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학생. 일어나서 오늘 수업한 내용 정리해서 설명해 보세요."
"예…. 예? 아, 예! 그게…. 그러니까요" 사람은 한순간에 누군가에게 비웃음거리가 된다. 쉽게 놀림당하고 쉽게 무시당한다. 그리고 분위기 역시 쉽게 흐트러진다. 교수님이 교탁을 탁탁 치시며 마카 뚜껑을 여니 교실은 쉽게 조용해진다. 쉽다. 이렇게 쉬운데 난 뭐가 이리 어려운지 모르겠다. 어제는 분명 빡빡한 시간표 때문에 일찍 잠에 들려고 했다. 그것 역시 나는 어려웠다. 자꾸 아른거리는 그 귀여운 미소가 날 괴롭혔기 때문이다. 아, 머리가 너무 아프다. 남우현은 오늘 하루종일 연락도 없다. "10분간 쉬도록 하죠" 교수님이 나가시고 뒤이어 친구들도 앓는 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선다. 그대로 푹 책상에 엎드린 나는 어제의 둘을 다시 생각해본다. 남우현과 이성종, 이성종과 남우현. 성종에 대한 내 마음이 확실하지 않아서 더욱 혼란스럽다. 처음 봤을 때의 첫 느낌은 이상하리만큼 묘했다. 내 눈에서부터 온몸까지 쫙 퍼져갔던 묘함. 미소 한번에 발 끝부터 간지럽던 그 묘함. 단단히 미치지 않고서야 친구의 애인을…. 하…. "아 차가!"
"뭔 생각을 그렇게 해" "그냥…." 내게 음료수를 건네는 이 예쁘게 생긴 남자는 대학교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 이성열이다. 신입생 환영회 때 눈에 띄어 내가 먼저 친구를 하자고 했었다. 웬만한 여자보다 예쁘게 생겨서 번호도 자주 따이고 고백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성열이는 매번 거절하곤 했다. 자신은 연애따위 하지않는 화려한 솔로라나 뭐라나.
"이번 수업 다음에 시간 비지?" "이 다음 수업 끝나야 공강이다" "그러게 누가 시간표를 그렇게 짜래?" "내가 짠 거 아니거든요? 잔소리 할 거면 가라 형 피곤하다" "난 다음 수업 없는데, 너도 대출 부탁하고 나와라" 오호…. 그럴까? 안 그래도 배도 고프고 수업 듣기도 싫었는데 성열의 제안에 귀가 솔깃하다. 수업이 끝난 뒤 어쩔 수 없이 같이 수업 듣는 친구 중 가장 착한 친구에게 대출을 부탁했다. 수업을 빼긴 뺐는데 막상 생각해 보니 딱히 할 것도 없다.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가자"
학교 근처에 있는 순대국밥집에 갔다. 사실 순대국밥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남자 둘이 크림 스파게티를 먹으러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점심때가 지나서 그런가 식당 안은 조용했다. 안쪽에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넌 뭐 폰만 보고 앉아있냐"
"어? 아…. 뭐 그냥" "무슨 고민 있지 너?" "고민은 무슨. 너야말로 아까 수업시간에도 벙져있고" 고민이라…. 고민이라면 고민이지. 하지만 아직 내 고민을 말할 수가 없다.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급하게 성열에게 다른 질문을 했다. "넌 요즘 외롭지 않냐?"
"어? 아니" "고백도 많이 받는게 연애 좀 해봐라" "하고 싶었으면 진작 했겠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성열을 보고는 얘도 만만치 않은 고민을 안고 있는 거 같았다. '연애가 싫어요' 라는 고민이랄까? 결국엔 쓸데없는 말 때문에 분위기만 가라앉았다. 국밥이 나오고 얼마 먹지도 않았을 때 진동소리가 울렸다. 징- 징- 휴대전화기 진동소리의 주인은 성열이었다. 성열은 전화를 받자마자 표정을 확 구겼다. 또 성격 고약한 선배의 심부름인 것 같았다.
