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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5년 전 (2018/10/19) 게시물이에요
조선시대의 야생 동물과 가축 | 인스티즈

김동진(중세사2분과)

거시 생태는 생태 환경을 구성하는 여러 생물종의 변화를 수로 헤아리고, 브로델이 말한 바와 같이 그 수의 무게를 달아 생태 환경의 변화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바이러스로부터 거대 동물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생명체의 수량을 헤아리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현대적 과학기술을 갖지 못한 조선 시대의 기록을 살피면 당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사람과 어느 정도 비슷한 크기의 동물들이었고, 또한 사람들과 가까이서 살아가는 동물들이었다. 다행히 조선시대에 들어 4군과 6진이 개척되면서 한반도 대부분이 가용공간으로 편제되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살았던 동물들을 헤아린 기록을 꼼꼼히 되새겨 시간이 경과하면서 나타난 수량의 변화를 확인하면 생태 환경의 변화를 그려낼 수 있다.

   한국인은 한반도의 생태계(Ecosystem)의 먹이 사슬에서 최상위 포식자이면서, 다양한 종의 동식물을 삶의 수단이요 동반자였다. 그 결과 한국인과 한반도 생태 환경의 관계, 한국인의 문화적 역량과 이에 의거하여 결정한 국가 정책과 관련을 맺으며 생태 환경이 크게 변화하였고, 이는 먹이 사슬의 정점에 선 깃대종이나 지표종의 양적 지표로 나타났다.

   조선이 성립하기 이전에 한반도에서 널리 서식하거나 사육되면서 사람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동물들은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18세기 이전 한반도에서 살아가던 한국인의 삶을 표현한 거시 생태의 개념도라고 할 수 있다. 먹이사슬을 이루며 공존하던 범과 사슴을 말을 탄 무사들이 몰이꾼과 개를 동원하여 사냥하고, 사냥한 짐승을 싣고 가려고 소가 끄는 수레를 동원한 모습은 18세기 이전의 한반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세계였고, 18세기 이후 상상 속의 이미지로 전환된 과거의 역사였다.

조선시대의 야생 동물과 가축 | 인스티즈
[그림1]  고구려 무용총(舞踊塚) 수렵도(狩獵圖)  무용총 널방 서쪽에 그려진 것으로 기복이 있는 산악에서 4명의 기마무사(騎馬武士)가 사냥을 하고 있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소재지 : 중국 吉林省 集安縣 通溝)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고분벽화에 일상적으로 등장하는 이러한 동물들이 조선시대에도 한반도에 널리 서식했다는 점은 말할 수 있지만, 역사학이 그것들이 살았던 모습을 수치로 말해준 적이 없다. 동물의 종류만을 나열하는 것으로 과거의 역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가? 만약 고도의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사상사의 연구라면 때때로 숫자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강진단서를 보면서 그곳에 쓰여진 숫자에는 상당한 무게가 담겨있다. 몸무게, 혈압, 콜레스테롤 등에 대한 수치는 건강함과 병약함을 판가름하는 시금석이다. 총생산량과 총소득, 생산요소의 고용수준, 전반적인 물가동향 등 거시 경제현상과 마찬가지로 생태환경을 반영하는 거시적 수치 역시 호랑이의 용맹함, 소의 우직함, 말의 날렵함 만큼 때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깃대종이나 지표종의 수치는 생태 환경의 해명할 수 있는 더욱 중요한 의미 그물망의 핵심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

   한반도에 살았던 동물들의 수치는 어떻게 헤아릴 수 있고, 어떻게 변화했는가? 몇 마리였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수치 변화의 개요는 간략히 말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야생 동물과 가축 | 인스티즈
[그림2]  유숙(1827∼1873)의 ‘호도(虎圖)’와 이인문(1745∼1821)의 ‘수렵도(狩獵圖)’  ⓒ국립중앙박물관

   범과 표범은 조선 건국 이후 17세기 초까지 적어도 매년 1,000마리 이상 사냥될 수 있었지만, 이후 급속히 줄었고, 20세기 초에는 그것들이 어디서 어떻게 잡혔는지를 모두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수가 줄었고, 20세기 후반에 사실상 멸종되었다.

