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로 끌려간 노모를 구한 고려의 효자 김천
1231년부터 시작되어 1259년까지 근 30년 동안 고려는 커다란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한 때 송, 요와 더불어 동북아시아 세력균형을 담당했던 고려는 최씨 무인정권의 끝없는 권력추구와 가렴주구로 인해 국력이 피폐해졌고, 설상가상으로 저고여의 피살을 구실로 쳐들어온 몽골과 7차례에 걸쳐 싸우면서 전 국토가 유린되었다.
몽골과의 전쟁은 고려에 큰 상흔을 남겼다. 20만이나 되는 고려인들이 몽골에 포로로 끌려간 것이다. 『송사』에 의하면 고려의 인구는 210만이라 하니 전 인구의 10%가 오랑캐의 땅으로 끌려간 것이다. 전쟁은 비참하다. 특히 약자에게 있어 전쟁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참담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
훗날 조선에서 청의 침입으로 많은 수의 조선백성들이 이역만리의 땅 청으로 포로로 끌려가 노예처럼 비참한 생활을 했듯, 고려인들 역시 몽골땅으로 끌려가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데 포로로 끌려간 노모를 구한 효자가 있었다. 『고려사』열전34 효우 김천 조의 주인공인 김천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김천은 명주(溟州) 아전이며 아명은 해장(海莊)이다. 고종 말년 차라대가 이끄는 몽골군이 김천이 사는 명주땅까지 쳐들어왔다. 이 때 김천은 어머니와 동생 김덕린을 잃었다. 당시 김천의 나이는 불과 15세에 불과했다. 그는 포로로 끌려간 어머니와 동생을 찾으며 밤낮없이 울고 지내다 잡혀 간 사람들이 도중에서 다수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어머니와 동생이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여 빈 관으로 장례를 치렀다.
김천의 어머니와 동생이 몽골로 끌려간 지 14년이 지났을 때, 백호(百戶) 습성(習成)이란 사람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개경의 장마당에서 ‘명주 사람 있소!’라고 외치며 돌아다녔다. 정선(旌善) 사람 김순(金純)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자신이 명주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습성은 김순에게 다가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김씨라는 여자가 원나라 동경(東京)에서 말하기를 ‘나는 본래 명주 사람인데 해장이란 아들이 있소’라고 하면서 이 편지를 전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는데 당신은 해장을 아는가?”
김순이 놀라며 자신은 해장(김천)의 친우라 대답하였다. 그러자 습성은 김순에게 편지를 해장에게 전해달라 부탁했다. 그 편지는 몽골에 포로로 끌려간 김천의 어머니가 아들 김천에게 보낸 편지였다.
“나는 몽골군이 명주에 침입했을 때 포로가 되어 몽골로 끌려왔다. 도중에 죽지 않고 살아서 어느 주(州) 어느 마을 누구 집에 와서 노비로 되었다. 배고파도 얻어 먹지 못하고 추워도 얻어 입지 못하고 낮이면 밭 매고 밤이면 절구질한다. 그 동안 갖은 고생을 다 겪었다. 누가 나의 생사(生死)를 알겠는가?”
죽은줄만 알았던 어머니의 편지를 본 김천은 통곡하였다. 울다가 그치고 다시 편지를 읽었다. 김천의 아버지도 비통해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동정하였다. 김천은 어머니가 몽골에서 비참한 노예생활을 하는 모습을 떠올라 식사를 할 때에도 목이 메어 밥을 넘기지 못했다.
김천은 아버지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오겠다고 하였다.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는 속전을 내야했으나 가난한 김천에게는 재물이 없어 겨우 이웃 사람에게 은(銀)을 꾸어 개경으로 올라갔다. 그는 조정에 모친을 찾으러 가겠다고 신청했으나, 조정은 허가하지 않아 되돌아와야 했다.
그 후 충렬왕이 원나라로 입조(入朝)할 무렵에 또 다시 개경으로 와서 청하였으나 조정의 결정은 지난번과 같았다. 김천은 오랫동안 서울에 묵고 있으면서 옷은 해어지고 식량도 떨어져 우울하게 지나가던 중에 도상에서 같은 고을 중 효연(孝緣)을 만나서 눈물을 흘리며 슬픈 사정을 하소연하였다.
“내 형 천호(千戶) 효지(孝至)가 지금 동경으로 가니 당신은 따라갈 수 있을 것이오 내가 주선을 하리다.”효연은 자신의 형 천호 효지에게 김천을 소개하였다. 천호 효지 군중에 있는 사람들이 김천에게 편지를 받은지 얼마나 되었냐고 묻자, 김천이 6년이 되었다고 답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김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이 모친의 편지를 받은 지 벌써 6년이 지났는데 그간 모친의 생사를 어찌 알겠는가? 그리고 도중에 불행히 강도나 만나면 목숨과 돈을 빼앗길 따름이다”그러자 김천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면 시신이라도 수습하여 돌아올 것입니다. 어찌 어머니를 만리타향에 두겠습니까? 어머니를 찾으러 가는데 목숨과 몸덩이를 어찌 아끼겠습니까?”
