 앉아있는데 뒤에서 누가 내 어깨를 두어 번 건드렸다. 돌아보니 캔 음료를 내밀며 나한테 수고했단다. 나는 얘가 춤 때문에 예술고에 진학을 할 줄 알았는데 일반고로 진학했더라. 물어보니 부모님은 아직 펜을 놓을 때가 아니라며 대학 진학을 원하는 것 같다고, 여러모로 갈등이 꽤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나도 양심이 있는지라 존나 미안해서라도 그 체육대회 뒤로 춤은 거들떠도 안 본다.
― 2016년 4월 XX일~
: 착하고…착하고…응, 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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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대부분이 이때가 질풍노도의 시기라지? 크으, 질풍노도이긴 했지. 아마 제일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소문이 좀 안 좋게 돌았다. 진짜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꽤 잘 나가는 무리 중 한 명이랑 시비가 붙은 거라 해명할 기회도 없었지만 딱히 해명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진짜 뭘 한 게 있어야 해명이라도 하지. 하필 그 여자애가 있는 무리랑 같은 반이어서 하루아침에 따돌림 신세가 됐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김태형이랑 전정국은 하필 또 다른 반이라 딱히 의지할 곳도 없었다. 내가 먼저 걔네들 반에 찾아가서 고자질하기도 좀 그렇고 그냥 혼자 다녔다. 근데 문제는 2학년은 빼놓을 수 없는 수학여행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거다.
'나도 딱히 같이 다닐 애들 없는데. 나랑 놀아줄래?'
난 진짜 혼자서라도 놀이기구를 섭렵하고 다닐 생각이었다. 아니면 뭐 김태형 불러내서 놀던가. 근데 갑자기 우리 반 반장이 불쑥 나타나서 말을 거는 거다. 애들은 다 놀이기구 줄 서려고 뛰어가고 우리 둘만 매표소 앞에 덩그러니 남겨져있었다. 반장이니까 이러는 거겠지, 싶었다. 사명감에 사로잡혀 반 아이들을 챙기려는 마음. 솔직히 동정심 때문에 이러나, 싶어서 거부감도 들었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딱 잘라 거절했다. 아니, 나 같이 다닐 애 있거든? 자존심에 괜히 저랬다. 박지민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금세 또 해맑게 웃었다.
'누구랑? 그럼 나도 거기 껴줘!'
아, 씨... 친구도 많은 게 왜 나한테 와서 난리야. 내가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자 녀석이 말했다. 태형이는 아까 자기 반 친구들이랑 가던데? 눈을 동그랗게 뜨자 푸스스, 웃기만 한다. 김태형이랑 내가 친한 거 아냐고 묻자 '당연하지! 맨날 등교 같이 하잖아.'란다. 하긴… 우리 존나 절친이에요- 광고하고 다니긴 했지. 나랑 같이 놀자. 응?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며 박지민은 나랑 눈을 마주치려 애썼다. 뭐, 그러던가. 못 이기는 척 그러겠다고 하니 와아- 하면서 좋아했다. 딱 거기까진 좋았지. 얘는 놀이기구도 못 타면서 뭘 같이 놀재? 롤러코스터 한 번에 박지민은 울타리를 붙잡고 우웩, 우웩을 반복했다. 등을 두드려주니 힘들게 웃으며 미안하단다. 결국 그날 놀이기구 3개밖에 못 탔다. 박지민은 다음 날 몸살이 났고. 얘는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도 반장을 도맡아 한다. 좀 애가 밸이 없는 면이 있긴 해도 착하니까. 오구오구 우리 찌미니.
― 2017년 6월 XX일~
: 천재 + 돌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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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 위기가 찾아왔다. (이놈의 인생은 뭔 위기의 연속이다 시발) 곧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중학교 3학년 학생으로서 내신 관리가 철저히 필요한 때였다. 하지만 우리 반은 3학년 아홉 반 중 성적으로 가장 끝 등수를 차지했고, 당장 인문계 진학이 어려운 아이들도 많았다. 이에 담임 선생님은 특별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하신 건지 중간고사 성적표가 나오자마자 종례 시간에 공지를 했다. 기말시험에서 짝지끼리 평균 점수를 계산해서 가장 점수가 많이 떨어진 팀이 벌을 받는 거였다. 공부랑은 담쌓고 사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양심이 있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 받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 한 번 열심히 해보려 했지. 근데 진짜 나는 짝지운이 존나 없는 것 같다. 그때 마침 내 짝은 김남준이었는데, 전교 등수가 다섯 손가락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애다. 한마디로 얘는 더 올릴 평균 점수가 없는 거다. 고로 내가 다 올려야 한다는 말씀..^^ 더군다나 그때는 걔랑 별로 친하지도 않고 애가 전형적인 범생이 스타일이라 다가가기도 너무 힘들어서 더 부담이 되는 거다.
