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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국]나의 사랑스러운 그대에게 

 

 

 

 

 

 

01 

 

"전정국" 

"네" 

 

 

아이답지 않게 푸석한 손이 허공으로 내밀어지자 그 작은 손 안에 빵과 우유가 놓여진다. 어린 정국은 그것을 품 안에 안고 재빨리 발을 굴렀다. 저처럼 배급받으러 온 아이들이 줄 지어 선 복도를 비쩍 마른 다리로 달려 정국은 제 방으로 들어갔다. 좁은 방 안에 이층 침대가 네 개나 우겨넣어져 땅바닥에 발을 디딜 수 없어 정국은 밟는 곳마다 먼지가 터져나오는 침대 매트리스를 밟고 뛰어 제 침대로 숨어들었다. 곧장 퀘퀘한 내가 나는 이불 아래를 파고 들어간 정국은 부스럭거리는 빵봉지를 까 제 입으로 구겨넣었다. 손만큼이나 퍼석한 입술이 빵을 우걱우걱 삼키고 다급히 작은 우유를 까서 급하게 입 안에 쏟아부었다. 노릇하게 구워진 밀가루 덩어리의 구수한 냄새를 맡을 새도 없었다. 단지 입안으로 밀어넣어 삼켜버리는 일련의 과정을 마치고서야 정국은 이불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야, 너 빵 또 다 처 먹었지?" 

"개 같은 새끼" 

"너는 원장새끼가 예뻐해주잖아, 빵 더 달라고 해" 

 

 

 

급히 먹은 빵은 얹힐 기미도 없이 잘도 넘어간 듯 정국은 제법 든든하게 부른 배가 만족스러웠다. 그 짧은 행복감의 여운을 즐길 새도 없이 정국 홀로 있던 방으로 불청객들이 들어왔다. 정국이 재빨리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침대 구석으로 등을 붙이고 앉았다. 잘 먹지 못해 또래보다 작고 마른 정국과 달리 그들은 또래보다 컸고, 그만큼 힘이 셌다. 정국의 침대 한 켠에 널부러진 빈 빵 봉지와 우유곽에 그들은 분노했다. 억울했지만 아이들의 서열은 어른들의 것 만큼이나 위계적이고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들이 또래보다 크고 힘이 셀 수 있었던 기반에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빼앗겨 준 정국과 같은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정국도 배가 고팠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숨어서 먹기 시작했고 행여 그들에게 발각이 될까봐, 아니 발각되더라도 제 분량의 것을 먹지 못할까봐 급하게 먹는 것이 생존의 법칙처럼 정국에게 뿌리내렸다. 침대 위로 올라오는 아이들의 무게감때문에 여린 정국의 몸이 휘청였다. 곧이어 쏟아지는 발길질에 정국은 입을 틀어막았다. 

 

고통의 찬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서가 아닌, 제가 먹은 것이 역류해버릴까 겁 먹은 아이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복부가 걷어차여 자꾸만 토기가 올라왔다. 정국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그것을 억눌러 삼켰다. 살고 싶어, 마른 눈으로 눈물이 맺힌다. 정국의 나이 12살, 정국은 고아원에서 살고 있었다. 

 

 

 

 

 

 

 

[랩국]나의 사랑스러운 그대에게 

 

 

 

 

02 

 

 

"정국아, 너 밥 안 먹어?" 

"아, 응.나 괜찮으니까 너네 먹고 와, 나 원래 점심 잘 안 챙겨먹어" 

"야 그래도 건강 나빠지게, 너 어차피 공강이잖아.간단하게 먹자" 

"아니야, 다녀와.나 도서관에 있을게, 연락해" 

 

 

 

전공책을 품에 한아름 안아든 정국은 어느덧 20살이었다. 8년이 지난 지금이나 그때나 정국은 여리고 물렀다. 제게 밥을 함께하자며 호의를 베푸는 동기들에게 두 손을 휘휘 저어보이고서 정국은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도서관을 향했다. 비록 과모임이다 동아리다, 심지어 엠티까지도 알바라거나 집안이 엄격한 교리의 종교를 믿어서 외박은 안 된다는 이유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정국의 착한 성격과 귀여운 외모탓에 다가오는 이들은 제법 있었다. 그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을 거라는 걸 정국도 알고 있다. 단지 그러지 못할 뿐. 

