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라는 나라 자체가 70년이나 수·당 제국과 자웅을 겨루던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인 만큼 자존심이 굉장히 강하고 그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았을 것이라는 인상이 있습니다. 거기에 발해가 한민족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보유했다는 점과 독자적으로 연호를 사용하고 스스로를 '황상'이라고 칭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나타난다는 점은 이러한 인상을 더욱 강하게 합니다. 하지만, 발해가 '좀 심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저자세로 나온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다름 아닌 '일본'입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니 실로 천황의 은혜를 크게 입었지만, 검푸른 바다가 땅을 뒤흔들고 파도가 하늘까지 넘쳐서, 선물을 받들어 올리고자 하나 어쩔 도리 없이 헛되이 고개 숙여 우러르는 마음만 더하였을 따름입니다.
≪일본일사 권5≫
승란이 아룁니다. 사신을 분주히 보내서 인정과 예의를 펼쳐주시는데, 우두커니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한갓 우러러 뵙기만 할 뿐입니다. 천황께서 갑자기 두터운 은혜를 내리시어 사신을 보내주시니, 아름다운 안부 말씀이 귀에 차고 진기한 선물 모습이 눈에 흘러넘칩니다. 이에 내려보고 올려보며 스스로 즐거워하니, 엎드려 위로되고 기뻐함이 더할 뿐입니다. 우리 사신 여정림 등이 변방의 오랑캐를 미처 예상치 못하여 도적의 땅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천황께서 이들을 구제하여 본국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게 해주셨으니, 생각컨대 사신의 왕래가 모두 천황의 은덕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숭린은 외람되이 부덕한 몸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다행히 좋은 시운을 타게 되어 앞 시대의 관작을 그대로 계승하고, 과거의 영토도 그대로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황제의 명령에 따른 임명장이 한겨울에도 다다랐고, 금으로 만든 도장과 자줏빛 도장 끈이 요하 밖에서도 빛을 발하였습니다.
훌룡한 나라와 예의를 닦으며 귀국과도 교분을 맺어, 철마다 천황을 배알하는 배들이 돛이나 돛대를 서로 마주 대할 수 있을 만큼 빈번히 사신을 파견하려고 생각하지만, 배를 만들 큰 나무의 재목을 고르려 하나 우리 땅에서는 나는 것이 없고, 작은 배를 만들어 바다에 띄우면 침몰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위험에 빠지곤 합니다. 또 때로는 바닷길을 잘못 인도하여 오랑캐에게 해를 당하기도 하니, 비록 천황의 성대한 교화를 사모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난관들을 어찌하겠습니까?
≪일본후기 권5≫
천황의 풍모를 향한 정성을 저 스스로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며, 부지런히 교화를 사모하는 태도는 고구려의 발자취를 뒤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일사 권7≫
근래에 천황께서 쳔지를 써서 명령을 내리시고, 이를 전하는 칙사가 조정에 도달하니, 아름다운 명령은 두터움을 더하고, 총애하는 징표들이 온통 빛을 발하였습니다. 재상 지위에 해당하는 은혜를 입고, 역시 재상 서열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니, 다만 제가 덕이 부족한데도 이렇게 각별한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생각만 하게 됩니다.
≪일본후기 권8≫
위의 기록들은 모두 발해 7대 왕인 강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들로, 일본 측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무슨 글마다 천황의 은혜 운운하고 심지어 발해 왕이 일본의 재상과 같은 위치에 올라 감격스럽다는 뉘앙스의 글까지 있습니다. 물론 발해가 멸망하면서 발해가 스스로의 입장에서 기록을 남기지 못해, 우리가 일본이나 중국의 기록에만 의존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부풀려진 게 아닌가 의심해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저 국서들만이 아니더라도 발해가 일본에 상당히 굽혀주는 외교를 했음은 분명한 사실로 보입니다.
어째서냐, 사신을 보낼 때도 늘 발해가 먼저 보냈고 일본은 느긋하게 기다리다가 어쩌다 한 번씩만 보내주는 식이었거든요. 일본이 발해보다 사신을 보내는 데 적극적이었던 때는 일본 열도 전체가 신라 정벌에 정신이 팔려 발해에 함께 신라를 치자고 제안했을 당시뿐입니다. 그렇다면, 발해의 이러한 저자세 외교는 어쩌다 나오게 된 것일까요? 발해의 조상 격 되는 나라인 고구려도 이처럼 일본에 저자세로 나왔을까요? 아닙니다. 고구려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신라나 백제를 고구려의 발아래 둔다는 자신들만의 천하관에 정신이 팔려 있었지, 왜에는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당시 왜는 고구려의 천하관에 방해되면 한 번씩 응징할 만한 이민족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고 아예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왜는 하필이면 광개토왕 시절에 백제의 요청에 응해 한반도 내에서 찝쩍대다가 고구려군에 짓밟힌 뒤로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에 제대로 끼어들지조차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는 발해가 왜, 무슨 이유로 고구려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게 되었을까요? 이는 발해 건국 직후, 발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보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쪽에는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뒤에 당나라마저 몰아낸 뒤로 최고의 기세를 자랑하던 신라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고, 서쪽의 당나라는 뭐 설명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신라와 당은 모두 고구려를 멸망에 이르게 한 발해의 적이자, 언제든 발해를 고구려와 같은 처지로 몰아갈 수 있는 강대국이었습니다. 건국 당시의 발해는 전국의 군사를 모두 합쳐도 수만 명 정도이고, 고구려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약한 나라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쪽의 일본마저 적으로 돌리면 발해는 그야말로 사방이 적으로 포위되는 신세였던 것입니다. 또, 건국 초의 발해는 당나라 등주를 선제 공격했다가 당과 신라가 한꺼번에 침범해 오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구요. 발해에 있어 일본과의 관계는 참 절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반일 감정 탓인지 일본을 꽤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일본 열도는 고구려나 발해의 영토와 거의 맞먹을 정도로 큽니다. 일본이 절대 무시할 만한 나라가 아니었던 거지요.
ps. 농담으로 하는 말이긴 하지만, 발해가 일본에 저자세로 나온 것에 혹시라도 자존심이 상하시는 분들은 신라를 보고 위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신라는 당으로부터 제1 제후국으로 대접받았고 군사력도 막강했기 때문에 일본에 전혀 꿀릴 게 없었고, 일본에서 신라를 무시할 때면 똑같이 신라도 일본을 무시했습니다. 일본 사신이 무례하게 굴면, 꾸짖고 내쫓았지요. 심지어 스스로를 왕성국이라면서 왜를 신라의 속국 취급하는 패기를 보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