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이걸 다 먹어요? 싸그리싹싹?!”
“이봐. 방금 자다 깼는데 이게 무슨…!”
“자다 깨던 말던 상관 없고, 지금 내 사과는 다 죽었다니까요?!”
경수의 초등학생 같은 언변에 종인이 그만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경수에게 사태의 심각성이 100이라면, 종인에겐 단지 1이 될까 말까 했다. 경수가 적잖이 당황했다. 머릿속으로 그려본 그림은 이게 아닌데… 미안합니다. 하고 정중하게 사과를 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종인이 누구인가. 사과가 웃으면? 풋사과! 라는 혜수의 말을 곱씹으며 킥킥대고 있는 위인 아니신가. 그런 행동은 경수의 심지를 더욱 바짝 당기는 역할을 하고야 말았다.
“내 사과가!!!!!!!!!!!!! 죽었다고!!!!!!!!!!!!!!!!!”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네. 종인이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이만큼 빽 소리를 질렀건만 박찬열은 아직 주무시고 계시는지, 만약 내 행방을 찾는 중이라면 분명 이 곳으로 달려와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종인이 말이다. 몇 초간의 정적이 둘 사이에 흘렀다. 경수의 거친 숨소리는 그가 화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경수가 남방을 두어 번 펄럭였다. 슬슬 열이 받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언쟁은 둘 사이를 빠르게 스쳐갔다.
“그래서, 이거 어떻게 할 거에요?”
“…정말 미안한데, 난 산 속에서 고립되어 있었어. 이게 가짜인 것 같아? 아니라고! 이거 봐! 내가 워낙 비싼 남자라 이런 꼴로는 안 다니는데, 내 쇄골이랑 팔뚝이 형아, 부끄러워요~ 하고 있잖아. 엉?”
“난 당신 팔뚝이랑 쇄골에는 아~무 관심 없구, 빨리 정중하게 사과해요. 얼른!”
“죄송합니다.”
“으아… 이게 아니라!!”
“그럼 뭐, 어떻게 할까. 돈 줄게. 돈. 한 박스에 얼마야, 저거?”
“아니야, 아니야.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리고 말야, 당신, 서리를 하려면 눈에 안 들키게 잘 해야지. 걸려서 사람 맘만 상하고 이게 뭐에요! …하긴, 꼭꼭 숨었어도 내 맘은 상했을 거지만!”
경수가 열 번을 양보한다 해도, 종인의 뻔뻔한 낯짝부터 서리를 해놓고도 남의 과수원 오두막에서 하루를 훌쩍 보내는 건 그냥 넘어가고 싶은 맘이 없었다. 경수는 화난 표정 위에 심드렁함을 얹으며 종인을 노려보았다. 언젠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물질 만능주의. 물론 시골청년 도경수는 아버지에게 반문하고는 했지만. 그리고 지금, 종인이 기억하는 바가 맞다면, 현재 종인의 지갑에는 현금 삼 만원이 들어있었을 것이었다. 종인이 자신만만하게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나 앞뒷주머니를 통틀어 ‘지갑’이라는 물체를 비롯해서 그 어떤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종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전개는 종인에게 매우 불리했다.
“저, 저기, 있잖아.”
“뭐요. 줄 거면 빨리 주던가, 정중하게 사과를 하던가!”
“……내가 지금 돈이 없거든?”
경수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그렇다고 화난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종인이 고개를 푹 숙였다. 모양새가 꼭 지각한 학생이 학주에게 벌을 받고 있는 듯하다.
“………한 번만 봐 줘.”
*
종인이 해가 중천으로 향하는 11시, 과수원의 한가운데에 땡볕을 맞으며 서 있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사과 농사나 같이 지어요.’ 라는 경수의 말엔 얼마나 당황했던가. 왜? 하고 물었다. 상황은 뒤집어졌다. 조금 전엔 경수가 100을 쥐고 있었다면, 이번엔 종인이 100이었다. 황당함과 당황스러움의 수치는.
