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회원님들을 위한 불마크 제거 버전입니다. 주의!
전설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존재했다는, 그야 말로 전설 같은 이야기가 말이다. 총 여섯 개로 나뉜 땅에 각각 나라들은 서로 다른 특별한 기운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푸른 대지는 하늘과 닿을 듯 높았으며, 드넓은 평지는 자연 속에 섞여 산뜻한 바람을 일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부터 내가 살았던, 그 시대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볼까 한다. 아주 짧고도 긴 두 달. 전쟁을 준비하기 전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슬펐던 여섯 나라의 이야기. 우리의 모든 전설은 거기서 시작된다.
창조주가 내려와 세계를 만들었다고 이야기가 내려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여섯 나라의 명칭은 총 이렇게 나뉘었다. 백(白)의 기운을 받아 순결하고 맑은 물이 흐르고 목화가 가장 아름답게 핀다는 백연국(白演國), 푸른 소나무의 기운을 받아 대지의 심지가 곧고, 바다와 맞닿아 달이 그곳에 머물고 간다는 전설이 존재한 솔월국(乺月國), 사람들 모두 흐르는 강처럼 머리가 맑고 두뇌가 총명하여 모든 제국이 드높은 하늘 위의 주인으로 받든다는 천주국(天主國), 신의 사랑을 독차지 할 만큼 왕족 대대로 그 용모가 아름다워 불로장생과도 같은 영원한 미모를 유지한다는 신애국(神愛國), 미인이 많고, 재주가 능해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미가 가장 뛰어나다는 인미재국(人美才國), 마지막으로 내가 태어나고 자란, 다채로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숲의 기운이 가장 맑다는 화과국(華果國).
그 사건의 모든 출발점은, 내가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때부터였다. 내가 ‘그들’을 만나고 사랑을 시작하면서, 내 세계에는 슬픈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만개하여 제 잎을 피우는 예쁜 붉은색의 꽃. 허나 그 자태가 한없이 곱고 독하여 사람을 홀리는 마약으로 쓰이는 슬픈 꽃. 그리고 모두를 홀릴 때쯤, 이미 그 꽃은 시들어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 전설적인 꽃. 그들은 모두 나를 ‘양귀비꽃’이라 불렀다.
일처다부제(一妻多夫制)
붉게 지저귀는 한 송이의 꽃
W.B 설향기
“어휴, 아씨! 어여 내려오세유! 마님께 들키면 지는 또 혼나구만유!”
“알았어, 알았어. 조금만 더 보고 내려갈게……. 와, 저 사람들이 전부 백연국 사신들이야? 그럼 저 커다란 가마 안에 있는 사람이 백연국 황제고? 우와…하여튼 백연국 황제라는 거 열라 티내고 다니네.”
“아, 아가씨! 그러다 누가 들으면 어쩌려구유…!”
“아, 알았다니까. 참나, 얼굴 좀 보려고 했더니 헛고생만 했네.”
마당의 커다란 나무를 타고 올라가 담벼락 너머 궁으로 가는 마차를 바라보던 나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신하들이랑 병사는 뭐 저렇게 많아? 참나, 아예 여기다 살림 차리겠다고 말하지 그러냐.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나무를 내려왔다. 가볍게 뛰어내려 마당 위로 사뿐히 안착하는 폼에 유모는 저절로 감탄하며 박수를 쳤으나, 곧 정신을 차린 듯 나에게 달려왔다.
“아, 아씨! 어디 다친 덴 없구만유?”
“나? 당연히 멀쩡하지. 내가 나무 한두 번 타보나?”
“이거 주인어른님께서 아시면 저 모가지 날라가유. 아씨, 제발유…제발 조심 좀 해주세유…!”
“뉘예뉘예~ 알았구만유.”
내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자, 유모는 곧 울상을 지었다. 그것에 내가 푸핫, 웃음을 터뜨리며 유모의 목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걱정마, 유모. 난 절대 다치지 않아. 그러니까 내 걱정 하지 마. 응?”
“아씨 걱정 하는 게 아니라 제 밥줄 걱정 하는 거거든유?”
“다 알아, 유모 마음. 그래도 방구석에 앓아누우면서 지내고 싶진 않아. 그건 아버지도 마찬 가지일 거야. 그렇지?”
