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홍빈(화가-집시)
부모도 집도 없이 길거리를 전전하며 다니는 내게 겨울은 너무나도 혹독했다.
한겨울이 지나가고 눈이 녹는 시점인 지금도 남아있는 잔추위가 내 몸 구석구석을 두들겼다.
그나마 오후에는 해가 나기 때문에 나는 해를 따라서 요즘 머무르고 있는 광장 구석구석을 옮겨다녔다.
오늘도 왔네.
어느 순간 부터인가 보이기 시작한 화가는 해가 날 즈음에 나타나서 해가 지면 사라지곤 했다.
광장에 도착하면 내내 붓만 놀리는 무표정한 그를 보며 나는 속으로 그를 움직이는 석고상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광장을 지나다니는 숙녀들의 은근한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꼼짝도 않고 그림만을 그리다 갔다.
"잘생겼네.."
억...눈 마주쳤다. 지저분한 모습이 민망해 나는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조금 더 따뜻해지면 이 곳을 떠나야 겠다고 생각하며 광장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오늘은 안오나.
나는 광장을 두리번 거렸다. 오늘은 움직이는 석고상이 늦는다.
"엥, 저기 오네."
뭐야 싱겁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오늘도 그의 미모를 곁눈질했다.
그런데 오늘은 늘 앉아있던 분수대 앞을 지나친다. 어디가는 거...
석고상이 내 앞에 섰다.
눈을 끔벅이는 나를 가만히 보던 석고상은 옆구리에 끼고 있었던 흰 천이 덮인 물건을 꺼냈다.
"나는..왕국 수석 화가에요."
석고상이 갑자기 제 소개를 시작했다. 말을 하면서 그의 얼굴은 점점 붉어졌다.
"일단은..미안해요."
뭐가? 뜬금없는 사과에 내가 뜨악하게 쳐다보자 석고상은 흰 천이 덮힌 물건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얼결에 그것을 받았다. 그가 천을 걷어내자, 광장 구석 햇빛 아래 앉아있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깨끗한 옷에, 단정한 머리. 구두를 신고 미소를 머금은.
"허락없이 당신을 그려서..그런데, 꼭 주고 싶어서.."
그가 다시 사과했다. 떨려 죽겠다는 얼굴로.
2. 태민(요정-아가씨)
나는 어릴 때 큰 열병을 앓은 뒤로 시력을 잃었다.
눈을 떠도 사라지지 않는 어둠이 끔찍하게 싫었지만, 나는 내 하나뿐인 친구의 도움으로 살 수 있었다.
"느껴져? 햇빛이야."
속살거리며 친구는 내 손을 오목하게 만들었다.
충만한 따스함에 내가 웃음을 흘리자, 친구도 조용히 웃었다.
모든 일에 예민하고 까칠한 내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친구였다.
"태민아. 너는 내게 유일해.."
내가 이렇게 말했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화를 나눌 때 상대방을 볼 수 없는 나를 위해 친구는 항상 자신의 얼굴을 만질 수 있도록 해주었으니까.
그리고 어느 날, 나는 타국에서 왔다는 의사에게 눈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그의 첫 수술대상이 되기로 결심했고, 이 위험한 결정에도 친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술 당일, 친구는 나의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림을 그리듯이.
"내가 만질 때는 몰랐는데.."
"...."
"되게 간지럽다."
수술이 끝나고, 눈을 압박하던 붕대를 푸는 날이 되었다.
붕대가 풀리고, 눈부신 빛이 눈에 들어왔다.
"보여?"
그가 눈부신 빛을 뿌리면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