   사슴은 대록(순록의 일종)과 꽃사슴이 있었는데, 대록은 16세기 이후 전국 각 지역에서 그 수가 급격히 줄었다. 세조∼성종 무렵까지 곳곳에서 한번 사냥에 보통 1,000여 마리를 사냥할 수 있었던 꽃사슴은 17세기 이후 곳곳에서 사라졌다. 18세기 이후 큰사슴은 개마고원과 백두산 일원 등 몇몇 곳에서 간간이 볼 수 있었다.

   1만 마리는 넘었고, 10만 마리에 도달하지 않았던 말들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범위 내에서 늘고 줄고를 반복하였다. 일제강점기에도 3만에서 8만을 유지했지만, 해방 이후 농기계의 도입과 함께 그 수가 급격히 감소하여 3,000 가량으로 줄어든 후 경마와 레져로 인해 1만을 넘고 2만을 행하고 있다.

   농사를 짓는데 필수적인지라 언제나 우리 가까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우직한 소는 세종대 무렵 3만 마리 전후에 지나지 않았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110만 마리 가량으로 헤아려질 수 있었다. 의 한국 소들이 세조대 오키나와에서 도입된 물소의 후손들과 교배되면서 이전보다 덩치는 대략 2배쯤 커졌으며, 힘은 2배쯤 세졌고, 논과 밭을 가는 속도는 2∼4배쯤 빨라진 능력을 갖도록 개량되었다. 노동의 효율성 측면에서 15세기 기준으로 3만 우력(牛力 : 서양은 말의 힘을 기준으로 馬力이라 하였다)의 조선은 20세기 초에 이르러 220만∼440만 우력으로 농사짓게 되었다. 우력의 대폭발이었다.

자 그러면, 15∼19세기에 범ㆍ표범ㆍ사슴이라는 야생동물의 멸종과 가축 중에서 소의 개체수가 대폭발한 까닭과 그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한반도에 서식했던 큰 동물은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이루고 있으며, 인간의 역할은 이 먹이 사슬의 체계를 변화시켰다. 한반도에서 최상위 포식자의 지위에 있으며 인간과 경쟁하던 범과 표범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조선이었다. 조선은 포호정책과 농본정책을 시행하였다.

   포호정책은 사냥으로 호랑이와 표범의 개체수를 줄였고, 농본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농지은 호랑이와 표범의 서식지를 줄였다. 포호정책으로 범과 표범의 개체수가 감소하여 호환의 위협이 줄어들면서 농지은 가속하였다. 즉, 생태 환경의 균형자로서의 범과 표범이 감소하면서 농지으로 야생의 숲이 크게 줄면서 한반도의 경관의 대전환이 나타나게 되었다.

   포호정책을 위해 나라에서는 범과 표범의 사냥을 전담하는 군사조직을 운영하였다. 15세기 초 200∼400명이 범과 표범의 사냥을 전담하는 착호갑사로 특별히 훈련되었다. 15세기 후반 성종대에는 전국 각 군현에 10,000여 명의 착호인을 두었다.

   16세기에는 강무에 참여한 지방군에게 범과 표범의 사냥법과 사냥 도구를 만들어 설치하는 법을 가르쳤다. 17세기에 이르면 면(面) 마다 호랑이 사냥을 주도하는 착호장을 두었고, 리(里) 마다 겨울이면 호랑이 발자국을 쫓는 심종장을 두었다. 화살이나 창을 세 번 맞아야 죽을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17세기 후반 조총을 든 강계포수들은 1발 필중으로 이름을 날렸다. 범과 표범이 맞서야 할 사냥꾼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무기는 강력해졌다.

   둘째는 범과 표범을 사냥한 사람들에 큰 상을 주는 포호포상제를 시행하였다. 호환을 일으킨 악호를 사냥하거나 5마리 등 일정한 수 이상의 범과 표범을 잡으면 관직을 받거나 가자 등을 통해 승진할 수 있었고, 원하면 상물을 받을 수 있었다. 지방에서 사냥을 주도한 수령 뿐 아니라 착호인, 착호장, 심종장 등은 그들의 공로에 따라 각기 다른 상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나라 뿐 아니라 민간에서는 곳곳에 함정이나 함기 등을 설치하여 범과 표범을 잡았고, 이들도 잡은 범의 크기에 따라 상을 받을 수 있었다. 실록에는 17세기 초 당상 중 절반은 ‘착호 당상’이라는 기록이 실렸다.