"예, 지금 바로 사서 갈게요"
"또 뭐래냐?" "아오, 아메리카노가 드시고 싶으시단다." 성열은 전부터 나와 함께 있을 때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맨날 성열한테 심부름시키는 여자 선배가 있는데 어디 있든 사오라는 건 다 사와야 하고 시키는 건 다 해야 했다. 그런 성열을 알기에 먼저 보냈다. 나 지금 짜증 나 있다는 뒷모습을 보이며 국밥집을 나갔다. 성열이 나간 뒤 난 몇 숟갈 더 떠먹다가 혼자 밥 먹는 게 얼마나 창피한 일인지 깨달은 난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난 이제 뭐하지. 대출까지 부탁했는데. 아직 수업하고 있을 시간이고 그 뒤엔 수업이 없어 널린 게 시간이다. 혼자 어디를 간단 말인가. 쓸데없이.
"어…? 명수형?!"
할 일도 없고 목적지도 없이 혼자 걷는 게 그리 쓸데없는 일은 아닌 거 같다.
* * * "근데 친구들은 다 수업 있어서 밥 먹을 사람도 없었거든요" "아, 잘됐네. 나도 친구한테 바람맞았는데." 꺄르르 웃는 게 여전히 예쁘다. 성종이는 우현과 밥을 같이 먹기로 약속을 잡아서 제시간에 나왔는데 우현이 급한 일이 생겨서 못 나간다고 연락이 왔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도 어떡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 나를 만난 거라고 했다. "와,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우리 바람맞은 사람들끼리 재밌게 놀다가요!" "그래, 그러자. 바람 맞힌 놈들 질투하도록." 농담 반, 진담 반. 사실 진담이 더 많이 섞였다. 성종이 오늘 나랑 온종일 놀았는데 너 질투 좀 해라. 그렇게 성종이와 나는 밥을 먹은 후에 시내로 나갔다. 시내 거리에는 연인들로 바글거렸다. 성종이도 내가 없었으면 우현과 저렇게 놀았겠지 생각하니 마음이 안 좋았다. 내가 더 즐겁게 해줘야겠다. 같이 있으면 즐거운 사람으로 성종이 기억 속에 남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은 거 같다.
"형, 형! 우리 오락실가요!"
. . 시내 오락실에는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선호 층이 다양했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학교가 이렇게 빨리 마치나? 불필요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성종이가 내 팔을 끌었다. 성종이 발걸음이 멈춰선 곳에는 농구공 넣는 게임기기가 있었다. 이걸 하자고?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성종이 덕에 안 하겠다는 말은 저 깊숙이 집어넣고 동전을 찾았다.
"형, 이거 더 많이 넣은 사람 소원 들어주기 해요!"
"오, 자신 있나 보지? 콜!" 그렇게 시작된 훈훈한 대학생 둘의 공 많이 넣기 내기. 성종이는 톡 치면 부러질듯한 팔로 뭔 공을 저렇게 잘 넣는지. 아, 이거 가오 다 죽는데? 결국에는 20골이나 차이가 난 체 시합은 종료되었다. 아…. 무려 소원 들어주기가 걸려있는 내기였는데 말이다.
"앗싸! 역시 내 실력은!"
"너 뭐 농구 배웠었어? 장난 아니다" "이래 봬도 저 고등학생일 때 농구부였거든요~" 성종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내 등을 툭툭 친다. 어쭈?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서 성종에게 건넸다.
"야 형이 20골이나 못 넣었다. 창피해 죽겠네"
"에이, 그래도 형 잘한 거에요! 우현이는 형보다 못하거든요"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며 우현이 얘기를하며 킥킥 웃는다. 우현의 연인이란 걸 까먹을뻔했다. 병신같이. 소원을 들어달라고는 못하지만 내심 성종의 소원이 뭔지 궁금해 물어봤다. 또 우현의 관련된 것일까 긴장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소원은 뭔데?"
"들어줄 거에요?" "너 하는 거 봐서" "헐 그런 게 어딨어요! " "알았어. 소원 말해봐" "제 소원은요! 음…. 우현이가 나 안 놀아줄 때 지금 같이 이럴 때 형이 나 놀아주는 거!" 의외였다. 성종의 소원은 오히려 내가 성종에게 하고 싶었던 부탁이었다. 이렇게 가끔 형도 좀 봐주는 거. 나도 좀 봐달라고 나한테도 오늘처럼 웃어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나는 성종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었다.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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