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대리가 넘겨준 업무들이 석율의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원래 석율이 해야 할 일들이 반, 그리고 원래 성 대리가 해야 할 일들이 반. 이젠 화낼 기력조차 없다. 무엇보다 지금 석율에겐 컴퓨터 모니터만 주구장창 쳐다보며 보고서를 쓰거나 이곳저곳 바쁘게 전화기를 붙잡고 업체 리스트를 조사할 집중력이 남아 있지 않다. 그냥 눈만 감으면 하얗고 고운 얼굴이 둥둥, 눈을 떠도 둥둥. 업무야 둘째 치고 도대체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냥 한 철 이러고 말겠지, 이러다가 말겠지, 했는데 그것이 생각보다 더 무시무시한 놈이었다.
토요일에 잡혀 있던 소개팅도 마다했다. 주선한 친구가 여자 사진을 보내줬는데, 꽤나 볼 만한 얼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자마자 드는 생각이 장그래가 훨씬 낫네ㅡ 였다. 아니 어떻게 27년 동안 고수해온 성 정체성이 이렇게 한순간에 바뀔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토요일은 밤을 꼬박 새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가 미쳤지, 진짜 한석율 이 미친놈아, 이 말을 수십 번을 되뇌며. 그리고 일요일엔 그냥 하느님의 뜻이겠거니, 하고 체념했다. 단념하자고 해서 그렇게 될 것도 아니고, 피하기만 한다고 해서 이미 굳게 자리 잡은 마음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그냥 정면 돌파다. 그리고 오늘 와서 아침에 탕비실에서 장그래와 마주쳤는데, 그 얼굴을 보자마자 글쎄 다리에 힘이 탁 풀려버렸다. 정면 돌파는 무슨. 돌파하기에 상대는 너무 견고하다.
“한석율 씨. 무슨 표정이 그래요?”
“어, 안영이.”
정신 좀 차릴 겸 야외 휴게실 벤치에 앉아 있는데, 커피 두 잔을 손에 든 안영이가 옆에 앉았다. 아, 나 너무 인상 쓰고 있었나. 이거 내 스타일 아닌데. 그래도 자꾸만 튀어나오는 한숨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내가 이런 일을 겪게 될 줄 어디 상상이나 했겠냐고.
“난 지금 내 인생 27년 중 가장 험난한 짝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지 말이야.”
“네? 짝사랑이요?”
마시던 커피를 뱉을 기세로 켁켁거리던 영이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쳐다본다. 한석율이 짝사랑? 물론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는 것이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그런 순정스러운 발언이라니. 그 대단한 한석율을 인상 팍팍 쓰며 한숨 쉬어대게 만든 장본인이 누군지 정말로 궁금했다. 뭐 어디 연예인이라도 되나.
“누군데요? 저희가 아는 사람?”
“아주 잘.”
“진짜요? 회사 사람인가 봐요?”
“…오랜만에 동기들끼리 술 한 잔 할까.”
더 이상은 말을 아끼겠다는 듯 석율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에 영이도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힘든 일은 참 많지만, 연애에 관한 건 그중에서도 악질이다. 석율의 표정을 보니 그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지 너무 훤히 보여 힘내라고 어깨라도 두드려주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망설여졌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오오라가 그에게서 잔뜩 뿜어져 나왔다.
터덜터덜 자리를 떠난 한석율은 쳐진 등과 어깨를 다시 곧추세우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도 없을 지경이다. 반듯한 가르마를 말끔하게 다시 정리하고 16층을 눌렀던 것을 다시 한 번 누른 뒤 15층을 눌렀다. 에라, 모르겠다. 얼굴이라도 보면 뭐라도 답이 나오겠지, 생각한 제가 바보 천치였다.
“한석율 씨?”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그래의 얼굴에 또 한 번 말문이 탁. 그리고 심장은 벌렁벌렁. 와, 나 생각보다 더 심각하구나. 청심환을 먹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파닥이는 심박수에 석율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붕어 마냥 입을 벌리고 있으니 엘리베이터 문이 맥아리 없이 닫히려고 한다. 그래가 다급히 버튼을 누르며 의아한 눈빛으로 석율을 쳐다본다. 평소 같으면 이미 온갖 난리 법석을 피웠을 사람이 미동도 없이 입술만 달싹이고 있으니 이상한 것이다. 얼굴도 발갛게 달아오른 게, 어디 아픈 건가.
15층 온 거 아니에요? 안 내려요? 하는 그래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발을 내딛는 석율이다. 무슨 일이에요? 묻는데 너 보러 왔어,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아니 예전 같았으면 그냥 막 뱉었을 말이지만 어째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예전엔 장난이었지만, 지금은 진심이니까. 눈만 요리조리 굴리며 있는데 그래가 한 발짝 다가온다.
“어디 아픈 겁니까? 얼굴이 빨게요.”
“어? 아니, 아냐. 어디 가는 길이야?”
“재무팀이요. 근데 진짜 아픈 거 아니에요? 땀까지 나는 것 같은데.”
이마가 뭔가 찝찝한가 싶었더니, 이제는 땀까지 나나 보다. 상당히 걱정스러운 눈빛을 한 그래가 양손에 들려 있던 서류를 한 손으로 옮기고 석율의 이마를 짚어 보는데, 꽤나 가까운 거리에 심장에 더 무리가 가는 듯 싶었다. 그냥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서로의 눈만 쳐다보고 있는데 둘 사이에 침묵과 동시에 적절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그래는 급히 석율의 이마에 안착해 있던 손을 내리고, 석율도 동시에 괜히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그래의 얼굴도 이미 석율 만큼이나 달아올라 있었다.
“어…. 저기,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 일 보고 가세요.”
