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아저씨를 만나게 된 건, 그러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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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새고 학교에 가는 길이었다. 비가 많이 왔고, 나는 지각을 했고, 담임은 나를 싫어했던 고등학교 3학년 초창기.
지금 생각해보면 담임이 나를 싫어했던 이유는 애어른 같은 분위기, 조금은 고지식하고 어른스러운 '척'하는 것 같은 못마땅한 태도가 아니었을까.
담임에게 어떤 소리를 들을까, 와 같은 고민 때문인지 지끈 지끈한 두통으로 시작하는
참 최고의 아침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진작에 이혼하셨다.
아버지의 잇다른 바람, 도박, 그리고 마약, 조직까지 푸근한 외모 속에 감춰진 사악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덕분에, 남자에 대한 불신도 나날히 싸여만 갔다.
그 속에서 우리 언니와 나는 매일 부둥켜 안고 울며 견뎌냈다.
하지만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결국 언니는 아빠의 몸종 역할을 견디지 못해
나를, 우리를 떠났다.
한편, 어머니는 날 신경쓸 겨를이 없을 정도로 늘 바쁜 분이셨다
집안일과 회사일, 과연 정말 '회사'일까 의문이 드는 후미진 창녀촌에서 어머니는 마담 역할을 하신다.
그래도 뭐, 결코 우리 모녀가 사이가 나쁜 건 아니다.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응, 이해....
착하고 바보같은 딸은 그냥 엄마를 마냥 이해하는 것 밖에 할 일이 없다.
그래서 아침은, 늘 외롭다.
그런데, 그 날 아침은 좀 달랐던 것 같다.
나는 창 밖에 내리는 비를 보면서도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이유는 첫째, 내가 비 맞는 것을 좋아해서기도 하고
둘째, 오늘은 학교를 가기 싫었고
셋째, 그날은 우리 언니의 기일이기도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었을까, 학교도 지나치고 주변 사람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은 채
그냥 무작정 걸었다. 목적지는 없었고,
추워질 때 쯤, 보이는 커피숍에 들어가서 핫초코를 마실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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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diesen Tagen ist das Wetter so kalt.'
'...?'
'아, 춥다고. 많이 춥죠?'
분명 외국인인데, 서툴지 않은 한국어 실력에 벙쪄 있을 때 쯤
아저씨는 빙그레 웃으며 우산을 씌웠다.
나보다 머리 두개 쯤 큰, 거센 억양의 독일어까지,
어찌보면 참 무서운 상황이었텐데 나는 그냥 멍하니 아저씨를 바라만 봤다
그러다가, 눈물이 났다.
'어, 어, 울지마요. 미안 미안.'
뭐가 미안한지, 우는 나를 달래기 바빴던 아저씨는 한 손에 우산을 쥐고 연신 내 눈물을 어루만졌다.
왜, 그런 말 있지 않나? 울 때 달래주면 더 서럽다고.
나는 내가 왜 울고 있는지도 몰랐는데, 이 아저씨가 너무 다정하게 달래줘서,
너무 오랜만에 따뜻해서, 그냥 서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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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훌쩍 거리는 내 어깨에 손을 두르고 한손에는 우산을 든 채 아저씨는 무작정 걸었다.
울어서 그런지 힘이 빠진 내 발걸음에 아저씨는 천천히 보폭을 맞춰주며,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아무말 없었지만 그냥 걸었다.
사람들은 슬로우 모션으로 지나갔고, 세상엔 나와 오늘 처음 만난, 이 초록색 눈의 아저씨 둘 뿐 인 듯이.
'잠깐만 여기 서있어요.'
작은 골목길 구석에 있는 커피숍에 다다른 아저씨와 나는 나에게 우산을 넘겨주며
잠깐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다.
처음보는 사람이었지만, 그냥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갔다.
나를 싫어하는 담임보다,
지금 쯤 남자들이랑 히히덕 거리고 있을 우리 엄마보다도 더.
어쩌면,
나를 지키려나, 되려 나를 떠나버린 못난 우리 언니보다도.
이 아저씨는 갑자기 나한테 왜 우산을 씌워주셨을까,
출근 시간일텐데 괜히 민폐는 아닐까.
오면 꼭 감사하다는 말을 드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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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쯤, 아저씨는 한 손에 핫초코를, 한 손에는 뜨거운 커피를 들고 나왔다.
'뭐, 좋아할 지 몰라서'
'...'
'싫으면 다른 거 사올게요.'
'....'
'....'
'아뇨, 감사해요.'
그리고도, 또 한참을 걸었던 것 같다.
어느새 비는 그쳐있었고, 교복은 서서히 말라 뽀송해졌다.
익숙한 길이 없어졌을 때 쯤, 어디인지 모를 큰 길이 나왔고
자주 보지도 못했던 으리으리한 빌딩숲이 가득했다.
'어...'
'....'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다니엘 린데만이에요.'
'..'
'29살'
'아..'
'너는요?'
'아 저는...'
쭈뼛거리는 내 모습에 다니엘은 눈을 휘며 웃기 바빴고,
나는 쑥쓰러움에 땅만 보며, 신발 끝을 바닥에 콕콕, 찍어대며 이야기 했다
'저는 19살, ***이에요.'
또, 한참 정적이 흐르고, 나는 땅만 보고
아저씨는 아마, 내 정수리를 감상했으려나.
큰 손이 불쑥 들어오며 악수를 청했다.
'보아하니, 학교는 글렀고, 우리 회사 가서 몸 좀 녹이고 갈래요?'
비는 그쳤고, 나에겐 사랑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