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글을 처음 연재하게 된 작가 앤입니다. 앞으로 종종 빙의글도 쓰고 팬픽도 두루두루 쓸 생각이에요. 워낙 대단한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잘 부탁드려요!
첫 글은 그냥 빙의글로 들고 와봤어요. 남자 주인공은 각자 원하시는 분으로 대입해서 읽으시는 걸로!
아주 조심스럽고도 은밀한 만남이었다. 어둠이 깔린 후에도 꽤 오랜 시간을 몸을 낮추고 숨죽여 기다려야만 하는 그런 만남. 이윽고 저잣거리에 인적이 드문 것을 확인하고서야 거리로 나서기 직전 고개를 빼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미의 패물함에서 탐내던 장신구를 몰래 빼온 어릴 적의 날처럼 눈치를 보았다. 그러고도 모자라 혹 아는 자를 만나지는 않을지 경계를 늦추지 않고 나서야 약속한 장소로 향할 수 있었다. 대동한 이는 기억의 시작적부터 늘 함께였던 시양侍孃 이 뿐이었다.
치맛자락을 움켜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약속 장소로 향하는 내내 그곳에서 만나게 될 그 분을 떠올렸기 때문일까. 근 한 달 만에 보는 얼굴이 그 사이에 얼마나 준수하게 변하였을지 자못 설레었다. 그러다가도 저번에 주고받은 서신처럼 여즉 고뿔 때문에 편찮으신 것은 아닌지, 이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날만큼 괜찮으신 것인지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냥 이유를 알 수 없는 떨림 - 그 단정하고 상서로운 기운이 서려있는 얼굴을 두 눈에 담아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생기는 그 떨림이 다른 모든 감정을 눌러내었다.
약속 장소인 벚나무 아래에 거의 다다르자 스스로를 가리우던 쓰개치마를 벗어 잠시간 시양이에게 넘기었다. 그리고는 떨리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어 구겨벼린, 분홍치맛자락을 조심스레 펴보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간인지라 치마는커녕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겠다고 툴툴대는 시양이의 핀잔을 한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린 채 기어코 구겨진 치맛자락을 다 펴고 나서야 다시 쓰개치마를 받아들었다. 얼마만에 뵙는 것인지! 고뿔로 인하여 평소 만나던 것보다 시일이 더 지나서야 성사된 만남이었다. 저번보다 더 곱게, 해사하게 나타나고 싶었다. 혹시나 지난 한 달간 다른 여인에게 눈길이라도 주셨을까 싶어, 다음 만남까지는 이 모습만을 떠올리실 수 있게, 행여나 다른 여인을 보시더라도 그 여인의 모습에 나를 겹쳐보실 수 있게.
벚나무 코앞까지 다다르자 뒷짐을 지고 떨어지는 벚꽃잎을 바라보시는 그 옆모습이 두 눈에 들어왔다. 조금 핼쓱해지신 것도 같았으나 그 때문인지 전보다 더 날카로운 얼굴선이 강직함을 돋보이게 하였다. 그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다 문득 하염없이 겁이 났다. 사람이란 참으로 간사한 것이 막상 시야에 기다리던 이가 들어오니 한 달여간의 기다림과 하루종일 느끼던 떨림은 온데 간데 없이 그저 두려워졌다. 행여 몸이 좋지 않은 분을 어리석은 계집의 아집 때문에 무리하시게 한 것은 아닌지. 곱지 않다고 혹 실망하시지는 않을지. 그래서 채 열 발자국도 남겨놓지 않고 차마 발을 떼지 못하였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님께서 뒤를 돌아보시었다.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였던지라 님의 시선만이 오롯이 느껴졌다. 서신 하나마다 그리 절절하게 굴 때는 언제고 막상 뵙게 되니 내외라도 하는 것인지 대뜸 내외를 하는 제 주인을 보고 시양이는 남몰래 코웃음을 쳤다. 그런 시양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떨고만 있는, 수줍은 한 여인.
님이 다가오시었다. 님의 눈동자에 담긴 스스로의 모습이 부끄럽지만 참으로 황홀하여 그렇게 한참을 아무 말도 없이 서있기만 하였다. 그리고 님은 그런 제 앞의 사람을 가만히 기다려주시었다.
"혹, 고뿔이 그사이 심해지신 것은 아닐지..."
끝맺음조차 없는, 웅얼거리는 한 마디였다. 기어들어가듯 작은 그 소리를 용케 들으셨는지 님께서 고개를 저으시었다. 낭자께서 걱정해주신 덕에 그 어떤 때보다 빨리 고뿔을 털어냈다는 다정하신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부끄러운 마음에 기껏 펴놓은 치맛자락을 다시 만지작대고 있노라면 그것을 또 놓치지 않으시고 연분홍 치마와 하늘빛 저고리가 참 잘 어울린다 그리 일러주시었다. 지난 서신과 함께 받은 노리개를 하고 온 것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그 말씀은 없으시었다.
