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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하룻밤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했다, 그는.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저기 마음 한 구석에 묻고 또 묻어서 나조차도 잊어버리고 한낱 꿈이라고 치부하기로. 그런데,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 날 밤 다정했던 그의 목소리, 나에게 웃어주던 눈, 그리고 닿았던 뜨거웠던 입술이.


교수님이 잠깐 쉬자며 강의실을 나가자마자 명수가 자리에 엎드리는 게 보였다. 어젯밤 남자 동기들끼리 술 마신다고 하더니, 속이 별로인가보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책상 사이를 지나 명수 옆자리에 살며시 앉았다. 자리 주인은 잠시 자리를 비운 듯 가방과 책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괜찮아? 나의 물음에 명수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어 하고 겨우 목소리를 낸다. 더 이상 말을 시키기도, 이대로 다시 자리에 돌아가기도 민망해 가만히 앉아있었다. 문득 내가 앉아 있는 자리에 놓여있는 책과 노트가 보였다. 남우현. 꽤 정갈한 글씨가 눈에 띄었다. 이 자리가 남우현 자리였나보다. 숨을 한 번 들이 키고 고개를 돌리니 몇 칸 떨어져 있지 않은 자리에 다른 남자 동기들과 장난치고 있는 우현이 보였다. 멍하니 그 쪽을 쳐다보는데, 순간 남우현과 눈이 마주쳤다. 남우현은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올곧게 시선을 마주해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우현을 더 이상 바라보고 있기 힘들어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정말 잊어버렸나보다. 그 날 밤을. 남우현. 이라고 적혀있는 정갈한 글씨가 다시 한 번 눈에 들어왔다. 어제 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에, 남우현도 수업을 듣기가 힘들었던지 드문드문 빠진 필기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옆에 놓여있는 펜을 집어 들고 빠진 부분에 꾹꾹 글자를 눌러써주고 있었다.


"우현이 꺼 말고, 내 꺼나 해주지 그래."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언제 일어났는지 명수가 피곤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 하고 멍청한 소리를 내고 있는데 강의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그리고 우현이 내 앞으로 걸어왔다. 낙서를 하다 들킨 애 마냥 황급히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보다시피 내 자리라서.”


돌아가야겠다. 남우현의 눈이 예쁘게 접혔다.




==========================


평소 조용하던 학교가, 축제라 오랜만에 활기를 띄었다. 과 마다 꼬치, , 분식 등 음식을 팔았고 우리과도 예외는 아니었다. 낮부터 붙잡혀 뜨거운 불판에 서 있었던 지라, 얼른 기숙사에 가서 쉬고 싶었다. 하지만 꼭 오랜만에 동기모임을 해야 한다며 몰래 기숙사로 향하던 나를 동기들은 억지로 잔디밭에 앉혔다.


이은봄은 저기 명수 옆자리에 가서 앉으면 되겠네.”

에이, 커플은 떨어트려놔야지. ”


자기들끼리 주고 받는 왁자지껄한 농담에 작게 한숨을 내쉬고 아무데나 주저앉았다. 엊그제 싸우고 연락 한 번 없는 명수 때문에 이 자리가 영 불편한 나와 달리 김명수는 계속되는 동기들의 농담에도 빙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억울한 마음에 옆에 채워져 있는 아무 종이컵이나 주워들고 그대로 쭉 들이켰다. , 이은봄 오늘 달리는데. 동기들의 환호성이 돌렸다.

내 원샷이 신호가 된 것인지, 잔을 내려놓자마자 술 게임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분위기는 더 달아올랐고, 우리는 분위기에 취하고, 술에 취했다. 사람이 많아 어물쩍 잘 넘어가던 중 결국 게임에 걸리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종이컵을 집어 드는 나를 동기들은 말리더니, 흑기사라며 명수에게 종이컵을 내밀었다. 그리고 김명수는 군말 없이 그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소원은 뭐냐며 묻는 은근한 동기들의 말에 명수는 그냥, 둘이 있을 때 따로 말하겠다며 말을 돌렸다. 여기저기 부럽다며 내 어깨를 은근히 치는 동기들에 그저 나는 웃었다. 사랑 받는 여자친구라서 부끄러워 죽겠다는 듯이.


 여기저기 잔디밭에 술을 마시던 무리들이 줄어들고 술집으로 자리를 옮기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에 내일까지 제출 기한인 전공 과제 때문에 여자동기들은 이만 돌아가겠다고 선언했고, 남자 동기들은 오늘만 산다느니, 먹고 죽자는니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남자 동기들은 나를 데려다 주고 오라며 명수를 내 쪽으로 밀고 술집으로 향했다. 조금은 술에 취한 듯 걸어오는 명수의 걸음이 살짝 흔들렸다.


데려다 줄게.”

아니 괜찮아, 기숙사 얼마 된다고. "


 나는 김명수가 술에 취한 모습이 좋았다. 무뚝뚝한 평소와 달리, 술에 취하면 조금은 다정해져서. 나를 보는 눈빛도, 나를 감싸 안는 손길도. 그래서 명수의 말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김명수가 옆에 있다면 기숙사로 향하는 얼마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나는 또 스르르 마음이 풀릴 것이었다. 우리가 왜 싸웠는지, 또 잊어 버리고. 진짜 괜찮아, 나 가볼게. 나의 거절에 무언가를 말할 듯 입술을 달싹이던 명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서 들어가, 연락하고.”