 

 

도서관으로 들어선 정국은 독서실로 올라가기 전에 전공책을 품에 안은 그대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맨 안쪽 칸이 비었음을 확인하고 그곳으로 들어가 변기 커버를 닫은 정국이 그 위로 앉아 전공책을 바닥 한 켠에 조심히 내려놓고 가방을 열었다. 부스럭거리는 봉지 소리가 들려오는 것에 안으로 손을 뻗으니 익숙한 브랜드 빵 봉투가 잡혀온다. 점점 빨라지는 손놀림이 어느샌가 빵을 입안으로 구겨넣고 있었다. 마치 12살의 그 날처럼, 정국은 대여섯개 되는 빵을 몇번 씹지도 않은 채 목 뒤로 넘겼다. 아무리 익숙해졌다 해도 목 중간에서 턱턱 막혀버리는 퍽퍽함에 같이 사 온 우유를 까 마셨다. 이게 정국의 식사였다. 남 앞에서 차마 보여줄 수 없을만치 흉하고 게걸스러웠다. 입에서 넘쳐 흘러 밖으로 흐른 우유를 닦아내며 정국을 울컥 서러워지는 탓에 찡해지는 코끝을 부볐다. 아, 공부나 해야지. 납작하게 접은 우유팩과 봉지를 한꺼번에 쓰레기통으로 넣고 정국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더부룩하게 부른 배는 정국에게 살아있다는 신호였다. 급하게 먹어 트림조차 나오지 않건만은 정국은 꽤 괜찮은 식사였다고 여기며 재학생 열람실로 올라갔다. 그의 품은 지나치게 가벼웠다. 

 

 

 

"아, 전공책" 

 

 

 

가방 안에 있던 교양책을 밑줄 그어가며 읽던 정국이 대뜸 고개를 추켜 올리며 작게 속삭였다. 조용한 열람실에 울리는 정국의 속삭임에 몇몇 학우들의 눈이 정국을 향했지만 정국은 안절부절이었다. 그거 비싼데...금방 눈물이라도 날 것마냥 붉어지 눈꼬리로 제 자리에서 발딱 일어난 정국이 아까 들렀던 화장실로 직행했다. 제발, 제발 있어라. 만약 없으면 어떡하지. 다시 전공책을 사야 된다는 생각에 한 번, 지금까지 했던 필기가 날아간다는 생각에 한 번. 정국은 눈 앞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뛰는 듯한 걸음으로 화장실 문을 열어제낀 정국은 망연자실했다. 없어...어디갔지. 버젓이 제 학과와 이름이 남자치곤 정갈한 글씨로 쓰여져있는 것인데, 대체 누가 가져간걸까. 오늘 필기도 정리해야 되는데, 책은 또 언제 부르지?복잡한 머릿속이 이리저리 뒤엉킨다. 주말 알바를 구해야 할까.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다시 열람실로 들어가는 정국의 앞을 누군가 막아섰다. 수그려있던 고개 탓에 그의 가슴팍으로 정수리를 꽁 박은 정국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죄송합니다. 놀란 마음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사과의 말이 그다지 웃기지도 않건만 제 정수리에 가슴을 가격당한 남자는 뭐가 좋은지 실실 웃고 있다. 아무리 무딘 성격의 정국이라지만 전공책을 잃어버림으로써 삐뚤어진 마음은 손 쓸 도리가 없었다. 

 

 

 

"...." 

"전정국?맞지?우리 과" 

"..에?" 

"이거 니 거 잖아, 나 몰라?" 

"헐. 제 거는 맞는데...어...모르는데요" 

 

 

 

하긴, 넌 과행사를 다 빠지니까. 여유로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한 남자는 정국의 품으로 묵직한 책 두권을 안겨주며 정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흐트러지며 남자의 모습이 거미줄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문드문 가려졌다. 남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나는 기공과 과대표 김남준" 

"...아..." 

"넌 16학번 전정국, 맞지?" 

