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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글 공제선 01 l 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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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시 들어오고 재개발 시작하면 여기 뿐만 아니라 저기서부터 새로 깔아야 돼요. 이거 콘크리트 벽."
 
 

 
 공제선 01



 
납이 녹는 냄새에 견디기 힘들어 잠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니 하늘 빛이 노랗다. 잠시 예전같지 않은 체력을 탓하며 구부렸던 허리를 일으켰더니, 줄곧 옆에서 들리지도 않는 말을 중얼거리던 그가 눈 앞에 있다. 
 
 
 
 
 
"마지막 점검 차 왔어요. 방해 된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그는 내 옆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남은 인부들이 식당으로 몰려나간 지 20 분 체 안되는 시간이다. 머뭇거리다 아 예. 대충 기어가는 소리로 대답 했다. 안전모를 벗으려 고개를 슬쩍 내리니 잘생긴 구두 앞발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흙먼지로 뿌옇게 더럽혀진 구둣발.  
 
 
 
지켜보고 있었구나. 
 
그리고 그는 오전부터 있었던 인사 회의 중에 현장에 잠깐 들렸다고 덧붙였다. 
 
 
 
 
"아직 군수한테 승인도 안 받았는데 벌써 추가 물량이라니.. 그래도 준검 때까지 버티면 아쉬운 소리는 없겠네요." 
 
"...."
 
"아르바이트?"
 
"아뇨. 좀 됐어요. "
 
"아, 같이 일하는 분들 비해 어려 보이셔서.."
 
 
 
 
말끝을 흐리며 멋쩍은 듯 웃어 보이는 그의 입 사이로 고른 치아가 보인다. 한 눈에 뻔히 보일 정도의 어설픈 멘트 덕분에 그제서야 숨 좀 돌릴 수 있게 됐다. 
 
 
 
"다 나갔는데 왜 혼자 일해요? 배 안 고파요?"
 
 
"그냥 생각이 없어요. 더위 먹었나,,"
 
 
 
 
단정한 머리와 빈틈없이 각이 잡힌 옷차림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년의 얼굴이 있다. 호기심에 어찌할 줄을 모르는 얼굴은 용역 업체와의 회식 때 두어번 마주쳤던 얼굴이 맞았다. 슬쩍 눈이 마주쳐 순간 당황한 모습도 들켰었지 아마. 곧 볼 게 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서울 출신?"
 
"아니요."
 
"그럼 다른 분들과 같은..."
 
"신합촌이요."
 
"그러면.."
 
"보시다시피 여기 90%는 다 조선족이에요."
 
"아..."
  
 
 
말 그대로 살기 위해 얻은 신분이다. 통계에도 올려지지 않은 외국인 일용직 총 20 여 만 명중 한 명. 그 역시 방문 비자를 받아 어렵게 한국에 들어왔다가 체류 기간이 초과돼 불법으로 일하고 있던 수 많은 조선족 중 한 명이었는데, 우리 돈을 썼다가 말 그대로 공중분해 된 놈이었다. 졸지에 난 그의 이름을 얻었고 호적에는 내 이름이 사라졌다. 
 
 
 
 
 
"...거기 계속 있을 겁니까?"
 
 
 
곁눈질로 주위를 훑으며 물었다. 더럽게 안어울리는 꼴을 하고서는. 공장갑을 벗어던지고 침침해진 두 눈으로 마주하는 얼굴은 마저 할 말이 있는 듯 한참이고 우물쭈물한 얼굴.
 
 
 
 
 
 
 
"혼자 왔어요?"
 
"아..그게.."
 
"여기 위험한데 생각보다.. 괜한 시비걸지 말고 가시던 길 쭉 직진하시는 게 댁 신상에 좋을겁니다."
 
 
 
 
 
한방 먹었다고 생각하는 건지 제법 당황한 기색이다. 사내 새끼가 뭐 위험할 게 있다고.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멍청한 반응이 웃겨서 웃었다. 
 
 
 
 
"하하 일부러 겁주려는 거죠?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감시하러 온 거 아니니까. "
 
"..."
 
