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amB. 헝거게임]
- 김한빈의정석 -
지난 19편의 브금은 316의 망향입니다.
오늘도 브금과 함께 해주세요. 차근차근, 읽어주세요.
다음편부터는 결막이 시작됩니다.
* 암호닉 *
J
bobb_y
수박
파랑짹쨱이
옥수수
까만원두
페브리즈
디보
워후워
코카콜라
갓바비
진지한팀비
소녀
구주네
소묘
몰랑이
꽁빈냥
뚜비두밥 오뚜기밥
밤비
빈블리
구릴라
다이
세니
기맘빈과김밥
닭다리
허니콤보
햫기동동
들레
하늘
매력넘치는
김까닥
바뱌
토끼이빨
찌푸
비니비니한비니
보리차
햇님
꿍디꿍디
꽃게탕
뽑뽀
꿀떡
쿠쿠
아야오유
<3 기맘빈과김밥 <3
콘이
백년가약
꿀갓빈
라임
으우뜨뚜
양꽃
우현동자
조으디
진주
김셍
네티
지원아
깜백
헛둘헛둘
분홍양말
냐미냐미
김빱
체리돼지
달다리
나니
너란 존재는, 내게 있어서 절대적인 것과도 같았다.
너를 위해서라면 나는 내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너를 위해,
내 몸을 던졌고 내가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너가 웃어주기만 했다면, 난 삶의 가치를 티끌만이라도 느꼈을 것이다.
누구 하나 내가 널 향한 진실된 마음이란 걸 알아줄 이는 드물었다.
아니, 어쩌면 송윤형이 너와 교제를 시작한 후부터 나는 부정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김진환과 김동혁, 그리고 김한빈은 내 속사정을 알고있는 눈치였으나 굳이 티를 내지않았다.
불편할 것만 같았던 그들과의 관계도 오래 놔둔 토마토처럼 물렁하게 변했으니.
방송에서 2년을 강조한 이유를 넌 알고있니. 모를것이다, 속상하게도.
내가 널 알아오고 가슴아파했던 그 시기에 너도 힘들었을 것이다.
당연하다, 넌 그때 아버지를 잃고 텅 빈 몸뚱이만 든 채 여기저기를 거닐고 다녔을테니까.
눈 감고 귀막아도 너가 무엇을 할까가 상상이 되서 난 가끔 죽고싶었다.
너란 애 하나가 뭔데 가슴속에 박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건지 난 널 불러내서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작아진다. 소심하게 너의 뒷꽁무니를 쫓아다닌 건 아니지만, 우리 형과 아는 사이였던 네 동생에게서 흘려듣는 척 했었다.
그 날 이야기를 들은 후 집에 오면 온갖 망상을 하며 너와 지어갈 미래를 어서 설계하고 싶었다, 짝사랑.
세상에서 연인들 간의 가장 칼로 긋는 것과 같은 정의.
이 정의는 내가 널 영원히 잊지 못할 하나의 흔적으로 남겨두고팠기에 널 해치지않고 지켜보기만 했던 것이였다.
손대기도 아까운 너, 내가 가장 귀찮아하는 것들이 세상에는 가득했지만 나는 꼬박꼬박 널 만난 뒤부터.
아니 내가 10살이 되고나서부터 써내려갔던 일기장엔 어느덧 너가 빼곡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널 한눈에 넣어둔 날 부터 지루하기만 했던 내 일기장에는 너라는 존재가 자리를 잡았고 매번은 아니더라도 가끔 볼 때마다 널 응시했다.
가난했던 내겐 사진기는 커녕 무엇도 널 담을만한게 없어서 일기장으로나마 널 그리고 묘사했다.
투박한솜씨. 언젠가 너와 이걸 펼쳐보고 이땐 이랬다고 얘기할 날을 기다리면서.
어느덧 끝자락이 보이려는 내 10대시절에 강한 충격이였던 헝거게임에서 꿈에도 그린 너와 만날 줄은 알았을까.
당시 넌 종대와 윤형이를 놔두고 가야한다는 의무감에 큰 좌절감을 드러내며 몸부림을 쳤었다. 지켜보던 나는 너무 아니꼬와서 일부러 틱틱댔었다.
김진환의 등장, 그리고 캐피톨에 도착하고나서 입장을 화려하게 마친날 새벽.
일기 써야지, 하고 챙겨온 가방에서 툭 떨어진 무언가가 있었다.
난 대체 뭐지라는 생각으로 집어들었고 그것은 작은 쪽지였다.
부스럭대며 펼치자 정갈한 글씨체로 쓰여진 내용과, 마지막에 쓰여진 이름. 송윤형.
같이 종대와 가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것, 그리고 널 지켜보고 있겠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이 적혀있었다.
나도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눈을 깜빡이면서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마 내가 기차를 탈 때 사람들에게서 밀리는 동안 넣어둔 것이 틀림없다.
