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한국은 비행기로 12시간 떨어져 있는 프랑스 중소기업디지털경제부 장관의 취임으로 들떠 있었다.
독일과 더불어 유럽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프랑스의 정권 교체였지만 한국의 관심은 동양인 외모의 이 39세 여성 장관에게 집중됐다. 단발로 똑 자른 새까만 머리카락과 그에 대비되는 흰 얼굴, 까만 눈동자와 얇은 속쌍꺼풀이 진 눈까지, 동양계 최초로 프랑스 장관에 임명된 그는 누가 봐도 한국 여성이었다. 외모와 달리 그의 이름은 발음조차 힘든 플뢰르 펠르랭(44·Fleur Pellerin)이었다.
생후 6개월 때 한국에서 프랑스로 입양된 그는 지난 2012년 5월 중소기업디지털경제부 장관을 시작으로 2016년까지 통상관광부 장관과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작년 2월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그는 프랑스 IT산업 발전을 위해 '코렐리아캐피탈'을 세웠다. 지난 9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그에게 한국 입양아로 유럽 선진국에서 장관직에 오른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소감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냉정했다.
"태어난 곳은 여기일지 모르지만 난 뼛속까지 프랑스인입니다. 한국인들이 나를 성공 신화의 주인공으로 봐주는 것은 고맙지만 나는 한국인이 아니에요."
"친부모를 찾아볼 생각이 없느냐"는 물음에 그는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의 대답엔 한순간의 망설임이 없었다. 한국인들로부터 수십 번 들은 질문이었는지 '친부모'란 단어를 꺼내자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없다(No)"는 답이 튀어나왔다. 그의 머릿속 한국은 '나를 낳아준 나라'가 아니라 '아시아에 있는 작은 나라' 정도인 것 같았다. 우리 국민을 '한국인'이라고 칭하며 이어가는 그의 말투는 약간 매정하게 들릴 정도였다.
그녀에게 매정했던 건 태어난 나라 한국이었다. 1973년 8월 29일은 길에 버려진 그가 발견된 날이다. 태어난 지 3~4일쯤으로 추정되는 여자아이였다. 6개월쯤 지났을 무렵 그녀는 하얀 강보에 싸여 양어머니 애니 펠르랭 품에 안겼다. 김종숙이 플뢰르 펠르랭으로 다시 태어난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한 번도 한국에 발 디딘 적이 없었다. 2013년 3월 본지가 주최한 '제4회 아시아리더십콘퍼런스' 기조연설을 맡아 방한했던 게 처음이었다. 프랑스로 입양된 지 40년 만이었다.
태어난 나라에 돌아온 그의 첫 번째 일정은 한국에 있는 프랑스 기업인들과의 만찬이었다. 자신이 입양된 홀트아동복지회를 찾거나 자신이 발견됐던 동네에 들르는 일 같은 건 일정에 없었다. 그는 당시에도 "내가 태어난 곳을 방문하게 돼 설렌다"면서 "나를 낳아준 부모가 누군지는 관심 없다"고 선을 그었었다. 그는 이후에도 한동안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하필 한국 기업과 일하기로 했나요?
"한국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시아 시장에 관심 있는 유럽 IT 기업들이 한국을 선호하기 때문이에요. 빠른 인터넷과 삼성전자 등 IT 기업이 탐낼 만한 아주 발전된 시장이라는 뜻이죠."
―상대방은 당신이 한국인이라 더 편하게 생각할 것 같습니다만.
"저는 전혀 상관없지만 그들은 그렇게 느낄 수 있어요. 내가 갖고 있는 동양인의 외모가 백인이나 라틴, 혹은 흑인 등 서양인 외모보다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한국에선 어디 출신이다, 누구의 혈육이다라는 걸 워낙 따지잖아요. 내 외모가 한국인들에게 부담 없다면 사업 파트너로서 저한테 해가 될 건 없죠."
―한국이라는 게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군요.
"그렇죠. 한국에 오면 사람들이 자꾸 '네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엄마가 누군지 알고 싶지 않으냐'고 묻지만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내 나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나를 키워주신 두 분뿐이에요."
―굳이 ‘나는 한국인이 아니고 프랑스인’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나라(프랑스)는 정치·사회적 합의가 국민의식의 바탕이 되는 곳이에요. 내가 태어난 곳은 한국이지만 17세기 철학을 바탕으로 하는 나라에서 교육을 받았고 평생 살았기 때문에 그 인식이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거죠. 생후 6개월 만에 입양됐는데 기억이 있을 리도 없지 않나요?
―당신의 삶을 ‘인생 역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 앞에 놓인 한계를 치열하게 극복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어요. 프랑스는 한국과 달리 어린아이에게 학교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를 주는 나라가 아니니까요. 오히려 입양되면서 경제적으로나 정치·사회적으로 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입양된 게 1970년대였는데 당시 한국은 굉장히 가난하고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나라였으니까요.”
―입양됐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까.
“내 친부모는 아마 한국에서 아주 가난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확률이 높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갓 태어난 아기를 길에 버리진 않았을 테니까요. 그런 가정환경과 한국 특유의 경쟁적이고 억압적인 문화에서 컸다면 한국에서 장관을 할 수는 없지 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