"아..그러니까 제 말은...그 감시가 아니라. 사장님이 현장에 필요한 거 보안 하라고 하셨거든요. 마침 또 아는 얼굴도 있고 해서..아..이렇게 말해도 모르시려나. 우리 저번에 몇 번 봤죠? 혹시 저 모르세요?"
 
 
 
 
 
먼저 알아봤는데 모를리가 없지. 
 
 
 
 
 
"아니..그게 아니라.. 아무튼 무례했다면 사과드릴게요."
 
 
 
 
 
 
빈정이 상해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적극적으로 해명해오는 그에게는 적어도 함께 온 일행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떠듬 떠듬 사과를 건네는 그에게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거 굿이라도 해야하나."


무시무시하네 이 뭐같은 인연.


끈질기게 너와 나 뒤를 따라 붙는 걸 보니. 


정말이지 기억해서 좋을게 하나 없는 너와 나의 존재. 
 
 
 
 
 
 
 
 
 
 
 
 
 
 
 
 
 
 
*
 
 
 
 
 
 
 
 
 
 
개가 몇 번 짖더니 쇠 문이 끼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사이로 보이는 창백한 얼굴과 마주하는 눈이 제대로 풀려 있다. 그는 뭐라 할 반응도 없이 도로 집구석으로 쑥 들어갔다. 따라 들어가자 눈에 띄는 건 협탁을 가득 매운 빈 양주병에, 술에 젖어 노랗게 말라 다닥다닥 붙어있는 담배꽁초. 바닥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부패된 음식들이 음험한 산을 쌓고 있다. 쯧. 혀를 차며 들쳐 업던 가방을 구석에 던져 놓고 그에게 다가갔다.
 
 
 
갈아낀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백열등이 매가리 없이 공중에서 꿈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아래, 소파에서 거의 반 누드로 있는 그의 가슴이 거칠게 오르락 내리락 하는 걸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느릿하게 뜨이는 눈. 
 
 
 
내려다 보는 약한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는게 뭔가 찔리는 게 있다 싶다. 불안한 기운이 넘치는 화장실 안 쪽에서는 헤어 드라이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저절로 한숨이 입을 비집고 나왔다. 
 
 
 
"...요샌 적체가 심하네. 오늘도 세 명이나 잘렸다. 나보다 이쁜 애들인데..젊구..힘도 좋구....불쌍해..." 
 
 
화장실로 발을 옮겼다. 자기 연민으로 하루 종일 제 자신을 학대하면서도 오늘은 또 누구와 뒹굴까 고민 중 일게 뻔한 일이라. 
 
 
"그래서 자존심도 상해..그것들 땜에 요즘 따라 더 우울하고 불안해... 차라리 나보고 나가라고 하지, 그런 말도 못하면서...내 눈치 보는 그 더러운 년들 다 밟아버리고 싶어."​


"..."


"니가 좀 어떻게 해주면 안돼?"
 
 
 
드라이기 전원을 끄자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수도꼭지 아래로 고개를 틀어 박고 등목을 하는 내가 듣는 둥 마는 둥 하자, 어느새 내 등 뒤에 서서 멈췄던 말을 계속 이어하기 시작했다. 
 
 
 
 
"야,야. 너 쫌. 내가 그러지 말랬잖아. 아휴, 바닥 좀 봐. 홍수 났냐? 아예 들어가 씻던지..."
 
"...."
 
"너한테 온 소포 뜯어봤어. 죄다 사진이던데. 누구야?"
 
 
 
 
뒤를 돌아보자 신경 쇠약으로 갖은 고통을 호소하는 그 눈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 나왔다. 구석에 뒹굴고 있는 걸레짝이 된 수건을 집어 들고 얼굴과 목을 문지르며 그의 시선을 억지로 피했다. 
 
 
 
 
 
"똑같이 물어서 대답할 거 아니면 묻지도 마."
 
 
 
문을 막아 서고 있는 그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피 죽도 못 먹은 얼굴로 노려보는 꼴이 참 가관이다. 
 
 
 
"나와라 어?"
 
 
 
지독한 메조인 주제에 살기 싫다는 얼굴로 개처럼 끌려 와서는 회장님 밑에서 밤새도록 시달려야 했던 그를 보며 비웃던 시절이 있었다. 늘 내 말에 콧방귀 뿐이었던 그에게 나도 그런 위치일 때가 있었다. 
 
