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일부터는 넘기기 쉬운걸로 사올게. 아니면 저녁부터. "
" … "
윤기는 얕게, 아주 얕게 숨을 고르기시작했다. 그 짧은시간에 어찌나 땀을 흘렸던것인지 축축하게 젖어 등허리에 잔뜩 달라붙은 흰 티셔츠에 살이비친다. 이맛살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닦아내는 태형의 손길, 또 다시 눈을 지그시 감는다.
" 감기걸리겠다. "
다정스레 윗옷을 벗겨내는 태형의 손에 몸을 완전히 맡긴채 이따금 숨을 크게 들이쉬고나니 방전되어버린 체력에 정신이 아득해져왔다. 먹은게 없어 뒤늦게 몰려오는 허기와 갈증은 어지러움을 유발시켰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수면제의 역할을 대신에 윤기를 완전한 숙면상태에 이르게했다.
" 자? "
" … "
" 자는구나, "
…잘자, 하는 말을 입안으로 삼키고 태형은 담배를 물었다. 윤기의 금단현상과 한탕 실랑이를 벌이고나니, 기운이 쭉 빠져버리는 바람에 허기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한숨과 함께 담배를 물자 희뿌연연기가 태형의 시야를 메워내며 흩어졌다. 태형의 머릿속에 윤기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앞에 있는 자신보다, 자신의 주머닛속에 들어있는 약봉지를 찾는 윤기의 손가락이 바지춤에 닿는 그 허탈감이 가슴을 답답하게했다. 약을 가지고다니는 평소였다면 기어이 약을 꺼내어 떨리는 손과 동공으로 정신없이 팔뚝에 주사기를 꽂아넣었겠지. 그러고선 틀림없이 흐려진 눈동자로 눈앞의 인물이 누구인지도 모른체 올라타 댓가를 지불했을거다. 그래, 윤기를 알려고하면 알려고할수록, 이런사람이겠구나- 하고 예측하면 예측할수록 복잡해지는건 내 머릿속이다. 태형이 입술을 깨물며 골아떨어진 윤기의 옆에 풀썩 눕는다. 생각하는 사이에 거의 다 타들어가버린 담배를 대충 탁자에 비벼끄곤 고개를 돌려 자는 윤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앙상하게 드러난 척추뼈가 하루가 지날수록 존재를 확실히 하는것같았다. 깨어난지 몇시간 되지않아 잠도 오지않았지만 지금 이상황에 잠을 자지않는건 오히려 윤기에대한 생각을 증폭시키는 일이라는것을 가장 잘 알고있는 태형 본인이었기에, 애써 윤기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잠을 청한다.
*
" …? "
언제 잠들었을까, 한참을 뒤척이다 결국 잠에 들어버린 태형을 깨운건 느닷없는 노크소리였다. 잘 떠지지않는 눈덕분에 잔뜩 구겨진 인상으로 몸을 일으킨 태형.
" …누구세요, "
" … "
말없이 노크소리만 계속, 짜증이난 태형이 문을 벌컥 열어재끼자 소년티 다분한 정국이 서있었다.
" 전정국입니다, 김남준선생님 소개로 왔구요. "
" …아, "
" 동생분, 맞으시죠? "
" … "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내며 끄덕, 멀뚱히 서있는 정국을 아래위로 훑는다. 앳되어보이는 얼굴에 비해 꽤 다부진 몸, 꽤 예쁘장하고 부드럽게 생긴 눈모양에 비해 날카롭게 자리잡은 나머지 이목구비들이 소년스러움속에서 남성임을 강조하는것 같았다. 떫은 표정으로 몸을 살짝 비켜주자 실례하겠습니다, 하는 말도없이 무심히 집안에 발을 들인다.
" …집이, "
" …? "
" 좀 더럽네요, 선생님이랑 비슷할줄알았는데. "
집에 들어서자마자 툭 내뱉는 말이 아니곱게 느껴진다. 그러고보니 어젯밤 그 난리를 피워놓고서는 그대로 내비두고 잠을 청해버렸다. 이렇게 아침 일찍 올줄알았다면 치우고 잤을텐데, 어린나이에 비해 툭툭 내뱉는 말투에 꼭 가시가 돋혀있는것 같다.
