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구두 한 번 신어볼랍니까?
w. 랑데부
19.
"ㅁㅁ동이라며, 또- 또 미친듯이 밟아서 왔고만. 니 그래가 카메라엔 안 찍히나"
"안 찍힌다. 누나는 어딨는데"
"저짝에 고히 모셔뒀다. 뭔 일이고 또"
"모른다 내도"
도운은 구석에 찌그러진 ㅇㅇ에게로 달려갔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을까. 도운은 챙겨왔던 목도리를 정갈하게 메주곤 손가락으로 살살 ㅇㅇ의 앞머리를 넘겼다. 추운데 옷은 또 왜 이렇게.. 처음보는 옷인데. 콧물을 훌쩍이는 ㅇㅇ에 도운은 파리해진 얼굴로 ㅇㅇ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대었다. 분명 오전까진 기색이 없었다. 약간 미열이 나고 있었다. 도운은 입고 있던 패딩으르 ㅇㅇ의 팔에 끼워 잠궈 주곤 ㅇㅇ를 업었다.
"행님아 이거 패딩 모자 좀 누나 씌어도"
"내 짐 계산 하는 거.. 알았다 알았다"
"내 이름으로 달아 놔라. 내 간다"
"오야"
주차장까지는 꽤 걸어야 했다. 도운은 계속 들이치는 찬바람에 미간을 찌푸렸다. 문을 연 병원도 없을 시간이었다. 극강의 추위에 열이 오를까 도운은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아 내려주...어"
"차까지만 참아요. 금방 갈게요"
"우욱, 속.. 속"
내려주자마자 ㅇㅇ는 속을 게워냈다. 아 어쩌지. 도운은 급하게 바람이 몰아치는 방향을 막고 앉아 ㅇㅇ의 속을 두드려 주었다. 속을 전부 게워낸 뒤 도운은 ㅇㅇ를 안아 들었다. 기자들이 따라 붙어 찍히건 말건 그건 도운의 우선 순위가 아니었으니.
"우선, 잘자요"
"고타. 고타 이리와"
"멍!"
도운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달려온 거대한 털뭉치는 도운의 말에 따라 ㅇㅇ의 옆에 앉았다. 보일러를 올려두긴 했지만 더욱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선 고타라도 필요했으니.
씁, 안돼. 누나 핥지마 경고했어.
낑낑대며 소심하게 손가락을 핥아대는 고타를 뒤로 하고 도운은 급하게 일층으로 내려가 찬물과 물수건을 가지고 다시 올라왔다. 데리러 갔을 때보다 이마가 뜨거워진 걸 느낀 도운은 제 얼굴을 쓸어 내렸다.
"고타, 누나 옆 잘 지키고 누워 있어. 알겠지?"
"멍!"
고타의 턱을 긁어준 뒤 도운은 잠시 패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받아라, 받아라. 새벽녘에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전화였지만 도운은 연결을 실패하자마자 다시끔 전화를 걸었다.
"받으라고 좀"
도운의 손에 들린 종이는 곧 너덜너덜해져갔다. 우리가 다시 만날 때 그리 좋은 감정은 아니겠네. 시팔.
20.
"네, 네 죄송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간신히 대본 리딩을 미룬 도운은 시동을 걸었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확실해졌다. 그 개새끼. 도운은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거칠게 닫고 내려 상대방이 나올 때까지 잠자코 서 기다렸다.
"이봐요. 아,"
"무슨 말 했어요?"
"내가 뭘 말했다는 말입니까"
"무슨 말 했냐고"
다짜고짜 나오라고 하고선 무슨 말을 했냐니. 영현은 어이가 없었다. 도운이 저렇게까지 화가 난 일도, 갑자기 따지고 보는 것도.
"그쪽 알잖아요"
"두서없이 말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요"
그쪽 알았잖아. 누나가 혼자인 거. 누나 혼자서 버틴 거, 도운은 제 머리를 거칠게 흩뜨리고 영현에게 조금 더 가까히 다가섰다.
"무슨 말로 상처 줬는지만 말해요"
"내가 언제.."
