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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길이 있다면
   그 길에 저녁 있다면
   오늘은 그 마을에서 쉬다 가리라

   사람아 불 밝혀라




그리운 저녁/정일근













숨 가쁘게 달려왔고,
지금껏 만들어 왔던 나의 모습이 대견하다고
느끼고 있을 때쯤 주위를 둘러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나의 노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는데
나름 열심히 한발 한발
걸어왔던 길이 순탄친 않았어도
곧은 오솔길을 만들어 왔다고 느꼈었는데
누군가는 이미 큰 고속도로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과 내가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 건 아니니까.
고속도로가 아닌,
정글의 길을 만들어 가야 할
계획이 있을 수도 있고
아무도 가지 않은 산길에,
등산로를 만들어 갈 수 있으며
심지어, 강을 건널 수 있는 용기로
그들보다 더 빠른 길을 찾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열심히 살아가고는 있지만,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이 나보다
더 열심히 사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는 방식과 계획이 달라,
지금 내가 보는 상황과 다르게 느껴질 뿐.
우리는 각자 스스로의 길을
충실히 잘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그 길,
같은 길을 가려고 애쓰지 말자.
나는 조금 더 특별하고,
그들과 조금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고
나를 대체 불가능한 하나의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자.




길/전레오












외로움은 나의 밥, 찬 없이도 먹을 나의 끼니.
내 소망은 세끼 밥과 야식까지 골고루 야무지게 잘 챙겨 먹는 것.
외로움으로 살찌는 일. 그리하여 외로움 하나만으로 나 풍성해지는 거짓말 같은 생.
나 이제 외로움의 식구를 얻었으니 함께 먹고 또 먹어 배 터져 죽고 싶다.
버석거리던 날들이 외로움의 독을 입어 이리 촉촉하니 축복받음 아닌가.
날마다 독이 퍼져 이 저녁의 숨소리 그윽하구나.
외로움이 서 있는 그 자리.
거긴 원래 미루나무가 오래 서 있던 자리, 딸아이 날마다 학교 가던 길.
지치고 아플 때 하염없이 집을 바라보던 길.
오늘도 집 나간 마음은 기별 없으니 기다림으로 접혀진 마음자리는 쉽게 찢어지고,
마음 없이도 몸은 자주 아프고, 그리운 것도 없이 살 수 있다니,
오 놀라워라 거짓말 같은 나의 생이여.



오,행복하여라/이승희











꽃이 지는 천변을 걸으며
어찌도 이리 다정하게
내 몸에 잠겨드는지
나는 애초 그것이 내 것인 줄 알았네
지는 것들을 보며
끈적이는 핏물이 꼬득꼬득 말라비틀어지도록
이처럼 황홀했던 저녁
내겐 없었다고 말해주었네

불 켜진 집들 사이에서
불 꺼진 집이 오랜 궁리에 빠져드는 동안
나는 그만
따라가고 싶었지
지는 것들의 뒤꿈치에 저리 아름다운 한가로움

내 것이 아닌 것들로 행복해지는 저녁
누구도 나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가로등 불빛이 말해주지 않아도
내게 구역질하지 않는 것들로만으로도 얼마나 선한가
선한 것들에게는 뭐든 주고 싶어
이제 나는 무엇을 더 내놓을 것인가 생각하는데

꽃이 지거나 지지 않거나
너는 가고
나는 남는구나

나는 남지 말아야 했다




꽃이 지거나 지지 않거나/이승희













1부터 100가지 세어도 양은 양으로 되돌아오네 치타는 여전히 밤이고
나는 100마리의 양을 향해 개처럼 짖어 보네 한쪽 발이 커지고 얼굴을 잃어버리네 다리 한쪽을 들어 보네
어둠 속에 어둠이 전염병처럼 번져가네 꽃이 제풀에 시드는 소리가 들리네
나비가 흔들어 놓은 침묵을 생각하네 양은 가끔 50마리에서 70마리로 건너뛰네

나는 양의 안도 아니고 건너편도 아니고 어두운 대머리도 아니고 부처처럼 눈을 뜬 것도 감은 것도 아니고 희망을 지녀야 한다고 중얼거리다 코뿔소에 부딪히고 접시에 부딪히고 소심해지다가 뾰족해지다가
지푸라기였다가 헬멧이었다가 똑똑 떨어지는 욕실 물방울 소리였다가 다시 발을 들어 보네 어둡네
느린 흰 발바닥 같은 얼굴을 다시 잃어버리네 케첩같이 충혈되는 눈동자로 다시 1을 향해 달려가는  




