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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O/백도]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 | 인스티즈

 

 

1. 시한부 인생

 

 

길어야 한달 입니다. 너무 늦었어요. 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나는 괜찮은데 옆의 백현이가 막 운다. 매일매일 아픈 것 보단 한달 뒤에 일찍 죽는 게 빠르지. 울지마, 백현아. 의사 선생님께 고개를 꾸벅 숙인다. 네, 감사합니다.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백현이의 손을 붙잡고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대기실 의자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역시 유명한 대학병원은 다르다. 저들 중에서도 오늘 상태가 심각하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있겠지. 하지만 나처럼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들의 애인, 가족, 친구가 슬퍼할테니까. 물론 본인도 슬프겠지. 병원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버튼을 꾹 눌렀다. 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내려간다. 이상하지, 백현아. 오늘따라 엘리베이터가 너무 느려. 변백현은 아직도 울고 있다. 울보다. 예전에는 나보고 맨날 울보라고 놀렸으면서, 이제는 내가 울보라고 놀려야 할 때가 왔나보다. 엘리베이터에 달린 거울을 본다. 내 얼굴은 옛날과 똑같다. 전혀 아픈 사람 같지 않다. 내 눈에만 그런가. 엘리베이터의 문이 쩌억 열렸다. 백현이의 손을 잡고 내렸다. 오늘만큼은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봐도 상관없다. 손을 놓으면 백현이는 더 울테니까. 운동화를 신고 저벅저벅 걸었다. 백현이의 울음이 조금 잦아든다. 집 앞에 도착해서야 손을 놓았다.

 

"백현아. 열쇠."

"...내 주머니."

 

응. 하면서 백현이의 잠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다. 추운 날씨라서 꼭꼭 껴입으랬는데, 진짜 꼭꼭 껴입었다. 말 잘듣네. 열쇠로 잠금장치를 풀었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철문이 열린다. 오늘따라 문도 무겁고. 이상해. 현관에서 신발을 벗어던진다. 발이 가벼워졌다. 뒤를 돌아보니 백현이도 신발을 벗고 여기저기 흐트러진 신발을 정리한다. 난 거실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켠다. 한달 남았다고 했지. 날짜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놓고 돌돌 두른 목도리를 풀었다. 보일러를 미리 틀어둔 집 안은 따뜻했다. 언제까지 내가 이런 따뜻함을 느껴볼 수 있을까. 우리 둘의 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씻지도 않고 이러는 걸 알면 백현이는 화내겠지. 이불에 코를 묻었다. 백현이 특유의 향. 나는 언제까지 이 향기를 기억할까. 가물가물한 시야 사이로 백현이의 곧은 손가락이 보인다. 그 손가락이 내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것을 느끼면서, 잠이 든 것 같다.

 

 

 

2. 숨기고 싶은 것

 

 

"어서 먹어."

 

백현이가 평정심을 되찾았다. 다행이다. 그치. 나는 응, 하며 반찬이 올려진 밥 한숟가락을 입에 밀어넣는다. 안 아파? 눈빛이 그렇게 묻는다. 안 아파. 눈빛으로 다시 대답해준다. 정말 안 아픈 것 처럼 밥을 꼭꼭 씹는다. 몸이 얼마나 버텨줄련지 모르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기로 한다. 어제는 새벽에 깼었지. 아픔을 이겨내지 못했다. 나는 살짝 기분이 다운된다. 아팠던 생각을 하니 다시 아프려 한다. 서둘러 남은 밥알을 입에 밀어넣는다. 벌떡 일어나 싱크대에 빈 그릇을 넣는다. 백현이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본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화장실로 걸어간다. 최대한 아픈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화장실 문을 잠그고 물을 최대한 세게 틀었다.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변기통을 부여잡고 헛구역질을 한다. 방금 먹었던 음식물이 그대로 나온다. 웩, 웩. 목을 부여잡는다. 아프다.

 

 

나는 백현이가 나를 걱정하는 게 싫다. 괜한 걱정이다. 어차피 곧 죽을 목숨인데 뭐하러 나를 챙겨. 유유히 화장실에서 나와 소파에 앉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주방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방금 화장실에서 뭐한 거냐고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혼자서 안고 가고 싶어.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소파에 기대어 티비를 틀었다. 네모난 상자에서는 재미없는 이야기만이 가득하다. 주방에서 나는 소리로 귀를 기울여본다. 이제서야 그릇이 싱크대로 들어가는 소리가 난다. 백현이가 식탁 정리를 하고 나에게로 걸어온다.

 

"...아파?"

"안 아파. 나 괜찮다니까."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아.

 

 

 

3. 지키지 못할 약속

 

 

"결혼하자."

 

물 먹은 솜처럼 축축한 목소리.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그래.

 

 

 

4. 조그마한 풀꽃

 

 

오랜만에 백현이와 함께 걸었다. 밖은 여전히 춥다.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 보다 훨씬 더 추워진 것 같기도 하고.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더라. 고통의 간격이 점점 짧아진다. 진통제를 한 알, 두 알 집어먹기 시작한지도 오래다. 갑자기 찾아올 아픔에 대비하여 진통제를 한 움큼 가져왔다. 걸음은 느려졌다. 내가 쇠약해졌다는 증거다. 하지만 백현이는 짜증도 내지않고 나의 속도에 자신의 걸음을 맞춘다. 계절과 어울리지 않는 알록달록한 바닥을 보면서, 백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겨울 나무는 잎사귀를 다 날려보내고 말았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린다. 푸석해진 내 머리칼도 바람에 흔들린다. 나무는 내년에 다시 자라난다. 하지만 나는.

