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 선생님, 꿈을 꿨어요.
그래요. 무슨 꿈을 꾸었나요?
- 안개 속을 계속 걸었는데요, 그런데 걸어도 걸어도 안개 속 이었어요. 주위가 온통 하얬어요. 어둠 속 이었던 것 같은데, 안개가 너무 짙어서 주위가 하얬거든요?
그랬군요, 그래서 당신은 뭘 했죠?
- 뭘 하긴요, 그냥 계속 걸을 뿐 이었죠.
저런, 길이 끝이 없었을텐데요?
- 어떻게 아셨어요? 길의 끝은 없었어요. 전 그냥 차가운 안개 속을 헤메이고만 있었어요. 왠지 걸어야만 할 것 같았거든요.
왜 그렇게 느꼈죠?
- 바람이 불었거든요. 제 뒤에서 앞으로, 마치 바람이 빨려 들어가 듯 말이예요. 걷다보니 출구가 있었어요. 그래서 문을 열고 나왔죠.
길의 끝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 선생님, 저는 길의 끝이 없다고 했지 출구가 없다고 한 적은 없어요.
무슨 뜻이죠?
- 출구는 분명히 있었어요. 하지만 문을 열고 나가면 또 길의 연속이었어요. 어쩌면 출구가 있더라도 세상에 나가고 싶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본인 말인가요?
- 네. 저는 겁쟁이예요. 나가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벗어나고 싶어요. 이 저주 속에서 말이예요. 벗어나고 싶어요. 그러니까 제발 살려주세요. 선생님 저 정말 살고 싶어요.
002
네? 뭐라고요?
- 살고 싶다고요. 의미 없이 죽을 날만 기다려왔던 7년이 너무 황망해요. 저는 벌을 받는 걸까요? 죽을 날만 기다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괘씸해서 곧 죽는걸까요?
...
- 살 날이 정해졌던 그 날, 제가 그 날 부터 지금까지 땅이라도 파 우물을 만들었다면 기적처럼 내가 살 수 있었을까요? 선생님, 과거를 속죄하면 용서가 될까요? 지금부터 손톱이 빠지도록 맨손으로 우물을 파면 내가 살 수 있을까요?
…. 죽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 맞아요. 선생님.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죽음은 단순하지 않아요. 고마워요. 오늘은 이만, 가 볼게요.
나는 문을 열었다. 급하게 나를 잡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문을 닫았다. 죽고자 열었던 문을 다시 닫았다. 나는 위선자다.
당신이 살려고 하는 이유는 속죄인가요?
- ...
사람은 다들 살려고하는 이유가 제각각입니다. 그래서 옳은 답이 없어요. 하지만 만약 당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굳이 찾고싶다면, 속죄라는 이유로 살아보는 건 어떤가요? 7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당신에 대한 미안함으로 당신은 땅을 파 우물을 만드는 대신에 글을 쓰던, 그림을 그리던, 일도 나가고, 바느질도 하면서, 영화도 보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세요. 속죄의 마음으로.
003
나의 고개는 그로부터 한참 후 끄덕여졌다. 7년 전 나의 삶은 아무런 의미조차 없었다. 정말 기적이 일어나 나는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그것을 구경할 수 없었다.
어차피 남은 생은 일 년, 그저 빨리 그 시간이 지나가 죽음이 오길 바란다. 그러나 이렇게 한심한 자신이라도 지금은 아주 조금, 목표가 생겼다. 나는 그 목표가 된 선생님을 보며 다시 문을 열었다.
이번에 열린 문은 의미가 조금 달랐다. 방금 전 열린 문은 죽음으로 가는 문 이었다면, 지금 열린 문은 속죄로 가는 문 이다.
004
- 선생님, 살고 싶어요. 저 정말 살고싶어요.
나는 속죄를 향해 저주로 묶여있던 발을 한 걸음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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