"모든 대화에서 상처준 거 아는데,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누나가 저렇게까지 아무것도 안 먹는데"
지금 많이 아파요. 그것도 그쪽이 옮겼잖아. 아파 죽겠는데 축 쳐져서 입맛 없다고 피하는 것도 한 두번이었어요. 그쪽 만나고 온 날 술 진탕 마셨고, 가뜩이나 옮아가는데 술 들어가서 처음부터 고열이고 뭐고 다 붙었고.
"그 날 나한테 사과하러 왔었어요. 와인을 조금 마셨는데 내가 술이 약해서 무슨 실수를 했는지, ..기억이 안,"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영현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게 지금 나한테 할 말이야?
"정말 아무 감정 없으면 계속 옆에서 건들지마. 그쪽이 생각하는 것보다 그 이상으로 힘든 사람이야, 도와줄 생각 없음 오지 말라고"
"ㅇㅇ씨 좋아하죠?"
영현의 나직한 목소리가 주차장을 울렸다. 그 질문에 비소를 지은 것은 도운이었다. 웃긴 질문은 아닐텐데.
"그딴 거 궁금해 하지 말라고 온 거야"
"외로운 사람 더 외롭게 만드는 거, 그건 내가 못 보거든"
"이봐요"
"아프게 하지 말라고"
나는 그 사람이 아픈 거 보기 싫으니까. 도운은 흐려진 시야를 닦아내고 다시 영현을 바라보았다.
"사람, 안 믿지?"
"야"
"사랑도, 안 믿지?"
"이제 나도 가만 안 있어. 다시 이런 일 만들지마"
*
"..도운아 자?"
"ㅇ, 누나. 아뇨 안 잤어요"
안 자긴 너 색색거리면서 잘도 잤는데. 도운은 눈을 부비면서도 한 손을 ㅇㅇ의 이마 위에 올렸다. 열 좀 내렸구나, 다행이다. 벽에 불편하게 기대 잠든 게 마음에 걸려 ㅇㅇ는 베개를 건넸다. 이거라도 베고 자, 허리 아파.
"죽 좀 먹어요. 누나"
"..아니 입맛 없는데"
"나 한 시간 동안 끓였는데"
"끓이다 손도 데였는데"
"알았어. 알았어"
힘없는 발걸음에 도운은 ㅇㅇ의 손을 꼭 쥐었다. 이틀 간 한없이 쳐져 있었던 ㅇㅇ가 숟갈을 들자 도운의 얼굴엔 영현과 마주한 시선을 전부 지운 채 그저 강아지마냥 순한 미소만 만개해 있었다. 독감이 그렇듯 일주일은 쉬어야 했지만 ㅇㅇ를 조금이라도 기쁘게 해주고 싶어 도운은 미리 받아온 대본을 꺼냈다. 누나 이거,
"리딩은 다음 주 수요일이에요, 깨끗이 낫고 리딩 들어가면 될 거에요"
"미리 받아왔어?"
맑은 웃음과 함께 몇 번이고 끄덕이는 도운에 웃음이 터진 ㅇㅇ는 도운의 머리칼을 흩뜨렸다. 그리고 고타만큼 꼬리를 붕붕대며 웃는 도운에 ㅇㅇ는 다행히 죽을 모두 비울 수 있었다. 도운아 리딩 도와줘. 네, 금방 갈게요.
"어디부터 할까요?"
"어.. 3번째 수아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부분"
도운이 대본대로 바닥에 쓰러지자 ㅇㅇ에게 미열에 치이며 기침을 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금방 눈물이 차올랐다. 항상 대본을 맞춰보며 느끼는 것이였지만 ㅇㅇ의 몰입 속도는 굉장히 빠른 편이었다. 특히나 느와르에 가까운 장르는 많은 경험이 없었으나 ㅇㅇ는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내릴 새 없이 대본을 읽어 나갔다.
"가. 시간 지체하지 말고 가야 돼"
"못 가. 내가 널 어떻게 두고 가!"
독감으로 갈라지던 목소리가 명확한 발성으로 거실을 울렸다.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며 동시에 도운의 손을 더듬거려 쥔 ㅇㅇ는 도운이 대본을 읽어나가며 깍지를 끼자마자울음을 터뜨렸다. 안 돼, 나 절대 너 없이는 안 가. 안 갈래. 고개를 거칠게 도리질치며 도운의 얼굴을 매만지는 ㅇㅇ에 도운은 잠시 침을 꼴깍 삼켰다.