“그, 그건 그렇지만…….”
“그러니까 나 찬열이 좀 보러 갔다 올게!”
“어이쿠, 아씨! 황제 폐하 존함을 아직도 그렇게 부르시면 어떡해유…아니, 아씨!”
대문을 향해 뛰쳐나가자 유모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바깥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그 백연국의 황제가 신경 쓰여.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을 꼭 보고 싶단 말이야? 어릴 때부터 호기심을 참지 못했던 성격인지라, 나는 곧장 궁으로 향했다. 조금 뛰어서 그런 지 심장에 무리가 오는 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이 정도쯤은 버틸 만 하다고 생각하여 조금 더 달렸다. 금새 숨이 가빠왔다.
“음, 그러니까…이쯤 이었나?”
병사들의 눈을 피해 숲으로 들어온 나는, 숲 경계에 맞닿고 있는 궁전의 돌담장 아래 여기저기를 눌러보았다. 분명 지난번 찬열이가 알려줬을 땐 이곳이었던 것 같은데. 찬열, 그러니까 지금 화과국의 황제인 박찬열은 나와 오랜 소꿉친구였다. 아버지가 3정승 중 하나라는 게 신의 한수라고 해야 할까.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나란히 궁에 들락날락했던 나는 자연스럽게 찬열이와 만났고, 어울려 지냈다. 아니, 그래도 나중에 황제가 되실 몸인데 이래도 되는 겁니까? 관리들의 걱정 어린 목소리와 수많은 불만해도 당시의 황제는 웃으며 넘길 뿐이었다. 영의정의 딸이 아닌가. 괜찮다. 나에게는 ‘찬열이 아버지’라는 이름이 더욱 친근한, 둘만 있을 때는 아저씨라고 불러도 좋다고 하셨던, 지금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게 되어버린 나에게는 조금 특별한 사람.
“아, 찾았다!”
그 인연들을 여전히 간직한 채, 나는 몰래 궁으로 들어갔다.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궁이라 지리정도는 에전에 다 꿰차고 있었다, 는 무슨. 어휴, 십년감수했네. 매화궁(梅化宮)으로 향하는 모퉁이를 돌려고 할 때쯤, 갑자기 튀어나온 궁녀들의 모습에 급히 몸을 숨긴 나는 숨까지 참으며 그들이 어서 지나가길 기도했다. 그리고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질 때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었다. 정확히는 쓸어내리려고 했다.
“뭐하는 거야?”
“흐억!”
추궁하는 어투도, 경계하는 어투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너 여기서 지금 뭐하는 거야?’라고 묻는 천진난만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작은 말소리에도 놀란 나는 그대로 뒤로 넘어졌고, 그는 그런 내 모습에 당황해하는 듯하다가 곧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미안.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닌데.”
“아, 아니야. 괜찮아.”
앳된 외모. 무엇보다 강아지처럼 순한 눈동자가 나의 시선을 끌었다. 수수하면서도 최고급이라 불리는 비단의 옷을 입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슬쩍 훑어본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생긴 것과 달리 나를 번쩍 일으키는 그 힘에 놀라, 나는 한동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잠시 소년을 바라보았다. 뭐야, 여리여리하게 생긴 거랑 힘은 완전 딴판이잖아? 그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마치 제 얼굴에 뭐가 묻었냐나는 듯이. 그것에 나는 몇 번 헛기침을 하고선 그제야 소년을 경계하는 어투로 물었다.
“그, 근데 넌 누구야?”
“난, 변백현. 화과국 바로 옆 나라인 백연국에서 왔어.”
잠깐, 백연국? 그럼 얘도 백연국의 황제랑 같이 온 신하인가? 그러기엔 너무 어려 보이는데. 나는 자신을 변백현이라고 소개한 소년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 어쨌든 좋아. 난 지금 바쁘니까 이만 갈게. 우리 만났던 건 없는 이야기야. 알았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변백현은 뛰어가려는 나의 손목을 붙잡은 채 다시 내 몸을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 그 엄청난 힘에 순간 다리가 휘청거린 나는 다시 한 번 뒤로 넘어질 뻔 했으나, 내 허리를 손으로 받친 채 썩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는 변백현의 모습에 순간 할 말을 일었다.
