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주로 피씨로 업로드하고 모바일로 확인을 하지 않는데
모바일로 보니 경우에 따라 움짤이 잘 안뜨는 것 같습니다ㅠㅠ
혹시 안보이신다면 새로고침을 한번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때 걔, 담배는 끊었을까?
Ep09 : 스물 여섯
여기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대학교 1학년, 갓 스무살의 기억이다.
그 이후로 민윤기와의 기억은 없다.
바쁘게 기말고사 준비를 하고 방학을 하고, 2학기 개강을 했을 땐 민윤기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 그리고 1학년 1학기 과 석차 1등은 남준이었다. 모르는 것이 많다며 나에게 가르쳐달라던 남준이는 나보다 학점 평점 1점이나 높은 4.3으로 학기를 마무리했다.
축하해주는 동기들 사이에서 나와 눈이 마주친 남준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목을 쓸었다.
사실 대학이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번에 오,고 한번에 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민윤기도 수많은 스쳐가는 사람들 중 하나였을 뿐.
스무살 그 치기어린 나이엔 생각보다 많은 일이 일어나기에, 이젠 캠퍼스의 낭만을 논하기엔 너무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추억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그 시간들은 묻어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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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
몇 번의 휴학을 반복하면서 코스모스 졸업을 하게되었다.
"찍겠습니다-"
셔터에 맞춰 학사모를 힘껏 던졌다.
"축하해,"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진 학사모에 묻은 잔디를 손으로 툭툭 털며 주워 나에게 내미는 남준이의 얼굴은 순수한 그 미소 그대로였다.
"고마워, 졸업이 오긴 오는구나.."
"어, 두분 같이 찍어드릴까요?"
"아니요!"
"아니요!"
약간의 정적이 흐른 뒤 우리는 마주보며 소리내어 웃었다.
1학년이 끝나고, 남준이는 해병대에 입대했다. 아, 나중에 알게되었지만 부대에서 호석이를 만났다고 했다.
아마도 1학년 1학기가 끝나면서 바로 입대를 한 것 같다고 전해주었다.
제대를 하고나서 남준이는 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입학식 날부터 나를 좋아했었다고.
그리고 이젠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고.
물론 나는 놀라는 척을 해주었다.
"아-징그럽다, 김남준!"
"그러니까, 그땐 내가 뭘 몰라서 그랬지."
시끄러운 테이블의 한 구석에 앉아 동기들과 술을 몇 잔 마셨을까, 벌써부터 양 옆으로 몇 명이 취해갈 때쯤 남준이가 내 옆에 앉아 인사를 건넸다.
1학년 1학기 개총. 양 옆으로 앉은 남자동기들이 취해서 실수를 할까봐 조바심이 났던 김남준은 그들 사이를 굳이 비집고 들어와 잔과 수저까지 들고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고,
"탄소야 옆에 앉아도 돼?"
누군가 내 옆 자리에 앉으면 후회할 것 같았던 김남준은 비어있는 자리들을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내 옆자리에 앉았고,
"넌 해수나 지영이랑 부스구경할거지?"
"아마..? 아직 잘 모르겠어, 호석이랑 얘기..아 호석인 다른 과 내 친구!"
"남자애야?"
"응, 같은 동네 친구야"
"아,, 그래. 과제는 다 했어?"
"응? 어, 다 했어. 이번에 좀 어렵더라, 그치"
수업이 끝난 후 남준이가 먼저 일어섰다.
정호석이 누군지 몰랐지만 남자였다는 사실만으로 질투가 난 김남준은 평소답지않게 말을 돌리고 나에게 불친절한 행동을 했고,
벚꽃축제때 사진전 이벤트 있다는데
탄소 너 참가할거야?
태어나 처음으로 벚꽃길을 함께 걷고싶다고 생각한 나와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김남준은 혼자 몇 시간이나 고민을 하다 카톡을 보냈고,
그 옆에서 내 가방과 신발을 든 남준이와 동기들이 같이 뛰고 있었다.
내가 다쳤던 날 김남준은 새로 산 닥터마틴을 신고 달려 그날 밤 발에 물집이 잡혔으며,
"탄소야, 아직 안갔네?"
"아, 남준아.."
과 방을 정리하고 나온 남준이와 마주쳤고 남준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줬다.
내가 엠티를 민윤기와 함께 가게 되어 질투가 났던 김남준은 일부러 과방을 정리하는 척 하며 민윤기와 내가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고,
"동기들 중에 좋아하는 사람 있냐구."
인생에서 가장 큰 용기를 내어 물었던 김남준은 술에 취해 결국 나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사랑은 타이밍, 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얽히고 고장난 관계가 비단 민윤기와 나 뿐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느 노래가사가 그랬다. 사랑을 시작한 그 순간이 다르듯, 끝나는 것도 그런가보다고. 아마 김남준과 나도 그랬던 것, 아닐까.