 

 

 

정국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준이 제가 흐트러뜨렸던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해주었다. 듣던대로 귀엽게 생겼구나. 다정한 목소리에 정국이 고개를 저으며 남준을 바라보던 시선을 바닥으로 고정했다. 그 모습이 첫사랑을 만난 소년처럼 수줍어서 남준은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그것이 첫만남이었다. 

 

 

 

 

 

03 

 

 

 

 

"정국아, 너 파스타 좋아해?" 

"응. 아, 아니" 

"뭐야, 좋아하는 음식 없어?왜 다 안 좋아해?" 

 

 

 

남준이 물려준 사탕을 볼을 부풀려가며 야무지게 먹는 정국에게 남준은 연신 조르듯이 물었다. 전공책에 얼굴을 파묻듯이 한 정국의 맞은 편에 앉아 턱을 팔뚝에 괴고 누운 남준, 도서관 열람실에도 이모냥 이꼴로 정국을 졸라대는 남준 탓에 다른이들의 눈총을 받고 나와 정국의 자취방으로 온 둘이었다. 정국이 한숨을 내쉬며 남준을 바라보았다. 나 먹는 거 안 좋아해. 한숨과 이어지는 탄식같은 말에 남준이 눈을 크게 떴다. 너 사람?너 사람 아니지?왜 먹는 걸 안 좋아해. 

 

 

그 말에 바람빠지게 피식 웃은 정국은 턱을 괴고 남준을 바라보았다. 그냥, 살기위해 먹는거지. 정국의 말에 남준이 눈썹을 구겼다. 이따금씩 정국이 세상을 다 산 어른처럼 굴어올때마다 드러나는 버릇이었다. 

 

 

 

"또 애어른처럼 군다, 생긴 건 교복입고 버스카드 할인이나 받게 생겨가지곤" 

"이게 뭐가 애어른이야, 진짠데?" 

"너 그래도 사탕같은 건 잘 먹잖아" 

"맛있잖아" 

"어이고, 입은 꼭 애기같으면서" 

 

 

 

툴툴거리는 남준을 향해 정국이 뭐야,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을 삐친 척 곁눈질로 흘깃거리던 남준이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앉은뱅이 책상 아래로 엇갈려있던 다리가 사라지자 눈을 동그랗게 뜬 정국의 입 안에서 사탕이 빠져나가고 남준이 허해진 입 안을 채운다.형, 형!. 다급한 정국의 부름에도 남준은 오히려 정국의 뒷덜미를 잡아 살살 눕히며 허리를 쓰다듬었다. 아아, 시험기간이잖아. 맨살에 닿아오는 듬직한 손에 정국이 칭얼거려 보지만 이미 바닥에 눕혀진 뒤였다. 둘은 제법 뜨겁게 사랑하는 중이었다. 정국이 결국 한숨을 내쉬며 남준의 목으로 팔을 두르자 남준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정국의 얼굴 위로 뽀뽀세례를 날렸다. 

 

 

 

"아, 너 같은 게 어디서 둘러들어 왔을까" 

"몰라, 바보야" 

"어쭈 바보?형한테 바보?" 

"아, 간지러워!" 

 

 

 

04 

 

 

"가자, 응?" 

"나 알바.." 

"하루만, 응?" 

 

 

 

정국은 난처했다. 남준은 제가 순전히 단체행동을 싫어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고, 이미 남준에게 자취를 하는 것과 알바시간을 다 꿰이고 있어 어찌 변명할 거리도 없었다. 정국의 자취방에 마주보고 누운 둘은 시험이 끝난 후에 가게 될 엠티에 대해 실랑이 중이었다. 안 가겠다는 정국과 꼭 같이 가자는 남준의 사소한 말싸움은 거의 남준이 졸라대고 정국이 도리질치는 것의 반복이었다. 정국과 꼭 가고 싶다는 둥, 자길 노리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아냐는 둥, 종국에는 그냥 같이 가자고 졸라대는 중이다. 한 시간째 계속되는 설득에 정국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정국의 대답에 남준이 누운 채 만세를 부르고 정국을 껴안았다. 잔뜩 신이 난 남준에게 아무것도 먹지 않을 거라는 뒷말을 삼켜두고 허리를 마주 안은 정국이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부터 막막하다. 

