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혁] 헬로, 줄리엣
"그래서 구준회랑 화해는 잘 돼가시나?"
"걔 말 꺼내지마요, 형."
"망했나보네."
김지원은 어딜 또 나가는지 가죽 자켓을 걸치며 낄낄거렸다. 구준회 전시회 오늘까진데 결국 안가보냐?
누군 안가고싶어서 안가는줄 알아, 가면 갈기갈기 찢길지도 모르니까 그렇지. 한번 더 의도적으로 마주치게될 날이 있다면 그 땐 정말 구준회가 으르렁거리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거라는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랬다간 아마 물릴지도.
"형 나간다. 너도 임마, 구경좀 하고다녀. 파리까지와서 방에 콕 박혀있냐."
"응.."
"아, 맞다. 구준회 전시회 끝나는 날에 다른데로 간다는 거 같던데. 화해할거면 오늘이 마지막기회겠네."
"마지막은 무슨.."
이미 우리는 아마 마지막이었을 만남을 끝냈어.. 하고 김동혁은 작게 투덜거렸다. 김지원은 뭐가 웃긴지 킥킥대며 아무래도 안될모양인가보네, 하며 목도리를 둘렀다.
아무튼 저녁에 보자.
쾅,하고 낡은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집안은 조용해졌다. 시계마저 없는 방 안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그래, 파리까지 왔는데..
머릿속은 온통 구준회뿐이었다. 진짜 김동혁 너는 왜그렇게 멍청해? 응? 준회한테 무슨 개소리를 지껄인거야아··· 제 머리를 습관처럼 콩,콩 때려대던 김동혁은 갑자기 울린 벨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번호도 저장되어있지 않은 구준회인데, 무슨 근거도 없는 기대감인지 김동혁은 '준회?!'하고 속으로 외치며 급하게 폰을 잡아들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액정에 뜬 이름은 송윤형이었다.
×××
07 : Roméo et Juliette ne est pas une tragédie, une comédie
김동혁은 한 층 더 우울해졌다. 아니, 우울해지다못해 지금 당장이라도 창문밖으로 몸을 내던질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윤형이에게 모든 것을 들었다.
그 상황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하지못했던 제가 원망스러웠다.
-사실 나도 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냈을런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직접 보고 들은것만해도 엄청 힘들었다더라.
정신과 치료도 매일 다니고 그랬..다던데. 내가 철이 없었지, 그때는. ···그냥 너한테 말해야할 거 같아서.-
친구인 윤형이마저 원망스러웠다. 이제와서 누굴 원망할 수 있겠냐만은. 저를 그렇게 싫어한 것도 이해가 됐다. 아니, 이해가 안됐다. 고작 그정도로만 싫어해준 것이. 나였다면 훨씬 더, 싫어하다못해 증오했을텐데.
김동혁은 우울함이 열배정도 곱해져서 의자에 축, 늘어졌다. 아아. 동혁아. 너는 왜 동혁이니. 왜 인생을 그렇게 곱게 못살았니. 너는 천벌을 받을거야. 준회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 응? 그런 애한테 내가.. 와.. 이 미친.. 남자를 왜 좋아하냐고.. 준회야. 어떻게 날 한 대도 안치고 참았니. 차라리 날 때리지그랬어.
제 잘못과 구준회의 힘들었을 당시를 곱씹으며 자신을 책망해대던 김동혁은 무의식중에 식탁위에 얹어져있던 구준회 전시회의 책자를 들었다.
'La lumière parle'.
이건 무슨 뜻일까. 라 루미이..에..아, 몰라. 생각없이 책자의 첫 장을 넘기자 한글이 눈에 들어왔다. 헐. 한글이다. 오랜만에 접하는 한글에 김동혁은 눈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문자는 어디에도 없을거야.. 한글 만세. 전시회 책자에는 영어, 불어, 한국어 3개국어로 해석본이 적혀있었다.
La lumière parle
: 빛이 말했다.
김동혁은 뭔가에 뒷통수를 한 대 맞은듯 한 기분이 들었다. 멍,하게 한참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빛이 말했다. 빛이 말했다.
