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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6년 전 (2018/2/19) 게시물이에요

1차 세계대전 목

1)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마른 전투(1914)

2) 1차 이프르 전투: 본격적인 참호전의 시작(1914)

3) 1915년의 서부 전선: 무시무시한 독가스의 등장

4) 베르됭 전투 : 1차 대전 최악의 전투(1916)






협공을 펼치기로 한 연합군


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솜 강 전투 - 신병기 탱크의 등장 | 인스티즈



1914년 8월, 유럽의 열강들이 마치 오랫동안 이날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전쟁에 돌입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바로 끝날 것으로 낙관했던 전쟁은 해를 넘겨서도 계속되었고 어느덧 두번째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졌다. 젊은이들이 환호를 지르며 앞다투어 전선으로 달려갔을 만큼 열광적이던 전쟁 초기의 모습은 어느덧 사라졌다.


이처럼 예상치 못한 상태로 전쟁이 장기화되자 당사국들은 모두 당황했다. 특히 참호가 굳게 파이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단단해진 서부 전선은 어느 누가 우세하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왕 전쟁이 발발한 이상 반드시 이겨야 했고 그러려면 이 상태로 있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었다. 너무 팽팽하다 보니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1915년 12월 6일, 지금까지의 지지부진한 전과를 분석하고 대안을 찾기 위해 파리 북부 샹티이(Chantilly)에 위치한 프랑스군 총사령부에서 프랑스,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를 비롯한 연합국 주요 군사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전략 회의가 개최되었다. 3일 동안 계속된 토론 끝에 연합군은 지금까지 별개의 전역으로 싸웠던 동(러시아), 서(프랑스, 영국), 그리고 남(이탈리아)에서 동시에 협공을 펼치기로 결정했다.


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솜 강 전투 - 신병기 탱크의 등장 | 인스티즈

(1915년 12월 6일 샹티이에서 개최된 연합국 전략 회의 당시에 함께 회의장 밖으로 나오는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우)와 영국 원정군 사령관 헤이그)


동시다발적인 공세로 독일이 손을 들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연합국 전체의 동원 능력이 독일보다 앞서므로 충분히 타당한 전략이었다. 서부 전선에서 결전의 장소로 지목된 곳은 솜 강 북쪽의 아라스(Arras)에서 알베르(Albert)에 이르는 폭 30여 km의 피카르디(Picardy) 지역이었다. 지금까지도 잔인한 악명을 떨치는 솜 전투(Battle of the Somme)는 그렇게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감당해야 할 어려움


그런데 각론으로 들어가면 그동안 계속해 온 전투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실 당시의 전투 기법이나 장비를 고려한다면 대대적인 포격 후에 돌격을 감행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대안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문제는 이제까지 경험했듯이 이런 방식은 아군의 심각한 피해도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결론적으로 출혈 경쟁이 되는데, 전선의 돌파나 점령과는 별개로 끝까지 살아남는 쪽이 이기는 셈이었다.


물론 이는 극단적인 가정이고 핵심은 더 이상 독일이 예비대를 투입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지휘부는 작전 개시일로 정한 1916년 8월 1일까지 전선을 현 상태로 유지하며 전력을 최대한 축적하기로 했다. 비슷한 시기에 반대편의 러시아와 알프스 남쪽의 이탈리아도 공세를 함께 시작할 예정이었다. 무려 7개월의 기간을 상정하고 준비에 나섰을 만큼 이번 공세에 대한 연합군의 의지는 대단했다.


이번에 서부 전선에서 공세 지역으로 낙점된 솜 강 일대는 교통의 요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변에 반드시 점령해야 할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전쟁 발발 후, 수차례의 격전이 벌어진 아라스 북쪽의 이프르(Ypres)나 알베르 남쪽의 수아송(Soissons) 등과 달리 상대적으로 소강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곳이 공격 장소로 선정된 이유는 BEF(영국 원정군)와 프랑스군의 경계선에 놓여 연합 작전을 펼치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솜 강 전투 - 신병기 탱크의 등장 | 인스티즈

(BEF(영국 원정군)와 프랑스군의 경계인 솜 강 일대의 피카르디 지역이 공세 장소로 지목되었다.)


1915년 12월 당시, 솜 강 일대에는 BEF 소속 8개 사단과 프랑스 북부집단군(Groupe d'armées du Nord) 예하 11개 사단이 포진해 있었다. 이에 대응하는 독일군은 벨로브(Fritz von Below)가 이끄는 2군으로 총 11개 사단이었다. 이들은 석회질 지대를 깊숙이 파고 5km 가량의 종심에 차례대로 구축한 3개의 단단한 방어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연합군에 비해 전력은 열세였지만 충분히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야심가의 반발


영국과 프랑스는 작전의 목표와 지점은 쉽게 합의했지만 세부 실행안 수립 과정에서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Joseph Joffre)는 BEF가 솜 강 북쪽에서 전투를 벌여 독일군의 주의를 끌어주면 남쪽에 대기 중인 프랑스군이 독일 2군의 측면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겠다고 제안했다. BEF가 일종의 미끼가 되는 것을 전제로 한 이런 주장은 영국의 반발을 불러왔다.


지난 1915년 12월, 제2대 BEF 사령관에 부임한 헤이그(Douglas Haig)는 영국군이 조공을 담당해야 한다는 프랑스의 주장을 몹시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병사들의 엄청난 희생도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저돌적인 공격을 선호한 야심가여서 영국군이 전선을 주도하기를 원했다. 이처럼 무모한 면이 있는 헤이그의 성향은 솜 전투의 비극을 불러온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결국 갑론을박 끝에 솜 강 북쪽에서 영국군이 바폼(Bapaume)으로, 남쪽에서 프랑스군이 페론(Peronne)까지 나란히 공격에 나서는 것으로 타결을 보았다. 사실 당시 프랑스군이 영국군보다 전력이 앞섰으므로 조프르의 제안이 합리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헤이그가 함께 주공을 자임할 수 있었던 근거는 2월에 4군이, 5월에는 후방군(Reserve Army, 5군의 전신)이 창설되어 BEF의 전력이 대폭 증강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솜 강 전투 - 신병기 탱크의 등장 | 인스티즈

(제2대 BEF 사령관에 부임한 헤이그. 공세적인 지휘관이었으나 너무 많은 병사들의 희생을 불러와 전후 많은 비난을 받았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인도, 남아프리카 등에서 지원 온 병력으로도 부족했던 영국 정부는 1916년 1월 징병제를 실시했다. 덕분에 1914년 최초 파병 당시 20만에 불과했던 BEF는 5월이 되면서 120만에 이를 전망이었다. 아무리 전투를 벌이는 곳이 프랑스 땅이라 해도 사실 이 정도의 병력을 투입하고 조공 역할에만 머문다는 것은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허를 찌른 독일의 공격