나는 괘씸하고, 화가났다. 이제 겨우 너와 단 둘이 있게 됐는데 송윤형이라는 존재가 불필요한 인간으로 느껴졌다.
그 자리에서 종이를 찢어버렸다. 갈기갈기 찢고나서야 내 두손안에 들어있는 그의 편지조각들이 다시 눈에 보였다.
사랑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너와 송윤형이... 부러웠다.
그리고, 내 손안에서 송윤형의 마음이 보이는 것만 같아서 나는 대역죄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황급히 조각들을 떨어뜨렸지만 난 그 날밤 결국 새고말았다. 일주일 동안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김한빈의 방해와 훅, 들어오는 고백에 긴장감을 늦추지않았다.
너는 3일가량 김한빈과 트레이닝을 받으면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난 그게 좋아서 너 옆을 알짱거렸다.
대망의 방송날, 김한빈의 대형사고에 넋나갔지만 무섭게 화를 내던 네 모습이 낯설고 너도 사람이구나를 느꼈다.
나도 그와 똑같이 사고를 쳤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 마음을 전달한 느낌에 뿌듯하기까지 했는데 너는 김한빈에게서도 보여주지않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쓰러졌다.
김진환의 질책에도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숙소로 돌아와서 방문을 걸어잠그고 쓰러지듯이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내 고백은 허무하게도 밟히는 걸 차츰 느껴서 가슴 한켠이 따가웠다.
너는 내가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리고 내가 향한 진심은 이제 방송용이라고 치부해버려도 어색하지 않을만큼 하찮은 것이 되버렸다는 사실에,
비참해서 내 머리를 감싸고 가빠오는 숨을 애써 골랐다. 고백, 그리고 짝사랑.
내가 꾸준히 너를 보고 달리고 있었으나 너는 다른 이를 보고 똑같이 달리고 있었다.
그의 숨이 멈췄다는 것은 대포가 터지고나서야 물 밀려오듯이 실감났다.
펑, 하고 터지는 대포소리에 나를 지켜보고 있던 김한빈도, 김지원을 껴안고 울부짖던 나도 고개를 동시에 쳐들었으니까.
지원이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죽었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을정도로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띄고있어서 그게 더 화가났다.
화남과 드는 생각은 온통 멍청이, 라는 생각 뿐이였다. 그의 가슴을 주먹을 쥐고 한번, 두번 두들기기 시작했다.
"...김지원..."
"..."
"일어나..."
"..."
"왜, 왜 웃고있는건데..."
"..."
왜 불쌍하게 웃고 있는건데, 너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웃고 있는건지.
김지원의 가슴을 두드리는 속도를 더 빨리했다. 콩, 콩 거리는 소리는 이제 둔탁한 소리로 변했고 김지원의 몸이 미세하게 내 주먹에 따라 흔들렸다.
눈 감지말라고 했는데 너도 말 안듣잖아, 나만 울고있다고 울지말라고 말 안듣는다고 했으면서 너도 내 말 안듣잖아...
김지원의 두 눈은 감겨있었다. 억지로라도 깨우고 싶었다. 깊은 잠에 빠진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에서 전해져 오는 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발, 제발... 누구에게 비는 거였는지, 특정한 대상도 없었지만 되뇌이듯 중얼거렸다. 제발, 이라는 이 단어 하나에 모든 것을 건 것마냥.
숨을 죽이고 울었다. 끅끅 거리는 목에서 울려퍼지는 울음소리가 야수마냥 더럽고 거칠었다. 같은 지역 아이였는데, 같이 살아남고 싶은 아이였는데.
김지원, 이라고 불러도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당장 깨어날 것만 같았다. 모든 건 장난이야, 라고 하면서 눈을 다시 천천히 뜰 것 같았다.
황급히 손을 만졌다. 손은 예전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벌써부터 차가워지고 있었고, 검지손가락은 벌써 굳고 있었다.
뻣뻣해진 그의 근육을 억지로 피고 싶었지만 새하얗게 변한 그의 얼굴을 보고있자니 차마 건들 수가 없었다. 김지원, 그는 정말 꿈꾸고 있는 듯했다.
허망했다. 지금 드는 생각은 허망하고 허탈하고, 그냥 모든 것이 텅 빈 느낌이였다. 가슴 한켠이 시려오다 못해 만지기가 겁날 정도로 차가웠다.
눈을 깜빡이다가 부풀어오는 두 눈가를 슥슥 닦았다. 눈을 감자마자 김지원과 함께 했던 그 짧은 기간의 대화와 행동들이 떠올랐다.
창가에 앉아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던 그와, 침대에 누워서 꼬질꼬질한 푸를 잡고 잠을 청하던 얼굴과, 피곤해죽겠다며 골골거리던 그의 모습까지.
방송에 나와서 대형사고를 치고나서 화를 내던 나를 달래주던 그의 몸과, 시작하는 전 날 밤에 날 껴안았던 그의 숨결, 시작할 때 던져주었던 손수건도.