“누이 좋고, 매부 좋잖아요. 그리고, 고립됐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여기서 서울 가려면, 차 타고 적어도… 음… 다, 다섯 시간은 가야 해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서울에서 8인승 봉고를 타고 오는 길, 준면이 게임을 포기하며 재어본 바로는 정확히 여덟 시간이었다. 지도상의 거리로는 적어도 세 시간이었지만, 흔히들 말하는 산 넘고, 강까지 건너는 과정까지 합하면. 그래서 모두 뻗지 않았는가. 기차역이 어디인지 알았다면 진작에 타고 왔을 것이었다. 비행기는 더더욱. 종인은 그 끔찍한 행동을 다시는 하지 않기를 바랬다. 그래서 쿨하게 콜! 하고 승낙해버린 것은 약간의 과오인 것 같기도. 그러나 후회는 늦었다. 꿰멜 수도 없는 옷가지들은 버리고, 할머니 댁에서나 보았던 몸빼바지와 옥시크린으로 빤 듯이 하얀 반팔티를 입고 있었으니까.
“농사는 언제 끝나는데?”
“적어도 두 달은 걸릴걸요. 여름엔 쪄 죽으니까 저, 저기 강도 있어요.”
온순해진 경수는 ‘귀여웠다’. 남자가 이렇게 귀여울 수 있구나, 하고 종인은 생각했다. 귀여움은 다분히 여자만의 소유물인 줄로만 알았다. 하긴 그럴만도 했다. 찬열과 준면을 비롯한 주위의 동기들은 귀엽기 불가능한 마스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격은 두 말 할 것도 없고. 하지만 종인은 입 밖에 내지 않기로 했다. 아까의 악마 본성이 어디서 고개를 쳐들고 불쑥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두 달은 막막했다. 적어도 두 달이라는 말은 희망고문에 가까웠다. 풍년으로 서울로 돌아간다면야 좋겠지만, 흉년이 든다면… 제 탓이라는 책임감을 안고 경수의 응석을 받아가며 언제까지 과수원의 남자로만 있을 것인지. 덧붙여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안 사실은 차비를 비롯해 스마트폰도 어디론가 떨궜다는 것이었다. 그래, 김종인. 너 큰 일 났다. 자포자기였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자, 여기에 이 물뿌리개 같은 걸 대고 막 뿌려요.”
“…….”
“뿌린 다음엔 반질반질 닦아줘요.”
“…….”
“듣고 있죠? 이걸 사과 하나마다 하면 되요. 다섯 그루 정도만 하면 되니까 쉬, 쉬울 거에요.”
종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구가 담긴 수레를 가지러가는 경수의 손목을 낚아챘다. 경수가 화들짝 놀란 눈으로 종인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지만, 넓디 넓은 흰자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겠지, 하고 종인이 생각했다.
“너, 이름이 청명이냐.”
“청명은 우리 과수원 이름인데… 맑을 청, 그리고 뭐였지? 바, 밝을 명?”
“그래서 이름이 뭐야.”
“…도경수.”
종인이 그 말을 입 안에서 굴려보았다. 도경수. 도경수. 나쁘지 않은 어감이었다. 문득 멈추었을 땐, 경수가 아직도 앞에 버티어 서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빛을 담고서. 제 이름을 말하지 않았음을 깨달은 종인이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김종인이야. 근데 이거, 이렇게 하는 거 맞지?”
경수가 환하게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이 상황이 웃기기도 했을뿐더러 쩔쩔매는 종인의 꼴은 두 배로 웃겼기 때문이었다. 서울 남자가 외딴 시골에서, 그것도 몸빼바지를 입고 풋사과나 따는 모습이라니. 수레를 가지러 종인에게 등을 보였을 때, 경수는 큭큭대며 소리 없이 웃었다. 하나 더 믿지 못할 사실은, 투덜대던 종인이 이내 옅은 미소를 띄웠다는 것. 시계는 벌써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과수원의 침입자는 둘로 늘었다.
“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