“왜?”
“…뭐, 뭐가 왜야. 다시 만날 사이도 아닌데, 뭘.”
“그건 좀 싫은데.”
변백현은 살짝 미간 사이를 찌푸리더니 순간 얼굴을 내게로 가까이 했다. 그것에 깜짝 놀라할 틈도 없이 눈만 깜빡거리던 나는, 곧 내 입술에 닿는 뜨거운 숨결에 그제야 놀라 순간 입을 벌렸다. 자, 잠깐! 이라는 말이 다 나오기도 전에 내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덮은 백현은 나를 매화궁 벽으로 몰며 진득한 입맞춤을 이어나갔다. 이, 이게 뭐야? 이게 무슨 상황이야? 서, 설마 내 혀에 닿는 게, 변백현의…아, 안 돼. 이건 절대 묘사 할 수 없어! 넋이 나가 멍하니 눈만 깜빡이는 내 모습에 변백현은 잠시 제 입술을 떼어내더니 곧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입을 맞출 땐 눈을 감아야지.”
그리고 그 나른한 목소리를 끝으로 변백현은 제 손으로 내 눈을 감겨주었다. 아니, 잠깐! 이라고 외치려던 나의 말은 또다시 진득하게 입을 맞춰오는 변백현에 의해 먹혀버렸다. 비벼지는 입술, 부딪치는 이와 혀. 그 모든 게 생생하게 느껴지자 고요했던 나의 심장이 뜀박질을 할 때 마냥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변백현을 밀어내려고 했으나, 그럴수록 더욱 더 깊게 입을 맞추며 혀를 굴리는 변백현의 행동에 손이 덜덜 떨려왔다. 그걸 귀신같이 알아챈 변백현은 마지막으로 내 입술에 짧게 뽀뽀를 하고선 제 입술을 떼어냈다. 그리고선 내 두 손을 제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듯 움켜잡았다. 당혹감과 더불어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뺨을 붉히자 곧 변백현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더니 내 손등 위로 입을 맞추며 말했다.
“꼭 다시 만나.”
“…….”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 널.”
“저, 그러니까, 그렇게 말해도…….”
“내 이름 잊지 말고 기억해 줘. 그럼 간다.”
변백현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잽싸게 뛰어갔다. 가는 도중 한 번 뒤를 돌아 내게 손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고서 말이다.
“이, 이게 뭐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변백현이 시야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입술에 남는 그의 체온에 나는 손을 뻗어 내 입술을 어루만졌다. 그의 뜨거운 숨결에 데인 입술이 아직도 화끈거렸다. 아, 아니지. 지금은 이런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야. 그제야 궁에 잠입한 목적이 떠오른 나는 매화궁을 지나 전회궁(殿回宮)으로 향했다. 그 입맞춤이 어떤 시작과 재앙을 알릴지, 당시의 나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으아, 역시 신하들이 있어.”
이렇게 된 이상, 그냥 그 길로 가는 수밖에 없나? 나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 곧 자세를 낮추어 전회궁 뒤쪽으로 향했다. 궁 뒷마당에 핀 매화나무며 벚나무가 시야를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웠지만, 지금은 그것을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전회궁 아래 좁은 틈으로 꾸역꾸역 기어 들어간 나는, 전회궁 바닥 여기저기를 꾹꾹 누르며 어느 한 곳이 열리기만을 기도했다. 그리고 그 기도가 통했는지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열리는 순간, 나는 기쁨의 환호성을 지를 뻔한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고 조심스레 전회궁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도 은근 허술하단 말이지. 그리고 마침내 궁 안쪽의 바닥 창고까지 진입에 성공한 나는 의기양양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젠장, 안 열린다!
“흐어,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박찬열, 박찬열! 문 열어, 박찬열, 흐엉엉…!”
문을 부술 듯한 기세로 두드리다가 결국 체력이 방전 되어 주저앉아버린 나는 그대로 무릎을 감싸 안은 채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가슴 쪽이 뻐근한 것 같기도 하고. 벌써 약을 달여 먹을 시간이 되어 가는 건가. 이게 다 아까 만난 그 녀석 때문이야. 쓸데없이 두근거려서는. 나는 아까 만난 변백현을 생각하며 속으로 수천, 수만 가지의 욕을 퍼부었다. 심지어 욕을 퍼붓다 잠에 빠질 정도로 말이다. 다시 만나면, 그땐 머리를 콱 쥐어박아 줄 테야. 쪼꼬만게 진짜…….