아무것도 없었다. 기억, 기억만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추억을 공유할 사람은 둘이 아닌 하나였다. 하나, 외로운 숫자다.
김지원과 나는 연결고리가 없었다. 의미심장하게 뱉었던 말들을 모두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간신히 기억...아니, 지금 생각나는 건 그가 총을 쏘기 전 한 말들.
고마웠어, 2년 전의 널 만났고. 1년 전의 널 만났어도, 지금 너가 가장 생각날 것같다. 살아줘서 고마워, 바라보면서... 행복했어.
2년 전이라는 말에 되물었다. 그가 어떻게 내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 있는건지 수상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였다. 모르쇠하는 그의 표정도 눈에 밟혔다.
1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2년 전에 그와 내가 만난 적이 있었던걸까. 문득 머리가 누군가가 찌르듯이 아파왔다.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르는 느낌이였다.
눈을 찌푸리고 괜찮은 척 했지만 그 고통이 점점 거세졌다. 김지원이란 이름과 2년 전이라는 시간을 더듬는데 내 머릿속은 과부하가 걸려버린 것이다.
정신없이 장례식을 치르기 1년 전, 비가... 비가 왔었던 것 같았는데. 내가 총을 언제부터... 아니, 13살 때부터 잡았었는데. 2년전이면 16살이고, 1년 전이면.
내 뒤에서 파르륵, 하고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김지원의 빳빳한 몸을 잡고 있던 나는 툭 떨어뜨리고 뒤돌아보았다.
김한빈은 날 힐끔보고는 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곧 놓았다. 꽉 깨물었는지 붉은 기운이 맴돌았다. 김한빈은 노트 맨 첫장을 열면서 목을 가다듬었다.
10살 때 부터 이 노트를 썼나봐. 새까맣다, 이 밑이. 그는 만질만질거리며 노트 맨 밑을 문질렀다. 그 날 어두워서 잘 못봤는데, 정말 낡았다.
김한빈한테 들으라고 했던 김지원의 말이 생각났다. 하고싶었던 말, 못했던 말들 모두 담겨있으니... 김지원은 그렇게 끝까지 당부하면서 숨을 멈춰갔다.
김한빈은 맨 앞장을 뒤적이다가 뭔가를 읽어내리는 눈빛으로 스윽 훑었다. 그리고는 빠른 손길로 몇 십장을 계속해서 넘기더니 이내 멈추고 툭툭, 털어냈다.
16살, 1월. 그는 시를 낭송하듯이 말했다. 조금 높은 그의 목소리가 낭창하게 서로의 공간을 메꾸고 있었다.
1월 1일, 신년이다. 나도 이제 16살이니까 형이랑 누나랑 싸우지 말아야겠다.
1월 16일, 형 생일이다. 엄마랑 누나랑 시장갔다와서 형 생일을 축하해줬다. 나는 열심히 깎은 도장을 형에게 줬다. 뿌듯했다.
2월 22일, 헝거게임 1차 투표날이다. 형도 나도 같이 넣었다. 누나는 올해 20살이다.
3월 31일, 엄마가 쓰러졌다.
4월 16일, 엄마가 정신을 헤매고 있다. 무섭다.
5월 5일, 국가정부에서 식량을 나눠줬다. 한 입 베어먹었다가 토할뻔했다. 바퀴벌레가 있었다.
6월 19일, 여름이 시작됐다.
7월 9일, 누나의 생일이였다. 누나는 일을 시작했다.
8월 5일, 엄마가 국가정부 의료기관에서 몇 개월동안 계시기로했다. 근데 왜 돈을 주지?
8월 19일, 비가왔다. 어떤 여자애를 봤다. 창백한 안색이였는데 의도인건지 아닌건지 모르겠지만 예뻤다. 추워보여서 땔깜 하나를 주고왔다.
9월 18일, 헝거게임 2차 투표날이다. 형과 나는 2월 보다 좀더 많은 량의 투표지를 넣었다. 참, 그리고 그 애를 봤다. 동생이 있었다.
10월 5일, 산에 나뭇가지를 줏으러갔다가 그 애가 총 쏘는 모습을 목격했다. 정말 잘쐈다.
11월 1일, 춥다. 오늘따라 그 애 생각이 난다.
12월 9일, 헝거게임 투표를 위해 마을에 모였다. 나와 형은 올해도 뽑히지않았다. 다행이였다. 그 애이름은 역시 호명되지않았다. 다행이였다.
12월 21일, 내 생일이다. 엄마가 돌아왔다. 엄마는 더 이상 정신을 헤매지 않는다.
김한빈은 이 일기가 16살때 썼다고 했다. 여러번 펄럭이면서 참 초딩같이 썼다고 악평을 내리곤 했는데, 그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시 다물었다.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쓸면서 그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12월 31일, 16살의 인생이 끝났다. 그리고 나서 한 장을 넘기고 다시 시작된 17살의 김지원 일기.