명수의 말에 나는 힘없이 웃어주고 등을 돌렸다. 더 이상 김명수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


 얼마 마시지 않았던 터라 조금은 알딸딸한 기분으로 걸어갈 때였다. 이은봄. 누군가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남우현이었다.


너는 술 마시러 안 갔어?”

몸이 좀 안 좋아서


 우현이 씩 웃으며 걸치고 있던 점퍼의 지퍼를 목까지 쭉 올렸다. 그렇구나. 남자 동기들은 다들 조금씩 서먹한 관계라 그러고 나니 할 말이 사라졌다. 빨리 나으라며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고 등을 돌릴 때였다.


이은봄, 너 나랑 술 더 안 마실래?”


먹으려고 샀는데, 혼자 먹긴 많네. 우현이 장난 스레 검은 봉지를 흔들었다.







************


 술집에 앉고 나니 그제야 후회가 되었다. 남자랑 단 둘이 술이라니. 게다가 별 친하지도 않은 남우현이랑. 평소라면 딱 잘라 거절 했을텐데, 학교 정문에서 꽤 떨어진 술집까지 남우현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따라온 내가 나조차도 이해가 안 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혼자 먹기 많아서 술 먹자 한 거 아니었어?”

에이, 처음 이은봄이랑 술 먹는 건데 과자가 말이 되나"





 턱짓으로 우현이 들고 있던 과자가 잔뜩 든 검은 봉지를 가리키자, 능글맞게 웃으며 한 쪽으로 밀어놓는다. 그러고는 남우현은 테이블 한 구석에 놓여있는 메뉴판을 집어 들어 내 쪽으로 보기 편하게 돌려 놓았다.


뭐 먹을래, 사실 여기는 탕 종류가 맛있어.”

강요는 아니고, 그냥 참고만 하라고. 우현이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냥, 네가 골라. 난 아무거나 괜찮으니까.”

그래도 돼? , 그럼 해물 짬뽕탕 어때?"

 반색하며 말하는 남우현이 재밌어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지나가는 알바생을 붙잡고 말한다. 여기, 해물 짬뽕탕 하나랑 소주 두 병이요.


김명수는 신경 쓰지마. 걔도 지금 술 마신다고 정신 없을 텐데, .”

 

 먼저 나와 있는 강냉이를 우물우물 먹으며 남우현은 팔 뒤꿈치로 소주 뒷부분을 한 번 경쾌하고 치고는 뚜껑을 땄다. 어쩌면 무작정 남우현을 따라온 건 명수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금 나 같은 건 신경 안 쓰고, 즐겁게 술 마시고 있을 김명수가 미워서. 우현이 내 잔에 소주를 붓자마자 김명수 얼굴이 둥둥 떠올라서 쭈욱 한 입에 들이키자 남우현이 깔깔 웃는다.


그래, 김명수 그 새끼가 잘못 한 거지.”

“..너도 알아?”

, 너네 싸운 거?”


 남우현은 무심히 제 잔에 소주를 붓고는, 비워진 내 잔에도 술을 채웠다. 그래, 바보 같은 질문이다. 남자 동기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것도 명수와 제일 친한 남우현이. 정말 과 사람들과 연애하는 기분은 언제나 더럽다.


“..걔 그래도 너 좋아해. 많이.”

 

 우현이 쭉 술잔을 들이키더니 내 앞에 조그만 접시에 안주를 덜어주며 말했다. 김명수가 좋아한단다. 나를 많이. 1년이 다 되어가는 남자친구의 친구에게 들은 말은 그것이었다. 그런데도, 정말 이제는 나를 많이 좋아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먼저 들었다. 명수를 먼저 좋아한 것도, 고백한 것도 그리고 더 많이 좋아하는 것도 나였다. 내가 조금만 더 잘하면,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 언젠가 나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내가 준 사랑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돌려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미련함과 오기가 지금까지 명수와 내 사이를 이끌어온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술 먹자고 한거야?"


 김명수 때문이었구나. 술 한잔씩 걸치고 나면 남우현은 본격적으로 김명수 얘기를 꺼낼 것인가 보다. 김명수가 그럴려고 그런 게 아니라, 하고 운을 떼겠지. 그 여느 친하지 않은 다른 남자 동기들처럼 꽤 친한 척을 하며.


, 그런 거 아냐. 친목도모라니까. 입학하고 김명수가 너 홀랑 데리고 가는 바람에 친해질 시간도 없었잖아. 안 그래?”


 과장되게 손사래를 치던 남우현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내 비워진 잔을 채웠다. 입학하고 일 년이 넘은 시점에서의 뜬금없는 동기의 친목에 그저 웃으며 술잔을 털어 넣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남우현 덕분에 연락 하나 오지 않는 폰을 붙잡고 기숙사 방에 처박혀 있는 신세는 면했으니 말이다.