 

 

 

05 

 

 

엠티를 가는 당일이었다. 집앞까지 쫄래쫄래 저를 데리러 온 남준과 나란히 버스에 타서 정국은 가방 깊숙히 숨겨온 빵봉지를 들키면 어쩌지, 연신 걱정투성이였다. 그 옆에서 남준은 신난듯 열린 창문 밖을 바라보며 콧노래를 불러댔다. 학교까지는 제법 멀었기에 정국은 남준의 어깨로 고개를 기댔다. 남준이 피식 웃으며 정국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자도 돼. 다정한 목소리에 정국이 가방을 꼭 끌어안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가지 않아 잠이 몰려왔다. 남준도 졸린 듯 정국의 정수리로 볼을 기대왔다. 한산한 아침 버스 맨뒷자리에서 둘은 둘 만의 세상이었다. 지나치지 않은 볕도, 열린 창가로 스미는 산뜻한 바람도 모두 좋았다. 머리칼이 휘날려 드러난 이마로 대뜸 입을 맞추고 실실 웃는 제 연인도, 이렇게 좋을 수 있을까. 전공책으로 이어진 인연이 여기까지 왔다. 정국은 그 날 이후로 제게 관심을 표하며 챙겨주던 남준을 밀어내던 것을 문득 떠올렸다. 

 

 

 

'정국아, 같이 밥 먹을래?' 

'아뇨' 

'왜, 형이 사줄게' 

'괜찮아요.' 

 

 

'정국아, 좋아하는 사람 있어?' 

'없어요' 

'형은 어때?' 

'저 여자 좋아하는데요' 

'좋아하는 사람 없다며!' 

 

 

'야 전정국' 

'네?' 

'귀엽다. 눈 땡그란 거 봐' 

'차라리 잘 생긴거라고 해주세요.' 

'어쭈' 

 

 

'정국아' 

'네' 

'반말해 그냥, 내가 불편해' 

'싫어요' 

'그래..니 멋대로 해라' 

'응' 

 

 

 

푸스스 기분좋은 웃음을 짓는 정국에 남준이 정수리에 기댔던 고개를 떼어내고 정국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야, 왜 웃어. 정국이 남준의 허리를 힘있게 껴안았다. 

 

 

 

"어디서 형 같은 사람이 굴러들어왔지?" 

"뭐?" 

"호박이 넝쿨째 굴러왔네" 

"어쭈, 전정국 이제 형이랑 맞 먹어?응?" 

 

 

 

티격태격대는 둘의 얼굴 위에는 여전히 웃음이 가득하다. 정국은 늘 생각했다. 어쩌면 이건 참 꿈만 같은 일이라고. 학생들을 실은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소란스럽게 버스를 하차하는 와중에 정국을 옆에 세워둔 남준이 학생들을 이끌었다. 너는 이거 들고 가고, 여자 숙소는 저기고, 하며 저도 묵직한 박스를 든 남준이 정국에게 간단한 식자재가 든 작은 박스를 들려주며 손을 내밀었다. 우리도 들어가자. 정국이 그 손을 마주잡고 펜션으로 들어섰다. 정국의 첫번째 여행이었다. 

 

 

 

 

06 

 

 

 

정국은 처음 접한 엠티가 조금은 어색했다. 근처 계곡에서 한바탕 물놀이를 마친 후 한 명도 빠지지 않은 탓에 50명을 꽉꽉 채운 인원이 소수 인원인 여자들에 비해 머릿수가 많아 널널한 남자 숙소에 모여든 탓에 넓다란 거실이 가득 차있었다. 거기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는 단연 정국이었다. 조모임이에야 겨우 참석하는 정국의 엠티 첫 나들이는 모든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올, 정국이, 웬일이야?. 짖궃은 놀림에도 허허 웃는 정국에 다른 이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같이 오면 얼마나 좋냐는 둥, 자주자주 참석하라는 둥, 친해지고 싶다는 그런 류의 호의적인 말들에 정국은 정말 기분좋게 활짝 웃었다. 그런 정국의 옆에 앉아 호선으로 그려지는 입을 따라 부풀어오른 동그란 볼을 바라보던 남준이 술을 꺼내오기 시작했다. 