La lumière est partout, mais parfois, on ne le reconnaît pas.
빛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가끔 우리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Lumière ne est pas en mesure d'aborder audible nous.
빛은 우리에게 청각적으로 다가올 수 없기 때문이다.
Je voulais donc le cycle se il vous plaît lumière est laissez-moi savoir.
그래서 나는 빛이 내게 말해주기를 바랬다.
Donner de la lumière nous laisse de la peur.
빛은 우리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것이다.
La lumière est présente. Et je dis.
빛은 존재한다. 그리고 말한다.
Et Je te aime.
그리고 너를 사랑한다.
김동혁은 외투를 입을 생각도 하지못한채 그 길로 곧장 뛰쳐나갔다.
×××
내가 빛이 말할 수 있게 해볼게. 동혁이가 항상 무섭지 않게.
×××
"나 사실 야맹증 없는데.."
"알아."
"알아?"
"내가 너랑 하루이틀 지냈냐? 너한테 야맹증이 어딨어?"
무서우면 눈감고 손이나 잡아. 구준회가 내민 손에 김동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 손을 얹었다. 평소같았으면 남자끼리 무슨 손을 잡냐며 오두방정을 떨었겠지만 당장은 사는게 중요했다.
구준회가 김동혁에게 고백했던 겨울이 오기 전 그 해 여름 중학교 2학년이었던 그들은 야영을 갔다. 이튿날 저녁, 어쩐지 안한다했다 싶었던 담력테스트의 시간이 역시나 돌아왔다. 교관들은 아이들을 강당에 몰아놓고 다짜고짜 공포영화를 틀어주더니, 반별로 어두운 뒷산 산책로에 줄을 세워놓고 담력테스트를 하겠다며 일방적인 통보를 했다.
그리고 김동혁은, 여기까지 읽었다면 다들 예상했겠지만, 겁쟁이 쫄보였다.
야맹증 있는 사람은 특별히 2명이서 보내주겠다는 교관의 공지에 김동혁은 3초의 고민 끝에 야맹증환자가 되기로했다.
그리고 같이 가기로 고른 놈은 겁이없기로 유명했던 구준회.
"으으으으.. 야 너 잘가고있는거 맞아?"
"궁금하면 눈 뜨고 보던지."
"앞에 귀신있어?"
"귀신이 어딨어, 멍청아. 다 교관들이지."
"아무튼 분장했을거아냐!"
"허접한 분장이 뭐가무섭다고."
"아어어아악!!"
"뭐야, 왜?!"
비어있던 한 쪽 팔에 낯선 감촉이 느껴지자 김동혁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그냥 나뭇가지다.
"야, 눈 떠봐."
"뭔데!뭔데?어?"
감고있던 눈을 슬며시 뜬 김동혁은 제 팔에 걸쳐져있는 나뭇가지를 보고 머쓱하게 웃었다. 어.. 나뭇..가지네.. 하하. 구준회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야, 내가 다 보고있는데 걱정 좀 하지말고 그냥 있어. 얼마 안남았으니까."
"진짜..?"
"어."
"얼마나 남았어? 눈감고걸으니까 더 무서운거같은데."
"아직 뜨지마."
구준회의 눈 앞에 좀비분장을 한 교관이 공포스럽게 서있었지만 구준회는 눈 하나 꿈쩍않고 김동혁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눈 뜨지마, 도착하면 말할테니까.
구준회는 제 팔을 꼭 잡고 걸어가는 김동혁을 바라보았다.
이 산 속에 평생 갇히고싶다,고 생각했다.
×××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도착한 전시회장은 경비가 문을 닫으려하고있었다. 잠시만, 잠시만요.. 헥헥거리는 김동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이 든 경비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저를 들여보내줬다.
김동혁이 들어가자 문이 쾅 닫혔고 전시회장은 바깥 햇빛이 모두 차단되어 완전한 암막상태가 되었다.
