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라서 좋다거리에 서서초점을 잃어가는 사물들과각자의 외투 속으로 응집한 채 흔들려가는 사람들목 없는 얼굴을 바라보는 게 좋다너를 기다리는 게 좋다오늘의 결심과 망신은 다 끝내지 못할 것이다미완성으로 끝나는 것이다포기를 향해 달려가는 나의 재능이 좋다나무들은 최선을 다해 헐벗었고새떼가 죽을 힘껏 퍼덕거리며 날아가는 반대로 봄이 아니라 겨울이라 좋다신년이 아니고 연말, 흥청망청처음이 아니라서 좋다이제는 곧 육신을 볼 수 없겠지움푹 파인 눈의 애인아 창백한 내 사랑아일어나라 내 방으로 가자그냥 여기서 고인 물을 마시겠니? 마지막으로한 번 더 널 건드려도 괜찮지?숨넘어가겠니? 영혼아,넌 내게 뭘 줄 수 있겠니?- 12월 / 김이듬이목구비는 대부분의 시간을 제멋대로 존재하다가오늘은 나를 위해 제자리로 돌아온다그렇지만 나는 정돈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나는 내가 되어가고나는 나를좋아하고 싶어지지만이런 어색한 시간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나는 점점 갓 지은 밥 냄새에 미쳐간다내 삶은 나보다 오래 지속될 것만 같다- 축, 생일 / 신해욱헤어질 때 더 다정한 쪽이 덜 사랑한 사람이다그 사실을 잘 알기에 나는 더 다정한 척을, 척을, 척을 했다더 다정한 척을 세 번도 넘게 했다안녕 잘 가요 안녕 잘 가요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는 말들일 뿐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中 / 이제니내가 사랑하는 붉은 방, 햇빛 서글픈창문의 붉은 색지그 방에 내가 깨어 있는 방투덕투덕 화투를 칠 것 같은 이불 한 채헙수룩한 경대 위엔 오래된 티비와 재떨이가 놓여 있는엷은 병내를 풍기는 방내 방을 당신이 조금씩 여는내가 생에 대한 느낌 없이 당신을 재우고잠시라도 다시 내 방으로 놔두고 싶은 방눈을 감아도 내 눈두덩 감아 도는붉은 방, 하루도 못 견뎌 내안으로 잦아드는 그림자여닫이 창문을 열면내 방도 내 몸도 검붉은 물 흘리는누추한 나의 입술이 다시 붉어지고내가 나만을 사랑하게 누군가 날염하며 휘젓는 방그 방에 언제 봄꽃이 피지?붉게 울먹이다 방문을 닫아건 방하루치 숙박료를 받으러 오는 달소리- 붉은 달 / 김윤이함부로겨울이야 오겠어?내가 당신을 함부로겨울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어느 날 당신이 눈으로 내리거나얼음이 되거나영영 소식이 끊긴다 해도함부로겨울이야 오겠어?사육되는 개가 조금씩 주인을 길들이고무수한 별들이 인간의 운명을 감상하고가로등이 점점이 우리의 행로를 결정한다 해도겨울에는 겨울만이 가득한가밤에는 가득한 밤이?우리는 영영 글자를 모르는 개가 되는 거야다른 계절에 속한 별이 되는 거야어느 새벽의 지하도에서는 소리를 지르다가당신은 지금 어디서혼자 겨울인가?허공을 향해 함부로무서운 질문을 던지고어느덧 눈으로 내리다가 문득소식이 끊기고- 겨울에 대한 질문 / 이장욱당신이 원한다면 내 눈을 빌려 줄게유리창 밖으로 눈 내린다 목요일이 한 겹 닫히고 한 겹 열린다당신이 원하는 것이 마리 로랑생의 일상이라면 눈앞은 더 이상 기하학적인 것이 아니다오늘 구름이 맡은 일은 헌 캔버스의 지상으로 물감을 짜내는 일하얗게 덧바른 거리 위에 우산을 쓴 다리들이 붓질을 하면 구름이 그림을 지우고그림 위에 그림을 올린 듯 모든 흔적을 한꺼번에 겹쳐놓은 풍경화가 된다당신의 얼굴이 유리 안에 스며들고 창틀은 액자로 걸린다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그림엽서를 꺼내 당신은 편지를 적는다평범한 목요일이야 그곳의 너는 읽히지 