 

 

 

계곡에서 논 탓에 온 몸이 나른한 와중에 정국은 제 앞으로 내밀어지는 술잔에 정신을 차릴 틈이 없었다. 첫 엠티가 무색하게 정국은 잘 어울리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옆에 지키고 선 남준의 역할이 크긴 했으나 사글한 웃음에 무슨 말이든 들어주고 호응해주는 정국의 다정스런 태도도 한 몫했다. 남준은 엠티만 언급하면 질색하며 고개를 젓던 정국의 모습과 종이컵을 양 손으로 그러쥐고 동기들과의 만담에 빠져 함박웃음 짓는 정국이 오버랩되어 피식 웃어버렸다. 좋아할거면서, 하고는 벌써부터 주정을 부리기 시작한 다른 학우들을 챙기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07 

 

 

 

"정국아, 누나라고 해봐" 

"네?" 

"누나, 응?, 밑에 학번 중에 너처럼 귀여운 애가 없었는데, 이제까지 엠티 안 왔던 거야?" 

"아, 네..." 

 

 

 

정국은 동그란 눈을 떼구르르 굴렸다. 동기들과 떠들며 술을 홀짝이던 와중에 과 선배들이 깜짝 방문했고, 그 중 밑학번 남자들을 이리저리 찔러보기로 유명한 여선배에게 걸려 쩔쩔매는 중이었다. 제 옆에 있던 남준은 어딜 갔는지 여선배에게 손목이 잡혀 옴쌀달싹도 못하는 정국은 펜션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남준을 찾기 바빴다. 

 

 

 

"다음부터는 자주 와, 응?, 누나가 예뻐해줄게, 우쭈쭈-" 

"네, 네, 저 화장실 좀.." 

"어디를!, 누나 술 받고 가야지!" 

 

 

 

정국은 아침에 속을 게워낸 탓에 빈속이었다. 위액에 따끔거리는 목을 타고 이미 한 병에 다다르는 술이 흘려보내진 후였다. 더이상 마셨다간 다시 속을 게워낼 것만 같아 정국은 그 손을 거부하려 두 손을 휘휘 저었으나 그게 여선배의 손을 쳤던 모양인지 종이컵에 담겨있던 술이 바닥을 적셨다. 왁자지껄한 와중에 정국과 여선배 사이에만 싸늘한 정적이 맴돌았다. 

 

 

 

"아, 저는, 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싫으면 말로 해야지, 너 진짜 쓰레기구나?" 

"네?, 아...그게 아니라요..." 

 

 

 

술김에 잔뜩 화난 목소리가 정국의 귀를 파고 들었다. 그 와중에도 정국은 눈을 굴려 남준을 찾았다. 형, 어디갔어...울 것 같은 와중에 뒤에서 익숙한 손길이 닿아왔다. 

 

 

 

"누나, 애 술 몸에 안 맞아서 많이 마시면 안돼요." 

"아, 뭐야....남준이가 아끼는 동생이야?" 

"네, 누나 애 제가 데려가도 되죠?" 

"그래, 그래, 동생 나중에 또 봐" 

 

 

 

저에게 손을 흔드는 여선배를 향해 고개를 꾸벅인 정국이 남준에 손에 이끌려 거실을 벗어났다. 점차 조용해지는 주위에 정국이 제 손목을 잡고 앞장서는 남준의 등을 바라보았다. 참, 듬직하다. 

 

 

 

 

08 

 

 

처음에는 당황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남준은 정국이 쩔쩔매는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난처한 표정으로 종이컵을 연신 홀짝이는 모습이 처음보는 것이라 마냥 새롭고 귀여워서 지켜보던 중이었다. 허나 술잔이 의도치않게 밀쳐지면서 싸해지는 분위기에 당황한 정국이 저를 찾으려 눈을 굴리는 것을 더이상 지켜보지만은 못하고 남준이 나섰다. 

 

 

 

"많이 당황했어?" 