김명수가 너 술 잘 못 마신다고 하던데, 순 지 기준이었나보네

채워주는 잔마다 입에 훌훌 털어 넣자 남우현이 휘파람을 불며 장난스레 말했다.


 술기운 덕분인지 어색했던 남우현에게 술술 농담도 나왔다.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우현은 거의 넘어갈 듯 크게 웃어줬다. 말 없이 웃을 듯 말 듯 내 말만 듣고 있는 명수와 달리, 짖궂은 농담도 기분 나쁘지 않게 느물하게 해대는 남우현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많이 웃는 것 같았다. 그리고 친목도모라는 자신의 말을 말을 철저하게 지키기로 했는지 남우현은 명수 얘기를 단 하나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남우현도 술이 꽤 들어갔는지 점점 웃음이 많아졌다. 그리고 양쪽 눈꼬리를 예쁘게 휘었다. 이제껏 남우현은 매일 웃고 다니는 애라 생각했는데 이제껏 보아왔던 남우현의 웃음은 웃는 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긴 눈꼬리가 곱게 휘고, 보조개까지 예쁘게 패였다. 순간 참 웃는 게 예쁘다고 생각했다.




너 웃는 거 예쁘구나.”


내가 하려던 말을 남우현이 입 밖으로 꺼냈다. 네가 더 예쁘다고, 말하려 했지만 어쩐지 민망해서 그저 접시에 담긴 안주를 휘휘 저었다.


한 번만 더 웃어봐."


 남우현이 손가락으로 내 눈가를 내리 눌렀다. 순간 어이가 없어서 픽 웃으니, 진짜 예쁘네 하고 중얼거린다. 술기운이 갑자기 확 뻗쳐 올라 오는 건지 가슴 속이 간질거리고 얼굴이 화끈해졌다.


지금 몇시지..?”

괜히 민망해져 가방 속을 뒤적거려 폰을 꺼내들었다. 여전히 명수에게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벌써 열두시 반이네. 기숙사 한 시까지? 슬슬 일어서자.”


 남우현도 시간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우현이 계산하러 간 사이 벗어둔 옷을 챙겨 일어서는데 많이 마셨는지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우현이 계산을 마치고 왔는지 어느새 휘청거리는 나를 옆에서 단단히 잡는다.







취했네. 들이 붓더니.”

너도 혀 꼬였거든?”

나는 오늘 몸 컨디션이 별로라서 그래.”

근데 왜 술 먹자 그랬어.”


 네가 눈 앞에 보이니까. 남우현이 푸스스 웃는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는 술집 문을 열었다. 훅 하고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앉아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한 발짝 내딛자 또 휘청거린다. 우현의 손이 어깨에 닿는다. 그리고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넘어질까봐 그래.”


 내 손에 닿은 우현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자 우현이 말한다. 그러는 저도 내딛는 한 발이 불안하다. 혼자 걸을 수 있다고 우현의 손을 뿌리칠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냥 가만히 아까 왔던 길을 천천히 내딛었다. 밤공기는 쌀쌀하고 우현의 손이 닿인 곳은 뜨겁고, 밤하늘의 별은 예뻤다.


******


, 힘들다

업힐래?"


, 넘어져도 상관없으면. 우현이 조금은 비틀거리는 자신의 발을 가리켰다.



아니, 마음이,”


마음이 힘들어. 명백한 술주정이었다. 대학 와서 술은 좋은 핑계라는 걸 깨달았다. 술기운에 그랬어. 그리고 지금 너를 뿌리치지 않은 것도 다 술기운 때문에 그래.

마음이 힘들다는 내 중얼거림에 우현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나를 감싼 팔이 더욱 단단히 감았다. 명수가 보고 싶어. 너의 웃음이 예쁘다는 말에 간질거렸던 마음, 우리밖에 없는 듯한 이 깜깜한 밤길이 어쩌면 좀 더 길었으면 하는 못된 마음을 억지로 누르기 위해 김명수를 입 밖으로 꺼냈다. 너와 함께 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는 생각하고 있다고, 김명수를내 술주정에 남우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어느덧 저 멀리 기숙사가 눈에 보였다. 오늘 예상치 못한 남우현과의 기억은 내일 일어나면 그냥 조금 부끄럽고 말, 그리고 곧 저 구석에 처 박혀 사라질 기억일 것이다. 우현의 손을 가만히 떼어냈다.

오늘 고마웠어. 다음에는 내가 살게"




요즘에는 거지라. 어질한 정신을 붙잡고 주머니를 툭툭 털어보였다. 나를 가만히 보던 남우현이 후, 하고 입바람을 한 번 불었다.



"은봄아"

우현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이 이상했다. 은봄아. 그도 취했는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들어가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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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아아아ㅠㅠㅠ 우현아 너는 정말 Love
9년 전
독자2
아 와ㅠㅠㅠㅠㅠ작가님ㅠㅠㅠㅠㅠㅠ와ㅠㅠㅠㅠㅠㅠ대박 설레ㅠㅠㅠㅠㅠㅠㅠㅠ와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9년 전
독자3
와우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설마 2편까지가 끝인건가요??ㅜㅜㅜㅜㅜ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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