   셋째는 호피공납제(공납과 진상)를 통해 범과 표범의 가죽을 거두어 들여 사냥의 성과를 확인하였다. 17세기 초 이전에 하삼도의 각 군현은 매년 겨울 3달 동안 3마리의 범이나 표범을 잡아 그 가죽을 나라에 바쳐야 했다. 건국 이래 17세기 초까지 매년 1,000여 마리의 범과 표범을 잡아 그 가죽을 임금에게 바치는 것은 나라의 법이었다.

   성종 22년 이후 범과 표범의 포획에서 어렵다는 주장이 크게 늘어나고 방납이 성행하였다. 17세기 초에 이르러 호피와 표피를 실물로 납부하는 대신 국가에서 정한 값으로 낼 수 있게 하는 호속목을 관행적으로 용인하게 되었다. 17세기 중반 이후 대동사목에서 호속목을 법제적으로 공인한 이후 각 군현이 납부할 액수는 1장 이내의 호피와 표피였고, 이는 호속목으로 납부할 수 있었다.

   1637년 이후 조선이 외교적 의례물로 사용하는 호피와 표피는 매년 150∼200장 가량이었지만, 1711년 이후에는 20∼30장 가량으로 줄었다. 

   병자호란 직후 체결한 강화조약으로 조선은 청에 대해 매년의 정기사행에서 표피 142장을, 부정기 사행에서 53장을 진헌해야 했다. 칙사예단으로 호피 29장과 표피 6장이 있었지만, 1648년 이후에는 호피 10장을 준비하는 것에 그쳤다. 18세기 초 강희제가 감액조처로 청에 바치던 호피와 표피 147매 가량이 줄었다. 일본에 보내는 통신사와 문위행에 연평균 10여장 내외의 호피와 표피를 준비해야 했고, 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18세기 초 이후 조선에서 매년 실질적으로 사용해야만 하는 호피와 표피의 수량은 0∼50매 가량으로, 연평균 20∼30장 가량으로 줄었다.

   사슴과 멧돼지는 범과 표범의 먹잇감이었으므로 개체수의 변화에서 비슷한 추이를 보였을 것으로 보인다. 멧돼지의 변화 추이는 기록에서 파악하기 어렵지만, 사슴 개체수의 변화는 범과 표범의 개체수를 추정할 수 있는 지표와 같은 흐름을 보였다.

   한반도에 살았던 사슴은 ‘실록’에서 ‘대록(大鹿)’이라고 기록한 순록 종류가 있고, ‘록(鹿)’이라고 기록된 꽃사슴 종류가 있다.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의 수렵도에서 말을 탄 무사가 쫓는 두 마리의 사슴은 각각 암수 한 마리씩의 대록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몰이가 끝나고 군사의례로써 말을 타고 활을 쏘는 훈련의 과정이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말과 대등한 크기의 사슴은 여러 마리가 아닌 암수 한 쌍이 짝을 이룬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는 큰 규모로 무리를 이루는 꽃사슴과 다른 생태적 특성이 벽화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암수 한 쌍을 중심으로 작은 무리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슴들은 조선 전시기에 걸쳐 한반도에 서식했지만, 그 분포범위는 점차 만주에 연한 삼수-갑산 일원으로 좁아졌다. 일찍이 태종 8년(1408) 무렵 전라도 해변의 봉수를 지키는 군사들은 틈틈이 해안에 서식하는 대록을 사냥하여 그 가죽을 진상할 수 있었다. 세종 4년(1422)에도 봉상시는 대록 9마리로 젖으로 담았다. 경기도 일원에서 살던 대록을 사냥하여 바친 덕분이었다.

   16세기 무렵 대록의 서식지는 점차 줄어들었다. 16세기 초 각도는 대록을 방물로 마련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하였다. 나라에서도 이를 인정하여 5년간 견감하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강무장과 같이 야생동물을 기르던 곳에서는 간혹 2∼3마리 가량을 사냥할 수 있었다. 연산군이 특별히 짐승을 기르고 사냥을 즐긴 후원에서도 순록(馴鹿) 사냥이 이루어졌지만, 이는 반정의 명분일 정도로 정상적 상황은 아니었다.

