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타쿠야네 부모님은 맞벌이셨고, 나는 좋은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삼촌네 집 (정확히는 삼촌이 회사 근처에 집을 구해서 텅 빈 집) 에 살게 되어 혼자 자취를 하게 된 아이였다. 처음 타쿠야를 만난건 모의고사가 끝나고 조금 일찍 하교를 하던 어느 여름 날. 모의고사로 진이 다 빠져 친구들과 노래방이나 피시방도 안 가고 그저 한숨 푹 자자 싶어 이른 시간 귀가를 하던 어느 한 푹푹 찌던 날이였다. 나는 하굣길에 평소에는 잘 먹지도 않던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서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갑작스레 먹고 싶은 기분이 들어 산 바닐라 아이스크림이였지만 먹지는 않고 집에 도착하면 냉장고에 넣어놨다 한 숨 푹 자고 일어나 저녁을 다 먹고 난 뒤 후식으로 먹을 생각이였다. 비닐봉지가 탁, 타탁! 하고 바지에 부딪치며 나의 발걸음과 맞춰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땀을 훔치며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덥기도 하고, 아이스크림이 녹으면 안됐기 때문이다.
- 철컥, 철컥.
문에 머리를 박고 열쇠로 문을 열자 끼익 하는 문소리가 들리며 집 안의 풍경들이 보였다. 늦은 밤에 말고 보는 이 집안의 포근한 풍경이 대체 얼마만이냐. 나는 무언가 벅차오르는 기분에 신이 나 안으로 한 발걸음을 디뎠다. 얼른 선풍기를 켜고 얇은 요를 덮은뒤 한쪽 다리만 내놓고 오랫동안 낮잠을 자고 싶었다. 아이스크림만 얼른 넣고, 아니, 하굣길에 땀을 많이 흘렸으니 샤워를 하고 푹 잘까? 그러면 저녁 못 먹고 아침에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하는 이런저런 잡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매웠다.
"형."
그때, 문을 막 닫으려는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앳된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 나는 뒤를 돌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선을 약간 밑으로 내리니 초등학생 저학년, 그니까 나의 반정도 밖에 안되어보이는 한 꼬마가 옆집 문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였다. 나는 한번 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를 부르는건가? 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자 이 부름이 나를 향한 것이라는걸 깨달았다. 왜, 꼬마야? 나는 궁금증과 함께 약간 귀찮다는 투로 꼬마에게 대답했다. 나는 꼬마보단 점점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과 꿀같은 낮잠이 더 중요했다. 꼬마는 쭈그려 앉아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맑은 미성의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나랑 놀면 안돼?"
응?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나는 잠시 그 말을 이해하기위해 머리를 굴렸다. 놀자고? 너랑? 내가? 나는 놀자의 정의를 한번 생각해보고 이 아이와의 관계를 한번 생각해보았다. 초등학생 저학년이 '논다'고 말하는 것은 피시방, 노래방이 아닌 그네를 탄다던가 같이 무언가 그림을 그린다던가, 역할놀이를 한다던가 하는 고등학생인 나와는 이질감이 있어보이는 것들이였고 저 아이와 나의 관계는 지금 문 앞에서 처음 본 '남', 굳이 세세히 말하면 교류없는 이웃 사이였다. 나는 떨떠름함을 느꼈다.
"꼬마야, 형아가 지금 피곤해서 그런데 한숨자고 놀아줄게."
나는 꼬마의 대답은 듣지 않고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
꼬마의 대답은 중요치 않았고 난 내 귀퉁이가 약간 녹은 아이스크림과 땀이 벤 와이셔츠, 그리고 얇은 요가 꼬마보다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5.
한 숨자고 일어나니, 날이 어둑해졌다. 여름이라 낮도 긴데 어둑한걸 보면 꽤 오래 잤다는 뜻이였다. 게으르게 하품을 한번 한뒤 저녁을 먹기위해 느릿느릿 냉장고로 향했다. 저번에 엄마가 왔을때 놔두고 갔던 반찬통과 이것저것을 식탁에 올려두고 찬장에서 햇반을 하나 꺼내 전자렌지에 데웠다. 나른함에 기지개와 함께 하품을 또 한번 하는데 이번에는 문뜩 아까 나와 놀자던 꼬마아이가 생각났다. 한숨자면 놀아준댔는데. 나는 몇시간이나 지난 일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어깨를 한번 들썩이고 자리에 앉았다. 햇반을 뜯고 숟가락으로 햇반을 퍼 입안에 넣었다. 음, 늘 그렇듯 인공 쌀밥이 맛이 났다.