깜깜한 실내에 김동혁은 뒷걸음질치다 벽에 기대어섰다. 전시회가 끝나서 불을 안켜주는건가, 어두운거 딱 질색인데. 전력으로 달려왔더니 여전히 벌렁거리는 심장소리만 어둠속에서 요동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불시에, 전시회 내부의 조명들이 일제히 켜졌다. 갑자기 들어온 빛들에 김동혁의 동공이 작게변했다. 형형색색의 네온사인들이 아름답게- 아름답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황홀감을 줬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며 김동혁은 한 발자국씩 내딛었다. 넓은 어둠속에 김동혁과 빛만이 존재하고있었다.
HE LOVES ME not
not이라는 글자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사랑하지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하고 안쓰럽게도 깜빡이고 있었다.
*
"여기 금연구역인데요. 손님."
"뭐, 너도 한 대 필래?"
"아니."
전시회장 후문에서 구준회는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는 김지원을 발견했다. 연기를 제 얼굴에다 불어대는 김지원은 뭐가 즐거운지 실실 웃고있었다.
"왜 불렀는데?"
"안에 김동혁있다."
"뭐?"
"내가 거짓말쳤거든. 오늘 너 마지막 전시회하고 딴데갈거라고."
"..형, 대체 뭣하러,"
"싫음 냅두고."
"..."
"쟤 하루종일 너랑 어떻게 풀지만 생각하더라. 쟤가 좆도 눈치가 없는걸 어떡하냐. 그냥 니가 양보해."
지금 들어가면 김동혁과 화해할 수 있을까. 김동혁과 굳이 나쁜 사이로 남고싶진않았다. 그렇다고 선뜻 그래, 사과 받아줄게. 하는 것은 어딘가 석연찮았다. 과거에 받았던 상처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기도 했고 그럼 김동혁이 저를 얼마나 만만하게 생각할지라던지. 자꾸만 화해를 재촉하는 제 본능이 미웠다. 객관성을 잃어서 명분을 따를지 기분을 따를지 무엇이 옳은지도 몰랐다.
"그냥 들어가나 봐. 저도 팜플렛에 적힌거보면 느낀게 있겠지. 그것도 아니면 진짜 답도없는 씨눈새끼인거고."
"..몰라."
발끝으로 땅만 쿡쿡 찔러대며 고민하던 찰나에, 거리의 조명이 모두 꺼져버렸다. 해질녘이라 모든 전기가 나가버린 거리는 꽤 컴컴했다. 뭐야, 정전? 김지원은 꽁초를 발바닥으로 비벼끄며 눈썹을 구부렸다. 정전. 정전이라. 구준회는 머릿속이 간질간질했다. 뭔가 급하게 생각난 것 같은데.
아, 김동혁.
"야, 어디가??"
어쩌면 김동혁은 아직도 어둠을 무서워할지도 모른다.
×××
열쇠를 꽂고 급하게 돌렸다. 문 손잡이를 열자 어둑어둑하지만 그나마 남아있던 햇빛이 어두운 전시회장에 살짝 들었다.
아씨, 어딨는거야. 보이지도 않아.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여기저기 비춰봐도 김동혁은 쉽게 보이질않았다. 그러다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
불이 갑자기 나갔다. 무엇때문인지는 몰랐다. 조금의 빛도 들어오지않게 만들어진 전시회장이라, 전구가 모조리 꺼져버린 전시회장은 정말 '한 치 앞도 보이질' 않았다.
눈물이 났다.
어둠이 무서워서 우는게 아니라,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항상 어두운 곳에서 혼자 무서워 할 때면 준회가 같이 있어줬는데. 멍청하게도 가장 소중한 사람 하나를 잃었다.
전시회를 보며 구준회가 어쩌면 아직도 저를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어딘가에 대놓고 "난 김동혁 좋아함"이라고 적어놓은건 아니었지만, 작품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것이었다.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그게 더 나빴다. 그렇다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소릴 들은거니까. 그럼 제 자신은 구준회에게 적어도 최악일테니.
어딘가에서 쿵,하는 소리가 나더니 하얀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너무 어두워서 꿈을 꾸는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악몽.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구준회가 보고싶었다.