괜찮아?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괜, 찮냐고. 김지원이... 죽기전에도 괜찮냐고 물어봤던 것 같은데. 아냐, 내가 기억하는 목소리는 지금의 그가 아니다.
좀더 앳된 목소리다. 어디서, 어디서 이런 목소리가 김지원과 겹쳐지는 거지? 데칼코마니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목소리도 아닌 그 특유의 어투가 같았다.
17살 때부터는 정신차리고 썼나보다. 좀 길긴 하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귀찮은 얼굴이였으나 곧 자세를 바로잡고 입을 열었다.
지루해도 참아, 김지원이 읽어주라고 했으니까. 김한빈은 무뚝뚝하게 말하면서 일기장을 여러번 펄럭이다가 헛기침을 하고 시작했다.
1월 1일, 마을회관에서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단체신년맞이를 열었다. 누나와 형과 같이 갔는데 그 애가 구석에서 동생이랑 얘기하고 있었다.
동생 이름은 김종대라고 했다. 형은 취미삼아서 마을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곤 했는데 그 중에 한 명이라고 했다. 아는 척을 해보이니 동생 또한 반가워했다.
김종대, 라는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김종대...라니. 설마, 그럴리가.
하지만 12구역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동생을 가진 자들은 대략 절반이였고, 김종대라는 이름을 가진 동생을 갖고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나였다.
이상한 기운에 가만히 앉아서 김한빈의 목소리만 듣고있었다. 순간적으로 움찔한 내 몸을 알고있었는지 김한빈은 흘긋 보고는 말을 이었다.
너 동생 있지않냐? 그의 말에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흐음, 하고 입가를 쓰다듬다가 다시 일기를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1월 19일, 형이 내가 그 애를 좋아한다는 걸 눈치챘다. 그 애 동생인 종대한테서 몇 가지를 알아봐주겠다고 했다. 내심 설레고 기뻤다.
1월 24일, 그 애한테서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이름이 송윤형이라고 했다. 조금, 화가났다.
2월 5일, 엄마가 다시 정부기관 의료시설로 들어가셨다. 엄마를 배웅하고 오는데 누나가 울었다. 형이 달래주고 나도 달래줬지만 유독 누나는,
엄마한테 약했다. 엄마는 몇 주뒤에 돌아오신다고 했다. 지금 믿을 건 의료시설 사람들 밖에 없었다.
3월 1일, 헝거게임 1차 투표를 시작했다. 조금 늦장 부리면서 그 애 얼굴도 봤다. 동생과 함께 나온 듯했다.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3월 28일, 형이 종이뭉치를 주면서 그 애한테 갖다주라고 했다. 굳이나한테 시키는 걸 누가 모를까. 나는 못이기는 척 갖다줬다. 아쉽게도 그 애는 집에 없었다.
물어보니까 사냥하러 나갔다고 했다. 더 물어보고싶었는데 차마 못 묻고 그냥 돌아왔다. 바보, 김지원.
4월 17일, 엄마가 돌아왔다. 몇 주만이라고 했는데 몇 달이나 걸렸다. 슬슬 엄마의 안색도 좋아져야 할텐데 걱정이다. 누나는 시장에서 여전히 일하고 있다.
5월 15일, 그 애 생일이라고 했다. 뭘 줘야할지 몰라서 고민하다가 사냥을 하는 것 같아서 평소에 아껴뒀던 문양을 기억해내고 아껴뒀던 은을 챙겼다.
옆집아저씨한테 가서 이렇게 만들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돈을 드렸다.
5월 18일, 뒤늦게나마 완성됐지만 상당히 예뻤다. 그 애가 생각날만큼. 근데 전해주러 가는길에 그 애랑 송윤형이 보였다. 둘은 얘기를 하면서 웃고있었다.
질투가 사로잡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도무지 그 둘을 볼 자신이 없어서 황급히 다시 돌아왔다.
6월 2일, 만든 은 어깨박이를 팔았다. 누나에게 부탁해서 팔아달라고 했다. 왜 이런 예쁜걸 파냐고 묻길래 그냥, 이라고 대답했지만 차마 털어놓진 못했다.
김한빈은 문득 잘 읽어내리다가 멈추고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에 딜레마가 겹치는 것만같아서 재빠르게 몸을 움츠렸다.
안 해쳐, 너. 그는 속삭이다가 나를 툭툭 치고 공책 한 곳을 가르켰다. 구석에 조그맣게 그려진 무언가가 자리를 잡고 뽐내고 있었다.
김지원의 그림실력은 형편없었지만 곳곳에 특징을 잘 살려내고 있었다. 투박한 솜씨로 그려진 어깨박이가 여러번 덧칠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거 너가 김지원한테 준 거 아냐? 그는 김지원을 힐끔 보다가 그것을 바라보기를 수 없이 반복했다. 아무말도 안하고 멍 하니 그 그림만 쳐다봤다.
김한빈은 기합소리를 약하게 내면서 일어섰다. 그는 내 손에 김지원 노트를 건네주고 어깨를 지나쳤다. 내 손에 들어온 김지원의 일기장이 허름했다.