*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제법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어…그러니까 여긴 아마도 전회궁? 근데 난 분명 전회궁 바닥 창고에서 잠들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눈을 비비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누군가 내 어개를 툭 건드려왔다. 그것에 놀라 소스라치게 몸을 피하니, 옆에서 나를 제법 화난 인상으로 바라보는 찬열…이 아니라, 황제 폐하가 있었다.
“내가 그 길로 오지 말라고 했지, 위험하다고.”
“아니, 그, 찬열, 아니 황제 폐하…….”
“영의정의 딸이 이렇게 사고뭉치면 어쩌자는 거야, 정말.”
내가 잔뜩 당황해하자, 찬열도 서서히 표정을 풀더니 곧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섞인 얕은 미소에 덩달아 기분 좋아져 내가 헤실헤실 웃자, 금세 표정을 굳힌 찬열이 뭘 잘했다고 웃냐며 반박해온다. 쳇. 하여튼 걱정은.
“입고 온 옷이 엉망이더라. 상궁한테 부탁해서 옷 갈아입혀 놨어.”
“어, 응. 고마워.”
“근데 여긴 왜 온 거야? 설마 나와의 혼례를 정식으로 받아들…….”
“그건 절대 아니니까 꿈 깨. 난 아직 누구한테 시집 갈 마음 전-혀 없거든.”
나의 말에 찬열이 조금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그건, 아쉽네. 순간 그런 찬열의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한 나였으나, 지금 여기에 온 목적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나는 헛기침을 끝으로 이야기를 바꿨다.
“백연국의 황제께서 오셨다며?”
“응. 방금 만나고 오는 길이야.”
“그, 계속 같이 안 있어도 돼?”
“…계속 같이 있어야할 이유는 뭔데?”
“에…그…그래도 황제가 왔는…데?”
나의 표정에 얼굴에 ‘?’를 띄운 찬열이 곧 무언가 알아차렸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표정을 바꾸었다. 그러니까 너 지금.
“왜. 궁금해?”
“뭐, 뭐, 뭐가?!”
“백연국의 황제 폐하.”
“따,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뭐…….”
“그에겐 너무 관심 갖지 마. 어려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벌써 첩이 여럿이니까. 그 황제가 바람둥이라는 사실쯤은 알 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정도야.”
“그, 그러니까 그게 궁금한 게 아니래도!”
하여튼 눈치 하나는 백단이라니까. 머쓱한 표정이 그대로 들어났는지 찬열은 큭큭 웃으며 제 어깨를 들썩였다. 하여튼 얘도 겉만 황제 폐하지, 속은 열 살 때 그 철부지 박찬열 그대로라니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쭉 마을을 몰래 돌아다니며 찬열과 지냈던 시간을 떠올렸다. 항상 지나가는 길마다 흩날리던 벚꽃잎. 만개한 우와한 잎으로 길을 밝히던 매화꽃. 사시사철이 봄이라 그 어느 나라보다 풍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화과국. 그리고 그 나라의 왕이자 이 나라를 이끄는 우리의 군주, 박찬열……. 우엑, 오글거려. 나는 혼자 생각하다 말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오므렸다. 그것에 찬열이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으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만 설레설레 저을 뿐이었다. 아씨, 괜히 민망하네. 그래서 그런가, 갑자기 얼굴 쪽으로 열이 쏠리는 이유는.
“그, 그나저나 좀 덥지 않아? 하핫, 덥다 더워.”
나는 이유 없이 끌어 오르는 열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쪽문으로 향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 좀 괜찮아 질까 싶어 자그마한 문을 열려던 그때, 불현 듯 찬열이 나의 허리를 끌어안아 왔다. 그것에 내가 당황해 하며 찬열의 쪽으로 몸을 돌리자, 그걸 놓치지 않고 찬열이 나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싸온다.
“내일 백연국 황제와 신하들을 접대하는 자리가 있어. 거기에 오고 싶으면 와도 돼.”