" …냉장고에는 물도 없고, 이것저것 사오길 잘했네요. "
뭘 저리 많이 싸들고왔나 했더니, 이것저것 간단한 먹을거리들이었다. 제멋대로 냉장고를 열고선, 시킨적도없는데 혼자 봉지에서 먹을거리들을 꺼내어 냉장고에 정리하는 정국의 뒷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던 태형이 뒤늦게 탁자위에 널부러져있던 음식물들을 치운다. 초면에 청소라, 그닥 평범한절차는 아니었지만 요 근래에 평범한 만남을 가진적이 까마득 하기에 태형은 별로 신경쓰지않기로했다. 냉장고 정리를 금방 끝냈는지 팔짱을 끼고선 벽에 기대어 태형이 탁자닦는모습을 지켜보는 정국의 시선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 …왜 그렇게, "
" 쳐다보냐구요? "
" … "
" 그냥, 안닮았길래, "
남의 말 뚝 자르고 저 할 말 하는것을 보니 남준의 애제자이긴 애제자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든 태형이 미간을 찌푸린다. 의형제인걸 모르는건가?
" 뭐, 어떤게? 생긴거? "
" 생긴것도 그렇고, 하는것도 그렇고, 성격도 딱히, 가구취향도 딱히, 닮은구석이 없는것 같아서요, "
" 피가 안섞였는데 닮을리가있나, "
" …? "
" 의형제야, 그냥 어렸을때부터 같이 자란거뿐이지 피는 한방울도 안섞였어. 공통점은 한국인이라는것밖에 없을껄. 집은 내 애인집이라. "
잠시 생각하는듯 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정국, 한숨을 푹 내쉰다. 이리보고 저리봐도 하는 행동거지가 남준과 쏙 빼닮았다. 안그래도 남준자체가 마음에 드는 유형의 인간은 아닌데, 나이도 어린게 행동은 똑같으니 소중한 윤기를 맡길 주치의치곤 마음에 드는 모양새는 아니다. 이거 완전 리틀 김남준이네, 태형이 생각한다.
" 그럼, 애인분은? "
태형이 침대에 아직 잠들어있는 윤기를 향해 턱짓을 까딱, 하자마자 정국이 제법 대범한 걸음으로 성큼성큼 침대에 다가선다. 어린티를 내지않으려고 용을 쓰는 그 모습에 기가차 헛웃음이 나온다.
" …? "
상자에 담겨져있는 내용물을 확인하듯 집게손가락으로 이불을 살짝 걷어내 얼굴을 확인하고서 제 멋대로 의자에 다리를 꼬고앉는 정국이었다.
" 내가 보호자니까 어떻게 치료를 시작할건지는 들어둬야할거같은데, 나는 좀 있다가 일 나가야하거든. "
" 게이? "
" 뭐? "
" 이 집에 오자마자 예상치못한 일들이 많이 생기네요, 친형제인줄 알았던 동생분은 알고보니 피한방울 섞이지도 않았고, 게다가 그 애인이라는분은 남자. 좀, 실망스럽달까, 그러네요. "
" 금발의 미녀라도 상상했던건가? "
정국의 건방진 태도에 태형이 비아냥거린다. 정국의 맞은편 의자에 삐딱하게 걸터앉은 태형이 손가락을 틱틱댄다. 마음에 들지않는지 태형의 손끝과 얼굴을 번갈아 보던 정국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 더이상의 사담은 나누지 않겠습니다. 저는 어지간하면 이것저것 기록하는편이거든요, 치료일지는 퇴근하실때마다 읽어보시고… "
" 의사치곤 립서비스가 부족한것같군, 의사도 말로 먹고사는 직업아닌가? "
" …? "
" 그… 왜,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하고서, 돈뜯어내고, 수술하고, 완치되면 아이고 선생님 감사합니다 소리 듣는? 그런직업 아니던가? "
자신의 가방속에서 수첩을 꺼내던 정국의 동작이 멈칫한다. 감정을 억제하려는것인지 심호흡을 훅- 하고 쉬는모습이 아니꼬워 픽 웃음이 나왔다.
" 제가 마음에 들지않나보네요. "
" 글쎄, 초면에 좀 무례하길래, 의사양반들은 이렇게들 친해지는건가 싶어서. "
" … "
" …아님 말고, 내가 어린애는 꽤 다룰줄알거든. "
태형의 비아냥거림에 정국의 손에 핏대가 선다.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내쉰다.
" …보호자분, 아니, 동생분 성함이? "
" 동생분? "
" 보호자보단 선생님의 동생이라고 생각하는게 예의를 지킬수있을것같아서, "
" … "
한마디 지는법 없이 꼭 되갚아 주는 모습에 기가차서 헛웃음이 나온다. 윤기한테 헤코지만 안하면 참 다행이련만, 하는 생각이 스쳐 애써 무표정을 유지한채 정국을 똑바로 응시했다. 태형과 눈이 마주치자 그제서야 수첩을 마저 꺼내어 펼치는 정국.
