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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늘도 악몽을 꾼다

-김지운 감독이 쓴 <장화, 홍련>, 그 식은땀의 기록



촬영 내내 악몽에 시달렸던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제작기 | 인스티즈





# 2002. 01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였다. 1월이긴 하지만….
오늘은 나가지 말고 그냥 집에서 이불 덮고 하루종일 지내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오기민 PD의 전화다. 커피 한잔 하잔다. 추워죽겠는데….

오기민 PD가 <장화와 홍련>을 고딕호러 스타일로 만들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듣는 순간 필이 딱 꽂혔다. 그렇지 않아도 장편 호러에 꼭 한번 도전해볼 생각이었다.
어떠냐는 오 PD의 물음에, 주체할 수 없이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흥분된 어조로 열변했다.

오기민 PD는 감탄스런 얼굴로 입을 연다.

“그건 <콩쥐팥쥐>인데….”


악몽을 꾼다.


꿈에 네명의 소녀가 하얀 소복을 입고 누가 콩쥐, 팥쥐인지 장화, 홍련인지 맞혀보라며 나를 쫓아온다.




# 2002. 03

마술피리가 제작하고 봄이 마케팅하는 구도가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인 <여고괴담2>와 <고양이를 부탁해>를 제작한 오기민 PD와 봄의 오정완 대표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게 여간 든든한 게 아니었다.

만만치 않은 두 오씨사이에서 김씨의 명예를 걸고 잘 버티어내야지.



# 2002. 04

깊은밤 책상에 앉아 시나리오를 쓴다.
극도의 공포스런 장면을 상상할 때면 항상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낀다.

뒤를 휙하고 돌아본다.아무도 없다.
잠시 뒤 방쪽에서 나는 이상한 작은 소리들…. 조심스럽게 나사 돌리는 듯한 소름끼치는 소리를 듣는다.
천천히 방으로 가 문을 확 연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가 왜 이럴까 하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공포영화 시나리오를 쓰면서 하루에도 몇번씩 이런 순간들이 수없이 되풀이된다.
하루종일 매 순간, 모든 일상을 공포스럽게 상상해야 하는 일이 고통스럽다.

내가 왜 호러를 한다고 했을까?


촬영 내내 악몽에 시달렸던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제작기 | 인스티즈



# 2002. 06

<조용한 가족> <반칙왕>의 연출부였고 <복수는 나의 것>을 조감독한 이소영을 불렀다.
영문도 모르고 놀러온 듯한 화사한 분위기로 들어온 소영에게 오늘부터 조감독을 해달라고 말했다.
소영이는 벌컥 화를 내며 “시나리오도 안 보고 무슨 조감독을 해요?” 하며 대들었다.


“그냥 해.”

“네.”

시나리오도 안 보고 일을 시작한 이소영은 시나리오를 뒤늦게 보고 여간 후회한 게 아니었다고 한다.
이유를 물어볼까하다가 상처받을까봐 안 물어봤다.



악몽을 꾼다.

소영이가 무서운 얼굴로 나타나 시나리오를 북북 찢으며 이것도 시나리오냐고 나를 쫓아온다.

다행스러웠던 점은 소영이의 다리가 짧았다.



# 2002. 06. 15

조감독이 연출부들을 미팅한다. 조감독은 연출부 황동궁을 보자마자 바로 지방 헌팅을 보냈다.
난 보지도 못했다. 보지도 못한 내 연출부가 헌팅을 간 것이다. 나보다 더 지독한 조감독이었다.
이름이 어려워서 처음에는 발음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적응이 되었다.

이어 들어온 연출부 공부성이란 이름도 만만치 않았다.

황동궁? 공부성? 다 한국 사람들 맞아?

가뜩이나 이름 잘 못 외우는 나는 덜컥 공포스러웠다.
PD는 김영, 제작부에 이근욱, 고미희의 이름도 겁을 주기에 충분한 이름이었다.
여기서 촬영감독의 이름은 일단 제외하기로 한다.
팀 버튼이 나온 학교로 유명한 칼아츠에서 공부하다가 온 이지행이 스크립을 맡기로 했다.




광란의 월드컵기간.
온 거리가 온 나라가 승리에 취해 있었다.
방 이후 이렇게 온 국민이 미치듯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태극기를 흔들고 춤추고 얼싸안고 어깨를 두르며

팔짝팔짝 뛰어다닐 때가 있었던가?

몇통의 통화를 한다.