우여곡절 끝에 확정된 공격의 총지휘는 그나마 영국군과 사이가 원만했던 프랑스 북부집단군 사령관 포슈(Ferdinand Foch)가 맡기로 했다. 그는 BEF의 증강이 완료될 때까지 전선에서 최대한 소극적으로 행동할 것을 지시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섣부른 공격은 위험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손실을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압도적인 상황에서 공세를 취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솜 강 전투 - 신병기 탱크의 등장 | 인스티즈

(1915년 루(Loos) 전투 직후 이동하는 영국군)


하지만 2월 21일, 전선 중앙의 베르됭(Verdun)에서 들려온 소식은 연합군의 야심만만했던 모든 계획을 흩뜨려 놓았다. 지난 한 해 동안 수세적 대응을 견지하던 독일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는 급보였다. 프랑스군이 결사적으로 막아내고 있었지만 참호 지대를 돌파한 독일군은 2월 25일, 난공불락으로 여겨져온 두오몽(Douaumont) 요새를 함락시켰다. 당장 이곳을 틀어막지 않는다면 파리의 안전까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서부 전선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독일이 선택한 방법도 연합군의 출혈을 강요하여 전의를 꺾어 버리는 것이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독일이 끝장을 볼 장소로 지목한 곳은 베르됭이었고 먼저 준비를 완료한 후 공격을 시작했다는 것뿐이었다. 세부적인 방법도 가용할 수 있는 모든 포병 전력을 집중하여 대대적인 포격을 가한 후 보병이 돌격하는 방식으로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같았다.


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솜 강 전투 - 신병기 탱크의 등장 | 인스티즈

(8월 1일을 목표로 준비를 하는 동안 베르됭에서 독일이 먼저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함으로써 연합군의 계획은 전면 수정되어야 했다.)


후세의 사가들은 너무 무모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쉽게 비판하지만 양측 모두가 동시에 같은 방식을 생각했다는 것은 어쩌면 당시 전쟁을 치르던 이들에게 고착된 전선을 무너뜨릴 현실적인 방법이 이것 말고는 없었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이제 연합군의 급선무는 베르됭에 가해지는 위기를 해소하는 것이었다. 솜 일대에서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상당수의 프랑스군이 베르됭으로 급거 이동 전개에 들어갔다.






작전 강행이냐 연기냐




조프르는 7월 말까지 40개 사단을 목표로 한창 진행 중이던 프랑스 북부집단군의 증강을 중단시키고 그때까지 구축된 전력을 대거 차출해 베르됭에 투입했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는 스스로 독일의 의도에 말려들어가는 모양새였다. 연합군 지휘부는 독일의 이번 공세가 베르됭의 점령보다는 이곳을 프랑스군을 소모시킬 블랙홀로 삼는 데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솜 강 전투 - 신병기 탱크의 등장 | 인스티즈

(이른바 ‘성스러운 길(Voie Sacree)’을 통해 베르됭으로 이동 전개하는 프랑스군)


만일 프랑스가 독일의 의도를 정확히 깨닫고 일단 후퇴하여 후방에 방어선을 형성하는 식으로 지연 전술을 펼쳤다면 베르됭 전투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파리로 향하는 천혜의 길목에 위치한 베르됭은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요새들이 축조될 만큼 전략적 가치가 너무 컸기에 조프르는 조급하게도 독일군 참모총장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


하지만 팔켄하인도 간과한 것이 있었다. 예상대로 프랑스가 적극 대응하는 바람에 소모를 강요할 수는 있었지만 독일이 입은 피해도 그에 못지않게 엄청났다는 사실이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3달이 지난 6월 초가 되면서 베르됭은 누가 우세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학살의 경연장이 되어 있었다. 이때쯤에 이르러서는 정작 공격을 시작한 독일도 어떻게 전선을 추슬러야 할지 암담할 지경이었다.


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솜 강 전투 - 신병기 탱크의 등장 | 인스티즈

(베르됭 전투 당시 돌격하는 독일군)


이처럼 독일이 고심하고 있을 때, 솜에서 예정대로 공세에 나서야 할지를 놓고 연합군 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BEF는 예정대로 13개 사단으로 증강되었지만 프랑스 북부집단군 20여개 사단이 베르됭으로 전개해서 전체적으로 본다면 전력이 오히려 줄어든 상태였다. 결국 BEF가 담당해야 할 전선이 넓어졌고 동원할 수 있는 예비대는 부족해졌다. 때문에 포슈는 1917년 이후로 작전을 연기할 것을 신중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무시되는 반면교사


하지만 베르됭에 가해지는 압력을 분산하기 위해 예정보다 빨리 공세를 펼치는 것이 옳다는 의견도 있었다. 대표적 인물이 바로 BEF 사령관 헤이그였다. 야심만만한 그는 전쟁 발발 후 계속 조연만 담당해온 영국군이 이번 기회에 전장의 주인공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오히려 프랑스가 베르됭에 더욱 진력하면 포슈의 생각대로 솜에서의 공격이 연기 또는 취소될 가능성이 있다고 조바심을 낼 정도였다.


헤이그는 프랑스가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나선다면 차라리 솜을 포기하고 전쟁 초기부터 BEF가 계속 담당해온 이프르에서 단독 공격을 실시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전쟁 발발 후 지금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긴밀히 협조하여 작전을 펼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충분한 협의를 거쳐 전략적으로 계획한 최초의 작전인 솜에서의 합동 작전이 무산된다면 결국 섹터를 나누어 알아서 싸우는 예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였다.


당연히 조프르도 이런 모습이 달가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영국의 단독 공격 의지가 확고하자 이프르보다는 그래도 베르됭에 직접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솜에서 공격을 실시하라고 헤이그를 설득했다. 결국 영국이 주공을 담당하여 최초 계획보다 한 달 앞선 7월 초에 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이탈리아가 5월, 러시아가 6월에 공세를 시작한 것도 크게 자극이 되었다. 영국 4군, 후방군 예하 13개 사단과 프랑스 6군 11개 사단은 애초 구상의 절반 정도 수준이지만 그래도 독일 2군의 2배는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솜 강 전투 - 신병기 탱크의 등장 | 인스티즈

(전선을 이동 중인 BEF 병사들)


그런데 공세에 나설 연합군의 헤이그는 자신이 이번 작전을 주도한다는 사실에 흥분했는지 반면교사가 될 만한 사례를 무시했다. 바로 한창 동남쪽에서 진행 중이던 베르됭 전투였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은 목적과 방법으로 연합군보다 먼저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 독일이 베르됭에서 곤욕을 치르는 모습은 솜에서 공격을 시작할 연합군에게 좋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상황을 너무 낙관했다.