" 일단 동생분 성함부터 적을게요. 환자분증세는 어느정도 알만하니까. "
" …V, "
" V? "
태형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수첩에 짧게 메모한다. 'V' 한글자 쓰는데 저렇게 오래걸리나, 하고 수첩을 멀찍이서 훔쳐보는 태형이 불편한지 또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피는 정국이었다.
" …가명이군요, 맞죠? 가명. "
" 어, 가명맞아. "
" 제가 동생분께 신뢰감을 주지는 못했나보네요. 하긴, 아니곱게 보고계시니까. "
" … "
" 사담은 안나누기로 했지만, 제가 이곳에 온건 순전히 선생님말씀 따라서 온거예요. 그러니까, "
" 너 역시 내가 그닥 마음에 드는 편은 아니시다? "
" 말이 잘통하시네요. 일만 보죠 우리, "
정국이 얼굴에서 불쾌함을 싹 지우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민다. 불쾌한 말을 웃으면서 건내는꼴이 꺼림칙해 툭 치다시피 악수를 끝내고선 몸을 일으킨다. 언제까지나 윤기의 옆에만 꼭 달라붙어있을수도 없고, 약 이틀동안이나 거래를 미루다시피해서 새로 약속을 잡아야할 거래처가 한둘이 아니었다. 약속이라고 해봤자 늘 가는 바에서 거래처가 나타날때까지 기다리는것뿐이었지만, 나름대로의 직업이었고, 또 반대로 태형을 바에서 기다리는 거래처들도 많았기에 어찌되었건 오늘은 꼭 바에 방문해야했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눈에 띄지않는 차를 빌리고, '창고'에 들러 약을 꺼내와 차를 숨기고 거래처에게 품질을 입증할 샘플 소량만을 주머니에 챙긴다. 그러고선 바에 출근, 거래처를 기다린다. 이 모든일이 적어도 오후 4시전에 이루어져야했기때문에, 꽤 바쁜하루가 될것같았다.
" 윤기야, "
아무리 바쁘다 하더라도 생각보다 이른시간에 나가게될것같고, 윤기의 밥은 챙겨주고 나가야할것같은 마음에 죽은듯 자고있는 윤기의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윤기가 눈가에 주름을 만들며 게슴츠레 눈을 뜨자 태형이 윤기의 등허리께에 손을 받쳐 몸을 일으켜준다. 부작용이나 자발적으로 잠이 깬것빼고는 아침일찍 일어난것이 드물었던 윤기였기때문에 몸을 일으키자마자 무릎을 세워 무릎에 고개를 도로 파뭍는다. 그 모양새가 귀여워서 태형의 입가에 웃음기가 서린다. 그런 둘의 모습을 아니곱게 바라만 보고있는 정국이 쯧, 하고 혀를찬다.
" 형이 보낸 의사왔어. "
" …의사? "
" …응, 의사? 아마 의사. "
" …아, 안녕하세요. "
정국이 의자에서 일어나 고개를 까딱, 하고 인사를 한다. 태형을 대할때와는 상반된 태도에 태형이 허, 하는 소리를 내며 정국을 바라본다. 그런 태형을 완전히 무시한채로 윤기만을 응시하는 정국, 빤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윤기가 고개를 돌린다.
" 몸은 어때, 어제 아무것도 못먹었잖아. "
" 좀 어지럽긴한데 괜찮은것같아. "
" 다행이다. "
" 이름이 윤기예요? "
느닷없이 태형과 윤기의 대화에 끼어든건 정국이었다.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윤기와 대화에 끼어든것 조차 마음에 들지않아 정국을 노려보는 태형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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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미친 델루젼입니다...
요즘 현타가 자주와서 글쓰는걸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서야 한편이 써져서 올리게되었네요ㅠㅠ
제 개인사정과 상관없이 연재를 미룰생각은 전혀없었는데..
독자분들과의 약속을 대체 몇번이나 어기는건지 모르겠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늦지않도록 노력할게요 늦더라도 열흘이상은 넘기지않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부족한글 꾸준히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드리구요 댓글은 언제나 소중히 하나하나 잘 읽고있어요ㅠㅠ
더더욱 죄송한 제 암호닉분들 언제나 믿고 따라주셔서 감사합니다
(호시기호시기해 융기쨔응 비리미 명치 유니크 복숭 22 독방 민트초코 태태매거진 슈가 깨끗한나라 TRG-42 에어컨 뷔뷔 스웩 자괴감 검은별 희 뷥슈가_ 강낭콩 이제봤니 칸쵸 소름 윰슙 슈가곰 뿌뿌 맥스봉 모카 애플민트 툐롱툐롱 큥큥 슙슙 슈파츕스 슙기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