"..도운아 너 죽어야 돼"
"네? ㅇ, 아"
대본이 바닥에 굴러 들어갔다. 어색하지만 눈을 꽉 감은 도운에 ㅇㅇ는 금방 숨이 넘어갈 듯 울음을 치솟다가도 도운을 감싸 앉아 허리춤에 가상으로 차고 있는 총을 꺼내 장전을 위해 버벅거리는 행동까지 구사했다. 동시에 페이지를 마감한 ㅇㅇ는 그제야 눈물을 닦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리 도운이 연기가 늘었네. 곧 배우해도 되겠어.
"아프니까 주고 받는 부분으로 다음엔 해요. 문구점 가서 물총이라도 사올까요?"
됐어. 기어이 웃음이 터진 ㅇㅇ는 도운의 머리를 다시 한 번 흩뜨리고 대본을 주워 들었다. 액션 스쿨 들어가면 네가 많이 알려줘야 돼, 알겠지? 당연하죠. 미소를 짓는 ㅇㅇ에게서 훅 다가온 도운은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흘러 내린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야 너무 가깝"
"그랬어요?"
당연히 그렇게 훅 다가오면, 콧망울이 닿았다. 아주 가까워 깊은 눈동자와 올라간 속눈썹이 두 눈에 들어왔다. 금방 씩 웃어버리는 도운에 무언가 철렁했다. 그게 무엇인지 나는 잘 알지 못했다.
21.
아 여기 어떻게,
ㅇㅇ는 당당하게 계약서를 들어 보였다. 강영현 팀장님 좀 뵙고 싶은데. 직원들은 급하게 ㅇㅇ를 영현의 사무실쪽으로 안내했다. 뭐야 웬일이래? ㅇㅇㅇ 맞지? 어 맞는 거 같은데. 몸의 선이 여실히 드러나는 붉은 원피스를 입고 선글라스를 쓴 채 당당히 ㅇㅇ는 영현의 사무실 문을 열었다.
"내가 사람 들이지 말랬,"
잔뜩 짜증이 섞인 말투로 안경을 벗던 영현은 잠시 그대로 멈추었다.
"ㅇㅇㅇ씨?"
"네"
"저랑 선약 없는 걸로 아는데요"
"할 말은 있죠"
"안 그래도 사과하려고 했어요"
이제야? 아니 그것보다 기억하고 있었어?
영현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웅웅 울려대는 알림들에 ㅇㅇ는 급하게 휴대폰을 꺼냈다. 어, 어? 그때 고스란히 드러났던 어깨에 덮힌 온기에 ㅇㅇ는 휴대폰을 쥐고 올려다 보았다. 영현의 코트였다. 반대로 영현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사실 기억은 잘 안 나요. 내가 실수한 상황이었다는 건 알지만. 그래서 알려줬으면 해요, 내가 잘못한 일"
"그럼 나랑 영화 봐요"
"네?"
이때가 기회다 싶었다. 분명 상처 받았지만 영현의 마음을 변화 시킬 수 있으리란 확신이 ㅇㅇ에게 있었다.
"그럼 알려줄게요"
영현의 얼굴은 상관을 따져 묻고 싶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꼭 강영현이여야 하냐고 물었을 때 콕 찝어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지만 그냥 영현이 곁에 있었음했다. 영현이 곁에 있을 때 느끼는 모든 감정이 새로웠고 동시에 오묘하게 진짜 나를 꺼냈다. 영현은.
"팀장님 ㅇㅇ씨가 직접 온 건 또 드물..,"
"괜한 소리 나가지 않게 단속 잘 시키세요"
*
퇴근 후 바로 온 터라 영현은 수트 차림이었다. 약히 코트만 걸친 채 가라앉은 머리칼을 매만지는 동안 쫑쫑 걸음으로 검은 롱패딩으로 칭칭 감긴 ㅇㅇ가 앞으로 걸어왔다.