너가 읽어. 그는 낮게 속삭이면서 말했다. 내가 읽어주는 것 보다 너가 읽는게 더 이해가 빠를꺼야. 김지원이... 부탁했지만.
그의 말이 마법인마냥 움직일 생각을 하지않던 내 손이 움직였다. 김한빈의 말대로 6월 2일, 이라고 적힌 날짜 밑에 바로 그려진 그림을 도무지 보지못하겠다.
왜냐고? 눈이 그곳으로 가지 않았다. 애써 옮기려고 해도 겁이나는걸 어떡하라고, 난 입술을 깨물고 일기장이 김지원의 얼굴인 것 처럼 여겨졌다.
정말, 그의 얼굴인 것처럼 빼곡히 적힌 그의 일기장을 쓸어내렸다.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짓누른 종잇빛깔도 그의 고단함을 표출하는 듯했다.
맨들맨들한 그의 피부는 이제 썩혀질 것이다. 거칠게 변할 것이고, 내가 생각했던 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더 소중해졌다.
말도 못하고 감정전달도 하지못해, 얼마나 불쌍하냐. 김한빈은 또 다시 속삭이는 어투로 말을 건넸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져왔다.
다음장은 6월3일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 애'라는 단어에 집착이 완전히 홀려버려서, 눈을 빠르게 굴렸다. 혹시라도 언급이 되있을까봐. 그럴까봐.
[6월 19일, 광산이 무너져내렸다. 온 마을에 통곡소리가 가득해서 무섭다. 오랜만에 가족들이랑 같이 잤다.]
광산...이라고. 그의 단어에 퍼뜩 떠오르는 어두웠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광산이라는 말에 뛰어돌아가는 시간의 달림이 성급하다.
게다가 날짜도 그 날이였다. 평생 잊고싶지만 잊혀지지 않는 그 날을, 내 옆집 사람들도 모두 울면서 집에는 텅 빔이 가득했다. 온통 마을회관으로 모여들었다.
통곡소리가 가득했었고, 죽은 사람들의 가족들은 자신의 가족들을 찾느라고 분주하게 움직였었다. 땀에 젖은 손들과 더러운 냄새들이 한꺼번에 풍겼다.
사망자 명단을 확인하고 실종자 명단을 확인하면서 모두들 패닉에 빠졌다. 광산이 무너지는 건 흔한 일도 아니지만 드문드문 있는 일이였다.
우리 아버지는 그 광산 총 책임자였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고, 나와 동생은 아버지가 언제 돌아오나를 기다리면서 계속 밖에서 기다렸다.
김한빈에게서 듣는 김지원의 일기에는 그의 아버지가 언급되있지않았다. 아마 오래전에 돌아가셨겠거니를 예상하면서 그 대목에서 멈추고 도무지 움직이질 못했다.
광산이, 무너져내렸다. 17살이라는 나이에 아무것도 무섭지 않을 나이임에도 그는 무서움을 느끼고 있었다.
[7월 5일, 그 애 아버지가 발견됐다. 끔찍하게 얼굴이 뭉개진채 발견됐다고 했다. 며칠만 더 지켜보자는 어른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
[7월 16일, 장례식이 진행됐다. 나 또한 참석했다.]
7월 5일이라는 날짜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숨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그래, 나의 아버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되새김이다. 그 날의 기억을 나는 기억하고싶지않다.
그래서 더 묻어둔 것이다. 애써 모른 척하고, 다 잊혀졌을거라고 생각하고 아버지가 죽은 그 순간부터 내게 특별한 기억을 주지않는 이상 모두들 지워버렸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장녀로써 멍 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던 시간들이 허무하게만 느껴졌었던 지난 1년의 그 날, 마을 사람들은 애도했다.
김지원이 참석했었다는 말이 이상했다. 난 그의 얼굴을 보지못했었는데. 또 다시 괜찮아? 라고 묻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니, 지금은 안 괜찮아. 누군가가 다시 묻는다면 나는 지금 이렇게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괜찮지, 않다. 정말로.
잠재웠던 숨결이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지우고싶어서 지웠다. 쓸모가 없어보여서 잘라냈다. 힘들게, 힘들게. 나는 일기장을 들고 있던 손이 떨려왔다.
[7월 20일, 그 애가 사라졌다. 형이 시킨 심부름에 갔는데 그 애가 사라졌다고 동생이 말했다. 동생의 얼굴은 무섭도록 침착했다.]
잔뜩 휘갈겨 쓴 글씨체에 다급함이 묻어나왔다. 그 밑에 날짜는 20일에서 31일로 바로 넘어갔는데, 그 대목엔 이렇게 써져있었다.
[못 찾았다. 마을 사람들도 못 찾는 눈치다. ...허탈하다.]
내가 사라졌던 때를 말하는 것이였다. 김지원이, 나를 찾았다고? 그 사실이 혼돈상태를 만드는 것만 같아서 멍 하니 그 대목을 다시 읽었다.
