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첫사랑을 런던에서 마주칠 확률은?
BGM 추천
4. 겁쟁이 ▶ 아이유 - 이런 엔딩
5. 달이 참 밝아요 ▶ RM&V - 네 시
번외 4. 겁쟁이
대입 하나만 바라보고 처절하게 달렸던 열아홉이 무색하게도, 자퇴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리 오래 다니지도 않았을 뿐더러 좋은 기억보다는 치가 떨리도록 괴로운 기억들이 더 많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나름 정이 많이 들었던 건지 1년 조금 넘게 사용했던 캐비닛을 비우고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입학식 날 박지민이랑 누가 먼저 연애하나 하고 내기했었던 벤치에 혼자 다시 앉았다. 내기는 내가 진 건가.
내가 군대에 갔던 2년간 조금이라도 바뀌지 않았을까 했던 현실은 눈물이 날 정도로 그대로였고, 억울한 사람 하나에게 누명을 씌워 벼랑 끝까지 내몰던 나의 고고한 캠퍼스 또한 여전히 건재했다. 이 학교 진짜 가고 싶었었는데. 예비도 못 받았다가 기적적으로 붙어서 진짜 얼마나 기뻐했었는데. 졸업식 날 김여주한테 알려주면서 이 정도면 고백할 자격 정도는 있는 거 아니냐고 하려고 했었는데.
이젠 더 이상 나의 캠퍼스가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 아니, 사실 꽤나 씁쓸했다. 막 입학해 이런저런 로망에 부풀었던 신입생이 띄운 비행기는 제대로 날아보기도 전에 추락해 산산이 조각났다. 그리고 비행기를 날린 꿈이 많았던 신입생은 꿈을 잃은 자퇴생이 되었지. 내가 생각해도 진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바보같은 새끼. 미련한 새끼. 그거 조금 더 버텨보지. 조금만 더 해보지. 졸업장이라도 따지. 마음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던 채찍질은 현실의 가혹함에 무력화되기 일쑤였다. 그 지옥같은 곳에서, 악마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난 매 초마다 난간에서 떠밀렸으니까.
자퇴서를 제출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벤치 근처의 잔디밭 위에서 핸드폰을 들고 뛰어다니는 한 쌍의 연인이 눈에 들어왔다. 한 사람이 얼굴이 새빨개져서 내놓으라며 폴짝거리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팔을 더 위로 뻗는 다른 한 사람.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여주야, 진짜 웃기지 않냐. 문득 그 위로 교복을 입은 너와 나의 모습이 겹쳐보이는 거 있지. 이제 와서 내가 무슨 염치로, 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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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하고 난 뒤 마치 인사 한 번 하지 않았던 사이인 것 마냥 뚝 끊겨버린 연락에 섭섭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치만, 그 날 네그 울음을 고스란히 들었는데 내가 너한테 어떻게 먼저 연락 할 수 있겠어.
“ 지미나, 뭐 해. “
“ 태형아 미안한, 데 지금 내가 전화 할 상황이... "
“ 김, 김태... 나쁜 새끼... 흐, 윽... 내가... 내가 얼마나... "
내가, 어떻게...
" 아... "
“ ... "
" 태형아 이거, 이거는... "
" 어? 주변 시끄러워서 잘 안 들리네. 이따 다시 연락할게. “
" 어, 어어... 이따 카톡하면 전화 줘. "
군대에 갔다가 첫 휴가를 받은 날, 저녁에 술이라도 같이 할까 싶어서 한 전화에선 박지민의 다급한 말투와 함께 서러운 울음소리가 함께 흘러들어왔다. 물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내뱉은 이름은 온전치 못했어도, 멀쩡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훈련소에 있는 내내 너무나 그리웠던 그 목소리를 내가 착각할 리 없었다.
아마 맨 뒤 글자가 잘려나간 그 이름의 주인은 나겠지.