김천은 효지를 따라 동경에 들어가서 고려의 역어 별장(譯語別將) 홍명(弘命)과 함께 북주(北州) 천로채(天老寨)로 가서 모친이 있는 곳을 찾았다. 그 곳은 원의 군졸 요좌(要左) 집이었다. 요좌는 몽골군으로 고려에 출정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포로들을 끌고와 부자가 된 사람이었다.
김천이 요좌의 집에 이르러 문을 두드리자 한 노파가 나와서 절을 하는데, 누더기옷에 머리는 쑥대머리요. 얼굴에는 때가 더덕더덕 묻었다. 김천은 그 노파를 보고도 자기 모친인 줄 모르고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라고 물었다.
“나는 본시 고려 명주 호장(戶長) 김자릉(金子陵)의 딸인데 동생인 김용문(金龍聞)은 이미 진사(進士) 급제하였고 나는 호장 김종연(金宗衍)에게 출가하여 해장과 덕린 두 아들을 두었더니 덕린은 나를 따라 이곳에 와서 있은 지 이미 19년이 되었소! 지금 서쪽 이웃에 사는 백호(百戶) 천로(天老)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소! 오늘 뜻밖에 다시 우리나라 사람을 보게 되었구려!”
김천은 이 말을 듣고 꿇어앉아 절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울며 자신이 해장임을 밝혔다. 그러자 어머니도 김천의 손을 쥐고 울면서 “네가 진정 내 아들이냐?! 나는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구나!”라고 하였다. 요좌가 마침 집에 없어서 김천은 어머니를 속신하지 못하고 동경으로 가서 별장 수룡(守龍)의 집에 한 달이나 유숙하다가 수룡과 함께 요좌 집에 다시 가서 속신을 요구하였으나 거절하였다. 김천이 애걸복걸하여 은 55냥으로 겨우 속신하였다.
이 때 김천은 동생 김덕린도 만났다. 그러나 가지고 온 돈이 없었기 때문에 동생은 속신시킬 수 없었다. 김천은 어머니를 말에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돌아오기 시작했다. 동생 김덕린은 동경까지 배웅하러 와서 울었다. “편안히 돌아가십시오. 지금은 따라가지 못하나 하늘의 복이 있으면 반드시 서로 만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모자가 서로 안고 흐느껴 울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이 때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이 원나라로부터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동경에 이르렀다. 동경에는 김천의 이야기가 고려인들 사이에 크게 화제가 되고 있었다. 김방경은 김천의 모자를 불러 보고 칭찬과 감탄을 마지않았으며 원나라 총관부(摠管府)에 부탁하여 증명서를 교부하며 식사와 숙사를 제공받으면서 귀국하도록 하였다.
명주 가까이 왔을 때 김천의 아버지 김종연(金宗衍)이 이 소식을 듣고 진부역(珍富驛)까지 마중 나와 부부가 서로 보고 기뻐하였다. 김천이 술잔을 들어올리고 통곡을 하니 좌중이 모두 눈물을 흘리었다.김자릉(子陵)은 나이 79세였는데 딸을 보고 어찌나 기쁘던지 땅에 엎어졌다. 그 후 6년이 지나 천로의 아들이 김덕린을 데리고 왔으므로 김천은 빚을 얻어 86냥(兩)을 주고 아우를 노비 신분에서 해방시켰다. 김천은 부지런히 일을 하여 몇 해 안가빚도 다 갚고 아우 김덕린과 함께 종신토록 부모님께 효성을 다하였다.죽은 줄 알았던 노모를 구하러 만리타향까지 가 어머니를 구한 김천이야 말로 진정한 효자가 아닐까? 김천은 자신의 어머니와 동생을 속신시켜 행복하게 살았지만, 대다수의 고려인 포로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노예처럼 살다 비참하게 죽었을 것이다.
한 가지 재밌는 건 김종연이 자신의 부인을 따듯이 맞이한 점이다. 이는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들과 대비된다. 조선의 양반가는 자신의 부인이나 며느리가 청의 포로로 끌려갔다 환속했을 때 오랑캐에 몸을 더럽혔다며 받아주지 않은 것과 비교된다.
고려사 열전의 위 이야기는 전쟁의 참혹함,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하층민들의 삶을 보여준다. 영광의 역사, 굴욕의 역사, 승자의 역사, 패자의 역사 그 뒤에는 항상 민중들이 있었다. 민중들의 눈물과 애환.... 천년전 이역만리의 낯선 땅으로 끌려간 우리 선조들의 아픔이 전해지는 거 같아 가슴이 시리는 것 같다.
참고
『고려사』열전34 효우 김천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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