멀리서 보면 김밥인지 패딩인지 잘 알지도 못할 옷차림이었다. 약속시간에 늦을까 cf촬영이 끝나자마자 의상 위 꽁꽁 싸맨 채 눌러쓴 모자는 얼굴을 거의 전부 가려 버려 잘 보이지도 않았다.
"저녁 먹었어요?"
"네"
"ㅇㅇ씨는?"
다이어트중이죠 뭐. 강영현씨는 좋겠다 먹고 싶은만큼 다 먹을 수 있어서. 발권을 한 뒤 팝콘과 콜라를 든 영현의 손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ㅇㅇ덕에 영현은 어쩔수 없는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한 입 줄, 아니 아니다.
"추워요?"
"..어, 아뇨?"
아까부터 계속 떨던데. 영현은 영화관에 앉아 관객들을 살핀 뒤에야 조심스레 모자를 벗어두는 ㅇㅇ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뭔가 전세낸 느낌 같기도 하고. 영화 제작 발표회를 제외하고 이렇게 앉아 있는 건 몇 년만이었으니 이리저리 신기하게 둘러보던 ㅇㅇ는 영화가 시작한다는 영현의 귓속말이 들려오고 나서야 스크린을 볼 수 있었다.
"...아"
졸렸던 건가. 영현은 영화가 시작한 지 15분도 안 되어 제 팔뚝에 얼굴을 박고 잠들어버린 ㅇㅇ에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 버린 뒤 영현의 귓가에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들려왔다.
"..ㅇㅇ씨"
"ㅇㅇ씨"
"ㅇㅇㅇ"
퍽 얼굴을 부벼 화장이 묻어났다. 그건 별 일이 아닌데, 왜 자꾸 숨소리에 신경이 쓰일까.
22.
"너 유도했어?"
"네"
야 무슨 못하는게, 내가 너한테 혹시 뭐 잘못한 건 없지?
도운은 웃으며 끄덕였다. 잡아요, 여기. 여기? 네 여기. 액션스쿨에서의 연습은 거의 도운의 몫이었다. 어설프게 잡은 옷깃을 쥐어준 도운은 ㅇㅇ의 움직임에 따라 몸을 넘겼다.
"된 거야?"
"네 거의 됐,"
"오랜만이네"
도운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스케줄을 확인했을 때 ㅇㅇ만이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들어온 방해꾼이 하필 은제라니.
"아.. 어. 오랜만이다 진짜"
"잠수 탔다고 하던 데 그거 질려서 이거라도 하는 거야?"
"아니, 새 작품 들어가"
"조연?"
"주연"
어 잘해봐.
모든 어조에 엽신여기는 비아냥이 들어 있었으나 ㅇㅇ는 은제가 뒤돌아 제 연습실로 들어갈 때까지 표정을 일관되게 유지시켰다.
"맞다"
"스폰은 어떻게 됐어?"
"안 해 그런 거"
"그럼 나 좀 연결해 달라고. 넌 그런 거 없어도 다- 올라가잖아?"
내가 도대체 어딜 올라갔다는 걸까. 그리고 저 얘긴 대체 언제쯤, 아니다. 언제 가라앉은 적이 있었나.
오묘한 분위기를 갈아치운 뒤 ㅇㅇ의 눈치를 보느라 도운이 연습 내내 쉽게 쉽게 넘어가주자 ㅇㅇ는 도운을 일으켜 세웠다.
"신경 쓰지 말고 제대로 해도 돼. 나 괜찮아"
진짜 괜찮겠어요? 나 진짜 괜찮다니까.
물론 그건 ㅇㅇ만의 착각이었다. 도운의 옷깃을 쥐고 넘기자마자 되려 반대로 몸이 넘어가 공중에 붕 뜬 ㅇㅇ의 머리를 감싸안은 도운의 위로 넘어진 ㅇㅇ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야 미안해"
"잘했어요"
머리를 흩뜨리며 웃는 도운에 침을 꼴깍 삼킨 ㅇㅇ는 급하게 떨어졌다. 좀 떨어져야 할 거 같아, 너한테.
23.
