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재수없게도 그날은
담배도 술도 뭣도 나를 채워줄수가 없는 날이었다
난단지 욕구불만이었는데
그 '욕구' 가 너였으리라곤
w. 어센틱
남우현
담배하나를 입에 물고 난간에 위태롭게 기대섰다. 회사에선 커피를타고 집에와선 술에 물을 탄다.
늘어난 하얀 런닝셔츠. 체크무늬 사각팬티. 까끌거리는 발뒷꿈치와 멀끔한 얼굴.
파하- 남우현은 뿌연연기를 내뿜으며 자신의 공간을 즐겼다.
김성규
가로등하나가 단촐하게 켜진 그거리는 즐비한 원룸상가들과 오피스텔, 군데군데 보이는 유흥업소들 덕분에 한층 을씨년스러워보였다.
독서실을 마치고 매일같이 걷는 이거리는 익숙해지질 않는다. 김성규는 고등학생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거지같은 교우관계때문에 야자는 때려치우고 얌전하게 혼자공부하려고 무리하게 알바를 해가며 독서실비를 충당했다.
야자를 마치고 늦게 오든 독서실을마치고 늦게 오든 이 음산한 거리가 그에게 주는 공포심은 똑같았다.
한쪽면은 원룸의 발코니로 가득 메워져 있고 다른쪽면은 거의 입지 않은 여자들이 한창끓는 고딩의 신경계를 자극할만한 포즈를 취한채 네온위에서 빛나고 있다.
김성규는 이 거리가 싫었다. 이거리 끝에 무너질듯 앉아있는 자신의 집은 더 싫었다.
남우현
노래방과, 불법성매매업소와, 술을파는 비디오방과, 도무지 용도를 알수없는 칙칙한색의 오피스텔들. 그런것들따위가 잡다한 거리가 비치는 이 발코니, 이 발코니가 좋아서 남우현은 이 거지같은 원룸을 샀다.
그는 낮엔 능력있는 회사원이었다. 말짱하니 잘생긴 얼굴과, 잔근육으로 이뤄진 튼튼한 몸과, 향기가 나는 수트와, 적당한 매너와 배려심.
여사원들은 노래마저 잘부르는 그를 동경했고, 상사들은 그를 신임했다. 더할나위없이 완벽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 인간이, 이 음탕하기 짝이없는 거리를 사랑한다.
치직, 하는소리와 함께 꽁초가 그 나간을 타고 내려갔고, 남우현은 뒤를 돌아보려다 말고 거리끝에서 잔뜩움츠린채 걸어오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김성규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꼴에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꾸벅, 코를 책상에 박고서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며 섰다. 시간을 보니 열두시. 걱정할사람도 다그칠사람도 없었지만 열한시반은 넘기지 말아야겠다던 자신과의 약속이 생각나 다급하게 가방을 챙겨 독서실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자정을 넘긴시각. 오늘도 요란하게 빛나는 그 거리를 걷는다. 그거리. 지긋지긋한 이거리. 발에 채이는 돌멩이. 여자들의 웃음소리.
다닥다닥 붙어있는 발코니. 그런것들이 보이는게 싫어 어깨를 모으고 고개를 숙인다.
나는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김성규는 여기서 벗어나고싶다.
남우현
남우현은 양면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문란한 사람은 아니었다. 여자관계가 복잡한것도 아니고, 어두컴컴한 곳의 농밀한 손짓을 원하는것도 아니었다. 그저 사람들은 더럽다고 느끼고 기분나쁘다고 느끼는것들을 보며 묘하게 안심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성정체성이나, 특이한 취향같은것에 대해 신경쓴적도 없었다.
꽁초를 던지고, 심야영화라도 볼까나 티비를 틀기위해 고개를 돌리려 했다. 거리끝에서 어떤 고딩을 봤다.
단지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