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상회담/다니엘] Merry, Marry 1
written by Blacklist
"아 글쎄, 안 한다니까!" 한 번만 만나 봐, 어? 엄마도 이제 사위도 보고 좀 쉬자! 모든 집안의 외동딸들은 모두 공감할 거다. 시집 얘기. 그닥 연애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나는 그동안 나 좋다는 남자들은 코빼기도 관심을 보이지 않은 채 모두 만남을 거절해 왔다. 그때가 아마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일 것이다. "나 혼자 살 거니까, 엄마는 나 결혼 강요 하지 마." 엄마는 갓 스무 살이 된 내가 독신으로 살겠다, 으름장을 놓았던 10년 전까지만 해도 코웃음을 치며 말하셨었다. 과연 그럴 수 있겠냐고. 엄마랑 내기 하자고. "체. 야, 정여주. 엄마가 너 일이년 키우냐?" 너 서른에 결혼한다에 백 표 건다. 그것도, "체, 설마. 어떤 구린 남정네가 서른 살 늙고 돈도 없는 여자한테 청혼을 해?" 우리 집에 돈 벌어다 줄 남자 자알, 만나서. 그때가 2004년이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물론 나는 서른이고, 하고 싶은 일 하며 살고 있다. 시집도 안 갔다. 야속하게도 달라진 건 없었다. 어렸을 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던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지도 않았고, 그로 인해 기울었던 가정 형편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내가 남자들을 싫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결혼할 땐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한다더니, 여자들보다 8년이나 못 산다며? 그래도 뭐 잘 살아. 20대가 끝나가며 하나둘씩 결혼한 친구들에게 늘 하던 말이었다. 사실 아예 결혼할 기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죽도록 날 사랑하겠다며 날 꼬셨던 남자가 있었는데, 왜 그랬는진 모르겠으나 난 그 꼬임에 넘어갔다. 그렇게 결혼 준비를 하던 중, 왠 주말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이, 그 자식은 우리 엄마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준 결혼 자금을 건네받은 그 날 이후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만, 그 결혼 자금 1억은 우리 모녀가 죽을똥을 싸며 그러모은 전 재산이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나와 엄마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말 그대로 밥 사먹을 돈이 없어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시작한 이 일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짓이었는지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멍 때리고 뭐 해. 빨리 앉아서 밥 먹어." * "예..예.먹을게요." 다니엘 스눅스. 알 사람들은 알겠지만 한국에서도 꽤 알아주는 호주인 디자이너다. 아, 이 사람 밑에서 내가 할 일은...어. 사실, 나도 잘 모른다. 다니엘을 처음 만난 건 대충 2년 전이었다. 그러니까 그 놈에게 사기를 당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우리 집의 사정을 알고 계시는 옆집 아주머니가 주신 찬거리도 바닥이 나고, 그렇다고 더 달라고 하기엔 염치없지 않은가. 신문지 쪼가리를 들고 구직을 한다는 곳은 모두 가봤지만 고졸에, 경력도 턱없이 부족한 나를 받아주는 곳은 아무 곳도 없었다. "내 팔자도 참 개똥이다, 개똥." 그렇게 모두 퇴짜를 맞고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바람이 좀 선선하나 싶어 좋아했는데 생각하기가 무섭게 비가 툭툭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뭐 무시할 게 없어서 비도 나를 무시하나. 괜시리 화딱지가 났다. 집이나 빨리 가야지 싶어 앞만 보고 걸음을 빨리 했다. 그 순간, '빠아아아앙-'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아 가만히 서 있었다. 회의감이 들었다. 그냥 여기서 벌러덩 누워 버릴까. 그 때, 어디서 어눌한 말투의 고함이 들려왔다. 다행히 차는 급히 차선을 바꿔 비껴갔다. 나를 천당으로 보내줄 뻔 했던 커다란 트럭이 모습을 감추고, 이내 목소리의 주인공이 보였다. "야!!! 거기서 뭐 해 너!" 누구야. 낮은 남자의 목소리다. 남자니까 엄마는 아닌데. 그럼 모르는 사람이 그런 건가. 그 남자는 날 일으켜주더니, 갑자기 뭐라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생긴 건 쌩판 외국인인데. 어째 말은 나보다 더 잘하는 것 같다. "너 미쳤어? 그러다가 골로 가기라도 하면 어쩔 뻔했어!" "..네?" "어휴, 내가 미쳐. 오늘 안 그래도 파트너 모델이랑 대판 싸우고 왔는데. 오늘 재수도 아주 그냥 개똥이다. 개똥. 그냥 보질 말았어야 했어.." "......" 그러게 누가 싸우래요?... 라고 당연히 말은 못한다. 어쨌든 간에 고마운 사람이니까. 얇은 와이셔츠 위로 간간히 비치는 문신이 나를 더 쫄리게 한다. 뭐야. 고딩이야? 신종 양아친가? 아씨, 줄 돈도 없는데. "아니, 너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거.." "..저기. 고딩아." 내 지랄맞은 입은 벌써 눈을 질끈 감고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보다시피 누나의 몰골을 봐. 옷도 드러워 죽겠고, 돈도 없어 보이지? 응, 맞아. 누나가 지금 일자리도 없고 당장 길바닥에 나앉을 지도 모르는 신세거든. 구해준 건 많이 고맙지만 더 이상의 행패는 안.." 어째 주위가 조용하다. 가만히 실눈을 뜨고 앞을 보니, "..너 혹시 뭐 어디가 아파?" 고딩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퉁명스레 말을 뱉었다. "누나 말 못 들었.." "저기요, 아줌마. 저 고딩 아니거든요. 거기다 양아치라니." 뭐야. 고딩이 아니었어? 조그만 게 딱 고딩 냄새가 나는데? "네가 고딩이 아니라니." "다니엘 스눅스. 몰라요?" 어떻게 나를 몰라?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고딩,아니 그 남자의 입에서 뜻모를 영어들만 쏟아져 나왔다. 그나저나 다니엘 스눅스?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제가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러는데, 혹시 뭐 하세요?" "허. 진짜 몰라. 당황스럽네." 나. 디자이너 다니엘. 이래도 몰라? 넌 집에 티비도 없냐? "디자이너요?" "그래. 근데 아줌마, 너 일자리 없어?" 괜히 말한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싶어 흘깃 남자를 쳐다봤다.
"그냥 물어보는 얘긴데, 아줌마 모델 같은 거 해 본 적 있어?" - 독방 끌올! 많이읽어줬으면좋겠네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