"신중하게 행동 해. 또 막 이탈하지 말고, 감독님들한테 인사 잘하고"
"잘 알아서 했잖아요"
"눈 지워지겠다 다시 발라줘"
펄을 애굣살에 꼼꼼히 발라준 뒤 ㅇㅇ는 탈의실로 향했다. 나 이 색 싫다고 했는데. 은은한 회색계열의 드레스였다. 가슴골부터 이어진 주얼리가 알알이 박혀 퍽 아름다웠으나 특히나 연예계 사교모임에서 이런 노출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겉옷 주면 안돼요?"
"한 두 시간만 있을 건데 뭐. 예쁘기만 해"
다 드러난 게 뭐가 예쁜 건데. ㅇㅇ는 늘어뜨린 머리를 만지며 우물거렸다.
"ㅇㅇㅇ씨"
"어?"
블랙 수트를 차려 입은 영현이었다. 본사 D.A 대표로 참석했다는 말에 ㅇㅇ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동시에 노출이 심한 가슴팍을 가린 뒤 ㅇㅇ는 먼저 자리를 뜰 수 밖에 없었다.
모임이라 해봤자 호텔 내부에서 감독들에게 인사를 하고 잘 보이고, 뭐 그게 전부인데.
ㅇㅇ는 잘 먹지도 않는 샴페인잔을 들고 이곳저곳을 서성이다 그나마 아는 감독의 옆에서 잠자코 서 고개를 끄덕이고 보이는 이마다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또래 배우들하곤 친하지도 못했고 정을 붙인 사람보다 시기와 질투로 아니꼬운 시선이 대개였다.
"여기서 또 만나네? 아 안녕하세요, 감독님"
"은제씨? 요즘 잘나가더라, 같이 작품 한 번 해야지"
"저야 좋죠. 지인짜 열심히 할게요"
은제는 웃으며 ㅇㅇ의 곁에서 강한 어필을 했다. 가는 곳마다 마주치는 것은 고사하고 비슷한 드레스도 신경이 쓰였다. 은제를 피해 여러 걸음을 걷다 보니 영 구석진 곳에 선 ㅇㅇ는 조심히 몸을 구겨 넣었다.
"여기서 뭐해요?"
"아 깜짝이야"
놀랬잖아요 그렇게 불쑥.
영현은 수트를 벗어 건넸다. 아까부터 불편해 보이던데, 걸치고 있어요.
"이런 곳 불편하죠"
"네, 좀"
"저도 그래요"
말이 없는 영현과 대화는 어려웠으나 생각보다 오랜 시간 얼굴을 맞대고 웃을 수 있었다. 구석진 곳에서 영현을 꾹꾹 누르며 잘은 장난을 주고 받았다. 의외에요 강영현씨. 마치 두 사람만이 들어간 벽이 있는마냥 웃었다.
"안녕하세요. 강영현 팀장님"
"아, 안녕하십니까"
은제였다. 두 사람 곁에 다가서 인사를 나눈 은제는 영현의 옆에 붙어 대화를 시작했다.
"ㅇㅇ랑은 친해요?"
"아 네. 좀"
"얘가 워낙 밝고 착하잖아요. 조금, 눈치는 없지만"
"저는 잠깐 실례할게요"
기분이 나빴다. 드러낼 수 없으니 자리를 피해 삭히는 게 맞는 일이었다.
"ㅇㅇㅇ. 벌써 꼬리치고 다녀? 스폰 뜬 지 얼마나 됐다고"
"걔 원래 그랬잖아. 지 몸 팔고 다니는 것도 습관이고, 더러워 진짜"
"은제랑 똑같은 드레스 입은 거 봤지? 그와중에 그렇게라도 기사 뜨고 싶나봐"
맞다. 여긴 원래 그랬지. 믿을 사람도, 믿고 싶은 사람도 없는 곳.
모두 자리를 뜰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ㅇㅇ는 화장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만 가도 되겠지.
"ㅇㅇㅇ"
"어 실장,"
ㅇㅇ의 뺨이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내가 너 관리하라고 했지. 다시 한 번 돌아간 뺨에 발갛게 생채기가 일었다. 은제의 바람은 고스란히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몰래 찍힌 사진들에서부터 비교글이 올라오고 언제나 그렇듯 ㅇㅇ는 여론의 공격을 받았다.
