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어느덧 첫 눈이 내렸어. 조그만 창 틈새로 스물스물 올라오는 냉기가 차갑기만 해. 잘 지내고 있는거지, 경수야?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바빌로니아. 차가워진 아스팔트 위로 내리기도 전에 녹아버리는 이 눈발을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참을 생각했어. 첫 눈이라 하기엔 그저 휘몰아치는 눈발이 너무 날카로웠거든. 그러다가 그냥, 첫 눈으로 치부하기로 했어. 첫사랑이던 첫 눈이던, '첫'이라 칭해지는 건 무엇이던 낭만적이어야 한다는 네 말과 다르게 영 멋없이 나렸던 눈발이지만,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의 문턱에서 내린다는 눈 자체가 낭만적이잖아. 바보상자에서 그렇게나 떠들어대던 겨울이 오기는 하는 건가봐. 판단능력을 흐릿하게 만들어내던 여름에 겨울이란 건 안 올줄 알았는데, 하나둘씩 알몸을 보여가는 가로수들을 보면 겨울이 벌써 한움큼은 흩뿌려진 듯 해. 벌써 세번의 봄과 세번의 여름, 세번의 가을, 두번의 겨울이 지났어. 두바퀴의 계절이 다 돌고, 세바퀴의 막을 내려가는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던 나를 탓해도 좋아. 너에게 꽃한송이 건네줄 용기도 없었던 나였잖아. 보내지도 못할 편지를 쓰기 위해 연필을 잡는데 족히 2년하고도 10개월이 걸렸어. 잘 지내고는 있는지, 환절기마다 손님처럼 찾아오던 감기는 안결렸는지, 궁금하고 묻고싶은 게 아주 많지만 아직 너의 소식을 들으며 웃음 지을만큼의 용기는 없나봐. 물음은 그냥 물음으로만 남겨 놓으려 해. 알몸이 되어버린 가로수가 아직은 많이 낯설어. 매서운 칼바람에 더욱 단단해지기는 커녕 초라하게 변해버린 가로수가 안쓰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이 가로수길이 실감나지를 않아. 어쩌면 나는, 낯설음의 근본을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는지도 몰라. 낯설은 건, 모양새가 변해버린 가로수가 아닌 혼자 걷는 이 가로수길일텐데 말이야. 따뜻했어. 같이 걸을 때마다 조심스럽게 잡아오던 손과 담쟁이덩쿨처럼 얽혀든 그 손가락이. 겨울이란 걸 하얗게 잊을만큼, 가로수가 변해버린 줄도 모를만큼. 혼자가 되어버린 이 걸음이 모든 걸 낯설게 만들었나봐. 이젠 겨울도 익숙해져야 하는 계절이 되어버린 듯 해. 많은 게 변했어. 3년이란 시간이 그리 긴 시간이 아닌데도 말이야. 너를 바래다 주기 위해 매일 걸었던 그 길도 예전같지가 않아. 캄캄함에 묻혀 서로 입술을 부비었던 그 골목엔 어느샌가 가로등이 생겼어. 새벽마다 고양이가 올라와 울어대 너를 힘들게 했던 그 담벼락엔 고양이가 올라 탈 수 없을 정도로 무성한 덩쿨이 자라났고, 눈이 오면 빙판길이 되버려 서로의 손 없이는 내려올 수 없었던 네 집 앞 내리막길엔 잡고 내려올 수 있는 길다란 손잡이가 생겼어. 모든게 변했는데, 넌 아직 그대로인 것 같아. 그래서, 너를 따라서 나도 변할 수 없는가봐. 점점 눈발이 거세지고 있어. 까만 아스팔트 위로 하얗게 쌓여가는 눈이 낭만적인 것 같아. 이정도면, 첫 눈이라고 할 수 있겠지? 보고있니, 경수야. 내가 지금 보고있는 첫 눈이 너와 함께였으면 해. 내 첫 사랑도 너였고, 첫 키스도 너였으니, 첫 눈마저도 너였으면 좋겠거든. 사실 너와 처음으로 입을 맞대었던 그 골목길에서, 부끄러웠던 건 나였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너를 보며 웃어댔지만 어쩌면 내 가슴이 가쁘게 뛰는 걸 감추려고 그랬던 걸지도 몰라. 더욱 눈발이 거세지기 전에, 얼른 편지를 끝내야 될 듯 싶어. 이러다가는, 너에게 편지를 전해주지 못할 것 같거든. 경수야. 내가 사랑하는 경수야. 잘 지내야 해. * 보내는 이, 받는 이, 어느 것 하나 적혀있지 않은 편지봉투를 경수의 납골대 안으로 밀어넣은 백현이 말없이 웃고 있는 경수의 사진을 유리너머로 쓸어내렸다. 잘 지내지.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었다. 아마 대답대신 돌아올 그 침묵에 무너질 게 뻔했으니까. 어느덧 완연한 겨울인 듯 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내리는 눈에 세상이 제 색을 찾을 틈도 없이 하얗게 물에 젖었다. 오늘도, 낭만적이야, 경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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