않는구나그러니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초상화가 되어 죽는 걸까유리창 너머에 사내가 눈을 쓴다날리는 눈발에 목요일이 한 겹 열리고 한 겹 닫힌다엽서 어디에도 당신은 없는 단어다- 목요일 / 석지연첫눈이 내린다어디고 없이 제멋대로내리고 내리는 것 같지만내릴 곳을 보아 가며서둘지 않고 내린다첫눈이 내린다지상의 왼갖 성명들을 잠재우며지상의 왼갖 낙서들을 지우며한량없이하이얗게 내린다높고높은 하늘을 지나서가파른 절벽을 지나서풀잎들의 머리 위를 지나서움직이는 것들 위에 내린다숨 쉬는 것들 위에서 내린다꿈꾸는 것들 위에서 내린다오오, 오오, 소리치지는 않고오오, 오오, 그 입 모양만 보이며우리들 귓바퀴 근처에 내린다보아라, 보아라, 소리치지는 않고보아라, 보아라, 그 입 모양만 보이며우리들 눈앞에뺨 비비며첫눈은 그렇게 그렇게붐빈다- 사랑 / 조태일하루 종일 분홍눈이 내렸다 세로도 가로도 없는 그 공간을 '방'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기에 우리는 '우주'라는 말을 발견했다 그 후 우리는 '하나는 많고 둘은 부족한' 별에 착륙했고 중력은 희미했고 궤도를 이탈한 계절은 랜덤으로 찾아왔다 어제는 겨울 오늘은 여름 낮에는 가을 밤에는 봄 우리는 당황했지만 즐거웠고 우리는 은밀했다 이상했지만 세계는 완벽했고 중력은 충분히 희박했다 검색창 밖으로 하루 종일 푹푹 분홍눈이 내렸고 하루 종일 우주선처럼 둥둥 떠다녔다 사랑과 합체한 사랑은, 그리고 또 우리는 그 후 '하나는 많고 둘은 부족한' 별의 거북무덤엔 이렇게 기록되었다 사랑을 체험한 뒤엔 전과 똑같은 인간일 수는 없다! - 합체 / 안현미더 많이 사랑했다고 해서 부끄러워 할 것은 없습니다더 오래 사랑한 일은 더군다나 수치일 수가 없습니다요행히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어 행할 수 있거든 부디 먼저 사랑하고 더 나중까지 지켜주는 이가 됩시다- 서시 / 김남조무섭다 결국 그곳엔 아무도 없을 것이다무섭다 마음이 무섭고 몸이 무섭고싹 트고 잎 피고 언제나 저절로 흐드러지다가바람 불어 지는 내 마음 속 꽃잎 꽃잎, 그대가 무섭다나는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왔으므로아주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하나의 고요한 세상을 지니고 있으니, 무섭다 그러나 나는 나를 이끄는 매혹에 최선을 다해 복종하였으므로 고요한 세상에 피고 지는 아름다운 모반을 주시하였다그대가 처연히 휘날려 내 몸과 마음이 어지러울 때단 한번도 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흘러가는 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으므로기억을 만나면 기억을 죽이고 불안을 만나면 불안을 죽이고, 그러므로 이제 이 눈과 코와 입과 귀를 막아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하시길그대에게 익숙한 세상으로 나를 인도하여그대 몸과 마음에 피고 지는 싹과 잎과 꽃이 되게 하시길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왔으므로아주 정교하게 정렬해 있는 이 고요한 세상을 처연히 흩날리도록,내 몸과 마음의 꽃잎 꽃잎 피고 지는 그곳에 기다리는 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꽃잎, 꽃잎, 꽃잎 / 이장욱당신과 나는 꽃처럼 어지럽게 피어나꽃처럼 무심하였다당신과 나는 인칭을 바꾸며거리의 끝에서 거리의 처음으로자꾸 이어졌다무한하였다 여름이 끝나자 모든 것은 와전되었으며모든 것이 와전되자 눈이 내렸다허공을 예측할 수 