   대록을 일상적으로 사냥할 수 있는 곳은 만포, 삼수, 갑산과 같은 곳으로 한정되었다. 따라서 16세기 중후반에 지방의 각 병영에서 진상하는 대록비는 대부분 삼수나 갑산과 같은 곳에서 값을 주고 사서 바치는 것이었으며, 이는 명종 12년(1557) 단양군수 황준량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값으로 대신 내는 대가(代價)를 통해 대록과 관련된 진상물을 마련했다. 이미 16세기에 이르면 대록은 개마고원 일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극히 희소해졌다.

   범ㆍ표범ㆍ사슴이 인간이 활용하는 가용공간의 외연에 있던 야생의 공간에서 살아가면서 가용공간의 확장으로 15∼19세기에 걸쳐 그 수가 격감한 이후 20세기에 이르러 멸종하였다. 이와 달리 신석기 시대 말기부터 인간의 가용공간에서 가축화의 길을 걸었던 소와 말은 15∼19세기에 그 용도에 따라 소는 그 수가 크게 증가하였고, 말의 숫자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

조선시대의 야생 동물과 가축 | 인스티즈
[그림3] 안악 3호분 동쪽 결방의 외양간 벽화(좌)와 마구간 벽화(우)  (소재지 : 북한 황해남도 안악군)  ⓒ동북아역사재단 동북아역사넷

   조선시대에 말의 숫자나 용도는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말은 15∼19세기에 전국적으로 3만∼10만 마리의 범주에서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추세였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에서 말은 주로 사람들을 태우거나 군사적인 용도로 쓰였다. 나라에서는 관리들이 타는 말, 역마의 수요, 군마를 보충하기 위해 각지 목장을 설치하여 말을 기르고 훈련시켰다. 중앙에는 사복시를 설치하였고, 도성 인근의 경기 지방에 많은 목장을 설치하여 관리했다. 또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삼남 지방에도 많은 목장을 설치했는데, 특히 제주도에는 8개의 목장이 설치되었다. 여기에서 기른 말은 1446년 당시 9,780마리 가량이었다.

   임진왜란 직후 전라도 각 목장에서 기르던 말 가운데 남은 것이 10분의 2∼3밖에 되지 않아 제대로 징발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왜군의 약탈로 국영목장이 파괴된 결과였으며, 이후 오랫 동안 회복되지 않았다. 1641년 당시 전국의 말 목장 100개 가운데 말이 없다시피 한 목장이 55개였고, 말이 있는 목장이 45개에 지나지 않을 정도였다. 18세기 말에 강화도의 목장은 대부분 폐지되고 40∼50군(1군은 120마리)에 불과했다.

   목장은 곳곳이 되어 백성들의 경작지가 되거나 수군첨사진, 영둔전 또는 궁방전으로 개편되었다. 국가 목장의 수가 줄어든 만큼 국가 목장에서 기르는 말의 수도 줄었다. 1658년 국영목장의 말은 16,370마리에서 1682년에는 14,340여 마리로 20여 년간 2,000여 마리가 줄었다. 그 후에도 국영목장의 말은 계속 줄어 1792년경에는 8,618마리만 남았다.

   이처럼 17세기 이후에는 국가 목장이 쇠퇴하였으나 개인들이 사양관리하는 큰 규모 목장이 나타났다. 개인목장은 규모가 컸을 뿐 아니라 많은 수의 말을 길렀다.『증보문헌비고』권125, 병고17 인조 5년(1627) 비국 계에는 “제주인 김만일이 관할하는 말은 1만 마리에 이르는데 그의 목장은 한라산 지역을 거의 절반이나 차지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는 전국의 국영 목장에서 사육하던 말의 수에 맞먹는 규모였다.