 

 

 

자신이 나타나자 순한 얼굴 위로 피어오르던 안도감과 반가움같은 감정들을 본 남준은 제법 뿌듯했다. 나긋하게 물으며 어깨를 감싸오는 남준에 정국이 어리광처럼 남준의 허리께로 얼굴을 부볐다. 그런 정국을 방으로 이끌어 과대표의 권력남용 끝에 얻어낸 침대로 눕힌 남준이 그 옆으로 몸을 낑겨 누웠다. 정국이 새끼강아지 마냥 남준의 품을 파고들었다. 

 

 

 

"눈은 커다래져 가지고, 형 오니까 그렇게 반가웠어요?" 

"깜짝 놀랐단 말이야, 놀리지마" 

"그래도 기분 좋다, 예전에는 나한테 눈길도 안 주더니. 이제는 나만 찾잖아" 

"...뭐야, 오글거려.." 

"왜, 난 좋은데. 귀여워" 

 

 

 

부끄러운지 얼굴을 숨기려는 것을 끌어내어 이마로 입을 맞추니 분홍빛으로 볼을 붉힌다. 불이 꺼져 어두운 방 안, 남준이 천천히 정국의 등을 감싸안으며 입술을 부딪혔다. 끔뻑이던 눈망울이 남준의 얼굴이 다가옴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에 끙끙거리는 정국의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아 허리를 더듬던 남준의 손이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다급하게 떨어져 나갔다.  

 

 

 

"남준 선배, 07학번 선배랑 16학번이랑 싸움났어요. 선배가 오셔야 될 것 같은데..." 

"아, 어. 갈게, 먼저 내려가 있어" 

 

 

 

행여 들켰을새라 정국의 머리를 손으로 감싸 제 품으로 숨긴 남준이 머쓱하게 웃으며 정국의 이마로 입을 맞추었다. 금방 올게, 졸리면 자. 침대를 벗어나는 남준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국이 무거운 눈을 감았다. 피곤함이 온 몸을 덮쳐오는 듯해 이불을 얼굴께까지 끌어올린 정국이 잠을 청했다.  

 

 

 

"진짜 자네, 배도 안 고픈가." 

"형, 정국이는 왜 침대에서 재워줘요?" 

"침대 넓은데 저희도 껴주세요!" 

"어쭈, 발 치워" 

 

 

 

그다지 심각하지는 않았던 싸움을 마무리하고 흥이 깨져버린 술자리가 파하자 모두 자러가거나 거실에 모여 티비를 보는 분위기에 남준은 곧장 방으로 향했다. 그 뒤를 따라온 후배 몇몇이 침대에 곤히 잠 든 정국이 부러웠는지 침대로 발을 우겨넣었으나 남준의 저지로 바닥에 이불을 핀지 오래였다. 널부러진 것들을 정리하다가 문득 정국이 입에 댄 거라곤 술 몇 잔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남준이 남은 고기에 양념을 해 볶음밥을 해왔건만 피곤함이 묻어나는 얼굴은 잠이 들어있었다. 그릇에 비닐봉지를 덮어 침대 옆 테이블로 올려놓고 남준이 정국이 덮은 이불을 파고 들었다.  

 

 

불이 꺼진 탓에 보이지 않겠지만 혹시나 모르니 가까이 붙어 눕지는 못하고 손을 감싸 잡은 남준이 꿈나라에 빠져 있을 정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자. 낮게 속삭이는 말에 정국이 꿈틀거리며 남준의 품을 파고들었고, 남준도 에라 모르겠다 싶어 정국의 머리 아래로 팔을 끼워 베개를 해주었다. 비누 냄새. 잠시 정국의 머리칼 사이로 얼굴을 묻어 킁킁거리던 남준이 은은한 향에 비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아...배고파" 

"......" 

"몇시야..." 