없는 각도로 가득 찼다 누군가 겨울이라고 외치자모두들 겨울을 이해하였다당신과 나는나와 그는꽃의 미래를 사랑하였다시청각적으로유장하였다 당신과 그는 가로수가 바라볼 수 없을 만큼화사하고그와 나는 날아가는 새가 조감할 수 없을 만큼빠르게 변신하고나와 당신은 유쾌하게 떠들다가무표정하게 헤어졌다 우리는 일에 몰두하거나고도 15미터 상공에 앉아전화를 걸었다창가에 서서 쓸쓸한 표정으로 바깥을 바라보자다시 당신이 지나가고배후에 어지러운 꽃이 피었다- 당신과 나는 꽃처럼 / 이장욱몸을 팔아 하얀 꽃바구니를 샀네골목 어귀 눈에 띄는 담벼락에서 검은 장미를 한 웅큼 꺾었네꺾인 장미는 웃었고 나는 피를 흘렸네담벼락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끄적이고 걸음을 재촉했네검은 장미는 하얗게 변해 갔네나는 꽃바구니를 검은색으로 칠했네바구니에 꽂자 장미는 깃털을 흩날리며 날아가기 시작했네상심한 나는 꽃바구니에 신발을 담았네향이 진한 담배도 담았네 뚱뚱한 당신은 담기가 힘들었네팔과 머리칼이 삐죽삐죽 튀어나왔네당신을 다시 꺼내 운동을 시켰네 심부름도 시켰네검은 장미가 피었는지 골목 어귀에 가 보라고 했네천 일이 지나도 당신은 돌아오지 않았네골목 어귀에 다시 갔을 때 검은 담벼락에 눈이 부셨네담벼락을 휘감은 당신의 몸에서 아직 검은 꽃잎이 자라는 중이었네날아갔던 하얀 장미가 담벼락 아래서 구경하고 있었네나는 재빨리 들고 있던 검은 꽃바구니를 팔아 몸을 샀네당신을 한 아름 꺾어 내 몸에 꽂았네꺾인 당신은 웃었고 나는 피를 흘렸네- 산책 / 이민하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슬픔이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기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節度)는열렬하다간단도 사랑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눈을 떴다 감는 기술 - 불란서혁명의 기술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신념이여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신념보다도 더 큰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인류의 종언의 날에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새겨둘 말은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배울 거다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의심할 거다복사씨와 살구씨가한번은 이렇게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사랑의 변주곡 / 김수영세 장의 달력을 한꺼번에 뒤로 젖혔다 정확히 석 달,그 동안 우리는 매일 밤 전화를 했다 밤새낡은 말을 하고 그 말을 믿었다믿으려고 애썼다 한 줄의 글 쓰지 않았다편지 보내지 않으니 오는 편지 없었다단 하루의 日記도 없이 백 일을 보냈다 우리는서로에게 주인을 강요했다 노예로삼아달라고 밤새 서로를 설득했다 그렇게백 일을 보냈으나, 백 원짜리 폭죽처럼입술은 건드리는 족족펑펑 터졌으나, 속 쓰리고 머리 아픈 아침만이 남은몫이었으나한 번의 후회도 언급한 적 없었다 불안함없었다 비 없었고 빛도 없었다그저 지루한 인생의 백 일을 도려냈다는큰 몫을 우리는 찬양했다- 우리는 찬양한다 / 김소연어느 이름 모를 거리에서예고없이그대와마주치고 싶다그대가처음내 안에 들어왔을 때의그 예고 없음처럼- 헛된 바람, 구영주확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