   말은 일제 강점기에 3∼8만여 마리가 사육되었지만 해방 이후 농기계 보급의 증가로 1985년 경 3천 여 마리로 사육두수가 줄어든 이래 200년대에 들어 1만 여 마리 수준을 회복한 이후 경마와 승마 등의 발달로 점차 사육두수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말과 달리 소는 조선시기에 들어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한반도에서 소를 가축으로 사용한 것은 지금부터 4,000년 전의 유적에서 확인되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통해 소가 농사에 사용되거나 수레를 끌었으며, 청우와 같은 푸른색 소가 있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고려 성종대에 소의 사용법을 월령에 명시한 사실이 나타나 있고, 송나라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는 고려에서 소를 잘 키우며, 그 수가 많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비록 신라촌락문서를 통해 4개 촌락, 호수 43호, 인구 444명과 582결 95부 2속의 토지를 가진 곳에서 말 61두, 소 53두를 길렀다는 기록 이외에서 조선 이전에 사육하던 소와 말의 숫자를 추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고대에서 고려에 이르는 시기에 다소의 넘나듬이 있었겠지만, 조선 초기의 상황에서 아주 크게(5배 이상)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소의 숫자를 어느 정도 추정할 만한 단서는 15세기 전반의 기록을 통해서이다. 세종 13년(1431) 명에서 1만 마리의 소를 무역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당시 세종은 우리나라 호구에서 소를 가진 것은 10분의 1 가량이었고, 그들도 대부분 한 마리씩을 사육했다고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호구가 23만여 호인 점에서 15세기 초 조선에서 사육되는 소는 대략 2∼3만 마리 가량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 전기에 지속된 농우 중시 정책으로 소의 사육 두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17세기 이후 말과 소의 사육이 널리 보급되었다. 북부 지역과 제주도에서 말을 논과 밭의 갈이용으로 사용하는 예가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대체로 소가 중시되었다. 특히 함경도ㆍ강원도ㆍ평안도에서는 농경지나 인구와 비교할 때 많은 소를 길렀는데, 영조대 비변사등록에는 함경도에서는 대부분 농가당 수십 마리 씩 길렀다고 한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의 연대기 기록을 살피면 현종 1년(1660)에는 소가 많이 번식되어 도리어 백성들이 폐해를 입을 정도라는 주장이 있었으며, 이후 창궐한 우역으로 전국에서 74,424마리(1663∼1671)의 소가 폐사한 것으로 기록될 정도였다. 소의 사육 두수가 늘어나면서 우역과 같은 가축 전이 주기적으로 만연하면서 토착화하였지만, 이후에도 소의 사육두수는 더욱 늘어났다. 20세기 초에 전국에서 사육된 소는 110만 마리 가량이었고, 함경도에서만 16만 마리 가량이었다(한국토지농산조사보고, 1906). 1930년 조선을 방문한 헤르만 라우텐자흐는 소를 “대개의 농가에서는 적어도 한 마리를 기르고 있다.”고 하였다.

   국초에 3만여 마리로 추산되던 소의 사육 두수는 20세기 초에 이르러 110여 만 마리로 늘었다. 권태억ㆍ신용하가 추정한 연구를 원용하면 국초로부터 20세기 초까지 인구는 4∼5배가량 늘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국초에 비해 30∼40배에 이르는 소의 사육 두수 증가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수치이다. 따라서 조선 왕조의 500년 동안 소는 부와 권력의 상징에서 보편적 농업의 동반자가 되었다.

   물론 20세기에도 소의 사육두수 증가는 계속되었다. 1933년에는 소가 1,663,136마리, 말이 52,924마리였다(조선총독부통계요람, 1935). 해방 이후 남한 지역에서 소의 사육은 더욱 늘었는데 1960년 101만 마리(소), 1980년 139만 마리(이후 한우), 1990년 161만 마리, 2010년 268만 마리 가량이 사육되었다(KOSIS). 20세기로 넘어서 100만 여 마리를 돌파한 소의 사육두수는 20세기 말까지 3∼5배가량 크게 늘어났다. 그렇지만 20세기에 이르러 소의 증가율과 인구 증가율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점에서 조선시대에 소 사육의 증가는 역사적으로 획기적인 것이며, 큰 의미를 갖는 현상이었다.

   한반도에서 전통적으로 사육되던 말은 과하마로 불리던 품종이었고, 고대시기에 천마 혹은 한혈마로 불리는 아랍 계통의 말이 도입되었지만, 품종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몽골과 강화한 이후 제주도에 목마장을 설치하여 몽골에서 도입한 조랑말을 사육하기 시작한 데 있으며, 이후 육종을 통해 품종 개량을 추구했으나 근본적인 변화는 확인하기 어렵다.