 

 

 

모든 이가 잠 든 새벽녘에 잠을 깬 정국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었다. 제게 팔베개를 해주던 남준의 품을 조심스럽게 벗어나 이리저리 널부러진 사람들을 조심조심 피해가며 짐가방이 모인 곳에서 자신의 백팩을 꺼냈다. 꼼지락거리며 가방을 통째로 품에 안은 정국이 방을 빠져나가 남준 몰래 봐둔 구석진 화장실로 향해 문을 잠구었다. 혹 상하지 않았을까 싶어 미지근해진 우유와 빵의 냄새를 맡다 결국 허기를 참지 못하고 입으로 우겨넣었다. 술로 인해 뒤집어진 속은 고사하고 미친듯이 배가 고팠다. 결국 아침에 구매한 빵 7개와 500미리 우유를 해치우고 나서야 입안으로 우겨넣는 걸 멈춘 정국이었다. 더부룩한 배에 안정감을 느끼며 바닥에 널부러진 가방을 주우려 손을 뻗는 중이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건. 

 

 

 

"정국아, 뭐해, 여기서" 

"......" 

"문 열어봐, 안에서 뭐해?" 

 

 

 

남준이었다. 당황한 정국이 바닥으로 엉덩방아를 찧어 둔탁한 소리를 내자 남준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정국아, 형이야, 문 열어봐. 쿵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국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옴을 느꼈다. 삭막한 방 안, 매트리스의 먼지를 들이마쉬며 살고자 발버둥치던 어린 정국은 이미 커버렸는데도 아직 제자리를 걷는 중인 마음 한 구석이 쿵쿵 뛰었다. 야, 너 또 빵 너 혼자 다 쳐 먹었냐. 듣기 싫은 목소리가 메아리 쳐 옴에 급작스럽게 토기가 밀려왔다. 바닥으로 널부러진 빵봉지들을 정리도 하지 못 한 정국이 다급하게 변기를 잡고 먹을 것들을 비워내기 시작했다. 

 

 

 

"정국아, 전정국" 

 

 

 

안에서 들려오는 역한 소리에 남준이 문을 거세게 두드려 보지만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분명 가방을 끌어안고 이 곳으로 들어간 정국을 보았는데. 걱정스러운 마음에 방으로 가 마스터키를 들고온 남준이 콩콩 문을 두드렸다. 정국아, 형 들어갈게. 

 

 

 

"오지마, 진짜, 안돼요." 

"왜, 왜 안 되는데." 

"형, 제발요, 제발" 

 

 

 

봉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잔뜩 젖어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옴에 남준은 결국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변기뚜껑을 내리고 다급하게 봉지들을 정리하던 정국이 남준이 들어오자 모든 동작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내가 들어오지 말랬잖아요." 

"울었어?" 

"내가 들어오자 말랬잖아!" 

 

 

 

이리저리 구겨진 빵 봉지들과 허연 우유가 흘러나오는 우유곽이 낭자하는 욕실 바닥을 딛고 위태롭게 선 정국이 여린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헤어지자고 하겠지, 추한 모습을 봤으니까. 덜덜 애처롭게 떨리는 손으로 다시 정리를 하려 바닥으로 손을 뻗는 정국에게 다가온 남준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올렸다. 붉은 입술께를 닦아준 남준이 다정하게 정국을 안아왔다.  

 

 

 

"왜 울었어, 배고프면 말해야지" 

"......" 

"왜 혼자 이러고 있어, 빵 싫다며" 

"....흐으.." 

"괜찮아, 속은 안 아파?, 먹은 것도 별로 없으면서" 

 

 

 

안정감있게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정국이 결국 왈칵 눈물을 터뜨렸다. 그리고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고아원에서 살던 열 두살의 전정국을 털어놓고, 이제껏 정국을 살게 해 온 더부룩한 포만감을 털어놓고. 욕실의 한 가운데 덩그러니 선 두 남자는 끌어안은 채 밤을 지새웠다. 정국이 이야기를 마치고 엉엉 우는 것을 달래주고, 바닥을 정리하고 나니 동이 트고 있었다. 

 

 

 

"....나 안 싫어?" 

"싫어져야 돼?" 

"...아니, 그냥...나 되게 게걸스럽게 먹고.." 

"내가 고쳐주면 되지" 

"......" 