기동전을 구상한 헤이그


오히려 헤이그는 독일도 베르됭 전투에 진력하느라 이곳에 신경을 쓰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다만 일대 프랑스군의 전력이 약화되어서 1915년 말에 세워 놓았던 전략대로 작전을 펼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전선의 상황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가장 효과가 크다고 판단한 알베르 일대로 폭을 좁혀 공격을 실시하려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대 독일군의 방어가 허술한 것은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솜 강 전투 - 신병기 탱크의 등장 | 인스티즈

(공세에 들어가기 직전인 1916년 5월 10일 항공 촬영된 독일 2군 방어선의 모습.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돌파하기 어려운 모습임을 알 수 있다.)


1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전쟁의 방식이 많이 바뀌게 되는데, 항공 정찰이 일상화된 것도 그중 하나였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진의 상황을 샅샅이 파악할 수 있게 되면서 좀 더 정밀한 작전을 구사할 수 있었고, 이는 그만큼 사상이 늘어나는 데 크게 일조했다. 영국군은 항공 정찰 등을 통해서 독일군의 방어선이 3중으로 단단하게 설치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헤이그는 세르(Serr)에서 몽토방(Montauban)에 이르는 지역에 설치된 제1방어선을 최대한 빨리 돌파한 후, 포지에르(Pozieres)에서 긴치(Ginchy)를 연결하는 제2방어선까지 신속히 다다르는 것이 관건이라 보았다. 고지대를 따라 형성된 제2방어선은 상대적으로 전력이 취약한 편이어서 독일 증원군이 오기 전에 다다르면 점령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이후에 후사면에 위치한 제3방어선의 돌파도 손쉬울 거라고 판단했다.


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솜 강 전투 - 신병기 탱크의 등장 | 인스티즈

(헤이그의 계획은 최대한 빨리 제1방어선을 돌파하여 고지대에 위치한 제2방어선까지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동전을 원했지만 당시 수준으로는 실현이 어려웠다.)


한마디로 기동전이었다. 이를 위해 지난 5월 23일 창설된 후방군 예하 2개 군단까지 배속 받은 영국 4군이 공격 전면에 일렬로 배치되었다. 그 좌우로 영국 3군과 프랑스 6군이 보조를 맞출 예정이기는 했으나 4군의 진격에 작전의 성패가 달려 있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4군을 지휘할 롤린슨(Henry Rawlinson)은 헤이그의 전략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기동전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손발이 맞지 않은 영국군


롤린슨은 무엇보다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속전속결보다 점령한 지역의 방어선을 일단 강화한 후 후방에서 포병대가 이동하여 화력 지원 태세가 갖춰지면 다음 공격을 재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상은 훌륭해 보였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지난 2년간 겪어왔듯이 그렇게 해서는 제일 먼저 마주할 무인지대(No Man's Land)의 돌파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서부 전선의 모습이나 바로 옆에서 혈전을 벌이는 베르됭 전투에서 보듯이 돌파구를 내는 것도 힘들지만, 사실 대부분의 피해는 구멍을 뚫더라도 지쳐서 속도가 느려진 보병들이 후속 돌파에 실패하면서 발생했다. 결국 이런 문제는 2차 대전 때 기갑부대가 일반화되면서 극복하게 되지만 당시 기동전으로 이를 타개하려 한 헤이그도 정작 진격 속도를 높일 만한 뾰족한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유기적인 협조 체계를 충분히 구축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헤이그는 언제까지 어디를 점령하라는 개략적인 명령만 롤린슨에게 내렸을 뿐이었고, 롤린슨도 예하 사단장들에게 알아서 자신이 지시한 방식대로 신중히 공격하라는 대략적인 지시만 하달했다. 결국 최전선의 부대장들은 옆 부대나 후방의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그냥 예정된 시간에 각기 따로 작전을 펼쳐야 했다.


이번 공세를 위해 BEF는 참전 후 최대라 할 수 있는 1,500여문의 야포를 준비했고 남측에서 함께 공격에 나설 프랑스군도 전력이 약화되었음에도 상당한 수준의 포병을 동원했다. 헤이그는 이런 엄청난 포병 전력으로 대대적인 제압 포격을 가하면 이후 보병들이 천천히 걸어서 적진을 점령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마침내 6월 24일, 영국군의 대규모 포격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지옥으로 가는 문이 열린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솜 강 전투 - 신병기 탱크의 등장 | 인스티즈





전선을 뒤흔든 폭발


대다수의 전사에서는 영국군 보병이 일제히 독일군 진지를 향해 돌격에 나선 7월 1일을 솜 전투의 공식 개시일로 본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전 제압 포격이 처음 실시된 6월 24일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서부 전선에서 어느덧 포격은 하나의 일상이 되어 있었으므로 그 연장선상의 작전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번만큼은 누구나 차이를 느낄 정도로 규모에서부터 확연히 달랐다.


내심 독일 2군을 완전히 섬멸하여 서부 전선 전체의 판도를 뒤집을 야심까지 가지고 있던 만큼 헤이그가 이번 공세에 거는 기대는 상당했다. 포격의 강도가 이전과 확연히 달랐던 데다가 장장 8일간이나 계속되자 독일도 대공세의 전조임을 알아챘다. 보고를 접한 참모총장 팔켄하인은 공세에 나설 연합군의 정확한 규모는 몰랐지만 베르됭에 집중된 압박을 분산시키기 위한 의도임을 즉시 눈치챘다.


독일도 베르됭에서 발을 빼기 힘든 와중이어서 솜 강 일대에 또 다른 격전지가 형성되면 골치가 아플 것은 분명했다. 만일 이곳에서 연합군을 저지하지 못하고 돌파구를 허용한다면 한창 베르됭에서 격전 중인 독일 5군의 배후도 위험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더구나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가 한창 대공세 중이었고 알프스 전선에서는 이탈리아군의 공격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고전 중이었다. 일단 2군 사령관 벨로브의 선전에 기대를 걸어야 했다.


