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도 잠깐만이라고 했는데...)
2.
원래 같으면 가는 길에 본인이 즐겨듣는 팝송도 틀고 창문도 반 쯤은 열고 달렸을텐데 말 없이 운전만 하는 애인을 본 순간 그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으면 좋으련만
나는 그 때까지도 바보 같이 눈치도 못 채고 있었음.
자그마한 텐트 하나 빌려서 치킨도 먹고 먹으니 나른해져서 정재현 팔 베고 누워서 유튜브 보면서 깔깔거리는데
작은 숨소리가 들려서 잠 들었나 싶었던 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재현이가 한숨을 쉬었던 것 같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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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현 무슨 일 있어?"
'...'
"무슨 말을 해줘야 알지."
슬슬 해가 져서 정리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재현이가 유독 피곤해보여서. '내가 운전할까?' 라고 물어도 대답도 안 하고, 미묘하게 평소랑 다른 공기가 신경 쓰여서
내가 뭘 잘했다고 정재현한테 그렇게 신경질을 냈음. 내 두 마디를 끝으로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한 마디도 더 안 했고 나는 먼저 내려 집으로 혼자 올라왔음
3.
저녁 8시밖에 안 됐지만 너무 지쳐서 바로 옷도 갈아입고 씻고 침대에 눕는데.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재현이는 이제 왔나보네 알게 해줬음.
나는 신경쓰기 싫어서 옆으로 돌아누워 휴대폰만 보고 있었지. 정재현이 방으로 들어오는 동시에 기분 나쁜 냄새가 묘하게 퍼지는데 순간 생각했음 담배폈구나
재현이는 담배를 잘 안 피는데 답답하거나 마음처럼 잘 안 될 때 한 번씩 피는 것 같았음. 근데 내가 담배 냄새를 많이 싫어해서 가끔 피는 것도 꼭 냄새가 빠지고서야 들어옴
애한테서 담배 냄새까지 나니까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건지 나도 답답해서 정재현이 씻는 동안에 천장만 멀뚱멀뚱 보고 있으면
언제 다 씻고 나온건지 나를 지나쳐서 거실로 나가더라.
말소리가 들리는 게 티비를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또 괜히 짜증나서 그냥 잠 들었던 것 같아
4.
침대 옆이 꺼지는 느낌이 들어서 몽롱하게 잠에 깼는데. 정재현 이게 언제 쌩 깠냐는 듯 끌어안길래 뒤척이면서 정재현을 등지고 누웠음.
작게 한숨 쉬는 소리가 뒤에서 들리더니 그냥 내가 등진 채로 안아버리더라 근데 그 순간 우리 처음 동거 시작할 때 정한 게 생각나서 그래서 다시 돌아 누웠음
돌아누워서 그냥 평소처럼 정재현한테 파고 드니까 또 그냥 평소처럼 걔도 내 등을 토닥여주는데 서운한 마음이 확 밀려왔음
"왜 그랬냐 아까. 내 말도 무시하고"
'.. 나도 서운하거든'
"...뭐가"
'난 아직도 얼굴만 봐도 좋은데, 넌 벌써 식었나 싶어서.'
"..."
'같이 나갈 생각에 설레는데 넌 그저 그래보여서'
정재현이 그렇게 말하는데 미안해서 무슨 말을 해야 될 지도 모르겠고 그냥 정재현한테 더 깊게 안겨서 재현이 등을 토닥였던 것 같아 나한테도 잘 안 들릴 만큼 작게
"아닌데.." 라고 중얼거리면서
5.
옆에서 뒤척이는 느낌이 들어서 깨니까 정재현이 안 자고 나 자는 것만 내려다보고 있는 거야. 시간을 보니까 10시인데 안 자고 이러고 있었나 싶어서 민망하기도 하고.
조심스럽게 맥주? 하고 물으니 정재현이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면서 끄덕이길래 거실로 나가서 둘이 한 캔씩 나란히 들고 쇼파에 앉았음
정말 신기한 게. 한 번 이야기 꺼내니까 쉴 새 없이 서운한 게 터져나오더라 재현이도 나도. 한 달 전 일까지도 자기도 모르게 마음 속에 담아뒀던 것들이 새어 나오는 거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얘기한 게 다음날 오전 1시가 돼서. 포옹 한 번하고 가볍게 뽀뽀도 한 번하고는 방으로 들어가서 끌어안고 잠들었던 것 같음
그 날 이후로 동거수칙에 [한 달에 한 번씩 속마음 토크하기]가 추가되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