"… 음."
나는 숟가락을 입에 문 채 가만히 문쪽을 바라보았다. 뭔가 찝찝함이 가시지를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쪽으로 다가가 귀를 대어보았다. 뭐하는거지. 이렇게 귀를 대니 더 한번 밖이 보고 싶어졌다. 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열면서 아이를 무시하던 나의 비도덕적인 태도에 대한 미안함과 꼬마가 진짜 내가 한 말을 약속으로 생각했을지, 순수함에 대한 궁금증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나는 천천히 문을 열고 어느 정도 문이 열렸을때, 그대로 그 문을 고정시키고 가만히 한 곳을 바라보았다. 내 집안에 켜진 불빛이로 비춰진 아이가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때문이였다. 아이의 집 안의 불은 꺼져있었고 그 때문에 아이는 반쪽만 보이고 반쪽은 어둡게 가려져있었다.
"다 잔거야?"
"…… 우리 아이스크림 먹을래? 형이랑 밥먹고 가게가서 아이스크림 사오는 놀이하자."
"음…, 그래!"
나는 아이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여름인지라 아이의 몸은 차지 않았지만 나는 나를 바라보는 아이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 아이가 그렇게 우리 집을 처음 방문한 날, 나는 아이의 이름이 타쿠야라는것과 타쿠야네 부모님이 맞벌이로 집에 매우 늦게 들어오신다는 것. 타쿠야는 항상 혼자서 집을 보고 있다는 것. 오늘은 집 안에 있기가 너무 심심해서 하루종일 밖에서 (아파트 복도에서 1시간에 몇명 걸어다니나, 시멘트 바닥 까만 점 새기 같은걸 했단다.) 놀다가 옆집에 웬 형이 들어가길래 같이 놀자고 했다는 것, 그리고 그래서 저녁에 이렇게 누군가와 저녁밥을 먹고 아이스크림까지 먹게 되었다는 것, 까지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시간이 흐르고 주말에 타쿠야의 부모님에게 타쿠야의 물건들을 우리 집에 놓고 타쿠야를 우리 집에서 재울 수 있냐 물어보았다. 물론 10시에 끝나는 내가 타쿠야를 많이 봐줄 수 있는것은 아니였지만, 아무래도 부모님보다 일찍 들어오는 내가 정적인 면에서는 낫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였다. 처음에는 가끔 아침에 출근길에 인사하던 웬 선 남자애가 이런 부탁을 하나 싶어 의심적인 눈빛을 보내오기도 했지만 타쿠야가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하여 타쿠야는 곧 우리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안 되어 그게 타쿠야에게 훨씬 도움이 되고 좋은 일이라는걸 누구보다도 타쿠야네 부모님이 더 잘 아시게 되었다.
6.
사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참 힘들고 고달펐다. 숙취뿐만 아니라 늘 그 이른 시간에 일어난다는 것이, 그것도 혼자 알람 여러개 맞춰서 일어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였다. 나는 네번째 알람을 끄면서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며 더욱 이불 속으로 깊숙하게 몸을 파고들었다. 싫다, 출근하기 싫다, 회사 그만 두고 싶다, 아침밥 먹고 싶다. 인상을 잔뜩 쓰며 매일 생각하는 이루지 못할 위시 리스트를 한번 씩 쭉 다시 머릿속에 상기시키며 잠이 덜 깨 고개를 작게 저어댔다. 오늘 월요일 아침은 늘 두뇌를 상쾌하게 깨워 월요병을 이기자는 말도 안되는 논리의 아침 회의가 있다. 늦으면 안 된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머리를 올려 이불에서 얼굴을 빼내었다.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일 이 삼, 까지 숫자를 세고 일어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으악! 깜짝아!"
나는 내 바로 위에 보이는 남자 얼굴에 깜짝 놀라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뭐야? 잘 안 보이는 눈을 세게 비벼 보니, 타쿠야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것이였다. 타쿠야…? 아, 타쿠야. 나는 이제야 타쿠야가 당분간 우리 집 들어와서 살지. 하는 생각이 떠올라 타쿠야를 보고 어색하게 웃어대며 작게 말을 건냈다. 타쿠야는 아무 표정없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침이라 흉한건 알겠는데, 이렇게 빤히 쳐다보면 내가 너무 민망하잖아, 얘야.
"타쿠야, 잘 잤어? … 어어, 잠자리는 안 불편하고?"