"네가 배우니? 관리 하나 똑바로 못하고. 매번 이딴 식으로 자잘한 일들 터지는 거 이미지 상한다고 내가 말 했니, 안 했니?"
ㅇㅇ의 등을 맞고 떨어진 휴대폰엔 은제와 붙여놓은 저의 모습들 뿐이었다. 누구한테도 물을 수 없는 내 잘못인데 누굴 탓해. ㅇㅇ는 한실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
"그건 안 마시는 게 좋을텐데"
"어, 영현씨"
언제 올라왔어요? 방금요.
객실 문을 열다 들린 목소리에 해맑은 표정으로 ㅇㅇ는 영현을 올려다 보았다. 그거 다 마시려고요? 네. 밑에서 너무 지루했어서. 뻣뻣하게 굳은 영현의 표정을 읽었으나 ㅇㅇ는 더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올렸다.
"나 정말 괜찮아요. 멀쩡해"
"그나저나 안에 갑갑했죠. 이쯤이면 그만 가도 될 거에요. 나도 쉬러 올라왔구. 그럼, 잘 가요"
나 좀, 그냥 둬요.
급하게 잡힌 손목에 ㅇㅇ는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왜 자꾸 나를 건드려요. 그러게.
"나랑 같이 들어갔다가 내가 영현씨한테 밤새 같이 있어달라고 하면, 영현씨한테 또 관심이라도 있다고 하면 그때도 같이 있어줄 자신 있어요?"
그제서야 놓인 손목에 ㅇㅇ는 침을 삼키고 다시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문을 닫으려던 찰나였다. 영현은 불쑥 문을 붙잡고 ㅇㅇ와 함께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깜빡이는 현관불만이 두 사람을 비추다 말곤, 이내 사그라들 뿐이었다.
"...영현씨가 지금 나가야 내가 내일 얼굴을 볼 수 있어요"
"..."
"강영현씨"
그쪽은 좋아하는 사람한테 다 망가진 모습 보여줄 수 있어요?
"그럼 절대 방으로 들어오지마요"
ㅇㅇ는 한숨을 내뱉고 먼저 돌아섰다. 그리곤 영현에게 잡힌 손목을 직접 떼어낸 채 문꼬리를 잡았다.
"마실겁니까?"
"각자 할 일 해요. 우리"
ㅇㅇ가 방 안으로 들어간 뒤 영현은 소파에 앉아 디자인북을 꺼내 들었다. 어쩌자고 여기까지 들어온 걸까, 나.
그리고 문득 들리는 구역질 소리에 영현은 대번 몸을 일으켜 방 안으로 향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화장실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ㅇㅇ의 옆으로 위스키병이 두어개 출렁였다. 영현은 빠르게 ㅇㅇ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들었다.
"미쳤습니까?"
"...줘"
"ㅇㅇ씨"
"달라구우"
영현의 팔을 향해 손을 뻗는 ㅇㅇ를 받쳐든 영현은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취했어요, 지금. 단호한 영현만큼 단호한 ㅇㅇ는 기어히 술병을 입에 댔다. 잘하지도 못하는 술을 입에 댄 것은 취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루종일 먹은 것을 게워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렇게라도 하라고 한실장이 쥐어준 위스키니까.
"아직 다 안 해써어..."
"뭘 말입니까"
"그러니까아"
"너두 얼른 가"
영현은 도통 알아듣지 못하는 말에 미간을 찌푸리고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두 눈을 끔뻑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ㅇㅇ에게 다가서자 ㅇㅇ는 뒤로 몸을 내뺐다.
"다들 그랬던 것처럼"
"너두 가라고"
금방 ㅇㅇ의 두 눈에는 맑은 눈물이 고였다. 그도 개의치 않고 닦아낸 ㅇㅇ는 영현을 밀어내고 금방 울것 같은 얼굴에 떨리는 입가에 자꾸 미소를 그렸다. 아 웃어야 하는데에.
"ㅇㅇㅇ"
"얼르은"
"강영현씨 너도 가라구"
기대만큼 볼 것도 없구, 또오 나는 상처 잘 안 받으니까아.. 가도 원망 한 개도 안 해.
"멀리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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