류승완, “지금 난리났어요. 완전 집단 다찌마리라니까요”.


임필성, “이건 완전히 아시아의 남미 아니에요?”

박찬욱, “왜들 그래?”



촬영 내내 악몽에 시달렸던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제작기 | 인스티즈



# 2002. 06.23 ∼ 24

양일간에 걸쳐 공개오디션을 실시했다.
박찬욱 감독, 박희정 아트디렉터, 오형근 사진작가, 김영 PD와 함께 심사를 보았다.
요즘 조금씩 얼굴을 알리기 시작하는 신인 여자연기자들을 거의 다 본 것 같았다.
한 친구가 들어왔다.



“살면서 치떨리는 적개심이나 죄의식을 느껴본 적 있어요? ”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유일하게 질문을 이해하고 대답을 한 친구였다.바로 임수정이다.

어려운 질문이 아니라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있다.
벌써 세상을 알아버린 것 같은 대답이 슬퍼 보인다.


# 2002. 07. 25

문근영을 만나다.
다른 차원을 갖고 있는 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근영이의 눈을 보다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이 아인 이렇게 깊은 눈을 가진 거지?”

아이의 눈이 깊으면 슬퍼 보인다.
연예인 오락프로에 나가 주먹쥐고 흔들면서 “파이팅!” 하고 외치거나 손가락 두 개를 펼쳐 V자를 그리며 한쪽 눈을 찡긋거리거나 학예회 촌극 수준의 자기들끼리 웃고 떠드는 개인기를 부리며 인기를 쌓아나가거나 아무튼 또래의 다른 연예인과는 문화가 다른 수정이와 근영이가 장화, 홍련 역을 맡게 된 것 같아 왠지 기분이 좋았다.
아무쪼록 그들이 연예인이 아닌 연기자의 훌륭한 모습으로 거듭나길 바랄 뿐이다.



촬영 내내 악몽에 시달렸던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제작기 | 인스티즈



# 2002. 08. 08

'무조건 음산하고 부지 주위에 저수지가 있는 곳을 찾아라.'
헌팅할 때 제작부 연출부에게 당부한 말이었다.


후보가 된 장수의 논개 사당과 진천의 성대 저수지 등을 보았으나 논개 사당은 저수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진천저수지가 끝까지 후보로 있었으나 부지가 협소하고 서울과 가깝다는 이점은 있으나 근처에 비행장이 있다는 이유로 동시녹음에 장애가 있어 포기했다.

마지막으로 전라남도쪽 팀 김정화 실장과 연출부 황동궁(이 이름 맞나?)이 헌팅한 금곡마을과 율어저수지가 후보로 올랐다. 강력한 후보지는 금곡마을 장성군에 위치한 휴양림이었는데 저수지와는 멀지만 영화의 분위를 한층 살릴 수 있는 곳으로 최적이라는 판단이 섰다. 제작·연출부가 답사한 헌팅지를 보며 수없이 고개를 가로젓다가 몇 개월에 걸쳐 지친 제작부와 연출부에게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는 뜻에서 이곳으로 결정하자고 시원스럽게 결정했는데, 모든 드라마에는 반전이 있듯이 국유림이라는 이유로 산림청에서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회사에서 모든 노력을 보였지만 공무원 아저씨들의 마음을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음.
그리하여 지금도 땅을 파면 뼈가 나온다는 무서운 설이 남아 있는 보성의 율어저수지로 결정.


악몽을 꾼다.



내가 공무원 시험을 보고 있다.




# 2002. 08. 10

작품을 할 때 난 주연을 결정하는 것과 똑같은 고민과 정성을 들여 촬영감독을 결정한다.
한 단편영화제의 심사를 하게 되었고 수십편을 보면서 딱 세편만 촬영감독의 이름을 보았다.
놀랍게도 한 사람이 촬영한 거였다. 그 이름하여 이모개.

일찍부터 나와 말과 감각을 맞춰온 조근현 미술감독과 더불어 이모개 촬영감독, 오승철 조명감독이 합류하게 되었다.
촬영감독과 미술감독이 파트너십이 되는, 가장 이상적 형태의 시스템이 되어가고 있다.
이때부터 촬영, 조명, 미술감독은 거의 매일 모여서 영화의 미학적, 공간적 컨셉을 위한 회를 끊임없이 한 것으로 알고 있다.(직접 가서 보지는 못함. 이야기만 들음).

