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너 조교한테 뭐 책잡혔어?" 옆에서 밥먹던 친구가 놀란 토끼눈으로 너정을 쳐다봐. 너정은 페북 웃긴 동영상을 보며 실실 처웃다가 친구를 돌아봤지. "크크큭... 어, 뭐?" "과톡방에 조교가 너 찾는데?" 친구가 내밀어 보여준 톡방에 너정은 실실 흘리던 실소를 전부 삼켜버렸어. [학번 2014012355 너정상 당장 과사무실로 오라고 전해] 모든 과 학생이 있는 과톡방에 떡하니 적힌 문장. 무려 2시간도 전에 온 톡이야. 어젯밤 술김에 귀찮다고 톡 알람을 전부 꺼 놓았던게 화근이었지. 톡에 들어가보니 갠톡 단톡 난리도 아니야. "아, 씨..... 미친, 나 먼저 갈께." "너 뭐 잘못했어?" 너정이 급하게 일어나 가방을 메고 아까 다 먹은 식판을 들어올리자 친구는 여간 걱정스러운게 아닌가봐. 조교한테 한 번 잘못걸리면 멘탈이 먼지가 되서 나온다는 과사무실 던전에 새내기 친구가 홀로 입성해야하니 속이 편하지 않은 게 정상이었지. "나도 모르겠다. 나 지금 간다고 톡좀 해줘." 너정은 급히 식판을 정리함에 갖다놓고 무거운 몸에 추진력을 최대한 붙여 뛰기 시작했어. 가방은 오늘따라 왜이렇게 책이 한가득인지. "으아- 진짜! 나 잘못한 거 없는데-!" 뛰면서도 억울한 생각이 한두가지가 아니야. 개인적으로 톡을 한 것도 아니고, 공개적으로 불러낸 건 분명히 탈탈 털릴 조짐인데. 이미 겁은 먹을 만큼 먹었고, 차근차근 멘탈 부서질 준비를 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고, 혼날 이유는 없는데?! 젠장할! "하악, 헉...... 으억... 토나와..." 숨 가쁘게 헉헉거리며 과동에 뛰어와 계단까지 오르려니 양쪽 종아리 알이 부화할 것 같아. 어깨는 찢어질거 같고 다리는 석화하는 느낌이었지만 멈추면 안될 것 같아. 똑똑똑- 헉헉거리는 숨소리 그대로 과사무실에 들어서니 조교 에네스의 차가운 표정이 먼저 눈에 들어와. "넌 오라고 한 지가 언젠데 이제 와?" "죄, 죄송해요... 알림을 꺼 놓는 바람에..." "그런거 하나 신경 안쓰고 있다가 나중에 진짜 큰 피해 입을 수도 있는 거 몰라?" "죄송합니다..." 젠장, 젠장! 본 내용으로 혼나기도 전에 에피타이저로 혼나고 있는 기분이 굉장히 별로야. 어후, 몇분간 어떻게 버티지? "문닫고 들어와서 앉아." 에네스가 가리킨 의자에 너정은 헉헉거리며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어. 진이 다 빠져. 아주그냥 숨소리만 들으면 죽기 직전이야. 하지만 죽기 직전으로 숨을 몰아쉰다고 해서 에네스가 봐 줄 리는 없었지. 숨도 고르기 전에 본론으로 들어가. "너 희망 직업 조사 표 왜 이따위로 해 왔어?" 에네스가 던진 서류는 어제 너정이가 작성해서 낸 표야. 물론 면밀히 따지면 너정이가 작성한건 아니고, 너정이가 새카맣게 까먹고 있었던 서류 작성을 친구가 하라고 알려주고, 친구 3명의 것을 부분부분 배껴썼지. 너정이 써서 낸 회사가 무슨 일을 하는 회산지도 몰라. "그, 그건-" "너 친구들이 해온 조사표랑 싱크로율 엄청난 거 알아 몰라. 이쪽 일을 할 생각은 있어?" 에네스의 돌직구에 너정은 입을 다물었어. 꼼짝없이 너정이 잘못한 일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억울해. 1학년한테 뭘 조사해오라는 건지. 사실 전문대도 아닌 상황에 어떤 회사에 들어갈지 내가 어떻게 알고. 그리고 너정은 나중에 회사에 다니고 싶지도 않은데. "아무리 요즘 여자애들이 취집이 목표라지만 이건 아니지 않아?" 에네스는 너정을 쳐다도 안 봐. 