마지막으로 그 애가 왜 우는지까지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친해진 건 고등학교 끝 무렵이었지만, 네가 잘 울지 않는 성격이라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중학교 가정 실습 때 뜨거운 물을 손에 엎질러 손이 새빨개지도록 화상을 입어 응급실에 다녀왔는데도 인상을 찌푸릴 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던 옆 반 여자애, 졸업식 때도 묵묵히 친구들을 달래주던 그 애, 나 때문에 괜한 소문에 휩싸였을 때도 글썽거리지조차 않았던 김여주. 그랬던 애가 운다. 그것도 몹시 서럽게, 말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 할 정도로, 나 때문에, ... 두 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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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후 지민이네 동아리 애들이 간 캠프에서 네가 나 때문에 펑펑 울었던 일은 굳이 박지민을 통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엔네가 울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이내 너도 날 좋아했었고, 그때 네 손에 들려있던 그 편지의 주인이 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는 나도 정말 울고싶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절망적이었던 건 박지민과 함께 카페에 갔을 때 지민이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그 애에게서 왔던 카톡이었다. 내 이야기를 들으면 힘들다, 고.
그때 난 어쩌면 너는 다시 손을 내밀어 올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비록, 그 작은 바람은 무참히 짓밟혀 버렸지만. 나를 기다리기는 커녕, 이야기를 전해듣는 것조차 너에게는 힘든 일이구나. 나는 이만큼이나 널 아프게 하는 존재구나.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나쁜 일들은 희미해지고 좋은 인연으로 기억되길 바랐다. 내가 너의 첫사랑이듯, 너도 나의 첫사랑이니까. 너로 인해 처음 느껴보는 감정들을 하나 둘 배워나갈 즈음에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부정해보려 부던히도 노력했건만, 공식을 거스르기가 이렇게까지 힘들 줄이야. 나는 너만 생각하면 세상이 말랑말랑하게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하니까, 너도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엇비슷하길 바랐다. 나를 떠올릴 때 말랑하진 않아도 아프지는 않기를, 그래도 옅은 미소 정도는 지을 수 있기를.
필기를 보고픈 마음 반, 너를 보고픈 마음 반에 여느때와 같이 노트를 빌리자 익숙하게 건네며 혹시라도 빠트린 부분이 있으면 채워달라는 부탁에 꼼꼼히 살펴보고 겨우 하나를 찾아내 적어놨던 어느 월요일 오후. 몇 교시 뒤 했던 말을 잊고 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이거 대체 언제 써 놓은 거냐고 놀라는 얼굴에 귀여움을 참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었던 날도,
어떤 느낌의 노래를 좋아하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ㅡ박지민이 내가 노래를 추천해줄 때마다 자기랑 취향이 완전 비슷한 애가 있으니 이제 나의 그 시끄러운 음악은 추천해주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알고 있었다.ㅡ지만 괜히 반응이 궁금해서 추천해줬던 취향 정 반대의 노래들에 진심인지 모를 긍정적인 대답을 삐걱대며 뽑아내다 나중에는 그 노래들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들썩거리는 뒷모습에 나도 모르게 멍하니 쳐다보며 실실 웃음을 흘리던 날도,
책 없는 사람은 친구랑 같이 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책상 서랍에 버젓이 있는 생윤 교과서를 없는 척 깊숙하게 쑤셔넣은 다음 양 옆에 앉아있는 친구들은 가볍게 무시한 뒤 괜히 앞자리까지 의자를 끌고간 날 옆 자리에 앉자마자 훅 풍겨오던 핸드크림 향도.
그냥 너와 함께하던 모든 날이 나에겐 봄날과도 같은 추억들이었는데 너에게는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깊숙히 꽂혀 들어오는 칼날 같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더라. 그 어떤 누군가는 왜 해보지도 못하고 지레 겁을 먹냐고 하겠지만 여주야, 이상하게 나는 네 앞에서 항상 겁쟁이가 돼버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아닌 건 죽었다 깨어나도 아닌 게 맞는데 너만 생각하면내가 지금껏 생각해왔던 모든 잣대가 무너지는 기분이야. 어떤 일이 있든지 간에 네가 다치고 아파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었고, 싫고, 싫을 거야. 설령 그 원인이 나라도.
번외 5. 달이 참 밝아요
자퇴 후, 이제 뭘 어떻게 해야할까 막막해하던 나는 재수도 알바도 아닌 여행을 택했다. 말이 여행이지, 이민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플랜이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냐는 지민이의 말에 모르겠다며 웃어보였던 것도 대답하기 껄끄러워가 아니라 나도 언제쯤 한국에 돌아가게 될지 모르겠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제일 궁금했다. 나는 언제 다시 올까?