촬영 내내 악몽에 시달렸던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제작기 | 인스티즈


# 2002. 08.25

아버지 역에 김갑수 선배를 만나 제의를 했다.

연극 <길 떠나는 가족>에서의 너무나도 훌륭한 연기로 감동, 감화받은 나는

언젠가 저분과 꼭 작업을 해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던 차였다.

시나리오를 읽으시고는 아버지 캐릭터의 어려움을 정확하게 짚어내었다.



“시나리오에서 모자란 부분, 선배님께서 채워주세요.”



이런 말을 하는 내가 꼭 장사꾼 같았다.



# 2002. 09. 07

극중에선 항상 반듯한 이미지로 나온 염정아씨를 만나다.
“장화 역 때문에 만나자고 하신 거죠?” 하며 혼자 깔깔거리며 웃는다.
항상 쾌활하고 털털한 모습이다가 순간순간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어쩐지 재밌는 새엄마의 캐릭터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촬영 내내 악몽에 시달렸던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제작기 | 인스티즈


# 2002. 09.09 ∼10. 06



-1차 테스트 촬영


양수리 6세트에서 연기자 한명을 두고 인물, 엠비언스 조명과 벽지를 가지고 테스트 촬영을 함. 밤샘 촬영을 함.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수많은 색깔의 천을 많이 봄).




-2차 테스트 촬영


보성 율어 외부세트장에서 촬영을 함.
조감독과 김정화 실장, 이모개 촬영감독, 연출부 이안규가 <살인의 추억> 촬영장을 방문.


오는 길에 안개에 휩싸여 길을 잃다.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이게 내 모습이 아닐까?
작은 일에도 불길한 징조로 생각하는 내 모습에 겁이 났다. 혹시 이게 내 모습이 아닐까?

깊은 밤에 숙소 도착.
촬영감독이 안개장면을 직접 찍고 싶다고 해서 새벽부터 서둘러서 부지로 올라가 촬영. 안개 지긋지긋하다.
보성 차밭에서 리버설 필름 테스트도 하고 밤 늦게 서울로 출발.


-3차 테스트 촬영


양수리 2세트의 내부세트를 짓는 곳에서 주연배우들과 함께 테스트 촬영.

제 세트와 비슷한 느낌의 임시 세트를 지어 벽지와 가구 등으로 전체 분위기를 테스트함.
테스트 촬영결과물을 보고 애초에 디지털 색보정 기획을 안 해도 좋은 색감과 톤을 건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촬영 내내 악몽에 시달렸던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제작기 | 인스티즈



# 2002. 10. 21

보성 율어세트장에서 #9신 촬영.
고사도 함께 지냄. 오전에 비가 조금 내리다 고사를 지내고 날씨가 갬.
계속 그럴 줄 알았는데 해가 구름에 들어갔다 나갔다 해서 그림이 영 신통치 않음.
래도 첫날부터 허탕칠 수 없어서 밤늦게까지 촬영을 강행하고 훤한 보름달이 떠서 달CG소스 촬영.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며 오늘 처음으로 큰소리로 O.K사인을 냈다(첫날 유일하게 건진 O.K컷. ㅜㅜ).



# 2002. 10. 24. 4회차

40신 그네에서 수미와 무현이 대화하는 장면 다시 찍음. 원신 원컷으로….
영화를 하면서 정말이지 해도해도 안 나오는 신이 꼭 한개씩 있다.
딱히 어려운 것도 아닌데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감이 안 잡히는 신들.
아마 40신 그네신이 그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밤에 첫 레커신을 찍는데 너무 추웠다.
10월에 입대해서 깊은 산속,

부대에서 찬물로 머리를 감던 그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내 기억 속엔 10월이 가장 춥다.



촬영 내내 악몽에 시달렸던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제작기 | 인스티즈




# 2002. 10. 27. 5회차
저수지 선착장신.
집에 도착한 두 자매가 집으로 들어가기 전 선착장에 들렀다 들어가는 장면이다.
아직 영하는 아니지만 바람부는 저수지의 체감온도는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수미, 수연이 맨다리로 저수지 물에 발을 담구는 장면을 찍는다.
아이들 다리에 붉은 반점의 알레르기 같은 것이 일어나 다시 다리를 따뜻하게 하고 메이컵한 뒤 촬영재개.
그걸 보고 있던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고 함.
바람이 너무 많이 부는 관계로 지미집 컷을 찍는 데 고생했다.
최상의 장면을 잡기가 너무 어렵다.
지미집은 바람에 흔들리고 수미, 수연의 다리는 물에 퉁퉁 불기 시작하고….
결국 신을 다 찍지 못하고 철수.