미칠 것 같다며 머리를 쥐어뜯는 나를 김태형이 측은하게 쳐다봤다. 이제 막 고등학교에 올라간 김석진에게 SOS를 요청해봐도 맨날 야자 째고 처먹으러 다니는 놈이 도움이 될 리가 없다. 어떻게 16년 동안 안 쓰던 머리를 갑자기 회전시키냐고! 김남준한테 직접 공부를 배워볼까 생각도 했다. 저, 저기…. 눈썹을 치켜세우며 문제풀이에 집중하는 녀석을 톡톡 건드렸더니 날 딱 쳐다보는데, 와… 포스에 눌려서 그냥 찌그러져 있었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전교 3등을 기록한 김남준은 오로지 나로 인해 일주일 벌청소에 당첨이 됐다. 담임은 교실 청소와 화장실 청소 중에 선택할 권리를 우리에게 주었다. 내가 충격받은 부분은 여기서 나온다.
"화장실 타일 가로 길이가 Acm, 세로 길이가 Bcm 정도로 어림잡으면 타일 하나의 면적은 XX야. 이게 대충 20개 정도 있다고 치면 20 곱하기 XX가 되겠지. 또 화장실은 넓이보다도 변기나 세면대 청소 시간을 무시할 수 없으니 여기에다가,"
진짜 얘는 뭐지. 할 말을 잃은 나의 답을 기다리길래 '아, 그래… 네가 하고 싶은 걸로 하자. 난 아무거나 괜찮아.' 하고 최대한 멀리 떨어져 섰다. 정말 잠깐이지만 김남준이 너무 무서워 보였다. 아직도 그냥 대화할 때에도 사자성어나 외국 용어가 툭툭 튀어나온다. 여러모로 나랑은 안 맞는 애다.
― 2018년 10월 XX일~
: You Are My Desti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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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이날 이후로 끝나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미래에 대해 온갖 잡생각들과 쓸데없는 망상들로 가득한 내 뇌를 깨끗이 정리해버린 사람이 나타나버린 거지. 드디어 내 운명의 짝을 만난 것이다. 재수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김석진이 재학 중인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위에 등장했던 찌끄래기들과 모두 함께...^^ 이놈의 인생은 평온할 날이 없다며 다사다난할 앞으로의 내 3년을 미리 애도했다. 한 학기가 지나고 막 시험기간이 다가올 때 즈음 학교가 난리가 났다. 급식 때문에 식중독 열풍이 불면서 학부모들의 항의 전화가 끊이질 않았다. 때문에 일주일은 도시락을 싸와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하, 그날 내가 도시락을 성실하게 잘 챙겨갔다면 민윤기를 만나지 못했을 거고 그랬다면 내 인생의 큰 의미를 찾지 못한 채로 방황했겠지. 담임 몰래 핸드폰을 만지다가 여러 육두문자와 함께 도시락 받으러 자기 반으로 올라오라는 김석진의 문자를 봤다. 찾아오는 서비스 같은 거 없냐니까 창문 밖으로 던져버린다길래 잠자코 4층으로 올라갔다.
'김석진? 화장실 간 것 같은데.'
살면서 심장이 그렇게 뛰어본 적이 없었다. 하얀 피부와 낮은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어버버 거리고 있는데 친구인지 웬 남자 선배 한 명이 '야, 민윤기! 밥 먹고 농구 코트!' 하면서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민윤기? 시발 이름도 민윤기래… 존나 인소틱하잖아? 도시락 받으러 왔다고? 하고 묻는데 예에, 예… 하고 존나 바보같이 말해버렸다. 자기가 꺼내줄지 물어보길래 격한 동의의 의미로 막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려는데 존나 도움 안 되는 김석진이 나타났다. 둘이 뭐 하냐? 방해꾼의 등장에 한껏 째려봐줬더니 뭐어- 하며 억울한 표정을 짓는다. 결국 김석진한테 도시락통을 받고 아쉬운 마음으로 내려가려는데 김석진이랑 윤기 오빠도 나를 따라 교실에서 나왔다. 난 진라면 매운맛이랑, 콜라랑, 빠삐코랑…. 보아하니 김석진이 얻어먹을 일이 있나 보다. 매점을 털어버릴 기세로 윤기 오빠 옆에서 조잘거리니 오빠는 작작 좀 처먹으라면서도 눈을 접으며 웃었다. 와 시발 웃는 건 진짜 미쳤다. 개설레 미친. 들고 있는 도시락통이 덜덜 떨릴까 봐 주체 못하는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키려 하며 걷는데 들려오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홀릴 것 같았다.
'석진이 동생? 너도 뭐 마실래?'
난 그날 민윤기가 사준 사이다를 애지중지하며 수업시간 내내 책상에 올려두고 관찰했다. 시발 전정국 새끼가 지 운동하고 와서 나 없을 때 홀라당 까먹어버렸지만. 어쨌든 내 인생은 민윤기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더 이상 내게 미래 계획 설계 따윈 필요하지 않다. 민윤기가 곧 내 미래일 테니 (물론 개인적인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