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솜 강 전투 - 신병기 탱크의 등장 | 인스티즈

(호손 리지(Hawthorn Ridge)의 독일군 보루 밑에 은밀히 매설한 폭발물이 터지는 모습)


7월 1일이 되자 8일간 지속된 포격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보병이 돌격하기 10분 전인 07시 20분, 알베르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약 20km의 전선에 산재한 19곳의 독일 진영에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대지가 크게 흔들렸다. 그 위에 있던 진 파괴되었고 많은 독일 병사들이 비명횡사했다. 사전에 영국 공병대가 터널을 뚫고 들어가 매설한 엄청난 양의 폭약 가 진격에 앞서 일제히 폭발한 것이었다.






자신만만했던 돌격


사실 공세를 준비하면서 영국군이 참호 지대를 돌파할 묘수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뒤에 등장하게 되는 전차(Tank)처럼 다양한 연구와 시도를 하고 있었는데, 폭약 공격도 그중 하나였다. 현재까지도 핵폭탄을 제외한 가장 커다란 인공 폭발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개전 첫날 영국군이 선보인 깜짝쇼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지금도 솜 전투 전적지에 가면 처참한 지옥의 서막을 알렸던 커다란 흔적이 남아있다.


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솜 강 전투 - 신병기 탱크의 등장 | 인스티즈

(인위적으로 생성된 로크나거(Lochnagar) 분화구. 우기에 호수로 변하는 이곳은 솜 전투의 잔혹함을 알리는 기념물로 보존되고 있다.)


대대적인 제압 포격과 폭약 공격이라는 매조지를 바로 앞에서 지켜본 BEF 병사들은 이 정도면 독일군의 전의가 완전히 꺾였을 것이라 생각했다. 헤이그처럼 이들도 파괴된 독일군 진지를 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그들이 직접 보았던 사전 공격은 몸서리칠 정도로 대단했다. 마침내 돌격을 알리는 호각 소리가 들리자 수십만 병사들이 일제히 참호를 뛰쳐나와 무인 지대로 뛰어들었다.


남쪽에서 보조를 함께하는 프랑스 6군 예하 1개 군단을 포함하여 충실히 무장한 총 27개 사단 75만명의 연합군 병력이 공격에 나섰고 이를 막을 독일 2군은 서둘러 증강을 받았지만 16개 사단 40만에 불과했다. 이 정도의 압도적인 전력과 8일간 있었던 무서운 사전 정지 과정만 보더라도 영국은 쉽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본다면 분명히 영국이 이길 수 있는 전투였다.


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솜 강 전투 - 신병기 탱크의 등장 | 인스티즈

(1917년 7월 루 일대에 형성된 전선의 모습. 좌측의 영국군 참호선과 우측의 독일군 참호선 사이의 공간이 이른바 무인지대다.)


착검을 한 영국군 병사들은 마치 경주를 벌이듯이 앞다투어 달려 나갔다. 거리가 먼 곳이라도 무인 지대의 폭이 300m 내외에 불과했으므로 독일군 진지까지 다다르는 데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병사들은 중간쯤 이르러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의 포격으로 제거되어 있어야 할 철조망을 비롯한 독일군 방어물이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곧바로 막힌 진격


결국 전진이 멈추었고 이곳을 넘기 위해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에 독일군 진지에서 예상치 못한 기관총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독일 포병대의 저지 사격이 개시되었다. 허허벌판에서 이런 불벼락을 피할 방법이 없던 많은 영국군 병사들이 외마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져 갔다. 독일군은 8일간의 포격으로도 부술 수 없을 만큼 요새화된 벙커에서 그동안 안전하게 숨어 있었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솜 강 전투 - 신병기 탱크의 등장 | 인스티즈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영국군 병사들)


오히려 폭약 공격이 끝나고 10분 동안 영국군이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보병의 돌격이 곧바로 시작될 것이라 판단한 벨로브는 벙커에서 부대를 빼낸 후 전진 배치시켜 손님을 맞을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서부 전선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무인 지대는 그저 앞으로 달려가다가 죽거나 다친 영국군 병사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러나 규모가 컸던 만큼 쌓여가는 시신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곰쿠르(Gommecourt), 프리쿠르(Fricourt) 같은 일부 지역에서 돌파에 성공해 목표한 독일군 진지를 점령하기도 했지만 이 또한 엄청난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기동전을 생각하던 헤이그나 거점을 점령하고 일단 전선을 정비한 후 재차 공격을 가하려 했던 4군 사령관 롤린슨의 생각은 처음부터 어긋났다. 하지만 멀리 떨어진 후방에서 지휘하던 이들은 정작 이런 현실을 아직 알지 못했다.


일선 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최초 돌격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다른 대안이 없었던 그들은 병사들을 같은 방식으로 축차 투입했다. 영국군은 지난해 내내 갈리폴리(Gallipoli)에서 경험했던 참혹함과 현재 바로 옆 베르됭에서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시키는 데 성공한 교훈을 망각했다. 그렇게 피비린내 나는 첫날의 공격은 일부 점령한 곳도 있었지만 대실패로 막을 내렸다.






참혹했던 그날의 결과


1916년 7월 1일, 약 20 km의 전선에서 돌파를 시도하다가 영국군이 입은 손실은 그야말로 참혹한 수준이었다. 하루 동안 무려 19,240명이 전사하고 35,493명이 부상당한 영국 역사상 최악의 참사였다. 전쟁사에는 기원전 216년에 있었던 칸나에 전투(Battle of Cannae)처럼 하루 동안 이보다 더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신빙성을 따질 때 솜 전투 첫날의 모습은 가히 전무후무한 수준이라 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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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되기 직전의 영국군 주검들)


이런 무서운 결과가 나오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야심만만하게 실시했던 8일간 이어진 사전 포격의 효과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먼저 거론할 수 있다. 숫자상으로는 1,500여 문이라는 엄청난 야포를 동원했지만 사실 충분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중포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무인 지대에 설치한 독일군 철조망 대부분이 그대로였던 것도 포탄이 미치지 못할 만큼 사거리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영국군 포병이 사전 포격으로 우선 제압할 대상은 독일군이 매복해 있는 참호나 진지 같은 방어 시설이어야 하는데, 정작 이를 파괴할 수 있는 고폭탄보다 재고량이 많은 대인용 유산탄(Shrapnel shell)을 사용하여 효과가 크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상당한 불발탄이 나왔을 만큼 품질도 형편없었다. 당시 나름대로 성과를 올린 프랑스 6군의 전과와 비교하면 이는 확연히 드러난 실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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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총 사격 준비 중인 독일군)