악몽을 꾼다.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이 테스트 촬영을 해야 하는데 연기자가 아직 도착 안 했다며

나보고 저수지에 들어가 있으라고 한다.분명히 수미, 수연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촬영 내내 악몽에 시달렸던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제작기 | 인스티즈




# 2002. 11.01. 10회차
변덕 심한 날씨와 일광조건 때문에 아직도 집으로 못 들어간 두 자매, 계속 선착장장면을 찍고 있다.
스탭들이 도대체 아이들이 언제 집에 들어가냐고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집에 도착한 지 9일이 지났는데 아직도 집에 못 들어가고 있다.
이러다가 스탭들이 들고 일어날 것 같아 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O.K사인을 냈다.

그리고 다시 밤촬영.


화순에서 촬영을 하던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감독, 송강호, 김무령 PD가 촬영장을 방문.
봉 감독인지 송강호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여기는 여배우들이 많아 좋겠네. 우린 현장은 여배우가 없어!” 하며 탄식한다.
(어쩐지 말투로 보아 송강호 같다).
그 말을 들은 김갑수 선배가 “여기도 뭐 마찬가지야. 한 사람도 정상적인 여자는 없어.” 한다.



# 2002. 11. 04. 12회차

조금 안정된 날씨 덕에 촬영 재계. 최고의 압권은 쥐새끼의 목이 서랍에 끼는 장면.
몸을 사리지 않는 쥐새끼의 열연에 노고를 치하.
이에 자극받은 다른 쥐새끼가 농약 먹은 쥐연기를 실감나게 열연.
마취에서 깨어난 쥐들을 다시 연구실로 돌려보냈다.

떠나는 쥐들에게 전 스탭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냄.



# 2002. 11. 14. 16회차.

양수리종합촬영소 2스튜디오.
이틀 뒤에 이모개 촬영감독 결혼식이어서 촬영 빨리 끝나고집에 가서 결혼 준비를 해야 하는데 진행은 더디어만 간다.

나도 빨리 O.K사인을 내고 싶은데 만족스런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오승철 조명감독이 이모개 촬영감독 빨리 가시라고 열심히 조명을 한 덕분에새벽 1시에 촬영이 끝남.



촬영 내내 악몽에 시달렸던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제작기 | 인스티즈


# 2002. 11. 22. 20회차

수미가 수연의 소리가 난다는 말을 듣고 1층에 내려오는 장면을 돌리 이동장면으로 촬영.
카메라 동선을 말해주니까 촬영감독과 영상시대가 난감해한다.
거의 돌리 위에서 360도를 돌아야 했다.
가능한지 아닌지 일단 테스트는 해보자고 합의한 뒤 모니터를 보니까 만족스런 이동이 나왔다.
“좋은데…” 하는 말을 하려고 세트 안으로 들어갔더니,

촬영감독이 360도를 돌아서 모니터 라인과 배터리 라인에 감겨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
다른 스탭들은 웃음을 참느라고 컥컥거렸고 이모개 촬영감독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 2002. 11.30. 26회차

우리 세트장의 여배우들이 예쁘다는 송강호의 소문을 듣고 <살인의 추억>의 김상경과 김뢰하가 옆 세트장에서 놀러옴.
여배우들과 인사를 나눔.
그뒤로 틈만 나면 세트장에 놀러오는 송강호와 김상경. 그리고 김뢰하.
송강호가 “감독님이 계시나?” 하면서 팀들을 몰고 들어온다.
촬영장에 당연히 감독님이 계시지.
김상경은 아예 나를 보고 의자왕이라고 놀린다.



촬영 내내 악몽에 시달렸던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제작기 | 인스티즈


# 2002. 12. 07
<살인의 추억> 현장에 놀러갔다.
송강호와 김상경이 취조실에 있는 한컷을 봤는데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앵글, 연출, 연기의 삼박자가 완벽한 호흡을 이루며 전율을 느끼게 했던 경험은 <복수는 나의 것> 현장 이후 처음이었다.
봉준호의 눈빛에도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다.
좋은 스탭과 훌륭한 연기자와 호흡을 맞춘 봉준호의 치밀함이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이거 분명히 우리랑은 적어도 한달 정도 차이나게 개봉하는 거지?”