   소의 경우도 지속적인 육종을 통한 개량과 몽골이나 중국 등지로부터 외래종이 도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품종에서 극적인 개량이 이루어진 시기는 조선시대인 15∼19세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소 역시 다양성을 기본적 특성으로 하고 있었음에도, 눈에 띌 정도로 중국이나 일본의 소와 외형상 그 형태를 달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조선시대를 넘어 최근까지 그들이 한국의 소를 수입하기 위해 애쓰는 원인이 되었다.

   즉, 조선 시대에 이루어진 소의 품종 개량 사실과 결과는 1903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러시아 학자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의 증언을 통해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즉, 세로셰프스키는

   한국의 소는 극동에서 제일로 치는 우량종이다. …한국의 소는 키가 146∼150cm에 이르고, 무게는 약 20푸드(330kg)까지 나간다. 건강하고 활동성이 큰 것이 특징으로, 달구지에 40푸드(660kg) 정도의 짐도 쉽게 나를 수 있으며, 산을 넘거나 물살 센 강을 건널 때는 그 어떤 가축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존재다. 말들이 쉽게 넘어지거나 발을 헛디디는 곳에서조차 소들은 쉽게 장애물을 피해 나간다. 발이 빠른 한국소들은 그 속도나, 장시간 사람을 태우고 갈 수 있는 능력에 있어 말에 뒤지지 않는다. … 한국소는 물소와 여러 차례 교배된 특징이 확실히 나타난다. 한국 소의 큰 키와 강인함, 큰 활동성은 바로 거기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19세기 후반∼20세기 초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사실이었다. 1885년 조선을 방문한 러시아의 다데슈칼리안 공후 역시 “조선산 황소와 암소들은 힘과 인내력이 뛰어난 데다 몸집도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의 야생 동물과 가축 | 인스티즈
[그림4] 『신편집성마의방우의방』의 ‘상우도’에 실린 소의 9가지 모습  ⓒ『신편집성마의방우의방』


한국의 소가 갖는 이러한 특별한 외양과 능력은 오키나와에서 물소를 도입하여 교배한 결과로 보이며, 이에 관한 사실은 실록의 기사를 추적함으로써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은 국초부터 활을 만드는 데 가장 긴요한 재료로서 물소의 뿔을 생산하는 데 관심이 있었을 뿐 만 아니라 조선에서 기르고 있던 소에 비해 강한 힘과 빠른 속도를 이용하여 논과 밭을 가는데 사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세종조에 실록에는 물소는 힘이 세고, 밭을 가는 것이 보통 소의 두 배에 이를 정도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물소는 털이 얇고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특성이 있었다. 세종은 이러한 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서울에서는 겨울철에 우리를 지어 잘 보살피고, 따뜻한 봄이 되면 살곶이에 내보내 길렀다.

   조선은 국초부터 명의 남부에서 물소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세조 7년(1461)에 이르러서야 오키나와에서 올린 암수 2마리의 물소를 도입할 수 있었다. 10월에 도착한 물소는 우선 경상도 웅천에서 겨울을 보내고, 서울로 가져와 창덕궁의 후원에서 사복시 관원들이 돌아가며 길렀다. 조선은 제반 의서에서 물소 기르는 법을 조사하고, 이를 의생 4명이 배우게 하는 등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이후 오키나와에서 들여온 물소는 잘 번식되었는데, 17년이 지난 성종 10년(1479)에 이르면 70여 마리로 불어났고, 이후에도 번식이 잘 되어 물소를 기르는 데 겪는 백성들의 고초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논의될 정도였다. 그러자 국가에서는 대신들에게 물소 암수 한 마리씩을 나누어 주고 기르게 하였고, 그러고도 남는 소들은 여러 도의 군현에 나누어주고 기르게 하였다. 성종 24년(1493)에는 이전까지 방목하던 물소를 아침ㆍ저녁으로 훈련시켜 길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크게 번식된 물소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농사일에 쓰려는 시도가 본격화하였다. 이런 추세 속에서 물소에 대한 민간의 관심은 중국의 남부 지역까지 진출하여 물소를 약탈하는 일이 빈번해질 정도였다. 조선과 중국과의 외교적 분쟁이 발생할 것이 우려될 정도였다.