 

"도경수, 이것 봐."

 

한창 넋을 놓고 있을 때, 백현이가 나를 부른다. 백현이가 손가락으로 가르킨 곳에는 풀꽃이 자리하고 있다. 바람에 흔들리지만 뿌리 뽑히지 않았다. 잎사귀가, 꽃잎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 풀꽃을 보면서 조금 웃는다. 하지만 누군가가 밟고 지나가면 끝이라는 걸 안다. 백현이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것 같다. 살아남아. 그럴 수 있지. 백현이의 속마음에 조심스레 대답한다. 아니. 살아남을 수 없어.

 

"집에 가자."

 

가까스로 눈물을 삼켰다. 나는 이제 끝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5. 일기장

 

 

백현이의 일기장을 본다. 실례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보고싶었다.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길 때 마다 눈 앞이 흐려온다. 어느새 마지막 한 장을 앞두고 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일기장을 넘긴다. 여기저기 얼룩진 종이. 울었다는 것을 확신한다. 손 끝으로 백현이의 글씨를 따른다. 삐뚜름한 못생긴 글씨. 모든 것을 사랑하고 있었구나. 글씨마저 사랑스러워 보여서 더욱 서러운 기분이 든다. 백현이가 남긴 일기의 마지막 장.

 

같이 가면 얼마나 좋을까. 도경수랑 같이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승길 함께 가서, 못 다한 거 다 해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약속한 결혼도 하고, 결혼 반지도 끼워주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같이 가고 싶어.

경수야.

 

마지막 글씨에 손 끝이 닿았을 무렵, 눈물이 툭 떨어진다. 안 돼, 백현아. 그건 안되는 일이야. 너도 잘 알지. 일기장을 가슴에 품고 고개를 숙인다. 더더욱 서러운 하루다.

 

 

 

6. 웃으면서 안녕

 

 

응급실이다. 무슨 정신으로 여기에 왔는지 기억이 나기 시작한다.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백현이가 깨어나 119에 전화를 했었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응급실은 언제나 시끄럽다. 손등에 매달린 링거가 거추장스럽다. 백현이는 그때처럼 울고있다. 울지 마. 손으로 백현이의 머리칼을 쓸어준다. 백현이가 빨개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숨 쉬는 것이 힘들다. 손을 뻗었다. 백현이가 손을 맞잡아온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입을 연다. 꺼끌거리는 목이지만 괜찮다. 그걸 신경 쓸 시간이 없으니까.

 

"백현아."

"..."

"다음에 만나면, 우리 못 해본 거 다 하자."

"...도경수."

"약속이야."

 

웃었다. 마지막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만족한다. 울지 않았으니까. 죽어도 외롭지 않아. 많은 추억들이 가득하니까 말이다. 내 상태를 알려주는 기계에서 요란한 소리가 난다. 백현이가 소리친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눈물이 가득하다. 결혼하자고 말했던 그때처럼. 물 먹은 솜처럼 축축한 목소리. 백현이 너는 항상 울기만 해. 눈을 감았다. 의사와 간호사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지만 이제는 괜찮다. 이제는, 정말 괜찮다. 정말. 나는 내가 할 말을 했고, 백현이는 내가 한 말을 들었다. 그거면 됐어. 하얀 빛이 보인다.

 

모든 것이 끝났다.

 

 

 

7. 남겨진 사람

 

 

결국 떠나고 말았다. 집 안에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일기장을 불태웠다. 경수가 내 일기장을 보았다는 사실과, 그 일기장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안다. 까만 재를 밖으로 날려보낸다.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경수도 그렇게 날아갔을까. 장례식을 했고, 뼛가루만이 남았다. 하루 종일 울기만 했다.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프다. 항상 함께했던 침대에 가서 누웠다. 도경수가 내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운 사실을 알면 화를 내겠지. 이불에 코를 묻었다. 경수 특유의 향이 난다. 너도 예전에 이랬겠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이불을 꼭 쥐었다. 눈물이 자꾸 새어 나온다. 나는 언제까지 이 향기를 기억할까. 너는 언제까지 내 향기를 기억할까. 언젠가는 서로의 향기가 까마득해질 날도 오겠고, 서로를 사랑했다는 사실이 멀어지는 날도 오겠지. 나는 한참을 생각한다. 그리고 해답이 나왔다.

 

 

많은 시간이 지나도, 나는 경수를 기억한다는 것.

 

 

 

8. 기다리는 사람

 

잘 지내는 듯한 백현이가 보인다. 그래. 그거면 됐어. 밝게 웃었다. 우리를 축복해줄, 많은 사람들과 함께.

 

 

 

 

[EXO/백도]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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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으아ㅜㅜㅜ아련터지는분위기 좋아요ㅜㅜ
9년 전
독자2
보면서 저도 모르게 울었어요ㅠㅠㅠㅠㅠㅠ 브금 덕분에 감정 이입도 더 잘 됐던 것 같아요ㅠㅠㅠㅠㅠ 신알신 하고 갑니다!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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