반면 독일 2군의 방어는 그야말로 냉정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만큼 훌륭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효과적이지 못했던 영국군의 포격을 안전한 곳에서 피하면서 방어 준비를 충실히 진행했다. 또한 포병도 최대한 전선 가까이 배치되어 일선에서 요구하는 목표를 향해 즉시 응사해 주었다. 전방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후방에서 사격을 하여 즉시 대응이 어려웠던 영국군 포병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물러섬이 없는 사람들


첫날의 전과만으로도 이 정도의 대규모 공세를 실시하기에는 아직 BEF의 역량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여실히 입증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포를 많이 동원했지만 중포와 고폭탄이 부족했고, 증강된 병사들도 대부분 전선에 투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징집병이어서 참호전이 낯설었다. 하루 동안 사상자와 실종자를 합친 인명 피해가 무려 58,000여명이라면 일단 작전을 멈추고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헤이그는 다음 날 다시 진격을 명령했다. 어이없게도 그는 영국군이 이 정도라면 당연히 독일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프리쿠르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 돌파에 성공하기도 했고, 독일군의 소모를 강요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결코 나쁜 상황이 아니라고 오판한 것이다. 더구나 1차 대전 발발 후 BEF가 주도한 최초의 전략적 공세이다 보니 자존심 때문에라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곧바로 대대적인,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다지 효과가 없었던 포격이 다시 이어진 후 보병들의 돌격이 재개되었다. 그나마 첫날의 악몽 때문에 보다 조심스럽게 공격에 나서 희생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는 있었다. 그럼에도 전반적인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고 무인 지대에는 계속 시신이 쌓여갔다. 헤이그의 희망과 달리 독일 2군의 소모는 크지 않았고 여전히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만일 초전에 밀렸다면 수세적 방어전을 구사할 생각이었던 팔켄하인은 독일 2군의 선전에 고무되어 한 치의 땅도 넘겨주지 말고 즉각 반격에 나서라고 명령했다. 사령관 벨로브도 반격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고 선형 방어를 실시하면서 기회가 되면 피탈된 지역의 탈환에도 나섰다. 이처럼 양측이 물러서지 않고 맞서면서 솜 전투의 양상은 연합군의 공세가 끝나면 독일군이 간간이 반격하는 모양새로 반복되었다. 당연히 병사들의 희생은 커져갔다.






일상이 되어버린 잔인함


양측 모두 공통적으로 사용한 전술은 공격에 나섰을 때는 포격 후 전진, 반대로 방어에 임했을 때는 일렬로 거치한 기관총으로 죽음의 세례를 날리는 것이었다. 1차 대전 당시 서부 전선에서 벌어진 참호전의 가장 무서운 모습이 1916년 연이어 벌어진 베르됭 전투와 솜 전투로 완전히 고착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격렬함과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전선의 변동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유사 이래 이런 무서운 싸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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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 전투 초반의 모습. 일부 구역에서 영국군은 목표 지점에 도달했지만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고전을 겪었다.)


마치 야구 경기처럼 시간을 정해 놓고 공수가 반복되는 것 같은 상황에서 그나마 병력이 우세했던 연합군은 7월 말에 이르러 콩탈메종(Contalmaison), 바장탱 르 프티(Bazentin le Petit) 같은 제2방어선의 일부 지역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처음에 꿈꿨던 기동전은 아니었지만 BEF는 초기의 엄청난 시련을 통해 하나하나 참호 지대를 돌파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이를 실전에 응용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곤욕을 치르면서 당장 살기 위한 방법을 터득했던 일선 지휘관들과 달리 후방 최고 지휘부의 사고는 바뀌지 않았다. 예를 들어 제1안작(ANZAC) 군단이 티에프발(Thiepval) 공격에 나설 때 후방군 사령관 고프(Hubert Gough)는 좁은 가도를 따라 독일 14군단 전면을 돌파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5주간 23,000여 명이 전사상당하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음에도 그는 단조로운 공격 방법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엄청난 희생에 힘입어 연합군은 7월 11일, 팔켄하인이 베르됭에서 공세를 중지하고 방어로 전환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곳이 뚫리면 베르됭도 포기해야 한다고 판단한 그는 7월 19일, 1군을 새로 창설해 2군의 부담을 덜어주면서 보다 공격적인 갈비츠(Max von Gallwitz)를 파견해 솜 전투를 책임지도록 조치했다. 하지만 병사들의 피로도가 극심하여 전력의 약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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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브가 신설된 1군 사령관으로 전보된 후 구원 투수로 투입된 막스 폰 갈비츠. 그는 2군뿐 아니라 1군도 함께 포괄적으로 관할했다.)







잘못된 방식의 돌격


시간이 흘러 어느덧 8월 중순이 되자 영국은 보병이 전진하는 데 보다 효과적인 포병의 이동 탄막 포격 방법을 터득했다. 사실 이제까지 겪었던 엄청난 희생에도 전혀 깨달은 것이 없다면 오히려 그것이 문제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공세의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횡대 대형으로 연속 제파 돌격을 반복하는 방식은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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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렬 횡대 대형으로 돌격해 들어가는 영국군. 최초 대형이 희생되면 곧바로 다음 제파가 돌격하는 방식으로 공격을 했지만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


당연히 이들은 대기하고 있던 독일군의 기관총 세례를 받아야 했고 여기에 밀려 후퇴하면 진지를 박차고 나온 독일군의 추격을 받고는 했다. 더구나 이때쯤에 이르러 독일은 초반에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펼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던 강력한 벙커와 참호들이 하나하나 격파되어 여기저기 파인 포탄 구덩이에 임시 방어선을 형성하고 연합군을 막아내기 급급한 형국이었다. 그런데도 영국군의 전황은 부진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조건 공격만 외친 헤이그의 잘못도 있었지만 거점 확보 후 공격을 반복하는 방식을 택한 4군 사령관 롤린슨의 오판 때문이었다. 일선 사단장들도 독일군의 소모를 강요하거나 전선에 돌파구를 내려 하기보다 진지 점령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독일군이 약화된 방어선에 넓게 산개하고 있었음에도 영국군은 몇몇 거점만 타격하고 공략하는 바람에 피해만 늘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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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롤린슨은 물론 독일의 갈비츠도 병사들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위기에 빠진 베르됭을 구원하기 위해 시작된 솜 전투는 일부 목적을 달성했지만 어느덧 그에 못지않은 피의 블랙홀이 되고 있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맞서다 보니 병사들의 피해를 줄일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어느덧 먼저 대응을 포기하는 쪽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되는 묘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부담스러운 현실