못 찾았다. 마을 사람들도 못 찾는 눈치다, 자기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찾았다는 건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김지원이 나를 찾고 있었다고?
떨림이 번졌다. 저절로 숨이 막혀오는 것만 같아서 콜록, 이면서 겨우 침을 내뱉었다. 목을 죄여오는 듯한 급박함, 그리고 노려보는 무언가가.
일기장은 31일 이후에 다시 한 장을 넘기도록 되있었다. 8월 1일부터는 짧막하게 써져있다가 19일부터 다시 길게 써지기 시작했다. 반듯하게 써진 글씨체다.
돌아왔다고. 딱 한 마디만 적혀있었다. 무더웠던 그 날 내가 돌아왔다고, 촉은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아니라고 부정해도 촉은 유난히 도드라지고 있었다.
8월 19일, 돌아왔다. 그리고 20일부터 다시 긴 줄글로 써져있었다. 나를 보지 못했어. 9월 3일자에 일기에는 그렇게 써져있었다.
[나름 그 애한테 날 인식시켜놨다고 생각했는데 역부족인가보다. 그 애는 여전히 날 보지못한다.]
[보지 못한다는 건 그 애가 장님이 아닌 이상 이상하다. 나를 눈에 넣고싶지 않다는 걸까? 조금, 섭섭하다. 송윤형이 있다는 걸 아는데 나는 자꾸 망상에 빠진다.]
[9월 29일, 송윤형과 마주쳤다. 시장에서. 때리고싶었는데 겨우 무시하고 지나쳤다.]
10월 8일에는 헝거게임 2차 투표가 있었다. 김지원은 그때도 날 봤다고 굉장히 기뻐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내 이름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그 애라는 단어도 보이지않았다. 설마, 설마하는 마음에 빠르게 눈을 굴리면서 내 이야기가 담긴 구절을 찾아내느라고 몇 번을 뒤적였다.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내 귀를 어지럽혔다. 12월 31일까지 내 이야기는 나오지않았다. 드디어, 18살의 김지원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18살, 이라고 크게 적힌 빳빳한 종이를 넘기자 다시 빼곡히 들어난 김지원의 글씨체가 전과 다르게 굉장히 정갈해졌다. 종이 특유의 쓰였음을 보여주는,
울퉁불퉁함이 16살때과는 다르게 묵직했다. 양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였고, 김지원의 모습을 한 번 쳐다보고나서야 나는 급하게 읽어내려갔다.
김지원의 팔 다리가 굳어지고 있었다. 김한빈은 욕을 슬쩍 읊조리면서 김지원의 굳은 팔 다리를 풀어주고 있었다. 존나 딱딱해.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1월이다. 누나가 일을 그만뒀다. 형은 이제 20살이 됐다. 나만 이 가정을 꾸려나갈 유일한 가장이 된 것이다. 불안하다, 불안하다.]
[1월 26일, 그 애가 나타났다. 시장에서 뭔가를 사서 갔다고 누나가 말해줬다. 종대의 뒷모습을 오늘 봤었는데 아마 그 애를 보러 간것이라고 생각했다.]
[2월 2일부터 9일까지 일기. 그 동안 못 쓴 이유는 헝거게임 1차 투표 때 유력한 후보자로 올라갔던 내 친구를 달래주고 오는 길이였다.
내 친구는 그 애 옆집에살았다. 그 애에 대해서는 한번도 들어본적이 없다고 했다. 정말 조용하게 살고있다고 했다.]
[3월 19일, 그 애가 다시 시장에 나타났다. 더 좋아지고 있다. 주체할 수가 없는 감정을 나도 이젠 인정해야겠다.]
[4월 26일, 그 애네 엄마도 정신적으로 아프다고 했다. 형이 종대와 얘기하면서 나온 말이였다고 했다. 동질감이 생겼다. 그 애를 보살피고 싶었다.]
[5월 30일, 날씨가 더워짐과 동시에 누나가 다시 일을 시작했다. 헝거게임을 다시보고 있는 형을 피해서 그 애 집 근처로 갔다. 불이 켜져있었다.]
[6월 10일, 아팠다. 유독 그 애 생각이 나서 쪽팔리게 울어버렸다. 아프다, 정말 아프다. 가난한 탓에 약 조차 쉽게 짓지 못한 내 처지가 불쌍했다.]
김지원은 6월의 마지막 날 밑에 시를 써놓았다. 보기만해도 사랑, 이란 걸 보여주고 있었고 짧지만 긴 구절로 되있는 외국 시였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시라며 꽤나 멋스럽게 써내린 그가 써놓은 시가 움푹 파여있는 것 같다. 유독, 눈에 들어온다.
그대 사랑을 말하려 애쓰지 말아요.
사랑은 말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 같은 것.
그때 난 내 사랑을 말하였지요.
