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이로부터 소포가 왔다. 이사를 하는데 네 사진이 있더라며 보내준 것이었다. 전화를 하는 내내 하이톤의 목소리가 신경쓰여 몇번이고 음량을 줄여댔다. 얘는 도대체 뭘 먹고 이렇게 팔팔한걸까. 한소리를 하려던 찰나, 바쁘다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몇 년만의 재회라고도 할 수 있는 전화이건만, 방금 만났던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 참 변백현다웠다. 나는 끊긴 전화를 침대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박스 포장을 떼기 시작했다. 덜렁대는 성격에 안맞게 꼼꼼한 상자가 참 언발란스했다. 뗄만큼 뗐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테이프는 절반이나 남아있었다. 나는 더운 숨을 몰아쉬며 그것들을 노려보다가, 가위로 송두리째 잘라버렸다. 상자 윗부분이야 뭐 없어도 상관없겠지. 아담한 사이즈의 상자 안에는 조잡한 것들이 꽉꽉 채워져있었다. 나는 분홍색의 스프라이트 패턴이 들어간 공책을 집어들었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보물처럼 아끼며 몰래 써내렸던 일기였다. 금세 하나 둘씩 떠오르는 추억에 웃음이 났다. 그 때에는 낯을 많이 가려서 그런지, 친구가 변백현밖에 없던 것으로 기억한다. 변백현은 투덜대면서도 그런 나를 받아줬고. 나는 낡은 책 냄새를 맡으며 첫 장을 펼쳤다.
2000년 4월 2일
고생 손생님이 오셨다. 아주 예쁘셨다. 변백햔이 개속 웃었다. 진짜 짜증난다. 아 그리고 오늘은 찬열이가 도시락을 사왓다. 자기가 싼거라는데 나는 알고잇다. 저건 엄마가 싸주신거다. 찬열이 거진말젱이.
2000년 5월 ?일
변벡현이 울엇다. 나 때무네 우는 건 아니엿다. 왜 우는지 모르갰다. 혹시 장난깜이 뺐겨서 그런건 아니갰지? 진짜 유치하다.
2001년 1월 12일
내 생일이다. 선생님들이 공책을 많이 주셧다. 변백현도 선물 준댔는데 안준다. 오늘은 도시락을 먹긴했는데 안먹은거같다. 너무 작게 먹은거같다. 아 맞다 오늘 저녁 카레다. 엄마가 일기는 자기 전에 쓰는 거랫다. 근데 지금 써도 된다. 나중이면 까먹을거 갇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쓴 일기를 보고있자니 옛날이 그리워졌다. 이 곳으로 이사오기 전에는 경상북도 쪽의 촌에서 살았다. 지금이야 상경한지가 꽤 되어 고쳐졌지만, 그때 당시에는 사투리가 엄청 심했다. 어린 나는 못 느꼈지만, 지나가는 어른들마다 사투리를 구수하게 한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나는 마을 어르신들의 예쁨을 독차지하며 초등학교, 중학교를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에는, 내 몸집이 왜소하다는 것을 처음 알아챘다. 그리고 내 눈이 꽤 크다는 것도. 어릴 때는 피부가 엄청 까맸는데, 운동을 즐길 시간이 줄어들다보니 피부가 새하얗다못해 창백해졌다. 나는 새록새록 떠오른 기억들에 웃음지었다. 내 학창시절은 정말 파란만장했었다. 축구를 하다가 다리 한쪽이 아예 쓸린 적도 있었고, 조례대에서 장난을 치다 떨어져 뼈에 금이 간적도 있었다. 그리고 변백현과 놀다가 코뼈가 부러진 적도 있었고 머리에 구멍이 난 적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다친건 모두 변백현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잠시 이를 갈았다. 또 뭐가 있었더라. 나는 상자를 뒤적거리다 작은 사진뭉텅이를 발견했다.
"....."
김준면? 생소한 이름이었다. 김, 준면. 되새겨보니 어감이 꽤 웃겨 웃음을 터뜨렸다. 호탕하게 웃는 와중에, 무언가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웃음이 어색하게 멈추었다. 김준면. 어찌보면 매우 익숙한 이름이었다. 김준면. 여름. 바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조합되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놀란 마음에 사진 뭉텅이를 놓치고 말았다. 인화된 사진의 비닐에 쓰인 이름, 김준면. 경수야, 뭐해? 살풋 웃는 목소리가 귀에 아른거렸다. 전혀 생소한 이름이 아니었다. 낯설다고만 생각했던 이름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선명해졌다. 전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준면이 형..."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다. 정신이 혼미해 살짝 비틀거렸다. 급한 마음에 사진 뭉텅이를 다시 주워들었다. 비닐을 던져버리고, 사진을 하나하나 훑기 시작했다. 나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았지만, 잠시 잊혀졌었던 얼굴. 여러 장면들이 머리를 스치고 갔다. 사진을 미친듯이 넘기다가, 말간 웃음을 띤 얼굴을 찾아냈다. 다리가 덜덜거려 서있을 수가 없었다. 목재 의자의 귀퉁이를 잡고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았다. 한여름의 방 안에서, 나는 입술을 달달 떨었다.
"김준면 선생님."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셨던. 그리고 나도 너무나 좋아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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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는 슴다섯 대학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뭐 이런 전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