“…어, 정말?!”
“물론. 넌 내 빈이 될 몸이니까. 미리 인사를 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찬열이 몸을 가까이 하며 능글맞게 말하자, 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버럭버럭 소리쳤다.
“누, 누가 너의 빈이 된다는 거야?! 난 아직까지 혼례를 치를 마음 전혀 없거든?!”
“어명을 듣지 않을 생각이야? 그러다 내가 무슨 벌을 내릴지 모르는데?”
“이씨, 박찬열 너…!”
“이씨? 박찬열? 너?”
찬열이 장난스럽게 인상을 쓰며 내 말을 하나하나 되짚자, 나는 바로 고개를 숙이고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여튼 미워 죽겠어.
“…폐, 폐하.”
“그래. 어연 일로 부르는 것이냐.”
“허, 허리에 손은 좀 치워주시지요. 소녀 부끄럽사옵니다.”
“부끄러울 게 뭐가 있느냐. 어차피 방엔 우리 둘 뿐이거늘…….”
그때였다. 불현듯 전회궁이 문이 열리고 신하가 들어와 정중히 머리를 숙이고서 말을 잇다 말고 깜짝 놀라며 다시 궁의 밖으로 나갔다.
“폐하. 숙의원이 전회궁으로 도착…흐익! 죄, 죄송합니다!”
“…너, 너, 박찬열! 저거 어떻게 할 거야, 어?! 어떻게 할거냐구!”
“야, 미, 미안. 나도 갑자기 신하가 들어올지 어떻게 알…아! 으악! 때리지 마, 어흑! 미안하다니까!”
사실상 내가 안에 있는 지 물어보고 들어와야 하는 게 정상이라고! 아니, 보통은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묻는 다니까?! 아, 아 미안, 잘못했으니까 그만 때려, 응?! 결국 찬열이 싹싹 비는 모습을 보고 난 후에야 등짝을 짝짝 내려치던 나의 손이 멈췄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웬 여자가 네 궁에 있냐면서 소문이란 소문은 다 돌 텐데!”
“이야, 잘됐네. 이대로 나랑 혼례…으아, 미안! 그만 때려, 그만!”
“너 진짜 맞아야 돼, 어휴, 어휴, 어휴!”
그때였다. 갑자기 눈앞에 까맣게 변하는가 싶더니 한순간 머리로 열이 몰렸다. 어, 왜 이러지? 결국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잡지 못하고 찬열의 품안으로 쓰러지자, 그것에 깜짝 놀란 찬열이 나의 팔을 서둘러 잡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왜 그래? 괜찮아?”
“열아, 열아…….”
“응, 나 여기 있어. 왜. 어디가 어떻게 아파?”
“몰라, 갑자기 어지럽고, 막…몸이 뜨거워…….”
목덜미 부분이 좀 화끈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나의 말에 찬열은 내 목덜미 쪽을 살피더니 곧 나를 안아 들어 침대에 눕히고서는 외쳤다.
“숙의원을 안으로 들여라.”
“으, 아…….”
“괜찮아. 별 거 아닐 거야. 아까 보니까 너 열이 있더라고. 그래서 미리 의원을 불러놨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으응…….”
찬열의 말에 안심한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왠지 모르게 나른한 게 잠이 쏟아졌다. 점점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누군가 나의 팔목을 잡은 것, 목덜미를 만진 것, 그리고, 그리고…….
“목덜미에 나타난 이 꽃모양을 보니 아무래도 ‘그 저주’가 시작된 듯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들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나는 깊은 잠에 빠졌다.
* * *
아주 오래전 기억이 이제야 떠올랐다. 그것이 왜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도 전, 아직 한참 어렸던 내게 늘 들려주었던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대충 어떤 거였더라. 분명 첫 내용은 창조주가 인간계로 내려오면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자신이 만든 창조물인 인간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한 창조주는,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여인은 이미 여섯 황제의 사랑을 받고 있었고, 여섯 황제는 그 여자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만든 창조주와 과감히 대립하였다. 그것에 화가 난 창조주는 아름다운 그 여인에게 ‘붉은 꽃의 저주’를 내리고선 말했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감히 너희가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창조주는 비아냥과 화가 가득한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녀를 구하고 싶으면 ‘몸의 언약’을 맺어라. 허나 잊지 말라. 어차피 너희는 곧 스스로…….