내 가슴 속 사랑을 꺼냈더니,
아! 왜그랬는지 그녀는
내 곁을 떠나고 말았어요.
그녀가 떠나자마자
나그네 한 사람이 와서는
말 없이 보이지 않게,
한숨 지으며 그녀를 데려가버렸지요.
[형이 갖다 준 책에서 오랜만에 마음에 든 시다. 그 애한테 들려주고싶다.]
7월부터 11월까지는 온통 내 얘기가 가득했다. 자신의 일상이 적혀있지 않았고, 그 날 나를 봤다며 후기비스무리하게 적어놓았다.
항상 말은 똑같았다. 더 생각나고 더 보고싶다고. 송윤형, 자신이 그 자리를 채우고싶다는 말을 했다. 그의 말이 왜 이렇게 과거를 감싸고 있는 걸까.
도중에 집착이 보이긴 했지만 다시 사라지고 순수하게 써놓았다. 뭐, 얼굴은 여전히 그대로라고. 더 어른스러워 진 것같다고 자기도 그래야겠다고.
날 따라서 변해야겠다고 했다. 언젠가 당당하게 설거라고 구체적으로 구상해놓기도 했다. 어린아이, 같았다.
12월이 되었다. 12월 8일, 헝거게임이 시작 된 날. 나와 김지원, 김진환, 김동혁이 만난 날이였다.
그동안 쓴 연필이 아닌 얇은 굵기의 흑연이 나타났다. 흐느적거리는 감이 없지않아 있었지만 열심히 쓴 흔적이 나타났다.
헝거게임에 자신이 지목되서 굉장히 놀랐다는 말과 함께 날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꽤나 놀랐다고 했다. 마치 영접한 기분이라고, 너무 두근거린다고.
그 애 하나하나를 놓치고 싶지않아서 툴툴 거렸는데 당황하긴 커녕 더 챙겨줬다고 했다. 김진환과 김동혁은 모르게 행동할 거라고 다짐까지 해놓았다.
화이팅, 김지원. 그는 그렇게 쓰면서 12월 8일의 일기를 마무리했다.
12월 9일부터 16일까지는 헝거게임의 트레이닝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내가 실수한 것까지 모조리 다써놔서 아이같은 면모에 작은 웃음이 났다.
일부러 삐뚤게 쏘게 만들었다는 대목에서 좀 놀라긴 했다. 내가 그 총에 미숙한 걸 인지하고 일부러 빗나가게 유도한 다음에 스폰서들에게 확, 인상을 줄 수 있는.
무리한 방법을 써서라도 나는 해냈을꺼라고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후폭풍적으로 너무 좋아서 칭찬일색이였다는 말과 함께.
내가 칭찬 받는 것 같았다. 그는 귀여운 이모티콘을 그리면서 웃어보이는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17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헝거게임에 핏자국이 묻어났다.
갈색빛으로 변해버린 변질된 핏자국에 다급하게 쓰여져 나간 일기장들은 하나같이 나는 어딨을까로 시작해서 죽여버리겠다는 말이였다.
비니를 떨어뜨렸다는 대목에서 그래서 차학연이 갖고있었던 건가, 싶어서 곰곰히 생각하다가 한 장을 넘겼다.
12월 20일, 날 찾아냈다고. 지금 옆에서 달의 이야기를 해주는데 마치 자기가 달인 것같다고 했다. 그 소년은 나라고, 멍청하다고.
[내가 널 여태동안 지켜봤다는 걸 여전히 모르는 눈치다, 정말 섭섭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걸... 난 이 애에게 뭘 해줬던 것일까 돌이켜보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달이 나고 소년이 그 애다. 소녀는, 송윤형이겠지. 달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고 하자 물음표를 띄운 표정으로 날 쳐다봐서 꽤나 가슴이 아팠다.]
[진짜, 날 모른다.]
그러고나서 밑에 줄은 온통 텅 비어버렸다. 뭐지, 나는 의문이 들어서 한 장을 넘겼다. 역시 아무것도 적혀있지않았다.
설마 하는 마음에 또 다시 한장을 넘기고, 또 한 장을 넘겼다. 또 한 장을 넘기고, 계속해서 넘겼다. 촤르륵, 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종이들은 하염없이 넘겨졌다.
빳빳한 종이대목을 4번인가, 5번을 지났던 것 같다. 빳빳한 종이는 이제 한 장밖에 남지않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넘겼다.
흑연이 아무렇게나 낙서가 되있다가 안녕?이라는 인사도 적혀있었고, 마구 칠해놓은 구석도 있었다. 보고싶어, 라는 말구도 있었다.
지웠다 사라진 흔적들도. 그리고 그림을 그려놨다가 누구누구라며 크크크 하고 적어놓기도 했고 하트를 구석구석 그려놓았다.
그래도 뭔가를 적어놓은 것같았다. 울퉁불퉁함이 좀 느껴져서 헛손질을 하는 내 손이 너무나 미웠다. 겨우 잡아내고 한장을 넘겼다.