촬영 전까지만 해도 한달 이상 사이를 두고 서로의 영화를 개봉하는 일정으로 촬영을 하자는 약속을 했던 봉준호.

그런데 봉준호의 태도에 싸늘함이 느껴졌다.


“글쎄 잘 모르겠네요. 좀더 늦춰질 것 같기도 하고…. 김무령 PD한테 물어보세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배… 신… 자.”


나는 김무령에게 뛰어가(물론 바로 앞에선 여유있는 폼으로 걸어갔다) 개봉일이 우리랑 부딪치는 거 아니겠지? 하고 물었다.



“<장화, 홍련>이 뭐가 걱정이에요?”



“무슨 소리야? 이건 완전히 레알마드리드랑 강북조기축구회와 붙는 거나 다름없지.”



“네? 여보세요? 감독님 잠깐만요. 여보세요. 아… 어디라구요?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 추천위원회라고요?”



내 말을 완전 무시하고 휴대폰을 들고 나가버리는 김무령.




그날 밤 정말 무시무시한 꿈을 꾼다.



<살인의 추억>과 <장화, 홍련>이 나란히 개봉했다.

“안 돼!”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깬다.



촬영 내내 악몽에 시달렸던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제작기 | 인스티즈


# 2002. 12 .21
조명부 막내 귀염둥이 선희 사고 일어남.
천장에 조명기를 설치하려다 발을 헛딛는 바람에 떨어짐.

오랜 시간 동안 답답한 세트 안에서 촬영을 강행했기 때문에 모든 스탭들이 지치고 집중력이 떨어져 있다.

세트장 분위기가 조금씩 흉흉해졌다.
편하게만 생각했던 세트 촬영이 이렇게 힘든 것인지 몰랐다.
게다가 너무나 큰 세트였기 때문에 감당해내기가 정말 어려웠다.
더욱이 이렇게 큰 세트 안에서 엔비언트 조명을 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은 일반 조명환경의 촬영 때보다 배 이상 걸렸다.
이렇게 힘드니까 알면서도 실험을 안 하는 것이군 하고 생각했다.
나도 순간적으로 ‘에이 확 무시해버리고 그냥 일반 조명으로 가버릴까? ’ 하고 되뇌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꿈에 장화, 홍련 두 자매가 원귀가 되어 나타났다.


“우리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니? 우리의 원을 풀어주는 영화를 만든다면서 그 정도도 안 하려고 그런 거야? ”




# 2002. 12. 24. 41회차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다들 섭섭해하면서 촬영을 함. 아침에 세트장 안에 큰 크리스마스 트리와 빨랫줄에 제작부에서 스탭들을 위해 준비한 양말 선물들이 카드와 함께 걸려 있었음.
오늘은 다른 날보다 O.K를 빨리 불렀다. 모처럼 신 누끼도 찍고 3신을 소화했다.
그러나, 무현 욕실장면을 찍을 때 호스가 잘 안 맞고 수증기를 만들어내는 부분 때문에 촬영이 새벽에 끝남.


제기랄, 그럼 그렇지.



# 2003. 01. 12∼13

에필로그 세트분량 촬영을 시작함.
염정아. 임수정. 문근영이 다른 헤어스타일로 나타나 촬영을 함.
뒤에 들어오는 촬영팀이 거의 밀고 들어오는 상황이라 며칠째 강행군을 해야 했다.
그래도 단 며칠이라도 봐준 그 회사가 고맙다.



촬영 내내 악몽에 시달렸던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제작기 | 인스티즈


# 2003.01.15. 56회차
세트 마지막이어서 다들 수십 시간 잠을 못 자고 촬영을 강행했다.
역시 이렇게 쫓기듯 찍은 장면들이 좋게 나올 리 없었다.
그래도 하는 수 없었다. 철수할 수밖에….

마지막 장면에서 소수정예의 잠없는 스탭들이 남아 끝까지 촬영을 함.
몰려오는 잠을 이겨내는 방법은 틈날 때 눈을 감고 있는 방법밖에 없었다.
“감독님, 일어나세요.”

세트 바라시하는 데도 이틀이 걸렸다.
영화를 잘못 찍고 두 다리를 쭉 펴고 자기란 쉽지 않다.

나는 오늘도 다리를 오므리고 잔다.