불면,1의 감정/서안나












‘여기서부터 혼자입니다’ 라는 표지판이 있다

여기서부터 혼자입니다

여기서부터 혼자라고 지금까지는 절대로

여기서부터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여기서부터만 혼자라고 생각 하십시오

여기서부터는 혼자를 더욱더 확실히 해 주십시오

여기서부터는 혼자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여기서부터 진짜 혼자입니다

여기서부터 진짜 혼자라고 언뜻 보기에 마치 혼자일 것 같지만

여기서부터 진짜 혼자입니다

여기서부터 당신은 오마주의 대상입니다




의미를 따라가다/권정일










첫 순간이죠. 이름을 기억하나요, 그대? 아무도 얘
기를 안 했는지도 모르고 아무도 얘기를 하지 않았
는지도 모르고* 나는 나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요?

내가 여름날 아침 나팔꽃처럼 시들 때 그대는 벼
랑끝에 걸린 아름다운, 더러운 노을이 되시겠다구
요? 첫 순간이죠. 어쩌면 마지막인가요? 그대는 또
무어라 불러야 할까요?

우리는 혁명을 기다리는 검은 그림자도 되지 못하
고 그리움으로 뻗어나가는 푸른 이파리는 더더욱 되
지 못하고 하늘과 땅 사이를 쏘아다니지요. 단지 고
삐 풀린 천사처럼.

기억하나요, 그대? 나라는 이름, 그대라는 이름,
이름이라는 이름. 혹은 잘못 붙인 무수한 명명들. 혹
은 그 무수한 밤의 멍멍들.

아무도 얘기를 안 했는지도 모르고, 아무도 얘기
하려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고.





지극히 사소하고 텅 빈/김근











고양이는 구름을 훔쳤다. 슬픔이 그들을 가깝게 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너의 이름뿐이다. 한때의 기억이 구
름으로 흘러갔다. 흔들리는 노래 속에서 말없이 걸었다. 침
묵은 발자국소리로 다가왔다. 돌의 심장에 귀를 기울였다.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의 저편
에서 날아오는 것, 시간의 저편으로 달아나는 것. 멀리서 오
는 것은 슬픔이다. 어둠은 빛을 발하며 들판으로 모여 들
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바람 속으로 걸
어 들어가면 영원에 가까워진다고 믿었다. 한때의 구름이 기
억으로 흩어졌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은 검은 조약돌.
나는 네게 주었던 것은 하얀 모래알. 바다는 오늘도 그 자
리에 없었다. 물결이 너를 데려갔다. 어둠이 너를 몰고 갔다.
휘파람을 불면 바람을 데려올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너의
이름은 나와 돌 사이에 있었다. 나의 이름은 너와 물 사이
에 있었다. 구름은 물과 돌 사이에 있었다. 돌의 얼굴을 바
라본 적이 없었다. 돌의 마음은 주머니 속에 놓여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너의 목소리. 바닥으로 번
져나가며 너의 목소리. 물결은 왔다가 갔다. 울음은 갔다
가 왔다. 바람은 돌이킬 수 없었다. 고양이는 노래를 훔쳤
다. 멀리서 오는 것은 슬픔이다. 희망이 그들을 멀어지게 했
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나의 이름뿐이다. 나의 이름 위
에 너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너의 이름 위에 돌의 마음을
올려 두었다. 발자국소리는 침묵 뒤에 다가왔다. 노래를 부르
면서 말없이 흔들렸다. 빛은 어둠을 감추며 언덕으로 달려
갔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돌의 마음. 네가 내게 주
었던 것은 검은 조약돌. 너는 너의 이름을 바꾸었다. 나는
나의 이름을 감추었다. 우리의 이름 위로 우리의 그림자가
흘러갔다. 구름이 나를 나무랐다. 나무가 바람을 뒤덮었다.
물결이 너를 데려갔다. 물결 뒤에는 조약돌만 남았다. 약속
은 남은 사람 혼자 간직했다. 바람은 구름 뒤로 사라졌다.
시간은 멈추지 않았다. 멀리서 오는 것은 슬픔이다. 영원을
보았다고 믿었다.



구름에서 영원까지/이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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