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열병
01
그날은 아마 노을이 예뻤던 날이었던 것 같다. 아, 그 애는 솔직히 말해서 그저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공부도 잘했고, 잘생긴 외모에 인기도 좋았으며, 부모님 잘 만나 집안 배경까지 훌륭했으며, 성격도 싹싹하니 좋아 선생님들의 사랑과 아낌을 한 몸에 받았었다. 이게 다냐고? 아니 더 있다. 그 애는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니었다. 이게 뭐 어쨌냐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언어 구사력은 나보다 더 뛰어났으며, 덤으로 운동까지 잘하던 아이. 그 아이는 모든 면에서 나보다 한참 월등했다. 도대체가 이런 아이였는데 내가 성자가 아니고서야 열등감을 가지지 않을 수가. 높고 단단한 장벽을 이기려고 금방 어장을 벗어나 꼬리를 치며 팔딱대는 바보 같은 물고기의 모습은 참 웃겼을거다. 물론 그 물고기가 바로 나고. 근데 다시 말하지만 그 애는 나를 좋아했다.
"뭐야 이렇게 보면 진짜 열등감에 쩔어서..그냥 무능력한 사람으로 보이잖아. 아 몰라 몰라."
아무튼 그날은 노을이 참 예뻤다. 그 애의 이름은 루한이었는데 뜻이 새벽사슴이라고 했던 것 같다. 나한테만 알려주는 거라며 눈을 반짝 빛내며 그랬었다. 그 때 좀 느낌이 이상했었다. 아마 나도 모르게 그 애를 좋아했던 복잡한 감정 중 하나였겠지. 그날 역시 그랬다. 뭔지 모를 긴장감이 감돌았고, 나 역시 바짝 긴장을 했었다. 우리는 조회대에 앉아 가을바람에 미세하게 살랑이는 인공잔디만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쑥 루한이 하얀 이어폰을 한 쪽 내밀었고 나는 화들짝 놀라 이상한 소리를 냈었다. 그리고 루한은 눈을 반달 모양으로 곱게 접어 웃으면서 내게 노래 제목을 말했었다.
'Miracles in December.'
'아..그게 제목이야?'
'어! 내가 젤 좋아하는 노래'
맞아, 루한은 제일이라는 발음을 잘 못했었다. 항상 젤 좋아해, 젤 웃겨 이런 식이였다. 진지하다가도 루한의 제일 발음을 들으면 나 혼자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그리고 항상 루한은 그런 나를 보면서 영문도 모르고 바보같이 싱글싱글 따라 웃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잘생겨서 웃다가 나도 모르게 루한 얼굴을 감상하며 넋을 놓았던 적이 많았다. 솔직히 잘생긴 건 너무 인정. 그리고 나서 루한은 내가 모를까봐 뜻까지 상냥히 알려주었다.
'12월의 기적이야.'
루한에겐 미안하지만 12월의 기저귀로 듣고 내 귀를 의심했었다. 역시 다시 생각해보니 기적이 맞는 것 같았다. 여름에 겨울 노래를 듣는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루한은 겨울을 참 좋아하나 싶었다. 그렇게 또 말없이 노래를 듣다가 루한은 뜬금없이 이 노래에서 여기 파트를 제일 좋아한다고 자세히 들어보라고 했었다. 루한이 눈을 감고 심취해서 작게 따라부르는데 솔직히 나는 얼굴이 빨개지도록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이 초라한 초능력 이젠 없었으면 좋겠어..?'
'응, 멋지지.'
'으응..멋지다아..'
말꼬리를 흐리며 손을 만지작 거리던 나는 갑자기 이상해진 느낌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루한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고, 또 다시 놀란 나는 하늘로 황급히 눈을 돌렸다. 그런 이상한 나를 보고 루한은 작게 웃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그것도 민석아, 라고. 솔직히 다른 친구놈들이 저렇게 불렀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축구공으로 머리를 세게 쳤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이상했지. 루한이 부른 내 이름은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았었다. 그것은 밥에 치약을 짜놓고 맛있다고 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생각해도 모순이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내가 조금이라도 루한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 같았다.
'..나 너 좋아해 민석아.'
'......'
'게이는 아닌데, 네가 좋아.'
그런데 참 바보 같지. 나는 루한의 그 고백을 듣고 그대로 집으로 도망쳤다. 무서워서? 이상해서? 그게 아니라면 루한이 싫어서? 아니, 그때의 나는 나를 인정하지 못해 피하기 바빴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이기적인 아이였다. 그렇게 나는 그 후로 한 번도 루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학창시절의 루한을 너무나도 그리워하고 있다.
어쩌면 내가 그 때의 루한보다 더 심하게 앓고 있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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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유지태 못알아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