[안녕.]
날짜를 적는 칸에는 12월 21일이라고 적혀있었다.
김지원, 오늘은 21일이라고... 방금전까지 김지원이 20일날 내가 달 얘기를 했다고 했으니까 분명 어제를 말했던 것이다.
오늘이, 21일이라고.
[지금 이거 발견했는지 안했는지 모르겠는데, 너가 지금 옆에서 자고 있어서 이렇게 글을 쓰는거야. 너 되게 잘잔다, 내 어깨에 기대서말야.]
[조금 뜬금없겠지만 이 글을 봤다면 넌 이미 내 앞의 일기장을 봤겠지. 그 애가 누군거 같아?]
[눈치챘겠지만, 맞아. 너야.]
[찌질하게 너한테 말도 못하고 마음으로만 삭히고 있었던 내가 좀 병신스럽겠다.]
[윤형이가 있는 너에게 난 무슨 의미일까 하고 많이 고민도 하고 자아성찰도 꽤 많이했어, 나.]
[그럴때마다 돌아오는 답은 그저 지켜보자였어.]
[미안해.]
[이렇게 일기장으로나마 너와 접할 수 있어서 미안해.]
고맙다는 말 대신, 미안해.
[...좋아해서, 미안해.]
[이 일기장을 보면 버려줘. 이젠 쓸모없을테니까.]
[12구역에 돌아가고나면,]
[나 잊고 살아.]
[내가 지켜보고 정말 뻔뻔하다고 신호보낼때까지 떵떵거리면서 살아줘.]
[나 잊고 살아.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서 미안해.]
[널, 바라볼 수 있어서]
그는 뭔가 정갈하고 작게 쓴 평소의 글씨체보다 뒷장에 뭔가의 자국을 남겨놓았다. 자칫하면 못 알아볼 뻔했는데, 바라볼 수 있다는 말이 굉장히 어정쩡하게 끝났다.
김지원의 당시 심경이 느껴져서 일까, 쉽사리 다음장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빨리 다음장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도무지 넘길 자신이 들지않았다. 머뭇거리면서 한참동안 김지원이 남겨놓은 글을 반복해서 읽었다. 세 번째 반복해서 읽자 입이 열렸고, 중얼거릴 정도가 되었다.
좋아해서, 미안해. 그 말을 하자마자 목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였다. 뭐가 미안하다는건데. 좋아하는 게 죄야? 사람 대 사람을, 좋아하는게 죄야?
깔끔하게 고백하고 차라리 차이지 그랬어. 그랬더라면 내가 널 기억했을 텐데, 그랬더라면. 조금만 더 다가와주지 그랬어. 김지원.
원망스러운 마음이 뭉게뭉게 솟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중얼거림도 멈추었고, 김한빈이 김지원의 팔다리를 매만지는 움직임도 멈췄다.
"..."
"..."
"뭐해."
"...나, 있잖아."
"..."
"다음장, 넘겨도 될까?"
내 말에 김한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걸로 고민하고 있냐고, 지금 이 새끼 손 발 다 굳어가고 있는데 얼굴 또한 점점 검어져 간다고 했다.
그의 일기장을 보고나서 얼굴을 보면 차마 넋을 잃고 쓰러질까봐 얼굴도, 일기장도 볼 자신이 들지않았다. 시체에 워낙 둔감했던건지 김한빈은 부스럭거리면서 재촉했다.
조금있으면 이 새끼 시신 부패될꺼야. 아무리 캐피톨이라고 하지만 미생물들은 똑같은 거 너도 알텐데, 시체 갉아먹을꺼라고.
형체도 못 알아보고 김지원 보낼꺼야? 김한빈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부스럭거렸다. 형체도 못알아보고. 그의 말에 다시 김지원이 총을 쏘기 전의 모습이 생각났다.
배를 드러내고 총구를 자신의 배쪽으로 들이밀던 그의 손과 웃어보이는 그의 얼굴, 그리고 탕 하는 소리와 함께 꽃이 지듯이 떨어지는 그의 몸뚱아리가.
스멀스멀 피어나자 쫓기듯이 다음장으로 넘겼다. 차마 내 힘으로 넘겼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겁을 냈었고, 그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도 무서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런 생각은 날아가버렸다.
김지원. 끝까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정말... 정말이다.
[행복했어.]
[잘 있어.]
[울지마.]
[나 잊으란 말, 거짓말이야.]
[기억해줘.]
[사랑해, 언제까지나.]
[괜찮아?]
아니, 기억났어.
여기서 조금 이상한 이야기를 마저 하려고한다.
그 여자가 잡은 그 남자의 손은 두 번째 남자였다.
첫 번째 남자는 이해가 가지않는 표정으로 화를 냈다. 왜, 왜 그 사람 손을 잡은거야?
그 말에 그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의 손을 잡기에는, 이 남자의 손이 너무 오랫동안 들려있었어.
그 여자는 두 번째 남자의 손을 꽉 잡았다.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