"그렇다니 다행이여요. 저번에 선물하신 노리개가 참 고와서... "
무슨 정신인지 스스로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대담하게 한 마디를 내뱉고야 말았다. 정신을 차린 후에는 너무 부끄러워서 채 말을 끝맺지 못하였다. 물론 시선은 여전히 땅을 향한 채였다. 눈치 아닌 눈치를 보는 저를 알아채셨는지 님께서는 살포시 웃으시었다.
"참으로 잘 어울리십니다. 낮에 저잣거리에서 체면 불구하고 한참을 고민하여 산 보람이 있습니다."
그 말에 그 빼어나신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저를 위한 노리개를 고르셨을 님의 모습을 생각하니 하릴없이 기쁘고 마냥 우스웠다. 서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학문에만 정진하시던 분이 대낮에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받으시며 잔뜩 진열되어 있는 노리개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마침내 하나를 집어드셨을테지. 저잣거리에 님을 모르는 이가 없거늘 그런 님을 본 노리개 장수의 표정이 아주 볼 만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혼자 속으로 웃다가 문득 님의 선물에 대한 답례를 하여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 달포간 침모가 화를 낼 정도로 귀찮게 하여 겨우 수놓은 손수건. 잘 다려진 손수건을 조심스레 님에게 내밀어보였다. 노리개에 대한 답례라는 것을 깨달은 님께서 얼굴 가득 환히 웃음을 지어보이셨다. 그것으로 지난 시일의 고생은 전부 다 잊을 수가 있을듯 하였다. 어둠이 바늘에 잔뜩 찔려 못나게 된 손을 감싸주니 그 또한 다행이었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시더니 이내 내미시는 손. 눈이 동그래지도록 놀랐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살포시 내미신 님의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손을 맞잡은 채 휘영청 밤을 밝히는 달빛과 그것을 베어내기라도 할 모양인지 하나 둘 떨어지는 벚꽃잎을 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화공이 보았다면 당장에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맞잡은 두 손이 그저 너무 신경쓰여서. 제 손에 닿아오는 저보다는 조금 더 따뜻한 체온이 자꾸 가슴을 떨리게 하여 미처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이어진 정적 가운데에서 님이 속삭이셨다.
"조만간 정식으로 댁에 매파를 보낼까 합니다. 혹 시기가 너무 빠르다고 생각되시면 더 기다릴 수야 있습니다만 굳이 혼례를 늦출 필요가 딱히 없는 듯 하여 - "
어제 저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한 길몽이라도 꾼 것일까. 순간 머리까지 올라오는 따스한 기운에 아득해졌다. 님을 뵐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다려왔던 말이었지만 귓가로 흘러들어오는 님의 음성이 참인지 차마 가늠조차 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놀란 가슴을 다독이고만 있었다.
"혹 부담이 되시었다면 너무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 말이 없는 저를 보며 님은 아직은 이르다고 판단하였다 생각하시었는지 급히 말씀을 덧붙이셨다. 그 음성에 묘한 떨림과 긴장감을 읽을 수 있었던지라 못내 즐거웠다.
"보내시기전에 소녀에게 서신으로 미리 언질이라도 주시지요, 도련님."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도도한 체를 하였다. 허나 그럼에도 살며시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막을 수는 없어 종래에는 웃음 띤 목소리로 답을 하였다. 답을 들은 님의 얼굴이 여태 본 중에 가장 활짝 피었다.
"아마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닷새 안에 연교緣橋에게 서신을 전하라 이르겠습니다. 이만 들어가시지요. 벌써 한 시진은 된 듯 합니다."
가벼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고 잡고 있던 님의 손을 머뭇거리며 놓았다. 곧 정식으로 매파가 당도하면 언제고 느낄 수 있는 체온이니 오늘은 별로 아쉬워하지 않으리라 못내 다짐하였다. 조금 전 까지 손을 잡고 있던 사람들은 어디 가고 다시 내외를 하듯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고 먼저 뒤돌아섰다. 님께선 늘 먼저 뒤를 보이시는 법이 없는 그런 분이시니. 저만치서 기다리고 있던 시양이가 눈치를 보더니 곁으로 다가왔다. 시양이에게 하는 것인지 님에게 남기는 것인지 모를 말을 하며 몇 걸음 발을 떼었다. 그리고 끝끝내 내뱉는 한 마디.
"청록색 도포가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허둥지둥 내려가는 여인을 보며 사내가 웃었다. 부끄러움을 타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저 여인은 곧 제 집 작은마님이 될 테다. 소리내어 웃는 그의 옆에서 시종 연교가 누구는 좋겠다며 입을 쭉 내밀었다.
들려오는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여인의 뺨도 붉게 물들어갔다.
댕기 위에 올려져 있던 벚꽃이 달빛 위로 살포시 떨어졌다.
1) 앵하조우櫻下遭遇 : 벚나무 아래에서 만남.
2) 시양侍孃 : 모실 시 자에 아가씨 양 자를 써서 아가씨를 모시는 계집종의 이름을 지어보았습니다. 3) 연교緣橋 : 인연 연 자에 다리 교 자를 써서 인연을 연결하는 다리라는 뜻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둘 사이의 서신을 전해주는 일등 공신인 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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