# 2003. 01.27. 60회차

수연이가 생리하는 장면 촬영.
어린아이여서, 피묻은 팬티가 나오는 장면이어서 남자스탭들의 출입을 삼가고 촬영기사와 감독님을 제하고 모두 여자스탭들이 들어가 진행함.
문근영은 이렇게 여자스탭들만으로 영화를 찍는 것이 너무 멋있다고 한껏 들떴고, 촬영감독은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눈감고 찍었다고 했다(이동컷인데…).

나도 눈감고 모니터를 봤다는 말은 차마 못했다.


촬영 내내 악몽에 시달렸던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제작기 | 인스티즈


# 2003. 01.29. 62회차

수미 방 세트 마지막.
에필로그 장면을 촬영하고 엄마귀신이 나오는 장면을 촬영.
와이어를 설치하고 천장을 막고 붙이고 하느라 세트팀이 고생함.
세트팀 오 차장님이 명언을 남김.



“뜯어요? 환장하겄구먼.”

“붙여요? 환장하겠네.”



러 번의 NG 끝에 20번 만에 귀신걸음 성공. 여전히 다음날 낮까지 촬영함.



# 2003. 02. 04. 63회차

정신병원 촬영. 꽤 고급스러운 정신병원으로 모든 스탭들이 조심조심하면서 촬영을 함.
병원에 있는 수미를 만나러온 은주와 무현의 장면을 촬영.
정신병원이어서 다른 소품이나 물건들이 없어 모두들 정말 세트 같다는 말을 했다.
너무 세트촬영에 길들어 있어서, 촬영감독이 벽을 ‘댕강’할 수 없냐는 말이 나옴.

병원촬영을 하다, 예민한 환자들의 항의 때문에 복도신을 찍지 못하고 철수.

환자 왈, 스탭들 중 누군가가 자기 보고 미쳤다고 했다고 한다.
확인했지만 아무도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환자의 말을 믿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음….”




# 2003. 02.14. 70회차

며칠 동안 소리지르고 많이 울어서 그런지 계속 감정이 나오지 않아 수정이와 근영이가 많이 힘들어 함.
둘다 거의 탈진상태. 안쓰러웠지만 여기서 약해지면 오히려 나중에 수정이와 근영이한테 원망을 들을 것 같았다.
좋은 장면이 나올 때까지 더할 수밖에.
TV촬영과 영화촬영을 동행해서 잠을 거의 못 잔 근영은 최후의 발악을 하듯, 현장에서 더 활발하게 뛰어다니고 떠들다가 촬영이 끝나자마자 쓰러져 잠.

런 근영이를 보고 웃는 수정이를 보며 진짜 자매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 2003. 03. 02. 마지막 촬영

촬영을 끝내고 그러니까 마지막 컷을 부르고 나오면서 스탭들과 하나씩 악수하고 포옹했다.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모두들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눈이 온다.




# 2003. 04

지나던 길이라며 편집실에 들른 홍상수 감독님이 편집된 것 좀 보자며 들어오기에 등을 떠밀어냈다. 개봉하기도 전에 망신당하고 싶지 않았다.
편집을 하도 붙였다 떼었다 하니까 고임표 편집기사가 이 컷은 다시 붙이거나 떼지 않겠다고 서약함이라고 아예 신 제목을 붙여 아비드편집기에다 입력했다.


촬영 내내 악몽에 시달렸던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제작기 | 인스티즈


# 2003. 05
이병우 음악감독 스튜디어에서 음악작업 중.
내가 하도 이 음악 만들어 달랬다가 저 음악 만들어 달랬다가 하니까 이병우 음악감과 피아니스트 신이경이 건반 자리를 내주며 한번 쳐봐 한다.
하라면 못할지 알고? 하면서 건반을 마구 눌렀다.

소리에 감동먹고 있는데 둘이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라이브톤에서 믹싱 중.

소리를 하도 이것 넣었다 저것 넣었다 하니까 라이브톤 최태영 기사가 아예 여러 소리를 만들어놓았다.
편집이 늦어진데다 개봉이 예상보다 일주일 정도 일찍 잡히는 바람에 사운드작업이 중요한 이 영화의 후반 일정이 너무 빡빡해졌다.


이 영화가 정말 무섭고 아름답고 슬픈 영화가 될 수 있을까?
이 영화가 정말 두 자매의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순간의 참혹한 마음의 공포를그려낼 수 있을까?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어왔는데….
정말 상상력이 진정성이란 게 가능한 걸까?



오 하느님 제발 저에게 일주일만 시간을 더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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