   성종 25년(1494)에는 국가에서《안기집(安驥集)》에 실린《수우경(水牛經)》을 번역한 후 중외에 널리 반포하여 여항의 부로들도 물소 키우는 법을 모두 알게 하였다. 이는 물소 사육이 보편화하는 가운데 당시에 이를 더욱 촉진하는 정책이 본격화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몇 년 후 연산군은 기르는 제도 관찰사들에게 지시하는 가운데 물소가 많을 정도로 증가하였지만, 아직 밭갈이에 익숙해지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1497).

   연산군 8년(1502)에는 수효가 늘어난 물소를 각 고을에 나누어 주고 기르게 하였고, 특히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방목을 시작하였다. 각관에서 기르던 물소가 다시 크게 증식되자 중종 4년(1509)에는 병조의 책임 하에 각 관에서 기르던 물소를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기르게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중종 5년에 유순정은 인천의 농장에서 밭을 갈게 하였는데, 그 효과가 일반 소의 4배가량에 이르렀다고 했으며, 김해부사 이손은 물소로 밭을 가니 그 성과가 2배에 달했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이후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조선은 청에 대해 세폐로서 물소 뿔 200부를 바쳤다. 물소 뿔이 왜관을 통한 교역으로 조달되었을 수 있겠지만, 조선에서도 자체적으로 상당한 수량의 물소가 사육되고 있었다. 민간에서 사육된 물소는 이전부터 사육되던 토종의 한우들과 교배가 이루어지면서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특성을 갖는 한우로 탄생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조선시대에 농본 혹은 권농 정책을 시행했으며, 이 과정 소를 중시하였다는 점은 밝혀졌다. 우금정책, 혹은 지역에 따른 우경 방식과 쟁기 날의 형태에 대한 설명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 15세기와 19세기에 사육된 소의 마리 수에 대해 깊이 고민한 연구는 찾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반도에 범과 표범이 오랫동안 살았고, 그로 인해 호환도 빈번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도 한반도에 살았던 범과 표범이 어느 시기에 몇 마리 가량이 살았는지, 그리고 매년 몇 마리를 잡았는지에 대해 밝히려 하지 않았다. 비록 오랫동안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를 국사 교과서의 표지를 장식했지만, 문화의 정수, 즉 엣센스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둔 그 동안의 연구 경향으로 인해 수치의 무게를 헤아린 적이 없다.

   그러나 수치는 역사의 변화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을 설명할 수 있고, 특히 거시적 변화를 설명하는 데 중요하다. 소와 사람의 비율이 150:1인지, 15:1인지에 따라 사회 구성체와 노동생산성은 현저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한반도에서 1,000마리 이상의 범과 표범이 살아갈 때와 10여 마리의 살아갈 때 그 의미는 현저히 달라진다. 한반도에서 기르는 소가 3만 마리일 때와 100만 마리일 때의 생태환경은 현저히 달라지며, 이를 통해 많은 것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시대에 헤아릴 수 있는 동물의 수치의 변화에서 가장 큰 변화의 의미는 개략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다. 우선 범ㆍ표범ㆍ사슴의 감소는 야생 공간의 감소를 의미한다. 야생공간의 감소는 인간이 가용공간을 확장한 결과이다. 늘어나 소의 마리 수는 가용공간의 확장을 설명하기에 적합하다. 조선시대 농민들은 소를 앞세워 농경지를 넓혀 갔으며, 넓어지는 농경지로 인해 야생동물의 서식지는 갈수록 줄었다. 서식지의 감소는 개체수의 감소로 이어졌다. ‘황소 뒷발질에 범 쓰러진다.’는 속담은 조선의 생태환경의 거시적 변화에 대한 압축적 설명으로 적합하다.

http://www.koreanhistory.org/%EA%B1%B0%EC%8B%9C-%EC%83%9D%ED%83%9C-%EC%95%BC%EC%83%9D-%EB%8F%99%EB%AC%BC%EA%B3%BC-%EA%B0%80%EC%B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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