×××
"야이씨.. 찾았잖아!"
구준회의 화난 듯한, 하지만 누가 들어도 걱정하는 톤의 외침이 건물 내에 울렸다.
"..어떻게 알았어?"
"지원이형이. 아, 아무튼 빨리 나가게 일어나."
구준회는 넓직한 손을 내밀었다.
항상 구준회는 김동혁에게 손을 내밀어줬다. 그 손은 항상 제 편이고 저만을 향해있었다. 내민 손이 무안하게 김동혁은 구준회의 손을 바라만보더니 더 크게 울었다. 뭐야, 왜울어? 야, 울지마. 다 큰게 무섭다고 우냐? 구준회는 당황해서 횡설수설 말들을 늘어놓았다.
"진짜, 미안해."
"..."
"용서 안해줘도 돼, 근데, 이건 진짜로 진심이야."
"..."
"너무 미안해, 구준회."
"그래."
"아까 네가 너무 보고싶었어."
"..."
"와줘서, 고마워."
김동혁은 제 말을 끝내고 구준회의 손을 잡았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지만 김동혁은 어쩐지 구준회가 웃고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고마우면 키스해주던지."
김동혁은 대답이 없었다.
"아니, 뭐. 프랑스니까, 여기는.. "
구준회는 제가 말해놓고도 창피한지 흠, 흠 하면서 변명을 덧붙였다. 친구끼리 할 수도.. 아니, 아니다. 제 손을 잡고있던 김동혁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어두워서 네 입술이 어딨는지 안보여."
구준회는 전시회장이 어두워서 아무 것도 안보이는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않으면 제 빨개진 얼굴이 다 드러났을테니까.
구준회는 김동혁의 예상치못한 대답에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동혁은 갑자기 맞잡고있던 제 손을 들어올려 어딘가에 가져다대며 말했다.
내 입술은 여기있는데.
구준회는 차려놓은 밥상을 먹지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던 엄마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
이번 호에서는 한국 현대미술의 기대주인 신인작가 구준회, 그와 인터뷰를 나눠보았다
Q. 서울에서 두번째 전시회를 열게되었는데, 어린 나이에 경력이 대단하다. 이번 전시회에 대한 설명을 짧게 부탁한다.
A. 이번 전시회는 조각들을 중심으로 준비했다. 컨셉을 굳이 말하자면 르네상스의 부활. 그러니까 고대 그리스의 부활의 부활이다. 사실 말이 거창하지 실제로 보면 되게 우스꽝스럽다. 일부러 웃기라고 만든거다. 다들 그냥 가볍게 관람하면 좋겠다.
Q. 소재의 큰 변화로 얘기가 많다. 조명을 이용한 조형작품이 인기를 많이 얻었는데, 방향을 크게 바꾼 특별한 계기가 있나?
A. 아, 결정적인 계기가 있긴하다.
첫번째 전시회에서 나의 빛을 찾았던 것. (웃음)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조명이 필요없다.
암호닉 + 완결과 함께 후기! (+텍본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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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조명이 어떤느낌인지 글로 참 표현이 안돼가지구.. 대충 이런느낌임다
(중요하지않음)
아무튼 쓰면서 내내 불어불문학과 학생이 읽을까봐 걱정이 됐던..^^! 막 배운 불어라 문법이 1도 안맞았을거같아요 ㅎ헤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제목해석을 적어보자면 01 : ça fait longtemps, Juliet. (오랜만이야, 줄리엣) 02 : Amour avait, Romeo. (나도 사랑해, 로미오) 03 : Quelle est sa 'faute'? (그의 잘못은 무엇인가?) 04 : Se il vous plaît pardonnez-moi (제발 나를 용서해줘) 05 : Cependant, Je te aime encore (하지만,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한다) 06 : La lumière parle (빛이 말했다) 07 : Roméo et Juliette ne est pas une tragédie, une comédie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이아니라, 희극이다.)
네 아무튼.. 다음 준혁을 고대하며 헬로줄리엣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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