 
 
"너한테서 냄새 나."
 
 
"...."
 
 
"공구리만 칠 줄 알았지 어린 놈이랑 붙어 먹을 궁리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일부러 가늘고 달뜬 소리를 흘리며 웃는 그의 눈은 경멸이 가득하다. 작정하고 치대는 말투에는 가시가 잔뜩 돋쳐서는. 보란 듯이 눈 앞에서 개새끼처럼 킁킁 거리다가 문 틀에 기대다시피 늘어져 버린 그 팔을 꽉 붙잡아 세웠다. 
 
 
 
 
"그래. 알아줘서 고마운데."
 
"아씨...아아!! 야!!"
 
 
 
억지로 문턱에서 밀어내는 과정에 손목이 비틀어졌는지 우왁스럽게 내 팔을 잡아 뜯는 그의 손을 놓고 뒷덜미를 잡아 채자, 헉 하고 짧게 숨을 들이마신다. 
 
 
 
 
"너 이 꼴이 뭐야? 남의 집에 기어들어 온 주제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어?!"
 
 
 
쇳소리처럼 목소리가 쩍쩍 갈라지자 듣기 싫다는 듯 그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병신 새끼. 당하고 싶어서 어쩔 줄을 모르는 구만. 한 움큼 잡혀지는 그의 목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자마자 앞으로 맥없이 고꾸라져 쓰러지는 그가 별안간 우스워졌다. 
 
 
 
 
 
제가 쌓아 놓은 쓰레기들에 머리를 부딪혀 개새끼 마냥 끙끙거리고 있는 그는 납작하게 엎드려시피 한 제 몸을 최대한 말았다. 치다 만 블라인드 에서 햇빛이 그의 머리 위로 모래처럼 뿌려졌다. 그 빛줄기를 따라 가늘게 뻗친 탈색된 머리카락을 다시 움켜 잡아 당겼다. 
 
 
컥컥거리는 그의 코에서 가루가 뿌옇게 묻어있는 것을 발견하자 마자, 녀석을 한번에 뒤집어 허벅지를 잡아 끌어 내렸다. 허벅지 안 쪽을 무릎으로 밟아 문지르듯 누르자 고통을 호소할 길이 없어 기를 쓰고 벗어나려 애를 쓴다. 그다지 근성있는 놈은 아니라 제 풀에 꺾일 때까지 한참을 그 자세로 있었다. 
 
 
"야..."
 
"...하고 싶냐? 그렇게 당하고도 또 하고 싶어? 니 입으로 말해. 그래야 들어주든가 하지."
 
 
 
 
그렇게 몇년 동안 가지를 치고 쳐도, 불행하게도 너의 본능은 그렇질 못했다. 그 때는 몰랐다. 나를 보며 레옹이니 뭐다 미친년처럼 헛 소리를 떠들어대는 네 옆에 내가, 징그럽게 달라붙어 있으면 결국은 너도 네 본능에 질 수 있다고 생각했지, 너를 더한 불행으로 몰아 넣는 일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니 나이가 몇이야."
 
"....하아.."
 
"이젠 너보다 더한 애들 한 두 명은 있지 않겠어?"
 
"으응......그만. 야 나 진짜 아퍼..."
 
"니가 언제까지고 잘 나갈 줄 알아? 값은 제대로 쳐주냐고. 너 끝난 지 이미 오래 전이야. " 
 
 



그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소리에 몰아쉬는 숨이 좀 더 가빠졌다. 모두들 너를 보고 말했다. 고 놈 참 물건이라고. 눈을 딱 감고 그를 거미줄처럼 끈끈하게 덮고 있던 몸을 억지로 떼어냈다. 
 
 
 
 
 
"...사돈 남말하지."
 
"뭐?"
 
"그렇잖아. 니가 누군지 알아서 뭐할 건데? 어떻게 할 건데? 묻을 수나 있냐? 누구 말 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앨 수 있어? 아무것도 못하는 병신 주제에."
 
"그만해."
 
"아냐? 왜. 자존심은 아직도 멀쩡하게 살아서 날뛰나 보지? 따지고 보면 너나 나나 똑같은 처지 아냐?"
 
"그래 알았으니까 그만해."
 