솜 전투의 참혹함은 영국 본토까지 전해졌다. 전시 통제를 했지만 상황이 알려지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피해가 컸다. 현재 유네스코 기록 유산으로 남아있는 필름 ‘솜 전투’는 영국 국방부가 우려를 불식시키고 무공을 선전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었지만 편집을 했음에도 전선의 참혹한 모습이 생생히 알려지면서 오히려 염전 사상을 증폭시켰다. 독일도 5군 사령관 빌헬름(Wilhelm) 황태자 같은 일선 지휘부에서 우려를 드러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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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기록 유산으로 등재된 ‘솜 전투(The Battle of the Somme)’의 한 장면. 이후 전쟁 동영상 기록물의 기준이 되었을 만큼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멀리 떨어진 후방 몽트뢰유(Montreuil)의 BEF 사령부에 있던 헤이그는 이런 상황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지지부진한 전과를 탓하며 보다 과감한 돌파를 강행하도록 명령했다. 솜 지역이 포함된 서부 전선 북동부의 독일 1, 2, 6, 7군 전체를 관할하기 위해 8월 28일 창설한 루프레히트 집단군(Heeresgruppe Rupprecht)의 사령관 루프레히트 바이에른 왕세자도 결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이처럼 끝 모를 소모전이 한창이던 8월 29일, 지지부진한 전황에 대한 책임을 물어 팔켄하인이 참모총장에서 해임되고 후임으로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가 부임했다. 사실 팔켄하인의 낙마는 공세에 실패한 베르됭 전투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처음부터 수세적으로 임한 솜 전투는 비록 조금씩 밀리고는 있었지만 연합군에게 배 이상의 피해를 안겨주며 상당히 선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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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 직후인 1916년 9월 촬영된 참모총장 힌덴부르크(좌)와 참모차장 루덴도르프. 이때를 기점으로 루덴도르프는 군은 물론 정권까지 거머쥐고 독재 권력을 행사했다.)


힌덴부르크가 새로운 참모총장이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이때부터 독일군을 지휘한 인물은 참모차장인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였다. 그는 빌헬름 2세의 위임을 받아 군뿐 아니라 국정 전반을 관할하는 무소불위의 독재자가 되면서 전쟁에 관한 모든 것을 책임졌다. 루덴도르프는 결국 지구전을 버텨낼 수 있어야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상황을 검토한 그는 일단 공세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공세를 중단한 독일


1916년 9월, 당시 독일은 베르됭에서 펼친 공세가 실패로 끝날 것이 확실시되었고 계속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면 오히려 이곳과 솜에서 연합군에게 밀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동부 전선에서는 러시아의 진격을 막아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붕괴되면서 근심만 늘어난 상황이었다. 거기에다가 남쪽에서는 원래 삼국동맹(Dreibund)의 일원이었지만 1915년 연합국에 전격 가담한 이탈리아의 공세가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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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5월 구휼 음식을 배급받는 베를린 시민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방을 지원하느라 민간의 삶은 어려워졌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바다로 나가는 길이 꽁꽁 막혔다는 점이었다. 세계 2위를 자랑하던 독일 해군은 그해 6월 유틀란트(Jutland) 해전에서 영국 해군과 정면으로 충돌했지만 열세를 인정하고 바다를 포기했다. 이제 몇몇 중립국을 통하는 방법을 제외하고 독일이 외부에서 물자를 도입할 수 있는 통로는 사라져 버렸다. 현실적으로 더 이상의 확전은 전쟁 물자와 예비대가 부족한 독일에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루덴도르프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전쟁이 장기화의 길로 접어들면서 병력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으니 화력, 즉 무기를 통해 간격을 메우기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전시 경제 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생산과 민간의 소비를 조절하고 이를 군수 분야로 돌리기 시작했다. 결국 국민들에게 내핍과 희생을 강요하기 위해서 얼굴 마담 격인 힌덴부르크의 명의로 이른바 '힌덴부르크 프로그램(Hindenburg-Programm)'을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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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나중에 다시 공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생산을 늘리면서 동시에 병력과 물자의 소모는 줄여야 했다. 이에 따라 루덴도르프는 공세를 중지시키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최전선의 병력은 경계 수준으로 대폭 줄이는 대신 강력한 예비대를 종심 근처에 배치하고 있다가 위험한 지역으로 달려가 기동 방어에 나서는 탄력적 전술을 채택했다. 당연히 전선의 축소도 고려되었다. 물론 이런 내용은 대외 공표되지 않고 은밀히 진행되었다.






상황을 오판한 헤이그


미세하나마 공세의 주도권을 쥐고는 있었지만 영국의 상황도 몹시 나빴다. 1915년 5월, 독일 비행선이 심장부인 런던을 폭격하고 그해 11월에는 독일 해군의 군함들이 영국 본토까지 침투하여 포격을 가하는 사태까지 발생하면서 자신들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전쟁은 군인들이 바다를 건너가 먼 곳에서 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던 영국인들에게 1차 대전은 그야말로 초유의 경험이자 공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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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방으로 이동하는 영국군 부상병들)


하지만 보다 충격적인 것은 귀국한 참전 용사들의 생생한 증언과 사진이나 동영상을 통해 전해지는 전선의 무서운 모습이었다. 특히 솜 전투 발발 이후에는 신문에 실리는 전사자들의 부고 기사가 지면을 가득 채우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어느덧 영국인들에겐 친인척 중에 전사상자가 반드시 있을 정도가 되었다. 당연히 의회를 비롯한 정치권에서 헤이그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고 이는 상당한 압력이 되었다.