“아, 그래. 그래 장그래. 조, 조심히 가.”
조심히 가라는 건 또 뭔가. 뭐, 엘리베이터 추락하지 않게 조심히 가라고? 아님 뭐 자동문에 끼지 않게 조심히 하라고? 석율은 속으로 연신 욕을 내뱉었다. 이 등신, 병신, 머저리 새끼. 엘리베이터 문이 서서히 닫히는 걸 보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말을 까먹은 바람에 급하게 버튼을 다다닥 눌러 댔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문이 다시 열리고, 그래는 또 동그란 눈을 하고 석율을 쳐다본다.
“오늘, 끝나고 시간 있어?”
“네?”
“아니 그, 동기들끼리 술 한 잔 하자고.”
“아아…. 네, 괜찮아요.”
그래는 묘한 실망감과 안도감이 섞인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문이 닫히고, 석율은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제가 보였던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동들을 되뇌며 벽에 머리를 콩 콩 박았다. 정신 좀 차리자, 한석율. 좋아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이렇게 멍청이로 바뀌냐고. 안 그래도 점수 낮은데, 이러면 더 마이너스잖아.
참 아이러니한 술자리였다. 석율 때문에 가지게 된 자리인데, 정작 그 고민의 당사자가 제 옆에 버젓이 함께 있다니. 오기 전에 영이에게 아까 이야기는 꺼내지 말자고 신신당부한 석율은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계속해서 잔을 들이켰다. 역시나 공통의 화제는 상사 뒷담화나 자질구레한 일상들. 석율은 성 대리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마자 원래의 한석율로 돌아온 듯 싶었지만, 영이의 눈에는 그저 사랑의 아픔에서 도피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지 애잔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는 언제나 그렇듯 잔잔한 미소만을 띠며 이야기를 듣고 있고, 술에 약한 백기는 맥주 한 잔을 원샷 하더니 잔뜩 풀린 눈으로 테이블에 고개를 박을랑 말랑 하고 있다.
어느덧 10시가 다 되어 갔다. 이제는 거의 의자 밖으로 고꾸라지려고 하는 백기에 영이는 가방을 챙기더니 택시 좀 잡아주고 저도 먼저 가보겠다며 자리를 일어섰다. 소맥을 스트레이트로 마셔서 그런지 술이 꽤나 강한 석율의 눈도 반쯤 풀려있다. 둘만 남은 상황이 뭐 하기도 하고, 차도 끊길 것 같아 우리도 이만 가봅시다, 하고 일어나려던 그래의 손목을 붙잡은 석율은 제 옆자리로 앉혔다. 그리고 나서 테이블에 턱을 괴고 저를 가만히 쳐다보는 것에 그래는 괜스레 시선을 피했다.
“장그래.”
“…네.”
“그래야. 장그래. 우리 그래.”
덧붙이는 말도 없이 연신 제 이름을 한 번 부르고, 한 번 한숨을 쉬는 것을 반복하는 석율에 그래는 그저 가만히 석율을 쳐다보고 있었다. 두 눈동자가 맞닿는 억겁의 시간과 같은 몇 초가 흘렀을까, 석율은 이상한 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너는 말이야, 그 눈이 문제야.”
“…네?”
제 눈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며 인상을 쓰는 석율에 그래의 미간도 덩달아 좁혀졌다. 아니 이 아저씨가, 취할 거면 곱게 취할 것이지 난데없이 남의 눈을 가지고 시비람. 남자 눈이 그렇게 생겨서는 안 되지, 어떻게 하면 눈이 그럴 수 있는 거야? 안 되겠다, 앞으로 너 나 쳐다보지 마, 등등. 제 눈이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드는지 석율이 온갖 불평불만을 털어놓는데, 그래는 그에 더 눈을 부릅뜨고 석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말을 멈춘 석율이 그래의 눈을 제 큰 손으로 덮어 가린다.
“아이, 한석율 씨. 뭐 하는 겁니까. 치워요.”
“쳐다보지 말라니까.”
“저기, 한석….”
깜깜한 어둠 속에, 무언가가 느껴졌다. 석율이 그래의 눈을 덮은 제 손 위로 촉, 하는 소리와 함께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저한테 직접적으로 닿은 것도 아닌데 느껴지는 그 생생한 감각에 그래가 그 속에서 눈을 떴다. 이윽고 시야가 환해지더니, 바로 제 앞에 석율의 눈이 있다.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복잡 미묘하고도 애달픈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그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네가 그렇게 쳐다보니까, 그러니까 내가….”
말을 다 마치지도 못한 석율은 무어라 웅얼거리며 그래의 어깨에 고개를 박고 쓰러졌다. 시공간에 저 둘만 남아있는 듯 주변이 멈췄다. 그래는 눈을 감는 법을 까먹기라도 한 것 마냥 그 자세 그대로 멀뚱멀뚱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사고 회로가 팽팽 돌았다. 모든 것이 정지 상태로 있는데, 제 심장만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 어떤 것의 시작을 알려주는 밤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 예 오늘은 무려 6회가 돼서야 드디어 제대로 된 첫 진도를 빼는 율래였습니다. 근데 그것마저....ㅎㅎ (눈치 눈치) 그.. 그래도 이제 시작이니까.. (눈치 눈치) 진짜 제 글 제가 봐도 진도도 더럽게 느리고 삽질만 겁나게 해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주시는 분들은 정말... the love... ㅠㅅㅠ♡ 비회원 분들도 와주셔서 읽고 댓글까지 남겨주시는 거 보고 감동 받았어요... 크흡... 이런 모자란 글에... 아 그리고 암호닉을 신청해주신 분들이 계시네요! 보리님, 홍삼님, 교촌치킨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다음 편에서 빨리 봬요! 싸랑해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