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읏차." 문과대 5층, 학과 소품실 구석에 무질서하게 쌓여있던 요리도구들을 들어올리자 식기들이 부딪치면서 챙 챙 듣기 싫은 소리를 낸다. ..마지막으로 썼던 게 언제드라, 저번 1학기 때 바자회였던가? ..그 때 해묵은 기름기, 검댕이들 벗겨내느라 엄청 고생했는데- 그래도 미리 씻어서 보관해놔서 그런지 이번에는 도구들 상태가 양호하다. 피부가 타들어갈 듯이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 대학교 2학기는 지금 축제시즌이다. 오늘부터 내가 다니는 대학교도 축제를 개최했고, 학과 학생들 모두가 문과대 앞 잔디광장에 모여 천막을 치느라 분주했다. 보통은 남자애들이 천막을 치거나 짐을 옮기는, 주로 힘을 쓰는 일들을 한다면 여자애들은 저녁 때 다 같이 먹고 마실 수 있는 음식들을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그 때문에 내가 지금 이렇게 요리에 필요한 도구들을 옮기려고 소품실까지 올라온 건데, ....양이 너무 많다. 무게도 장난이 아니고. '...이거 나 혼자서는 무린데.' 광장에서 여기까지는 약 10분 거리. 그리고 그 사이에 계단이 장난이 아니다. ...아무래도 몇 번 왔다갔다 해야 할 것 같은데, 이걸 어쩌지. 평소에 그냥 느긋하게 걸어 올라와도 숨이 차서 헉헉대고 다리에 약간의 근육통마저 오는 저질 체력인 나인데. 핸드폰도, 핸드폰이 들어 있는 가방도 광장에 두고 와서 동기들한테 연락하기도 애매한 상황. 일단 들고 갈 수 있을 만큼만 들고 가서 애들을 한 두 명 더 데려와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덜컹 문이 열렸다. "OOO, 여기 있어?" "...도경수?" 문을 열고는 빼꼼 얼굴을 내밀어 휙 휙 안을 살펴보는 남자애는 도경수였다. 밝은 갈색의 머리. 검고 큰 동공이 뚜렷한 눈. 170 정도의 큰 키는 아니지만 몸의 비율이 좋아서 작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하얀 과 티에 블랙 진이라는 간소한 차림이지만 그 비율 때문에 핏이 살아서 스타일이 괜찮아 보였다. "경수 너 마침 잘 왔다. 나 좀 도와줘." "안 그래도 너 도와주려고 온 거야. 준면이 형이 여기 짐이 많아서 OO 너 혼자선 힘들거라고 하길래." 아, 준면 오빠 정말 사랑합니다. 역시 우리 과의 여며니. 내 얼굴 높이까지 오는 짐들을 위태롭게 들고 있는 상태로 경수를 바라보며 혼자 들고 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감격에 젖어 장난스레 울먹거리자 그가 내 쪽으로 걸어오다말고 풋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왜 웃어?" "-아니, 너 표정이 막.." "내 표정이 뭐." "..진짜로 살았다는 얼굴? 감동해서 울기 직전인데." "아, 말도 마. 나 진짜 이거 들고 가서 또 여기까지 올라오기 싫었단 말야. 생각만해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러게 평소에 운동 좀 하지. 고딩 땐 매일 뛰었으면서." "내가? 언제?" "쉬는 시간마다 매점가느라. 니가 그 때 그렇게 먹고도 살이 안 찐 이유가 그거잖아." "....나 쉬는 시간마다 매점 안 갔거든?!" 그리고, 많이 먹지도 않았어! 어디까지나 평균 여고생의 양이었다고. 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리자 경수가 여전히 웃는 낯빛으로 그래 그래 하고는 내 머리에 손을 얹고 두어 번 쓰다듬는다. ..얘는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이 버릇은 여전하네. 도경수와 나는 중학교에서 만나 같은 고등학교를 거쳐 같은 대학교, 같은 학과까지 온 소위 말하는 소꿉친구다. 첫 만남은 귀여운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내가 당시에 키도 작고 엄청나게 귀여운 얼굴이었던 경수에게 먼저 인사하면서부터. 그 뒤로 그가 얼굴과는 전혀 매치가 안 되는 상남자 성격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경수의 인간다운 면모가 상당히 마음에 들어서, 겉모습 따위는 별로 상관없어져버렸다. 