"정국아, 밥 먹자" 

 

 

 

 

 

09 

 

 

 

"아-해" 

"씽...답답해...진짜" 

"잔말말고 아-해" 

 

 

 

아-. 남준에게 두 손이 쥐어잡힌 채 얌전히 앉은 정국이 불만을 토해냈다. 답답해!. 빠르게 씹어먹으려 하면 예민한 옆구리를 꼬집어 대는 탓에 정국은 숫자를 세어가며 천천히 밥알을 느끼듯이 씹었다. 진짜 답답해!. 어린아이처럼 틱틱거리는 정국에 결국 한 그릇 내내 이 과정을 반복한 볶움밥의 마지막 숟갈을 떠 정국에게 내밀었다. 아-. 마지막 한 술 까지 야무지게 먹은 정국이 부른 배룰 두드리자 남준이 기름기가 묻어 번들번들해진 정국의 입술로 입을 맞추었다. 

 

 

 

"잘 했어" 

"나 진짜 이렇게 고쳐?" 

"그래도 나름 효과 있지 않아?" 

 

 

 

볶음밥이 담겨있던 그릇을 싱크대러 가져다 놓은 남준이 다시 정국의 앞으로 앉았다. 둘은 여전히 연인 사이를 이어가고 있었다. 단지 식사시간이 남들보다 조금 특별할 뿐.  

 

 

 

"내일은 파스타" 

"....그걸 또 어떻게 먹이려고" 

"한 가닥씩?" 

 

 

 

너무 했어. 울상이 되어 칭얼거리는 정국에 남준이 두 손으로 볼을 감싸 입술이 톡 튀어나오도록 했다. 쪽. 가볍게 입을 맞추자 불만스럽기만 했던 얼굴이 금새 볼을 밝힌다. 귀엽네. 툭 던지듯이 말하곤 다시 입을 맞춰오는 남준에 정국이 못 이기겠다는 듯 웃으며 목으로 팔을 둘렀다. 내일도 같이 밥 먹자. 다정한 목소리에 정국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모레도 같이 밥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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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와우 삐삐 님 ㅜㅜ 기다렸어요! 다 읽고 답댓 달아야징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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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2
와 대박 겁나 진짜 삐삐 님은 백 명 중 하나 나오기도 힘들 금손입니다 ㅜㅜ 진짜 확신해요 근데 삐삐님 암호닉 안 받으세요? 이거 진짜 와... 짱이에요 너무 재밌고 표현력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실은 저 어제도 삐삐 님 글 봤다는... 어쨌든 다시 뵈어서 기뻐요!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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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3
와ㅠㅠㅠㅠㅠㅠㅠ삐삐님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보고싶었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진짜 삐삐님은 짱이세요ㅠㅠㅠㅠㅠㅠ대박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진짜 재밌네요ㅠㅠㅠㅠㅠ짱짱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잘 읽고 갑니다!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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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4
남준이 진짜 듬직하다ㅜ정국이 아픈 과거 다 잊고 남준이랑 행쇼했으면 줗겠어요 과거에 얽매여서 힘들어하는 정국이 너무 안쓰럽네요ㅜㅜ남준이가 잘 챙겨줄거라 믿습니다!근데 여선배 정말 얄밉다!!ㅋㅋㅋ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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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5
헐 잠시만요 아악 정국이 오른쪽 영업 당할 것 같애요 이게 무슨 일이야 ㅠㅜㅠㅠㅠㅠㅜㅠ
11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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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6
이제더이상글안쓰시는거에요???아진짜작가님글하나하나가다제취향이에요 ㅠ ㅠ ㅠ ㅠ
이글은특히나제인생글이될것같아요 ㅠ ㅠ정말
사랑해요작가님♡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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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7
아ㅠㅠ정국이 뭔가 안타까운데 남준이가 잘 챙겨줘서 다행이다ㅠㅠ앞으론 행복에정구가..ㅠ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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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8
와 진짜..이런 글은 처음이야...글하며 분위기하며 표현을 어쩜이리...ㅠㅠ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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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9
와... 랩국 처음 봐보는데 발렸어요ㅠㅠㅠㅠㅠㅠ 치였어ㅠㅠㅠㅠㅠㅠㅠ랩국 사랑해요ㅠㅠㅠㅠ작가님 사랑해여ㅠㅠㅠㅠ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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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0
다정한 남준이랑 귀여운 정국이 넘 잘어울려요ㅎㅎ포근하고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ㅎㅎ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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