"………."
"뭐, 아침 수업이라도 있어? 일찍 일어났네."
"잠귀가 밝은데 알람이 네번이나 울려서, 잠 다 깼어요."
아, 그렇구나.
나는 아무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게 나 때문이라는걸 알자 당혹스러움에 그, 그럼 다시 자! 누우면 또 잠 올거야! 하고 얼토당토하지도 않은 소리를 내뱉으며 타쿠야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타쿠야는 잘때 잠옷을 안 입나보다, 그냥 하얀티에 편한 추리닝 바지였다. 저것만 입어도 핏이 나니, 키커서 부럽고 젊어서 부러웠다. 아니, 예전에 어릴때는 잠옷 입지 않았나? 언제부터 입은거지? 나는 어릴때 타쿠야랑 같이 잠옷 맞추고 입은게 버릇이 되서 지금도 잠옷입고 자는데.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밥은 안 드세요?"
"아… 해줄까?"
"아뇨, 안 먹어도 되요."
"내가 혼자 살아서 늦게 일어나기도 하고, 바빠서 아침은 잘 못 챙겨먹어, 토스트라도 해먹게 빵이라도 사다둘까?"
"아뇨, 괜찮아요."
궁색한 변명을 해대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충 이불을 개고 타쿠야를 향해 한번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제대로 보이는 모습이 없구나. 타쿠야의 저 표정없는 얼굴이 더욱 내 자신을 민망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나는 흠, 흐흠! 씻어야지, 이제. 하며 조심스레 타쿠야가 서있는 곳을 지나 화장실로 향했다. 정말로 식빵이라도 사다둬야겠다. 타쿠야는 아직 20대고 학생이라 아침 먹어야 될텐데. 오늘 퇴근길에 빵집에 들려 식빵을 사오자를 중얼거렸다. 뭐라도 해줘야되는거 아닌가? 지금 배고플텐데. 나는 걱정이 되어 지금 냉장고에 뭐가 들었는지 생각해보았다. 햇반은 사뒀고 파랑 계란이랑 맥주, 오렌지 쥬스…, 잠깐, 아침 메뉴로 먹을만한게 없었다.
"타쿠야, 형이 돈 줄테니까 이따 점심에 아침꺼까지 든든하게 먹…,"
"형, 머리 잔디났어요."
고개를 돌려 타쿠야에게 말을 하는데 어느 새 내 뒤를 따라온 타쿠야가 고개를 돌린 나를 보더니 잠결에 삐죽거려진 내 앞머리를 정리해주는 것이였다. 삐죽 튀어나온 머리를 내려주기 위해 매만지는 손길이 부드럽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타쿠야를 쳐다보았다. 타쿠야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근데 표정이 없는건 아니였다. … 웃, 웃는건가? 내 모습 지금 되게 우습구나. 나는 약간 부끄러워져 헛기침을 했다.
"크흠,흠. 타쿠야, 미안해, 오랜만에 봤는데 형이 어릴때보던 모습이랑 많이 다르지?"
"아니요."
"그래도 같이 지내야되니까 내가 좀 더 너한테 신경쓸게."
아니요, 괜찮아요. 이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타쿠야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한참 뒤에 타쿠야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제가 어릴때 보던 모습이랑 똑같아요."
"… 응?"
"똑같아요. 머리 다 정리됐네. 얼른 씻고 출근하세요."
타쿠야는 크게 한번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 뭐지. 나는 타쿠야가 만진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의 거울을 살펴보았다. 멍한 멍청한 표정의 남자가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 지금, 어, 이게 무슨 기분이지? 나는 볼을 두번 손으로 톡톡 쳤다. 아직도 멍한 느낌이였다. 나는 찬 물을 틀고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찬 물이 얼굴에 닿자 잠도 깨고, 아니 잠은 이미 다 깼지만, 아무튼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였다. 나는 세수를 마치고 머리를 쓸어올리며 다시 한번 거울을 보았다.
"… 똑같아? 내가?"
난 내가 많이 달라진거같은데.
"아니, 그보다 타쿠야가 되게 내 보호자같은 느낌이였어."
나는 머리를 다시 만져보았다. 물기가 있는 손으로 만지는 느낌은 타쿠야의 손 느낌이 나지않았다.
나는 샤워기를 틀었다. 그러고 머리를 감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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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어 ㅠㅠ 바빠서 답글 못 드렸는데 이번 화는 꼭 답글 달아드릴게요 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