"그럼 말해..너야 말로 말해!"
 
 
 
 
 
지긋지긋한 역마살에 도화살에. 답이 없다. 
 
 
 
 
"오늘은 너나 나나 할 말 없는 것 같으니까 나가."
"니가 날 버려?"
"안 나가?"
 
 
 
꽉 깨문 입술에 고집이 훤하다. 이미 땀으로 흥건해진 티셔츠를 벗어 저 멀리 내던지고 저 혼자 상처로 잔뜩 구겨진 얼굴과 등졌다. 묘하게 신경 쓰이게 하는 저 얼굴. 언제나 죄책감이 들게 하는 저 얼굴은 언제나 나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잤지?"
 
"야 너 말 조심해."
 
"...잤네."
 
"내가 넌 줄 알아?"
 
 
 
제멋대로 튀어나오려는 욕지거리를 참고 결국 뒤를 돌아봤을 때는 하얗게 질려서 얼어있는 너와 마주해야만 했다. 처음봤을 때부터 너는 감정 기복이 심했다. 이미 맛이 간 상태로는 앞 뒤 안보고 무작정 덤비는 탓에 내 손까지 놓으려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더 위험했다.
 
 
 
 
 
"그런거 아냐. 혼자서 이상한 생각 하지마."
 
 
 
 
후. 낮게 흐트러지는 날숨이 가까워진다. 한껏 누그러진 내 기운없는 목소리에도 부동 자세. 
 
 
 
 
 
 
"다 불어버릴 거야. 너 그 개버릇 못버리고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거라고."
"..그런거 아니래도."
 
 
 
알아듣지 못할 말로도 모자라서 기여코 울먹이는 듯 하더니 어깨까지 들썩이며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급하게 가린다. 애써 황망해진 손을 소심하게 내밀었더니 보기 싫다는 듯 제 얼굴을 반대 방향으로 아예 휙하고 돌려버린다. 뻔뻔한 놈. 젖어있는 목소리가 제 딴에는 마음에 들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듣고 있는 나는 짜증이 일었다. 
 
 
 
"너. 날 그런 년놈들이랑 똑같이 보고 있는 모양인데," 
"...."
"...하지 말랬잖아 내가. 멀쩡한 척 나한테 와서 이러는 거 이젠 지겨울 때도 됐잖아. 내가 니 그 속 모를 줄 알아? 너 하나 잡는 거 일도 아니니까.. 그니까 이제 제발 좀. 제발 그만해."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끝은 없었다. 내가 한 선택에 후회는 없다. 하지만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더 고압적이었다. 그런 나에 비해 상대는 눈하나 꿈쩍 하지 않았다. 물 불 안 가리고 몸을 던져도, 가져다 바쳐도, 때리고 협박을 하고 수천 번을 타이르고 달래봐도 늘 나에게서 도망가려고 애쓰는 니가 왜 정작 내 눈 앞에서 사라지지는 않는 건지 궁금했다.
 



정말이지 과거의 너와 나 처럼.
 
 




잠시 전까지만 해도 끓던 식욕도 씻은듯이 사라졌다. 김이 빠진 소리에 두 눈을 들어 나를 본다. 정적이 꽤 길어졌다. 돌아보는 그 까만 눈은 너의 그 아무 의미도 무게도 없는 눈물로 젖어있다. 공허하지만 틀림없이 맑은 눈. 마치 너를 처음 보았을 때 그 때처럼. 
 
 
 
 
 
"이리와 봐."
 
 
 
 
 
 
정상이 아닌 놈에게 어울리지 않는 진심을 토해봤자 무엇할까. 할말을 잃고 방전상태로 늘어진 한심한 내 자신을 탓하며 몸을 일으켜 그의 손을 붙잡고 내 쪽으로 끌어 당겼다. 수그러지다 못해 힘이 빠진 내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눈치를 보더니 그제서야 안도하는 기색이다. 
 



조심스레 끌려오는 두 손이 내 어깨로 아무런 저항없이 장착되더니 뱀처럼 슬그머니 안겨온다. 늘 같은 패턴에 지겨울만큼 반복되는 재회. 
 
 
 
 
 

 
미안하다는 말 대신에 그의 마른 등을 힘있게 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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