너희는 곧 스스로……. 음, 그 다음이 뭐였지.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아.
어? 숨 막혀. 누구야. 내 목을 조르는 건…?
나는 헉헉거리는 스스로의 숨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얼마나 땀을 많이 흘렸는지 목덜미며 이마며 등이며 안 축축한 곳이 없었다. 나는 가늘게 눈을 뜨고서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침대 옆에 걸터앉아 묵묵히 날 내려다보고 있는 찬열이 보였다. 손에든 수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나의 땀을 계속 닦아주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 고마워. 그 말을 하고 싶은데 목소리조차 잘 나오지 않았다. 심장을 무리시킨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분명 약도 달여 먹었고. 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찬열의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찬열이 그 손을 마주잡아오며 나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여기 오기 전에 누구와 접촉했어.”
“무슨 말…….”
“설마 백연국 황제를 만난거야? 대답해.”
“모, 르겠어…….”
내가 푹 꺼진 목소리로 말하자 찬열은 제 입술을 꾹 다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까부터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시야 때문에 나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열아, 힘들어. 나 왜 이러지? 마음속으로부터 찬열을 외치고 있을 무렵에, 찬열이 내 뺨 위로 제 손등을 얹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찬열이 얼마나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날 바라보고 있을지. 이 아이는 내가 아프면, 항상 울던 아이였으니까. 나는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리며 찬열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그렇게 보지 마. 나, 아파도 금방 낫는 애잖아.”
“…….”
“넌…늘 걱정이 많아서 탈이야. 야, 왜 또 울고 그래. 넌 진짜 몸만 다 컸지 여전히 울보구나…….”
나는 떨리는 손에 힘을 주어 찬열의 얼굴에게로 뻗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눈물에 괜히 가슴 한구석이 시큰해졌다. 이래서 네 앞에선 더 씩씩한 척 했던 건데. 나는 찬열에게 한번 방긋 웃어주고서는 그대로 손을 떨어뜨렸다. 그것에 찬열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지며 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무척이나 다급하고 초조한 목소리로. 아…또 걱정한다. 내가 달래줘야 하는데. 하지만 지금은 몸에 힘을 전혀 줄 수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싫을 만큼 온 몸이 무거울 뿐이었다. 나는 내 손을 꽉 붙잡은 채 덜덜 떨고 있는 찬열을 마지막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맺자. 몸의 언약.”
망설이던 찬열의 목소리에 떨림이 멎는 순간이었다. 네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어? 내가 묻기도 전에 찬열은 나에게 입을 맞췄다.
* * *
잊고 있었던 또 한 가지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왜 이걸 잊고 살았는지 후회가 들 만큼 슬픈 이야기였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이 이야기를 잊게 된 건. 너무 슬퍼서,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라서, 그래서 잊어버린 걸까. 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눈앞에 찬열을 바라보았다. 나의 옷을 천천히 벗겨가는 찬열의 손에 떨림이 묻어 있었다. 너도 망설이고 있는 거겠지, 분명. 나는 내 목덜미에 얹은 찬열의 손에 내손을 포개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떨지 말고 해.”
어머니가 내게 읽어주신 것은 매번 똑같은 내용의 동화였다. 먼 훗날 시간이 지나 환생한 그녀는 모든 기억을 잊은 채 살아가다 우연히 한 황제의 눈에 띠게 되어 후궁으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황제와 입맞춤을 하던 날 그녀의 붉은 꽃의 저주는 다시 시작되었고, 목덜미에 색이 차지 않은 꽃모양이 그려졌다고 한다. 그 색은 오로지 황제만이 채울 수 있는 것으로, 몸의 언약을 맺어야만 색감이 빨갛게 찬다고 한다. 그 꽃 안에 색이 다 차있는 동안은 여자는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으나, 점점 색이 빠질수록 여자의 생명도 위태로워진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여자는 오로지 몸의 언약으로 맺는 황제들의 기운으로 목숨을 부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된 황제는 여자를 특히나 지극정성으로 보살폈으나, 어째서인지 그녀는 나날이 쇠약해져만 갔다. 나라 최고의 명의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니, 붉은 꽃의 저주는 여섯 황제의 기운이 두루 갖춰줘야만 풀릴 수 있다고 하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여자는 타국에는 보낼 수 없다면서 명의의 말을 듣지 않았다. 끝내 몸이 한계까지 쇠약해진 그녀는 죽고 말았고, 황제는 여자를 잃은 슬픔에 기생집을 오가며 술로 날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걸 읽고 들으며 내가 했던 말은 늘 똑같았다.