그리고 본인은 전혀 아니라고 부정은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귀여운 언행을 할 때도 많고. "무거운 건 들지 말고, 걸을 때 방해 안 될 정도만 들어. 혹시 안 보여서 넘어지면 큰 일이니까." "응." 경수의 말에 일단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우리는 서로가 들고 갈 짐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주로 부피가 크고 무게가 나가는 건 경수가, 작고 무게가 가벼운 것들은 내가 가져갔다. ....근데, 생각보다 그가 들어야 할 짐들이 무거워 보인다. "..경수야, 너 괜찮겠어?" "뭐가?" "너 짐이 좀.. 많아 보이는데. 니가 들기엔 꽤 무거울 거 같아서." 성격은 아니더라도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유약한 인상인 것도 사실이라- 혹시 그가 무리하는 것은 아닐까 조금 걱정되는 마음에 물었는데, 경수가 그런 나를 어쩐지 못마땅한 기색으로 바라보더니 내 이마에 자신의 손을 뻗어 딱 손가락을 튕긴다. ....아얏! "-아우, 아파!" "아프라고 때린 거야. -왜, 내가 이 정도도 못 들까봐?" "걱정되니까 그러지! 괜히 무리하다가 다치는 것보단 낫잖아." "그런 걱정, 하나도 안 고맙네요." 그러면서 그가 무게를 가늠해보듯이 슬쩍 들어올리는데, 빈 말은 아닌지 상자가 쉽게 들렸다. ...대학교 들어와서 꾸준히 운동하는 것 같더니, 힘도 꽤 세졌나보다.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에 돋은 힘줄과 근육이 새삼 경수가 이젠 성인 남성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와, 도경수. 갑자기 사람이 달라보여. 니가 남자는 남자였네."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얼른 짐이나 챙겨, 그만 나가게." "응. 잠깐만-" 능청스러운 내 말에 그가 픽 웃더니 옆의 책상에 짐을 올려놓으며 내게 핀잔을 줬다. 어쩐지 씁쓸한 기색이 섞인 웃음. 살짝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에 그늘이 져 어른스러운 인상을 남긴다. ....경수 얼굴이 원래 저랬었나? 대학생이 되고나서부턴 어쩐지 학생 때처럼 쉽게 어깨동무를 하거나, 손장난을 치거나 하는 일도 줄어져서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기회도 적어졌는데 이렇게 새삼 그를 보니, 확실히 변한 부분이 보였다. ...좀 더 선이 굵어진, 남자..라는 느낌. ..내가 알던 도경수의 모습이 사라진 것에 서운해진 한편으로, 낯설은 그의 모습에 새삼 '남자인 도경수'를 의식하게 된다. ...아이참, 내가 왜 이러지? 갑자기 가슴이 좀 두근대는 거 같아. "...어디 보자- 더 가져갈 건 없나?" 잡생각을 떨치듯 붕 붕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젓고는 마지막으로 챙길 짐이 있나 살펴보는데, 선반에 놓인 후라이팬이 보였다. ..저건 꼭 챙겨가야지. -근데 가까이에 가서 손을 뻗으니 생각보다 높이 위치해 있다. 잘 닿지가 않았다. 조금만 더 발돋움을 하면 꺼낼 것 같아서 딱히 경수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나는 별 생각없이 아래 칸의 선반 위에 올라섰다. ...그 선반이 나무로 되어 있고, 더 이상 제대로 된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썩어서 소품실에 처박아둔 것이라는 걸 내가 깨달았을 땐, 이미 우지끈 소리를 내며 내가 균형을 잃은 뒤였다. "...아." "OOO!!" 따끔. 부서진 나무조각이 발목을 스치며 생채기를 내는 느낌과 함께 몸의 무게가 뒤로 쏠린다. 어떻게든 중심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잡히는게 없었다. ...제대로 반응을 할 새도 없이, 질끈 두 눈을 감고 앞으로 올 충격에 대비하려는데- 뒤에서 경수가 내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 "...-후." 꽈악 내 허리를 감싸안는 팔. 끌어당기는 힘. 등에 느껴지는 따뜻하고 단단한 몸. 놀란 듯 크게 쿵 쿵 거리는 심장의 진동. 귓가에 들리는 거친 숨소리. 바닥에 끌리는 신발의 소리. 