모니터를 쳐다보며 뭔가 일을 하고 있지만 가시돋친 말을 하는 건 여전했지. "생각이 없어도 정도껏 없어야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이런거라도 제대로 알아보고 해야 네가 나중에 뭘 하고 살아갈지 인생의 틀이 잡히는 법인데. 왜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질 않아?" "......" 너정은 입을 꾹 다물고 할말이 없었어. 친구들도 너나 할것 없이 표를 작성하는 내내 욕을 퍼부었지만 에네스의 말이 전부 맞는 말이라 굳이 대들며 할 말도 없고. 어린 마음에 눈물부터 떨어져. "...? 뭐야. 너 몇 살이야? 뭘 잘했다고 울어." 그 순간 울컥, 울음이 터져. 뭘 잘했다고 우냐니.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지겹게 하던 말, 지겹게 듣고 트라우마까지 생긴 말이었지만 에네스가 너정의 트라우마따위 알 리가 없었지. "너 나중에 직장 상사한테 혼나면 그렇게 울기만 할 거야? 울어봤자 해결되는 거 아무것도 없어." 에네스의 짜증어린 목소리에 더 위축되. 순식간에 커진 울음을 삼킬 수 조차 없게 되자 에네스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지. 울음이 잦아들길 기다리는데 누군가 과 사무실 문을 두드려. "저, 조교님." 한 남자가 들어오다 말고 울고있는 너정을 보고 놀라. 그리곤 에네스와 너정을 번갈아보며 당황하지. 하지만 에네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에게 물어. "무슨 일로 오셨죠?" "그... 박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아, 거기 노란 봉투 통째로 들고가세요." 에네스가 가리킨 봉투를 든 남자가 너정을 힐끗힐끗 바라보며 과 사무실에서 나갔고, 에네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어. "정상이 너, 내가 특별히 잘 챙겨줄테니까 그만큼 과생활 열심히 하라고 했어, 안 했어." 너정이 훌쩍이느라 말이 없었지만 에네스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 "아무리 졸업하고 금방 시집을 간다고 해도 사회생활이 필요한 거고, 결혼을 위해서든 나중의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든 회사에 취직해서 돈을 모아야 할 필요성이 있는 거야." 너정은 에네스가 좋은 말을 해줘도 이미 그의 앞에서 이렇게 울고있다는 자체가 너무 창피하고 쪽팔려서 울음이 쉽사리 그치지가 않아. 쥐구멍이라도 있었으면 기어들어가는 시늉이라도 하고싶었어. "웬만한 남자들도, 아무 일도 안하는 여자 싫어해. 일을 하고 사회생활을 해서 자신의 회사생활을 이해해줄 줄 아는 여자를 바라지." 에네스가 일어나 책자를 하나 뽑아 건네. "이거라도 보고 참고해. 조사표는 다음 학기에 새로 쓰라고 할 거니까 그땐 제대로 써와. 토익 점수도 좀 올리고." "...네." 훌쩍거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니 에네스가 너정을 쳐다보다 얕은 한숨을 내쉬어. "그래, 내가 미안해." 다가와 너정 옆에 앉아 너정을 안아줘. "정상이도 나한테 시집오기 전에 사회생활좀 하고 돈벌이 하는 어른 인생을 살아봐야 하지 않겠어? 안 그래?" 백 번 맞는 말이라 할 말도 없어. 그저 속상했다고 에네스의 옷깃을 꼭 붙들고 엉엉 울었지. "그래, 그래. 우리 애기." 에네스가 토닥여줘. *** 평생 쓸 글을 너를 위해 다 쓴다 듣고있나 에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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