헤이그는 병사들의 엄청난 희생에도 흔들리지 않았지만 2달 동안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아직 제3방어선까지 다가가지도 못했기에 느긋한 입장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바로 이때 BEF 정보참모인 차터리스(John Charteris) 소장이 전방에 배치된 독일군의 수가 급격히 감소되고 있다는 보고를 올렸다. 루덴도르프의 지시에 의한 변화였지만 BEF 사령부는 이를 독일군의 붕괴 조짐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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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 속에서 대기 중인 영국군)


독일군을 무한정 소모시켜 서부 전선에서 승리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이 드디어 효과를 본 것으로 오판한 헤이그는 최종 승리를 위한 결정적 타격을 가할 시기가 왔다고 확신했다. 그는 영국 4군과 후방군 예하의 15개 사단, 새롭게 증원된 프랑스 10군 예하 8개 사단을 동원하여 티에프발에서 베르망토빌레(Vermandovillers)에 이르는 30여 km에서 9월 15일 일제히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신무기의 등장


헤이그는 이번 기회에 독일의 제3방어선이 위치한 모르발(Morval)에서 구드쿠르(Gueudecourt)를 돌파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정찰 결과 그 뒤로 의미있는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이곳만 돌파하면 최종 목적지인 바폼과 페론까지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 낙관했다. 그가 그렇게 자신한 데는 먼저 눈에 띄는 독일 진영의 병력 감소가 있기도 했지만 충분한 전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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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 구덩이에서 6인치 야포를 이동시키는 영국군 포병)


먼저, 실패로 끝난 7월 1일의 공세를 교훈 삼아 당시의 2배가 넘는 충분한 야포를 동원했다. 이제 포병은 최후방이 아닌 전선 가까이에서 보병의 진격 상황을 파악하여 신속히 이동하면서 목표 지역을 정확히 타격하는 기법을 터득했다. 너무 혹독한 대가를 치른 이후였지만 BEF는 보병과 포병의 협조 체계가 유기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지옥의 참호전으로 인해 탄생한 신무기가 이번 공세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만으로 2년 가까이 참호전을 겪은 이상 이를 극복할 방법을 궁리한 것은 너무 당연했다. 그렇게 해서 장갑을 둘러 탑승자를 보호하고 무한궤도로 거친 대지와 방어물을 건너 상대 참호까지 다가가 공격을 가할 수 있는 무기가 고안되었다. 개발과 이동 중에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물탱크 같은 특유의 모습을 빗대어 탱크(Tank)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이 무기가 바로 전차다.


영국은 최초의 현대식 전차인 Mark I의 개발을 완료하고 서둘러 시험을 거친 후 49대를 9월 초에 은밀히 전선에 배치했다. 헤이그는 물론이거니와 닦달을 받아 스트레스가 심했던 4군 사령관 롤린슨도 당연히 이 새로운 무기에 대한 기대가 컸다. 최전선에 등장한 이 생소한 무기를 본 병사들은 사기충천했다. 그리고 9월 15일, 대대적인 포격이 재개되면서 9월 들어 잠시 소강상태였던 전선은 다시 불타올랐다.






기대와 실망


항상 그랬듯이 참호 속에 틀어박혀 있던 독일군은 영국군의 포격이 끝나자 기관총을 들고 밖으로 나와서 진지에 거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포연과 먼지를 헤치고 다가오는 영국군의 모습이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그들의 바로 옆에 처음 보는 이상한 차량이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서 기관총을 난사했지만 총탄을 너끈히 튕겨낸 이들은 진지를 향해 곧바로 달려오면서 탑재된 포와 기관총으로 공격을 가했다.


처음 겪는 상황에 놀란 독일군 전선은 무너져 내렸고 공황 상태에 빠진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다가 도망쳤다. 사기가 오른 영국군 보병들은 환호하며 철옹성 같았던 독일군 진지를 하나하나 접수해 나갔다. 특히 15군단 예하 41사단에 배속된 4대의 전차는 공격 당일 플레르(Flers) 시가지까지 진입하는 쾌거를 올렸다. 같은 방식으로 공격에 나선 서북쪽의 3군단도 쿠르슬레트(Courcellette)를 동시에 탈환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사실 전차보다는 루덴도르프가 전략을 변경하면서 독일군의 전방 진지가 이미 약화된 상태였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였다. 플레르 같은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9월 15일 영국군은 약 2km 정도를 나간 상태에서 독일군의 반격을 받고 진격을 멈추었다. 뒤에 있던 강력한 독일군 예비대가 이동 방어에 들어가자 더 이상 전진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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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에 모습을 드러낸 최초의 전차인 Mark I. 지옥의 참호전은 전차의 등장을 이끌었으나 솜 전투에서의 전과는 실망스러웠다.)



야심만만하게 도입한 Mark I은 고장이 잦아 정작 36대만 작전에 투입될 수 있었고 플레르나 쿠르슬레트의 탈환이 극히 예외적이었을 만큼 전반적으로 전과가 만족스럽지 못했다. 훗날 공세를 주도하기에는 숫자가 너무 적었고 이마저도 분산 배치하는 실책을 범했다는 비난이 있었지만 당시에 전차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법을 아는 이는 지구상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그는 이날의 공격이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했다.






희생의 대가


폭이 30km에 불과한 전선에 무려 50만의 대군을 투입해 벌인 공세의 결과가 2km 전진이라면 이를 성공이라 볼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있어 왔던 솜 전투의 양상을 반추한다면 헤이그가 첫날의 전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독일의 대응 강도가 이전보다 약해지고 영국군의 손실 비율도 줄어들었기에 그 이후를 기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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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 전에 밀스 수류탄 투척 준비를 하는 영국군)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헤이그는 공세지향적인 성격답게 이튿날부터 쉴 새 없이 공격을 가했다. 비록 전차의 전과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았지만 그는 이외에도 새로운 무기를 도입하는 데 열성적이었다. 특히 공격 시에 보병들을 가까이에서 엄호해 준 루이스(Lewis) 경기관총이나 진지 공격에 편리한 밀스(Mills) 수류탄 같은 경우는 상당히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혹독한 환경은 이처럼 새로운 전투 수단의 등장을 이끌었다.


9월 27일, 지난 석달 동안 공략에 실패하며 엄청난 희생을 야기했던 티에프발의 점령은 이제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알려준 전주곡이었다. 전선 대부분에서 독일군이 밀려나는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확보한 제1방어선의 요충지였던 티에프발의 함락은 그만큼 의의가 있었지만, 사실 후방의 보급로가 차단되어 버린 독일의 입장에서는 사수할 만한 가치가 사라진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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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9월부터 11월 사이에 있었던 솜 전투의 상황도. 연합군, 특히 영국군은 엄청난 희생을 당했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 특히 BEF의 희생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고 여전히 많은 병사들이 돌격 중에 산화했다. 다만 이전보다 그 비율이 조금 줄어들었고 희생한 만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었다. 연합군이 처음 솜 전투를 구상했을 때의 목적 중 하나가 독일군을 소모시키는 것이었는데, 엉뚱하게도 BEF의 희생이 더 많았다.