물론 그 어설픈 감정을 '사랑'이었다고 정의할 생각은 없다.
"너 집은 구했다 그랬나?"
"아직, 이번에 부산가서 집보려고. 이젠 좀 쉬어야지-대학다니는 동안 내가 어디 한번 제대로 쉬기나 했니.."
"그러니까, 푹 쉬어- 나도 이젠, 자소서 첨삭도 받으러 다니고 그래야지."
"취직 끔찍해."
"그래도 넌 성공했잖아-"
"뭐, 낙하산이긴하지만?" 살짝 웃어보이자 남준이도 크게 숨을 내쉬며 웃었다.
아는 분이 소개해준 회사의 신입사원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부산에 있는 물류회사 사무직.
코스모스 졸업이라 붕 떠버린 시간은 부산에 미리 내려가 생활하며 쉬기로 했다.
서울을 떠나던 날, 호석이가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보고싶었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어색해진 이 사이를 아예 끊을 수
도, 그렇다고 다시 없었던 일로 물리기도 어린 우리에겐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호석이를 난 이해한다.
원래 가장 친한 사람도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고, 원수라고 여겼던 사람이 배우자가 될 수도 있는, 세상은 그런거니까.
-
며칠동안 짐이 들어오고, 먼지를 쓸어냈다. 그렇게 이사온 집을 깨끗하게 정리한 날,
나는 정리된 줄로만 알았던 내 마음과 예고없이 마주하게 되었다.
지은지 몇 년 되지 않아 깨끗할거라던 집주인의 말과는 다르게
생각외로 전에 살던 사람이 거칠게 썼던 것만 같은 집을 한바탕 뒤집으며 청소를 해 그나마 쓸만한 방으로 만들었다.
"아 맞다, 옥상."
볕이 좋아 이불을 널어놓았던 옥상으로 뛰어올라갔다. 아깐 잘 몰랐는데, 탁 트인 시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날씨가 이렇게 좋았던가. 떠가는 구름을 한참을 쳐다보다가 이불을 걷었다.
옥상은 평범했다. 초록색 칠이 된 옥상 한 가운데에는 넓은 평상이 펼쳐져있었지만
누군가 자주 쓰는 것은 아닌지 세월의 흔적위엔 먼지까지 고스란히 얹혀있었다.
주인 아줌마가 식물을 키운다고 했었던가. 여러가지 초록색 나무와 꽃들이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옥상 가장 가장자리엔 담배꽁초들이 가득히 담긴, 재떨이가 있었다.
"...비워야겠는데, 이정도면."
생각없이 되돌아 가려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걔, 담배는 끊었을까?'
피식, 하고 웃음이 났다.
골초였지, 아마.
수북하게 쌓여있는 담배꽁초들이 더이상 비집고 들어갈 자리도 없을만큼 빽빽하게 꽂혀있었다.
톡 건들면 와르르 쓰러져내릴것만 같았다.
웃음이 절로 쏙 들어갔다.
엄지손가락이 빨개질 때 까지 쓸려가며 힘겹게 라이터를 켜 담배에 불을 붙였던 그 날의 감정이 이상하리만큼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런 걸 왜 피냐며 민윤기의 손을 뿌리쳤던 그 날 이후로,
그 기억들은 몇 달간 어리던 나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남몰래 흘린 눈물이 꽤나 될거다. 하지만 그 이후로 숱한 만남과 이별을 겪으며 그날의 기억은 별것도 아닌 일이 된지 오래였다.
꽉찬 재떨이를 보면서 민윤기와의 빛바랜 추억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애써 외면해오던, 공들인 그 시간들을 한순간에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주책이야 정말.”
혼잣말을 하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새하얀 이불을 품에 한아름 안은 채 옥상에서 내려오다 검은 슬리퍼를 찍찍거리며 끌고오는 남자와 부딛혔다.
“어,,! 죄송합니다,” 이불에 가려 남자의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팔로 겨우 이불을 치웠을 땐 가볍게 목례한 남자가 딸깍거리는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인 채 슬리퍼를 끌며 옥상의 한 구석으로 걸어가있었다.
저 재떨이. 주인이구나. 피부가 뽀얀게 꼭 민윤기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사람이 정말 민윤기여도, 민윤기가 아니더라도 난 꽤 가슴이 아플 것 같아 굳이 다가가지 않았다.
그렇게 정리되지 않은 마음과 예상치 못하게 마주하게 된 나는 민윤기의 생각을 떨쳐내고자 잡다한 일들에 정성을 쏟기 시작했다.
옥상에 각종 화분들을 사다놓고 잎을 닦고, 물을 주며 잡생각을 지워나갔다.
큰 효과는 없었다.
<그때 걔, 담배는 끊었을까?>
9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