아, 무슨 동화가 이래. 이건 동화가 아니야. 동화라기에는 너무나 슬프잖아.
나는 매번 어머니가 읽어주시는 동화에 불만을 토로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면서 말씀하셨다.
황제마다 대대로 이어지는 기운이 다 따로 있단다. 그 특별한 기운이 붉은 꽃의 저주를 받은 여자에게 생명을 주는 거야. 마치 우리가 한 가지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그 여자에겐 황제 모두의 힘이 필요했던 거지. 백연국은 따뜻하고 포근한 빛을, 인미재국은 안 좋은 기운들을 모두 날려 보내는 산뜻한 바람을, 신애국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단단한 밑거름이 되어주는 흙을, 천주국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물을 솔월국은 깊고 안전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그림자를, 마지막으로 화과국은 모든 것을 감싸 안아주는 사랑을. 그녀는 황제의 이 모든 기운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는 거란다. 그러니까 너는…꼭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어머니는 그 말을 남기고 얼마 안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나는 깨닫고 말았다. 그 동화의 주인공은 바로 ‘어머니’란 사실을. 나는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해 며칠을 울다가 결국 그 추억 자체를 내 머릿속에서 도려내 버렸다. 그래서 그런 거겠지. 그 소중한 추억을 통째로 잃어버린 나에게 이런 벌이 주어지는 것은. 나는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찬열의 뺨을 손으로 감싸며 애써 웃음을 보였다.
“왜 그래. 얼굴이 너무 슬프잖아.”
“…이런 일이 일어날까봐 항상 불안했었어. 네가 싫다고 해도 억지로 내 곁에 붙잡아 둘 걸. 지금 그렇게 후회하고 있어, 알아?”
“찬열아…….”
“나도 가지지 못하겠지만 그래야만 아무도 널 보지 못할 테니까. 나는…네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 했으니까. 저주가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너는 구속당하는 거니까…!”
한 번도 이렇게 약해진 찬열의 모습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유독 오늘따라 찬열이 더 애틋하고 아프게 보이는 건. 나는 힘들게 몸을 일으켜 먼저 찬열에게 입을 맞췄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순간은, 그 순간만큼은 슬퍼하는 찬열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찬열은 나의 입맞춤에 아무 말도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곧 내 두 뺨을 꽉 붙잡은 채 다시 제 입술을 포갰다. 그러다 결국 먼저 숨이 차버린 내가 버둥거리며 고개를 틀자, 찬열이 곧 제 입술을 떼어 내더니 망설임 없이 나의 연분홍색 저고리를 벗겨냈다. 깜짝 놀라 두 팔로 내 어깨를 감싸자, 찬열이 그런 나의 손을 치우더니, 곧 붉은 색 치마를 벗겨내고 그 안의 속치마로 손을 뻗었다. 그러더니 잠시 행동을 멈춘 찬열은 부끄러워서 잔뜩 빨개진 내 얼굴을 보며 씨익 웃었다. 뭐, 뭐야. 내가 불만스럽게 말을 내뱉자 찬열이 큭큭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화과국 황제에게 이어지는 기운은 애(愛)라고 한다지?”
“그, 그게 왜…….”
“기대 하라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네가 됐다고 거절해도 넘칠 때까지 사랑해줄 테니까.”
순간 말문이 막혔다. 몸의 언약. 그것은 굉장히 조심스럽고도 은밀한, 동시에 몰랐던 쾌감을 깨워주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는 아무런 생각도 안 들었는데, 지금 들어보니 꽤나 야릇한 단어구나. 나는 찬열의 목을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땀방울이 얽히고 밤이 깊어질 때쯤, 나는 잠이 들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그때 마저 이야기하자. 나를 달래는 듯한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손길을 끌어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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