10월 1일에 이르러서는 제3방어선 대부분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연합군의 진격은 다시 멈추었다. 보름 동안 계속된 공세로 말미암아 지치기도 했지만 독일의 방어선도 강화되었던 것이다. 당시 독일은 베르됭 공략을 포기하고 수세로 전환하면서 전략적 성과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이를 제외하고 연합군의 대공세에 협공을 당한 당시 상황을 고려한다면 전반적으로 상당히 선전했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솜 강 전투 - 신병기 탱크의 등장 | 인스티즈

(프랑스군의 돌격을 저지하는 독일군)


이른바 브루실로프 공세(Brusilov Offensive)로 알려진 러시아의 대공세를 받아내면서 9월 20일 동부 전선을 안정화시키는 데 성공했고, 5월의 트렌티노 공세(Trentino Offensive)를 시작으로 동맹국을 압박하던 이탈리아군의 공세도 둔화시켜 남쪽의 알프스 전선도 소강 상태로 만들었다. 덕분에 서부 전선을 다시 강화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당장 전세를 바꿀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헤이그도 다른 전선에 투입된 독일군이 동원되기 전에 어떻게든 솜 전투를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해졌다. 10월 13일, 대대적인 포격을 시작으로 영국군의 공세가 재개되면서 티에프발 후사면의 앙크르 고지(Ancre Heights) 일대에 독일군이 구축한 레지나(Regina) 참호선을 놓고 격전이 벌어졌다. 때마침 폭우가 이어지면서 피탄공으로 뒤집힌 전선은 발을 딛기 힘든 늪지대로 변했다.


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솜 강 전투 - 신병기 탱크의 등장 | 인스티즈

(늪처럼 변해 버린 전선의 모습)


그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은 영국 4군은 11월 7일, 마침내 난공불락 같았던 르 사르(Le Sars)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4군이 모든 것을 쏟아붓고 멈추자 후속한 5군이 공세의 대미를 장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동안 후방군으로 불리다 전력이 대폭 증강되며 부대명이 변경된 5군은 11월 13일 보몽아멜(Beaumont Hamel) 탈환을 위해 앙크르 강 북쪽에서 진격을 시작했다.






승자도 패자도 없었던 전투


티에프발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보몽아멜의 보루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 것은 무려 열흘이 지난 11월 23일이었다. 이곳의 공략에 나선 영연방 뉴펀들랜드(Newfoundland) 대대는 병사 전원이 전멸할 정도였다. 이로써 연합군은 보몽아멜에서 약 30여 km 동남쪽의 프렌(Fresnes)에 이르는 선까지, 종심으로는 최대 10여 km까지 전선을 밀어붙였다. 그러고 나서 전선은 마치 공기 빠진 풍선처럼 급속도로 소강 상태가 되었다.


물론 이후에도 쉬지 않고 교전이 벌어졌지만 많은 자료에서 이때까지를 솜 전투로 본다. 단지 지도상에 그어진 점령지만 놓고 따진다면 연합군이 승리한 전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5개월간 벌어진 전투의 승자와 패자를 그렇게 단순하게 나눌 수는 없다. 우선 독일군이 약 40만 정도의 전사상자, 실종자, 포로가 발생했던 반면, 연합군은 영국군이 약 40만, 프랑스군이 약 20만 정도의 인명 피해를 보았다.


또한 연합군이 최대 95개 사단을 동원했지만 여러 곳에서 동시에 격전을 치렀던 독일은 그 절반 정도인 50여개 사단만 투입했다. 아무리 서부 전선이 공격자보다 방어자가 유리했던 싸움터였다 하더라도 독일군이 선전한 것이 맞다. 특히 반대 입장에서 치러진 베르됭 전투에서 공세를 벌인 독일군의 피해가 수비에 나선 프랑스군보다 조금 적었던 사실과 비교한다면 연합군이 솜 전투의 승리를 주장할 수는 없다.


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솜 강 전투 - 신병기 탱크의 등장 | 인스티즈

(돌격 준비를 하는 프랑스 6군 병사들)


하지만 그보다 연합군이 공격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점이 이긴 싸움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1915년 겨울 공세를 처음 구상했을 당시에 최종 목표로 삼았던 바폼과 페론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공격을 마감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두 도시를 연결하는 가도를 점령했지만 그다지 의미는 없었다. 그 정도로 엄청난 피를 갖다 바치고 과연 얻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닫히지 않은 지옥의 문


그렇다고 독일이 승자가 아니라는 점 또한 확실했다. 상대적으로 적었을 뿐이지 5개월 동안 그 좁은 싸움터에서 입은 40여만의 피해 또한 경악할 수준임에 틀림없다. 2배나 많은 적을 상대로 열심히 잘 싸웠다는 점을 제외하면 독일도 피를 퍼붓는 잔인한 경쟁에서 입은 피해가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만큼 독일도 순순히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적어도 그런 점에서 본다면 연합군이 솜을 공세 방향으로 선정한 것은 맞았다고 볼 수도 있다.


야심만만하게 시작한 베르됭 전투에서 당황한 독일은 솜 전투에서 곤욕을 치르며 이제 1차 대전에서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자각하기 시작했다. 루덴도르프는 “완전히 탈진하여 더 이상은 싸우기 어려울 정도다”라고 토로했고 전선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루프레히트 바이에른 왕세자는 “전쟁 전에 육성된 정예 중에서 그나마 살아있던 마지막 병사들이 솜에서 완전히 쓰러지고 말았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참호전의 상징인 무인 지대는 텅 비어 있을 때가 가장 무서운 순간이었다. 돌격하다가 죽어간 병사들로 인해 이곳이 시체 지대로 변하면 최전선 지휘관들의 협의에 의해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임시 휴전이 벌어졌다. 대개 반나절 정도의 정리 시간이 끝나고 양측 참호 사이가 다시 깨끗한 무인 지대가 되면 이곳을 또 한 번 시체로 가득 채우기 위한 싸움이 반복되었다. 솜 전투는 바로 이런 잔인한 장면이 가장 많이 등장한 지옥의 싸움터였다.


1차 세계대전 최악의 솜 강 전투 - 신병기 탱크의 등장 | 인스티즈

(시신 정리를 위해 임시 휴전 중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영국군과 독일군 병사들)


5개월 동안 양측 합쳐 100여만명의 젊은이들이 죽거나 다친 솜 전투가 시작된 1916년 7월 1일은 지옥의 문을 연 날이었다. 살상 행위를 주저하지 않는 잔인한 인간들은 거리낌 없이 문을 활짝 열었지만 그것을 언제, 어떻게 닫아야 하는지는 몰랐다. 열어 놓고 놀라서 5개월 후에 일단 쉬기는 했지만 이 문이 완전히 닫히려면 앞으로도 2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은 몰랐다. 결국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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