내가 자퇴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부모님은 나를 말리지 않으셨다. 그냥 친구도 사귀고, 돈도 벌고 하면서 경험을 쌓고 오겠다는 말에 그저 건강만 잘 챙기라 웃어보이실 뿐. 솔직히 말하자면, 마음의 여유를 좀 얻고 싶었다. 부모님께 이것까진 말하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엄마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네가 제일 중요해, 태형아. 하고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다정했다. 그래서 울었다. 그냥, 너무 다정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내 편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장소를 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 나는 나중에 대학생 되면 꼭 런던 갈 거야. “
“ 왜? “
“ 그냥. 런던... 멋있잖아, 진짜 꼭 한 번은 갈 거야. “
"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
" 응. 무조건. "
무작정 가서 잘 지내며 기다리면 네가 날, '무조건' 찾아와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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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나 일어날 것 같은 일이었지만, 자꾸만 그런 운명을 기대하고 싶다는 아이같은 생각이 들었다. 괜한 고집에 여기가 아니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자꾸만 피어오르는 바람에 결국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지 어언 2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2년동안 나는 ,
“ Two latte? “
“ Yes, thank you. “
생각보다 꽤나 괜찮게 지내고 있다. 우연히 비행기에서 만난 옆 자리 한국인 아저씨와의 인연 덕분에 아저씨가 런던에서 하는 카페에 취직해 숙식과 일을 한 번에 해결했다. 카페 알바라면 한국에서 질리게 해봤지. 화려한 경력 덕에 아저씨의 카페에서의 알바는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수월했다. 같은 타임에 근무하는 친구와도 친해졌고, 쉬는 날엔 런던 이곳저곳을 목적 없이 돌아다니며 입시 때문에 잠시 접어두었던 노래도 버스킹을 통해 자주 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가다 노래를 구경하던 사람들에게 어디에서 왔냐는 물음을 받으면 매뉴얼처럼 항상 한국에서 왔노라 대답한 뒤 네가 좋아한다고 나의 핸드폰 안에 직접 넣어줬던 노래를 불렀다. 어느날 달에게 길고 긴 편지를 썼어. 너보다 환하진 않지만 작은 촛불을 켰어.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그 날, 잔잔하고 부드럽게 사각이는 느낌이 너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서 너를 닮은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난 네가 생각났다. 이런 노래 좋아하는 애가 내가 추천한 노래들은 어떻게 참고 들었는지.
“ 일본에 한 번역가가 ‘ 당신이 좋아요. ‘ 하는 구절을 부끄러워서 ‘ 달이 참 밝아요. ‘ 라고 번역했대. 되게 로맨틱하지. “
음악에는 기억으로다 담기지 않는 깊음이 스민다. 한 단어 단어를 부를 때마다 깊은 밤 푸른 달빛을 다리 삼아 붉어올 아침을 데려오는 네 모습이 머릿 속에서 일렁였다. 이 노래가 말하는 깊은 밤은 우리가 수능을 끝내고 같이 걸었던 그 밤이 아닐까, 이렇게 계속 네가 좋아하던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내 목소리를 다리 삼아 네가 내 앞에 와주지 않을까.
런던에서도 달이 참 밝아, 여주야.
6년 전 첫사랑을 런던에서 마주칠 확률은?
너는 느렸다. 걸음걸이도, 밥을 먹는 속도도, 아픔에서 벗어나오는 것도, 내 마음을 알아채는 것도. 마지막 건 아마 아직도 모르고 있을지 모른다. 함께 걷기 시작해도 항상 뒤로 뒤처지는 너에게 왜 이렇게 항상 느리다고 놀리던 예전이 기억난다. 이렇게 태어난 걸 어쩌라는 거냐며 씩씩대던 너였지만, 넌 속도는 느려도 항상 옳은 것을 고르던 네가 기억난다.
정작 문제는 나였나보다. 내가 너를 이렇게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돌이키지 못할 이제서야 깨달았으니.
진작에 알았다면 너를 놓치지 않았을텐데,
진작에 안았다면 너를 놓치지 않았을텐데.
오랜만이에요.. 너무 늦게 왔죠;; 머쓱키토
댓글에 존버한다고 달아주셨던 분들... ㅋㅋㅋㅋ큐ㅠㅠㅠ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하핫
오랜만에 왔는데 분량이 별로 없어서 죄송하네요 힝 짤도 좀 넣고 싶었는데 죄다 태형이 독백이라 마땅한 포인또가... 그래서 그냥 마지막에 넣었습니다 초ㅑ!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이번 편도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하투하투하투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