낮게 내뱉은 안도의 한숨. ...그렇게 나를 품에 안고 있는 것은, 도경수였다. ....떨어지면서 놀랐던 심장이, 그 사실에 이제는 콩 콩 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겨, 경수야?" "이 바보가! 거길 왜 올라가!!" 흔들 흔들. 경수가 내게 소리칠 때마다 그에게 안긴 내 몸도 같이 떨려왔다. ....발이 땅에 닿지가 않는다. "....미, 미안. 그러면 꺼낼 수 있을 거 같아서.." "저거 낡은 거 안 보여? 날 불렀으면 됐잖아." "...내가 할 수 있을 줄 알았지..." "내가 진짜,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다행이 제 때에 받아내서 망정이지, 안 그랬음 너 크게 다쳤을 수도 있었어." "...으,응. 미안. ...고마워 경수야."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이제 나 좀.. 내려주지 않을래..? 경수와는 오랜 시간을 친하게 지내온 친구지만, 이런 식으로 안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지금 내 허리를 감고 있는 그의 두 팔이 지나치게 의식이 되어서 얼굴마저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경수가 나보다 크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완전히 그의 품 안에 폭삭 안기게 되는 형태가 되자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심장이 세차게 뛴다. "....저기, 경수야." "...진짜 내가, OO 너 때문에-" "...." 꽉 허리를 조이며 경수가 좀 더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목덜미를 간질이는 머리카락. 툭 가볍게 어깨에 얹히는 도경수의 머리. 길게 내쉬는 한숨이 등줄기를 스치며 일순, 소름이 돋았다. 두근두근두근.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주 잠시동안 나를 그렇게 안고 있던 경수가 이내 조심스럽게 나를 내려놔주었다. ...으으, 어떡하지. 부끄러운 마음에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질 못하겠다. "...어디 다친 덴 없지?" "....응." "그래, 다행이다. 앞으로는 조심해 진짜." "...응. -고마워." 툭. 숙여진 내 머리 위로 그가 손을 얹으며 부드럽게 쓰다듬는게 느껴졌다. ...아마도 다정하게 웃고 있을 경수의 얼굴을, 내 붉어진 얼굴이 들킬까봐 나는 그 뒤로 꽤 오랫동안 얼굴을 들지 못했다. 후다닥. 잔디광장에 놓인 천막 안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달려가버리는 여자의 뒷모습을 경수가 시선으로만 쫓는다. 가을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 붉게 상기된 뺨, 빨개진 귀. ...그렇게 고개 숙이고 있어봤자, 보일 건 다 보인다. "-하여간, 아직 순진하다니까." 피식 웃음을 흘리는 그의 얼굴은 상대를 향한 애정으로 다정하다. 웃음기가 스며들어 부드럽게 휘어진 눈으로 경수는 학생들 틈에 섞여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집스레 다른 곳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지만, 이 쪽을 의식해서 그런다는 것을 안다. ...그런 그녀가, 참 귀여웠다. "....-" 품 안에 느껴지던 무게. 다가오던 온기. 확 풍겨오던 그녀만의 향기. 놓고 싶지 않았던, 두 팔에 안긴 사랑스러운 여자. 한순간이지만 그에게 다가왔던 그 충만함을 다시 상기하며, 경수는 두근 두근 기분 좋은 울림을 내고 있는 심장 부근을 살짝 움켜쥐었다. ...이제는 낯설지만은 않은 느낌. 익숙한 감정.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자신을 그녀가 의식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동안 참아왔던 마음이 확 터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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