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내가 수능 말아먹고 나 같은 건 죽어버려야 한다고 한강에 냅다 뛰어든 적이 있었는데,
그 후의 일이야.
정신을 차려보니까 내가 땅바닥에 누워있더라.
그래서 지나가던 선량한 시민이 나 같은 걸 물에서 건져내고 다시 유유히 갈 길 가셨나 보다, 생각하고 있었지.
분명 저녁때 뛰어든 것 같은데 왜인지 하늘이 되게 밝았어. 마치 낮처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까 뭔가 기분이 묘하더라고. 이상했어.
옆에서 누가 궁시렁 거리 는 것 같아서 벌떡 일어났는데,
내가 뛰어든 곳이 아닌 거야.
처음엔 경복궁인 줄 알았지. 하지만 내가 한강에 뛰어들었는데 미쳤다고 누가 거기에 던져놓고 가겠어.
근데 진짜 경복궁이더라고. 상상이 가?
놀래서 소리를 질렀지. 물론 미친 폭주기관차처럼 빼엑 지른 건 아니었고 그냥 너무 놀라서 한번 소리 질렀어.
그랬더니 옆에 있던 남자가 나한테 칼을 들이대더라. 순간적으로 촉이 딱 왔어.
아 여기서 잘못 굴었다간 정말 골로 가겠구나.
웃기지도 않지. 죽으려고 뛰어들었다가 떨어진 곳에서 살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다니.
물론 그때는 이런 생각도 안 들었지. 너네가 한번 봐야 해. 그 길고 날카로운 시퍼런 칼날을. 아직도 그거 생각하면 살아갈 의욕이 팍팍 든다.
그래서 내가 멀쩡히 살아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게도 조금 그립기도 해.
내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으니까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이 들어서인지.
아니면 멍청해 보여서 인지는 몰라도 칼을 도로 집어넣고 나를 일으켜 세우더라.
잘생겼었어. 응. 아마 지금 시대에 살고 있었으면 아이돌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던 곱상한 외모였어.
"저는 전하의 옥체를 모시는 호위무사 석진입니다."
"……네?"
"어인 일로 이곳에 계시는지 설명하셔야 할 겁니다."
나도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를 모르겠는데 설명하라는 거잖아. 그러니 내가 정신적 혼란이 안 올 리가.
정말 내가 제대로 설명을 못 하면 다시 칼날이 내 목에 올라올 것만 같은 분위기 인 거야.
물론 거기에 사람이라곤 나랑 그 호위무사라고 했나, 그분밖에 없었지만.
"그러니까……."
"예."
"사실 저도 제가 여기에 왜 있는지 모르겠……."
응. 병신 같았어. 말도 더듬고. 그리고 일단 제일 중요한 건 내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길이잖아.
지금 이게 꿈인지 아니면 황천길 전 코스인지 알게 뭐겠어. 정신은 없지 처음 보는 호위무사라는 사람이 목에 칼을 들이대지, 나는 느닷없이 궁궐에 있지.
그 사람은 그냥 굽히고 있던 허리를 핀 건데, 나는 칼 꺼내는 줄 알고 소리를 또 질렀어.
이번엔 그 사람도 많이 놀라더라. 조금 미안하긴 했어. 근데 어쩌겠어 내가 무서워서 소리 지르겠다는데.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그리고 바로 그때였어,
"궐이 조금 소란스럽구나."
"송구합니다."
빨간 도포를 입고 있는 고운 남자가 되게 여유롭게 우리 쪽으로 걸어왔어.
걷는 모습에서도 품위가 넘친다는 모습이 바로 그거였을 거야. 천천히 걷는 그 발걸음에 위엄이 묻어있다고 해야 할까.
생긴 건 나보다도 더 어리게 생겼는데 나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위압감이 도는 거야.
딱 보자마자 생각이 들었지.
여기가 조선 시대라면, 저 사람은 왕임에 틀림없다고.
옆에 서 있던 석진이 내 뒷목을 잡아 누르며 조용히 '전하께 예를 갖추십시오.' 라고 말했어.
눈치를 보며 눌린 뒷목을 숙였다가 올리자 발랄한 웃음소리가 쏟아졌어.
그래도 외부 침입자라고 죽임 안 당한 게 어딘가 싶어서 나도 따라 어색하게 웃었지.
"밝고 당찬 아이로구나."
"……감사, 아, 황송합니다."
어쭙잖게 사극에서 주워들은 말투로 대답했어. 아마 내가 아는 말로 얘기를 하면 말이 안 통할게 뻔하니까.
하지만 내가 놓친 게 있었지.
내가 입고 있는 옷. 마지막이라고 한껏 차려입어서 더 화려한 현대식 옷.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를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졌어. 물론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기도 했고.
"나를 따라오거라."
……네? 옆에 있던 석진이 깊은 한숨을 쉬는 것이 들렸어.
먼저 뒤돌아서 가는 왕의 발걸음이 아까보다 가볍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인가. 아무튼, 엄청 신이 나보이시더라.
내가 가만히 멀뚱히 서 있으니까 석진이 먼저 등을 살짝 밀었어.
"전하께서 또 호기심이 발하신 모양입니다. 얼른 가시지요."
날 막 실험대상으로 쓰진 않겠지. 이렇게 온화하게 대해놓고 갑자기 곤장 치면 어떻게 해?
나 여기 올 때마다 매번 길 잃어서 한 시간을 헤매고 그랬는데 도망은 갈 수 있을까?
별의별 걱정을 다 하긴 했는데 뭐, 걷다 보니까 그런 생각들은 금세 사라졌어.
이왕 죽으려고 포기한 인생. 이게 꿈일지언정 이런 경험 한번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물론 따라가면서 곤장은 제발 맞지 않았으면 하고 얼마나 빌었는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